소설리스트

6화 (7/15)
  • ◆ 

    “4일 뒤에 기획안 제출하고, 지대리는 내일 나랑 외근 좀 하고 LE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알겠습니다.”

    “자자,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그만 해산~ 일들 하자고~”

    오전 회의가 끝나고 몇몇은 짜증내면서, 몇몇은 신나는 듯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나 역시 신나는 사람 중 하나로, 어제 작성했던 기획안이 하나 통과가 돼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여기, 지주혁씨가 계십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컴퓨터 모니터에 전원을 넣었을 쯤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젊은 사내였는데, 입은 옷차림을 한신이라고 적혀있는 조끼를 입은 것을 보아하니 택배 직원인 것 같았다. 내가 손을 드니, 그 남자가 웃으면서 나에게 작은 박스를 안겨다주고 사인을 받아갔다.

    도저히 나에게 올 택배가 없는데…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아서 커터 칼을 들었다.

    칼로 박스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그으면서 송장에 적힌 발신인 주소를 봤는데 그냥 간단하게 ‘TOY APPLE'이라고 적혀 있었다.

    토이면 장난감이고 애플이면 사과인데…잘못 온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주소와 이름, 전화번호까지 완벽하게 내 것으로 기재 되어있었다.

    박스를 여니, 에어 캡에 둘러싸인 푹신한 검은색 봉투가 눈에 들어왔는데, 봉투를 집어보니 또 안에 상자가 들어있는 듯했다.

    ‘뭐지?’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으니, 정말 아무것도 안 쓰여 있는 박스가 나왔고, 그걸 보자마자 짜증이 났다.

    누가 장난친 건가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곧 왜 그렇게 치밀하게 포장해야만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그 상자 안에서 나왔다.

    상자에 손 넣고 약 5센티를 꺼내 손에 쥐자마자, 그 느낌과 그 모양을 보고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설마…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 것을 조심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상자에 집어넣고 상자 입구로 그 손에 잡힌 녀석을 바라보았다.

    ‘바이브레이터?!’

    정신이 혼미해진다.

    도대체 이게 왜…

    얼른 누가 볼 새라 다시 상자를 그 검은색 봉투에 봉인하고 있을 때, 검은색 봉투 안에서 두 개의 봉지가 툭 떨어졌다.

    하나는 구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쪽지와 함께 소독방법, 그리고 사용 방법이 적혀있는 미니 팜플렛 같은 것과 함께, 덤으로 준 콘돔 세 개가 들어있었고, 또 한 봉투에는 미니 젤통이 들어가 있었다.

    ‘누구야…도대체 누구야!!!!’

    머릿속으로 용의자들을 색출…하다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차분하게 검은색 봉지를 상자에 넣고 메신저를 켰다.

    그리고 그룹명 플러스마이너스에서 한 사람을 찾아 클릭했는데, 마침 오프라인이었지만, 그 사람의 메신저 메인 메시지를 보고 다시 모니터를 부셔 버릴 뻔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메시지를 보고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바이브와 탐의 합작품을 그대에게 선물합니다.♡』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폰과 박스를 들고 부서를 나와, 회사 복도에서 가장 구석인 흡연실로 향했다. 이 시간에는 거의 모든 부서가 회의시간이기 때문에, 흡연실이 비어있었고, 마음 가다듬고 폰내에 전화번호에서 플러스 그룹 바이브를 찾아냈다.

    폰 번호를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도 통화를 안 해서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따위는 오늘 집어 치우고 뭐라고 해야 할지, 도대체 이게 뭔지, 이게 왜 나에게 와 있는지 물어 할 것 같다. 인사는 바로 그 뒤다.

    [우왓! 로그님!!]

    이래서, 발신자는 안 좋다니까.

    “…안녕하세요?. 바이브님이시죠?”

    [그럼요 그럼요. 우와~ 나 오늘 계 타는 날 인가 봐요~ 로그님이 전화를 다해주시고.]

    “…저, 바이브님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네,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오늘 저에게 택배가 하나 왔는데-”

    [오오, 그것이 벌써 갔군요!!]

    “하아…역시 바이브님이 보내신 겁니까.”

    [네네, 탐은내꺼 아시죠? 그 녀석이랑 저의 선물이랍니다! 얼마 전에 채팅방에서 고민하시기에, 최근에 나온 녀석 중, 가장 촉감 좋고, 현실감 있고, 그리고 초보자가 사용하기에 무리도 없는 사이즈로 골라서 보내드렸죠!]

    “바이브님, 감사하지만…이건 좀…”

    […아, 너무…주제넘었나요?]

    갑자기 시무룩한 목소리에 움찔하였다.

    내가 너무 했나?

    이거 괜스레 미안해지는데…어떻게 보면 나를 생각해 준 것인데…

    “아, 그건 아니고…뭐랄까. 갑자기 회사로 이런 것이 오니까 놀라서, 거기다가 바이브는 아직 생각도 못했고”

    [어쩔 수 없었어요. 회원정보에 회사 정보가 적혀 있어서…주제넘었다면 로그님 미안합니다. 정말 악의나 그런 건 하나도 없었어요. 로그님이 너무 고민하시기에 그게 그만…]

    “아, 그게 아니고, 절대로 저는 기분 상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마시구요. 바이브님이야말로 제가 말이 심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로그님이 무슨…]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결국은 서로 잘못했다고 인사에 인사를 하고 간신히 전화를 끊었다.

    이제 오전인데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온다.

