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44/45)

[점심시간 도서관 잠시만]

변함없는 짧은 문자를 보면서 상원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동석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상원이 얼글을 붉혀가며 문자를 읽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 요즘, 그게 누구로부터 온 문자인지 동석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상원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 얼핏 물어봐 듣게 된 조석희에 대한 평판은 동석의 심기를 뒤집어 버리기 충분했다. 

조석희의 평은 간단했다 

개새끼.

이전에도 개새끼였고 지금도 개새끼 이고 앞으로도 개새끼일 거라는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 싸가지 없는 개새끼에게 애지중지 키운 자식을 빼앗긴 기분에 동석