    오늘 왠지 평범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보건실에 들러서 두통약을 받아와야 할 것 같아서 머리를 누르면서 흡연실 문을 열었는데, 실수로 그 흡연실 문턱에 걸려서 살짝 삐긋해버렸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비틀거림으로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중심을 잡는다고, 그만 손에 있던 박스를 놓쳐버렸다.

    넘어지지 않았다. 라는 안도보다는 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은색 봉지 안에서 나온 갈색 상자…아차 싶어서 얼른 다가갔지만, 바로 눈앞에서 그것은 누군가의 발아래에서 꽈직-하는 굉음과 함께 박스가 산산이 구겨지고 말았다.

    너무 놀라 피가 싸해지는 것을 느끼고 정말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것을 밟은 사람을 보았다.

    다행이라고 할까…

    정말 다행이라고 할까

    정말 불행이라고 할까.

    그것을 밟은 사람은 다름 아닌 진시우였다.

    진시우는 천천히 발을 들어 자신의 발에 밟힌 물건을 보고는 나를 한번 바라보고, 일그러진 박스를 주었다.

    그 순간 박스 아래 부분이 열려서 툭 하고 떨어지는 그 무언가…

    아까 바이브님이 말하신 ‘최근에 나온 녀석 중, 가장 촉감 좋고, 현실감 있고, 그리고 초보자가 사용하기에 무리도 없는 사이즈’의 바이브가 떨어졌다.

    정말 로비에서 사람들이 볼까봐 얼른 잡으려고 했지만, 내 손보다 진시우의 손이 빨랐다.

    “흐음…”

    어째서 이 남자에게는 이런 모습만 보이는 걸까…

    정말 서로 불편해지기만 하고, 이게 뭔지…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 밀었다.

    “주세요. 아니, 그것보다 사람들이 볼까 걱정됩니다. 빨리 넣으시던 지요.”

    “지대리님 겁니까?”

    일단 나에게 배달 된 거니…

    “제…겁니다.”

    내 대답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에 잡힌 그 바이브레이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진시우를 정말 멱살 잡고 흔들고 싶었다.

    빨리 좀 넣어!!!

    “내 거보다 작습니다.”

    “네?”

    “제 거보다 작다구요. 이거 사이즈”

    “……”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천진난만하게, 도저히 회사 내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 이 남자를 누가 좀 말려줬음 좋겠다.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것보다 크셔야죠. 그러니까 주세요.”

    필요하면 가지라고 하고 싶지만, 선물 받은 거니 또 그럴 수도 없다.

    “드리겠습니다. 대신 부탁 하나…아니, 두 개 들어 주세요.”

    “…네?”

    “하나는, 저에게 이제 존댓말 쓰지 마시길, 한태성과 한태산처럼 편안하게 대해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오늘 저랑 저녁 먹으러 가시죠.”

    “……그건…”

    “첫 번째는 지금 당장 해주실 수 있으신 거니, 패스하고, 두 번째 저녁은…오늘 시간되시지요?”

    “…하아…알겠습니다. 그러니 주세요.”

    “말-”

    그래그래,

    내가 원하던 바다.

    “진시우, 그거 줘”

    너무 건방지게 말했나? 싶지만 정작 본인은 기분이 좋은지 싱글 웃으니, 내버려두자.

    전에 사건으로 인해서 bar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도, 만족스러워 하고 있는 이상한 녀석이니 말이다. 은근히 M기질이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고…

    내가 손을 다시 한 번 내밀자.

    진시우가 바이브를 구겨진 상자를 곱게 펴서 그 안에 넣고 건네준다.

    “오늘 퇴근하고 같이 나가지요.”

    하아…

    난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내가 오늘 플마에 어떤 글을 올리나 두고 봐라.

    그리고 이건 고장을 핑계로 다시 반품 시켜야겠다.

    로터로 사실 이제는 만족이 안 되긴 하지만, 이것만은 쓰고 싶지 않다.

    아무리 촉감이 끝내주고 정말 사람 것처럼 느껴진다고는 하나, 진짜와는 다른 기계니까.

    이것마저 넣고 해야 한다면 정말 비참 할 것 같다.

    약속대로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진시우가 내 책상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다.

    왠지 도망갈까 봐 전전긍긍한 모습이 눈에 살짝 보이는데, 난 책상 정리하면서 도망안가니까 안심하라고 말했다.

    종이가방에, 아까 그 문제의 바이브를 넣고, 부장님과 다른 여사원들 그리고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런데, 아까 못 물어 본 것이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진시우가 물어온다.

    “그거, 사용하려고 산겁니까?”

    “…뭘?”

    “바이브 말입니다. 사용하려고 산거냐구요.”

    “선물 받은 거라서…”

    “…뭐요?! 선물?! 선물이라고 했어?! 지금?!”

    존댓말에서 반말…

    아아, 진시우의 습성? 버릇? 여하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녀석은 얌전히 있으면 존댓말을 하고, 흥분하거나 화나는 일 있으면 반말을 한다는 것이다.

    초기에 만났을 때는 이것저것 섞어서 말하더니, 한동안은 얌전하게 존댓말을 하고 이제는 또 흥분해서 반말을 하고…

    “진시우씨…조용히 해”

    나도 지금은 적응이 안 되어서, 반말 존댓말 섞여서 나가지만…

    “아니, 도대체 누가 선물을 해준다는 거야?! 그런 걸?! 그거 이상한 의미 아니야?!”

    “플마에서 선물 해줬어. 별 뜻 없고, 그냥 장난 친 거야.”

    “…플마…하…제발 좀 놀래키지 마. 젠장. 거기서 누군데요?”

    “전에 봤을 텐데, 바이브랑 탐”

    “아아, 그 사람들…그런데…선물 받은 거라지만, 쓸 건가요?”

    “…진시우. 그건 사생활 침해야.”

    “…우리 관계에 뭘…”

    “관계? 우리가 무슨 관곈데?”

    “뭐?”

    “그렇잖아. 진시우 당신과 내가 무슨 관계냐고, 친구도 아니고, 연인은 더더욱 아니고, 친한 동생도 아니며, 그냥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데…그것치고는 너무 사생활에 관섭하는 것도 묻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해”

    “……”

    진시우 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난 꽤 깔끔하게 우리 사이를 정리하고 말해줬다고 생각하는데, 진시우는 자신이 원하는 관계가 아니었나 보다. 정말 멍-한 표정으로, 지금껏 진시우를 본 그 어떤 표정보다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시우가 온몸으로 부들부들 떠는 것이 보인다.

    주먹을 꽉 지고 무언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내가 올라타자마자 닫히는 문틈으로 진시우는 여전히 꿈쩍도 안하고 서있었다.

    1층에서 내려 로비에서 기다렸다.

    몇 번이나, 엘리베이터는 20층과 1층을 왔다 갔다 했는데도, 진시우는 나올 생각을 안했다.

    전화를 해볼까도 했지만, 한 번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몇 번째 인지 모르는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섰고, 진시우가 엘리베이터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내 앞에 다가와 섰다.

    “오늘 저녁 약속은 없었던 걸로 하죠. 먹을 기분이 안날 것 같습니다. 내 진심이 하나도 당신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진이 빠질 줄이야.”

    “……”

    “정말 당신은 이기적이야. 아마 나뿐만이 아니겠지. 한태성도. 한태산도 이승진도 모두 당신에게 고백한 것으로 아는데, 당신은 그런 생각으로 그들의 고백을 무시해왔겠지. 순간 나도, 그 사람들도, 불쌍해져 버렸어.”

    “…무시 한 것은 아니야. 다만, 나에게 전부 과분한 사람들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시하는 거야. 나도 그 사람들도 당신 하나를 두고 전력으로 부딪히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얍삽하게 빠져나가고 있으니…”

    “진시우…”

    “관계가 없다고? 정말 멋진 답이군. 오늘 밤 내내 한번 생각해봐야겠어. 저녁 예약해 둔 곳은 취소했으니,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죠.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시길”

    “……”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진시우의 말에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 지는 건지 모르겠다.

    무언가 정곡을 찔린 기분에…입맛이 씁쓸해졌다.

    진시우가 시아에서 보이지 않고서야, 나는 회사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은 구리구리한 날씨에, 한바탕 쏟아지기 전에 빨리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손을 곧 누군가가 잡았지만 말이다.

    “형…”

    “태산아…?”

    늘 행복한 듯이 웃고, 미소를 잃지 않는 녀석이, 오늘은 잔뜩 침울해진 얼굴로, 나를 불렀다.

    “여기에 웬일이야?”

    “기다렸어…”

    “무슨 일 있어? 안되겠다. 비올 것 같으니, 어디라도 들어가자.”

    “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둥이 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방으로 태산이 머리위에 비 맞지 않게 하고 뛰어서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뭐 먹을래? 따뜻한 거…”

    “나, 신검 받으러 갔다 왔어.”

    풀 죽어서 말하는 태산이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 때문에 그래? 대한민국 남자면 다 갔다 와야 하는 곳인데…”

    “현역입대 될 것 같아.”

    “태산이는 건강하니까.”

    “언제 영장 나올지 모르고…아버지나, 형은 빨리 갔다 오는 게 좋다고 하니까. 다음 학기부터 휴학 할 것 같아. 빠르면 3개월 안에 가야하고, 지원 입대하면 바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그런데 요새 군대 정말 많이 좋아졌다잖아. 내가 들어갔을 때완 완전히 틀리다고 하니까. 괜찮을 거다.”

    “…나는, 군대를 갈 생각이야. 하지만 나에게 있어 군대는 현실도피용이야. 도망갈 곳을 마련 해 둔 곳이기도 해”

    “…무슨 소리야?”

    “…1년 전부터 생각했는데…형이 만약, 나를 거절하면…들어가려고…결심했거든. 2년 동안 형을 보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산아…”

    “그러니까. 이제 내가 결정 할 수 있도록 해줘.”

    “내가 네 마음 받아주면, 너는 군대 안 갈 생각이니?”

    “…아버지 빽이라면 안 갈수도 있어. 그런데 그런 건 주혁형이 싫어하잖아? 난 형이 싫어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아. 갈 거야. 가겠지만. 아마 하루하루 형이 보고 싶어서 미칠지도 모르고,…그건, 차여도 마찬가지겠지만.”

    “산아…”

    “형, 형에게 부담 주는 거 절대 아니야. 형이 누구를 선택하거나, 누구와 사귀거나 하는 건 형 마음이니까. 나는 축복해 줄 수 있어. 많이 아플 테지만. 형이 좋으면 그걸로 된 거라고…요즘 많이 생각해. 그러니까 형, 나에게 답을 줘”

    “…형은…”

    “아니, 오늘은 안 들을래. 갈게. 다음번에 들을 게”

    “산아”

    “아직 시간 있으니까.…”

    “앉아봐, 따뜻한 거라도 마시고가. 감기 걸려. 우산도 사줄 테니까.”

    “주혁형…난 애가 아니야. 알아서 할게. 걱정하지 말고, 형도 어서 들어가.”

    오늘 따라 저 표정

    정말 많이 본다.

    진시우도. 태산이도. 저 표정을 만드는 사람은 나겠지.

    저런 아픈 표정을 만든 것…

    정말 아까부터 일진이 사납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왜 이러는지.

    아니, 어쩌면 자업자득일지도…

    『정말 당신은 이기적이야. 아마 나뿐만이 아니겠지. 한태성도. 한태산도 이승진도 모두 당신에게 고백한 것으로 아는데, 당신은 그런 생각으로 그들의 고백을 무시해왔겠지. 순간 나도, 그 사람들도, 불쌍해져 버렸어.』

    진시우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렇구나.…그렇구나.…

    창가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다시 한 번의 천둥으로 거세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가, 바텀인것을 사람들에게 들어내지 않고, 꽁꽁 숨기면서, 피해자인척 했었지.

    아무도 나를 몰라준다고…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데 이제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도 내가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모두…진심이었구나.…

    모두 다…나를 알고, 정말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고 있었구나.

    그들이 한 말도, 그들이 한 고백도, 전부 진짜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들의 말을 그냥 흘려 넘겼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그들에게 상처를 줬을까…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았니.

    지주혁.

    자신의 한심함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사이를 뚫어서 예전에 자주 갔던 포장마차 집에 들어갔다.

    혼자 앉아서 깡소주를따고, 그리고 한 잔, 두 잔 마셨다.

    혼자 마시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늘 사람들이 함께 했으니까.

    몇 년간 얼마나 내 옆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던가.

    외롭다고는 느끼지 않았지만, 또 그 사람들의 소중함도 몰랐으니, 등신인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한 잔, 두 잔 마시던 것이, 어느새 세병이 되고, 그 쯤 돼서 난 스스로 스톱 하였다.

    이 이상 마시면 내 머릿속의 필름이 뚝 끊길 것 같기 때문에, 하도 오래 되어서 이제 나를 기억도 못하는 할머니에게 술값을 지불하고, 포장마차에서 나왔다.

    아까는 그래도 덜 어두웠는데, 이젠 완전 하늘이 새까맣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지만, 구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언제 쏟아질지 모를 일이다.

    어차피 지금 버스도 없고, 지하철 타기에는 약간 몸이 힘드니, 택시를 잡아서 집의 위치를 말해주고, 잠이 들었다.

    잠깐 잠이 든 것인데, 꽤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폰 진동소리에 놀라 깨보니 조금만 있음 집 앞이었다. 위치를 확인하고, 아저씨에게 저 앞에 세워달라는 말을 하면서 내 잠을 깨운 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너 목소리 왜 그래?]

    “아, 태성이구나. 잠시만- 아저씨, 여기, 잔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내 말에 아저씨의 목소리가 밝아지시면서,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말도 보너스로 해주셨다.

    나 역시 수고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택시에서 내려서 집으로 향했다.

    [이제 집에 들어가는 거냐?]

    “어…”

    [그런데, 너 목소리 왜 그래?]

    “어떤데…?”

    술은 좀 깬 것 같지만, 속이 울렁울렁 거려서 죽을 것 같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속을 좀 비워야지, 안 그러면 내일 하루 종일 고생 할 것 같다.

    […울었냐? 아니면 술 마셨어?]

    “음…울진 않았고, 술 마셨어.”

    [누구랑?]

    “혼자…”

    […무슨 일 있냐? 답지 않게…나라도 부르지…]

    “뭘…그냥, 혼자 마시고 싶었는데, 아, 태산이는 잘 들어갔고?”

    [아, 그것 때문에 전화했다. 애가 비 맞고 들어와서는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그래…후우…오늘 신검이었다던데…”

    [그렇다더군. 나도 오늘 들었다. 너랑 통화하면 애가 좀 기분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브라콤”

    [닥쳐라. 요샌 주혁콤이다.]

    “큭큭…그런데, 산이는, 나 때문에 그러니까. 나랑 통화하면 역효과야…”

    […역시, 그런 거냐…하아…어렵다. 어려워]

    좀…그렇지?

    차마 그 말은 태성이에게 할 수가 없어서, 큭큭 웃으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의례 문 앞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복도의 꺼져있던 조명등이, 내가 왔음으로 인해서 밝아졌고, 그리고 내가 본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듯이 나를 놀라게 한 인물이 서 있었다.

    [어이, 지주혁, 자냐?]

    “태성아, 끊을게, 나중에 이야기하자.”

    [야- 어이!]

    폰의 폴더를 닫고, 나는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내에게 좀 더 다가갔다.

    “진시우. 여기까지 무슨 일…”

    나에게 화나서 간 거 아니었나?

    “사과 하려고 왔어”

    반말인가…그럼, 아직 화가 나있다는 건데, 무슨 사과를 한다는 건지.

    게다가…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나지, 진시우, 네가 아니야. 이번 일로 내가 싫어 졌다거나, 정이 떨어졌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지. 나 같아도…”

    “그 반대야! 네가 나를 싫어 할까봐 걱정 돼서 왔어.”

    “진시우”

    “화내서 미안해. 네 입장도 이해되고, 내가 제대로 못 전한 잘못도 있지. 젠장, 나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잠시만, 그래, 뭐든 좋으니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 여긴 복도라구”

    목소리도 참 크지…

    난 얼른 열쇠를 꺼내서, 열쇠로 문을 따고, 진시우의 팔을 잡고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정말 잘못했다가는 아파트에서 게이라고 소문이 날 뻔 했다.

    정말 어린애 같다니까. 절대적으로 나쁜 의미로

    “들어와”

    왜인지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않고, 현관에서 우물쭈물 거리는 녀석에게 들어오라고 말하니, 그제야 실례할게. 라고 말을 하며 신발을 벗고 들어온다.

    한두 번 온 것도 아니면서…뭐가 그리 신기한지 이리저리 둘러보는 진시우를 보고 나는 물을 한잔 마셨다.

    “계속 말해도 돼?”

    “…?”

    “좋아해. 젠장. 나도 이렇게 빠져 버릴 줄은 몰랐는데. 나, 지주혁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아까 그 일로 더더욱 자각해버렸어. 당신 놔두고 몇 발자국 걸어서 곧 후회했어. 내가 왜 그 말 했지? 당신이라면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무서워서, 당신에게 다시 가고 싶었지만, 나 싫어 할까봐 다시 못 갔는데, 또 그게 후회가 되고…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어.”

    이 녀석 바보다.

    “당신이…내 마음 몰라주면 어때…내가 계속 대시 하면 되지…내 마음 알아 줄때까지. 그러니까. 아까 낮에 내가 한 말은 잊어줘”

    무언가, 물을 마셨는데, 물이 목에 딱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 느낌이다.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은데, 진시우 말을 들으니 왜 소화기관이 다 멈춘 것 같지?

    “…지주혁, 한 가지만 대답해줘”

    이상하다.

    그 오만방자하고, 성격 더럽고, 내 잘났네 하던 녀석이 왜 이렇게 오늘따라 작아 보이지?

    “나 싫어하지 않을 거지?”

    “…음…그건 잘 모르겠는데…그게…음, 이상하게 오늘 진시우 네가 그 어느 때보다 귀엽게 보이긴 하네.”

    초딩같아서 그렇지

    그 말 까진 하지 않고, 마시던 컵을 싱크대위에 올려두고, 물통을 냉장고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 진시우 네가 오늘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어이?!”

    안 그래도 지금 속이 막힌 기분에다가, 다시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고 있는 판국에 진시우가 나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눈앞에 시야가 심하게 흔들렸다.

    덕분에 ‘우욱-’했지만, 다행히 올리지는 않았다마는, 안도를 하기도 전에 진시우는 이미 나를 바닥에 쓰러트려서 헉헉 거리고 있었다.

    하긴, 자기랑 덩치도 비슷한 놈 눕히려니까 힘이 들었겠지.

    그러고 보니 갑작스럽게 바닥에 눕혀졌는데도, 아프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꽤나 조심스럽게 나를 눕힌 모양이다. 내 뒤통수에 진시우의 손이 있는 거보니, 후…아니 그냥 키스하기 좋게 자세를 잡은 것 일수도 있고.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방금까지 자기 싫어하지 말아달라고 해 놓고서는, 왜 또 이런 전개가 되어 버린 거지…

    “진…시우…”

    “…그냥, 안고 싶어졌어.”

    “그냥 포옹? 아니면 섹스?”

    “…둘 다”

    “미움 받는다.”

    “그럼, 포옹만…”

    내 뒤통수에 있던 진시우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옮겨져 내 등을 쓸고 허리를 당겨서 자신의 품으로 꼭 안는다. 

    마주앉아 주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있어주었다.

    진시우의 심장소리가 나의 심장과 반대편에서 전해져 옮겨온다.

    왜 이렇게 빨리 뛰는 걸까. 이 녀석의 심장은…원래 이런 녀석인가…

    그렇게 몇 분을 있었을까.

    우리 둘은 서로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는 안겨 있었고, 녀석은 나를 안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상태로 계속 있었다면, 난 녀석의 품에서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녀석의 하반신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녀석의 하반신 중에, 진시우의 아들이 잔뜩 흥분해서는 내 허벅지에 닿았다.

    그 느낌상…아까 회사에서 진시우가 말한 바이브보다 자기께 크다는 말이 사실이긴 한가보다…그나저나, 이러다가 당하는 거 아닌가.…

    안되는데, 술 마신 덕분에 힘이 없어서 반항 못 할 텐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저벅 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진시우!!!!!!”

    아, 태성이 목소리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안고 있던 진시우가 저 멀리 나 뒹굴어졌다. 

    태권도 사범의 주먹은 꽤나 강한지, 진시우가 정신을 못 차리고 고개를 흔들면서 계속 신음소리를 냈고, 한태성은 그런 진시우의 멱살을 잡고, 이새끼야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쏟아 붓고는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 진시우의 얼굴을 치려고 할 때, 내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진정해”

    “지주혁 놔라”

    “진정하라고, 한태성, 아무 일도 우욱-”

    아, 갑자기 토기가 올라온다.

    입을 틀어막고, 계속 우욱 거리니, 한태성이 놀라서 헤롱헤롱한 진시우는 던져두고 내 몸을 붙잡고 이번에는 마구 흔들기 시작한다. 

    걱정은 고마운데, 그만 좀 흔들어 올라올 것 같…우욱

    “지주혁…너, 설마…”

    남편이 외도한 아내 의심하는 눈초리

    왜 그래요!! 이건 당신 애라구요!! 날 못 믿나요? 라고 말하는 사랑과 전쟁의 한 대사가 생각나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내가 생각하는 유치한 농담 하려거든 비켜…속 좀 비워야겠어. 욱-”

    한태성을 밀어내고, 화장실로 뛰어가, 아까 먹은 아까운 술들을 다 변기 안으로 버렸다.

    역시 이젠 몸이 안 받아 주는 건가…나이가 나이이니…청춘일 때랑은 틀리구나,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양치까지 하고 이왕 하는 김에 세수도 하고 나오니, 상황이 정리가 된 건지, 소파에 두 녀석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진시우의 얼굴이 그 한방으로 인해서 조금 부어오른 것 같아서,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수건에 찬물을 적셔서 던져주었다.

    “좀 괜찮나…?”

    한태성이 걱정스러운지 물었다.

    “어, 너무 마셨나 보다. 이제 정신이 확 드네, 그런데 너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아니, 아무래도 네 목소리가 안 좋아서, 걱정되어 와봤지. 와보니까 현관문은 열려있지. 들어오자마자 너는 이 새끼 밑에서 깔려있지.…”

    “강간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냐?”

    “당연하잖아. 보는 순간 이성이 날아가더…”

    “이 새끼가!! 누굴 짐승 취급하는 거야!!! 내가 왜 강간을 해?!”

    “너라면 가능하니까 그렇지!!!”

    “뭐얏?!”

    정말 완전 시트콤이 따로 없다.

    계속 보고 있으면 재미있긴 하겠지만…

    “어이, 둘…진정해. 나 머리 아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뚝 끝나는 두 녀석의 유치한 대화

    난 얼굴을 닦던 수건을 다시 화장실에 갖다 두고, 진시우와 한태성에게 오렌지 주스를 한잔씩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마주 편에 앉아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안 그래도 두 사람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너무 무게를 잡았나.…

    진시우도 한태성도 내 말 한 문장에 침을 꿀꺽 삼키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내 얼굴을 바라본다.

    “오늘…진시우가 나에게 한 말이 있지…너희들 마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야, 그냥 너희들도 탑이 갑자기 바텀 된다고 하니까, 흥미가 생겨서 나에게 그렇게 고백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미안해.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

    “그래서…그렇게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거냐?”

    “…어”

    “후우…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이제는 조금 나, 아니 이 녀석까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냐?”

    태성이 손가락을 가리킨 곳에는 진시우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을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마도”

    “그럼 됐다. 네가 ‘둘 다 싫어.’ 하는 것보다는 낫지. 늦게 깨달아도. 그럼 이제 본편 시작이라는 거네? 누가 너를 가질지…”

    “억지로 강요는 하지 마. 난 그냥 내 마음 가는 데로 할 뿐이야.”

    “그럼 우리 외에 다른 사람도 좋아 할 수도 있냐?”

    “진짜냐?! 지주혁?!”

    태성의 말에 번쩍 뛰어오른 것은 진시우였다.

    아니, 네가 왜 놀라? 반박해야 할 사람은 난데…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럴 리가 없잖아. 애초에 이런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건 니들뿐이고, 결론은 너희들이 이상한 거야”

    “하하…”

    “에이씨- 놀랐잖아.”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

    “됐어, 너에게 사과 받으려고 널 좋아하는 건 아니야. 이왕이면 미안하다 보다, 네가 좋아. 사랑해 해주면 좀 좋냐?”

    “웃기고 있네, 꿈은 크게 가지라고 있지만, 너무 꿈이 커도 문제라고”

    “이 자식이!! 아직 덜 맞았나!!”

    “그래!! 너 가만히 있는 사람을 왜 때려?!”

    “네가 가만히 있었어?! 그럼 왜 주혁이가 네 밑에 있었던 건데?!”

    “좀 안아봤다!! 내 사람 내가 안는데 뭐 죄야?!”

    “누가 네 사람이야!!! 네 사람이!!”

    아…시끄럽다.

    다시 시작된 두 사람의 유치한 싸움으로 귀를 막고 조용히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한참동안 거실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곧 잠잠해졌다.

    이제 가겠지, 하고 생각했더니 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주혁- 이거 뭐야! 이거 뭐냐고!!”

    한태성의 절규

    도대체 뭐기에 저러는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려고 고리를 잡았는데,

    “내 사이즈보다 훨씬 작은 이 놈 누가 선물 해준 거냐. 대체!!!! 어떤 새끼냐고!!”

    아 맞다.

    아직 안 버렸지

    그대로 집에 들고 들어왔는데…

    “야, 나와서 말 좀 해봐!! 이거 누가 준거야!!!”

    한태성의 절규 뒤엔, 진시우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나가면 아무래도 더 시끄러워 질 것 같고, 잘못했다가는 잠도 못 잘 것 같아서,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했다.

    눈을 떠보니, 아침7시로…방문을 열고나오니, 어제 조금 어질러져있던 집이 깔끔하게 정리 되어있었고, 그 두 사람은 가고 없었다.

    자고 가도 될 텐데…

    그리고 부엌의 테이블 위에는 숙취에 좋은 약들이 놓여있었다.

    아마 두 사람이 이것도사고 저것도 샀는지, 병 만해도 6병이 넘었다.

    종류별로 다 있으니 말이다.

    그 중 한 병을 집어서 마시고, 회사에 출근할 준비를 하였다.

    회사로 가는 길에, 부장님이 바로 LE로 오라는 말에, 회사와 정 반대 방향의 LE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프레젠테이션 할 거 준비는 다 했지만, 연습도 안했는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아까 약 덕분인가 속은 괜찮지만, 머리는 아직 살짝 아픈 것이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어이~ 주혁군~ 여기”

    “부장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회사랑 정 반대 방향이라 시간 많이 걸릴 줄 알고 있었어. 어제 밤에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하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 잠시 만요.”

    폰에 진동이 울려 보니, 문자가 와있었다.

    태성이었다.

    [속은 괜찮냐? 약은 먹었고? 일 열심히 하고, 나 필요 하면 불러라~

    [참, 태산이는 아직도 저기압이다.]

    그러고 보니…태산이…하아…

    어제 태산이와 대화했던 것이 생각난다.

    덕분에 깨달은 것이 있었지.

    답장을 선택하여, 태성이에게 답변을 보냈다.

    태산이에게는 내가 따로 연락을 하겠다고…

    아무래도, 태산이를 위해서도 이것만은 빨리 선택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지대리~ 어여와~”

    “네,”

    역시 큰 회사라서 그런지, 뭔가 위압감이 느껴진다.

    엘리베이터도 금색이고, 번쩍 번쩍 하고, 정말 무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

    ‘땡’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

    그 중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한 남자.

    그 남자로 내리면서 나를 알아보았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주혁씨?”

    “이…승진씨…”

    도대체 이 사람이 여기 왜 있을까 의문을 품기도 잠시, 곧 그 의문은 잠시 뒤 풀렸다.

    우선 무엇보다 보통 혼자 있는 모습을 보거나, 혹은 그의 부하(?)로 보이는 한두 명은 봤지만, 그때는 암흑세계(?)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듯이 검은색 양복을 쫙 빼입은 떡대들이었는데, 오늘은 말끔한 샐러리맨들과 예쁜 여성의 비서들을 뒤에 달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서로 여기에 왜 있는지 어리둥절하여 바라보다가, 나는 부장님이, 그리고 그는 그의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불러서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보고 빙긋 웃었다.

    “지주혁씨, 여긴 무슨 일입니까?”

    “제가 묻고 싶은데요. 이승진씨”

    “저런…”

    “이사님, 약속시간이…”

    그의 비서-확실히는 모르겠지만.-그에게 스케줄을 말하자. 그가 곧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씨, 언제쯤 끝날 것 같습니까.?”

    “…흠, 프레젠테이션 때문에 온 거라,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좀 늦게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드리죠. 나중에 뵙겠습니다.”

    나중에…뵙겠습니다.…?

    그의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 인사하며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그만의 오로라를 풍기면서 사라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나만 보고 있지 않고, 부장님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내 옷자락을 잡아 당기셨다.

    “저 사람과 아는 사이야? 지대리?”

    “네? 네…어쩌다보니…”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아?”

    조폭…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말은 함부로 할 수가 없으니

    “글쎄요…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부장님은 아시나요?”

    “저런, 지대리, 저 사람은 이승진이라구.”

    “그거야 알죠.”

    “여기 LE의 대주주중 한명이지”

    “네?!”

    “경영권에 대해서는 별로 참견은 하지 않는 편이지만, 저 사람이 한번 입 한번 떼면 LE경영진들이 벌벌벌 떤 다구”

    조폭이 아니었어?!

    뭐야, 그럼 한태성이 말한 거랑 BAR사람들이 말했던 그 수만은 소문들과, 기타 등등의 모든 것은…당장 오늘부터 입단속을 시켜야겠네. 안 그러면 명예훼손으로 몽땅 잡혀 갈 거다.

    “이야, 나도 얼굴 저 멀리서 한번 보고는 이번이 처음이네.”

    “그렇게 대단한 사람입니까?”

    “우리 회사 이사진도 좀 꺼려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얼마 전부터 우리 회사 주식도 사 모으고 있다던데”

    “그것 참…”

    큰일이군요.…

    “뭐 소문으로는 암흑계의 큰손이라느니 어쩌다 느니 하는데, 저 정도 힘빨이 있으려면 그렇다고 생각 할 수밖에 없어.”

    “……”

    한마디로 정체불명의 사람이라는 거군.

    “지대리도 엮이지 않도록 조심해.”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이미 사적으로는 이것도 저것도 알게 된 것 같은데요.

    “이크, 약속시간 늦겠다. 지대리 빨리 빨리 움직이자고.”

    “아, 네…”

    좀처럼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지 않아. 서류가방을 안고 비상계단을 6층까지 뛰어올랐지만, 힘든 것 보다, 계속 머릿속으로 아까 본 이승진씨가 생각났다.

    정말 미스터리 한 인물이라고는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을 신경 쓸 때라고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하며, 헉헉 거리며 6층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까 이승진을 만난 것은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리고 없었다.

    생각보다 프레젠테이션이나, 회의나, 그리고 다른 거래 이야기나, 잡담 등으로 인해서 LE에 있었던 시간이 길었다.

    대체로 결과는 만족이고, LE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여, 룰루랄라 하며, 부장님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부장님과 술 한 잔 할까 했더니, 부장님의 딸이 아프다고 하여, 먼저 가셨고, 나 역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 정류소 앞에 익숙한 차량이 섰다.

    창문이 열리며, 아까 낮에 잠깐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남자가, 고개를 빼꼼이 내민다.

    “주혁씨, 타시죠.”

    여유롭게 웃고 있는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터리 인물이다.

    아까 나중에 뵙겠습니다. 는 이 뜻인가…

    차를 타야 하나, 망설였지만, 버스 정류소에 번쩍번쩍한 차가 서 있고, 그 운전수가 나를 보고 있으니,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해서 얼른 탔다.

    그러나 차를 탔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차에 타자마자. 전에 그 기억이 떠올라, 불쾌해졌기 때문이다. 타기 전에 떠올랐음 안탔을 텐데, 후회를 해봤자. 이미 늦었다.

    그는 열심히 또 어딘가를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전의 일…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주혁씨 얼굴은, 나용서 안했소― 하시고 계신걸요?”

    “잘 못 보신 겁니다.”

    “하하, 그럼 다행입니다.”

    “절 기다리신 겁니까?”

    “음…네, 제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몰래 기다렸습니다.”

    “몇 시간 정도…?”

    “3시간 정도 될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의 말에 놀란 건 나였다.

    이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전의일은…잊겠습니다. 아니, 잊었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군요. 늘 마음이 불편했습니다만,”

    “어디로 가는 겁니까?”

    “맛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주혁씨에게 맛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시간 있으시죠?”

    “…없다면요?”

    “끌고가지요 뭐. 이미 칼자루는 제 손에 있고.”

    당신 전혀 반성 안한 것 같습니다만…

    “시간 있습니다. 그러니 그 칼자루랑 칼 다 버리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화두절, 나는 창밖을 바라보고, 그는 운전을 하면서 한참을 달리더니, 시 외곽에, 정말 펜션처럼 예쁘게 꾸민, 레스토랑에 도착하였다. 

    어떻게 이 남자는 이런 곳을 잘 알고 있는 것인지…하긴, 부장님 말씀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럼 인사들 만날 거고, 그러려면 이런 곳을 많이 알아야겠지, 소개도 많이 받을 테고

    “주혁씨, 궁금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네?”

    “계속 궁금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군요.”

    아, 나도 모르게 그랬나 보네

    “…죄송합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말로 하십시오.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이면 알려 드릴 테니”

    그가 메뉴판을 나에게 건네면서 싱긋 웃는다.

    “음…죄송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못 참아서…”

    “물어보셔도 됩니다. 주혁씨의 질문이라면 답 못 할 것도 없지요.”

    “전에…제가, 조폭이라느니, 큰손이라느니, 돈으로 사람을 가지고 논 다고 하던지 그런 쪽의 이야기만 잔뜩 들었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그랬지요.”

    “그런데, 오늘은 또 전혀 색다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음, 대충 예상은 되는 군요. LE 대주주니 그런 말이겠지요. 맞습니다.”

    “…맞았군요. 그럼, 조폭…아, 실례 음…그러니까 그쪽…”

    “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그쪽이셔서 어쩔 수 없다고 할까. 저도 그쪽이지요.”

    “그렇군요.”

    “실망했습니까?”

    “…음…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궁금증이 풀리니 속이 시원하다고 할까…여하튼 그런 쪽이지 실망이나 무섭다거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우리 둘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스테이크를 자르면서 좀 더 편안하게 이승진씨와 대화 할 수 있었다. 전에 만났을때 까지만 해도 조금 벽이 보였는데, 이상하게 그 벽이 허물어진 느낌…아마 내 생각을 알면 태성이나 진시우나 뒤집어 지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나 이 사람에게도 고백 받았구나. 아니, 고백인가?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했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못 들은 것 같은데…

    그래, 솔직히 말해서, 진시우나 태성이의 그 고백은 이제 믿지만, 이승진…이 사람이 한 말은 조금 뭔가 걸린다.

    으으…고민해결 하나 했더니, 다시 이런 고민거리를 안겨 주다니…이 사람은 정말이지

    “이승진씨”

    “네,”

    “하나 더 물어 봐도 될까요?”

    “괜찮습니다. 아, 참고로 살인은 안 해봤습니다. 아직은요.”

    “하하. 그런 게 아니라…음…저를 좋아하시나요?”

    “아주 좋아합니다.”

    간단…

    순간 그 허탈함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떨어트릴 뻔했다.

    “어떤 점이요?”

    “전에 말씀 드린 걸로 기억하는데요. 지주혁씨”

    “음, 그럼 저와 사귀고 싶으신가요?”

    “집안에 하루 종일 가둬두고 열기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싶을 정도의 사이가 되고 싶습니다.”

    “…그럼, 저를 사랑하시는 건지…?”

    내 말에 그가 의외라는 듯이, 바라본다.

    그리고 또 특유의 웃음으로 무언가 생각하며 와인을 마신다.

    “주혁씨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조금 의외군요. 무언가 새로운 모습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그건 더더욱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궁금하다고 해야 할지…흠, 솔직히 말씀 드려서, 저에게 고백한 사람이 넷이 있습니다.”

    “누군지 알겠군요.”

    “그 중 이승진씨가…”

    “가장 믿음이 안가는 가보군요.”

    “네…그렇다고 할 수 있죠.”

    “주혁씨가 변하고 있군요. 처음 만났을때와 정말 다릅니다. 처음 만났을때는 날이 잔뜩 서있는 얼음 성 같았는데, 지금은 들녘의 봄 같군요. 그럼 꽃이 피고, 앞으로 그 꽃이 핀 들녘으로 나비들이 잔뜩 모이겠지요. 그런 당신의 변화를 보는 것은 정말 즐겁고 색다르지만…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아쉽군요.”

    “승진씨…?”

    “저는 아주 나쁜 남자입니다. 주혁씨. 그 들녘에 핀 꽃들을 다 짓밟아 버릴 정도로요.”

    “……?”

    “답을 해드려야겠지요?”

    그가 나이프와 포트를 접시위에 가지런히 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저는 주혁씨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이상의 답은 어렵군요. 라고 말을 하는 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이승진이라는 인물의 답다웠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였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를 사랑했다면, 방금 그의 답에 조금은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까.…?

    LE의 일에는 이승진씨도 관련이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아마 거래가 이루어지면 이승진씨도 자주 볼 것 같다고 말을 하고, 공과 사는 구분해서 일하자고 둘이서 합의 보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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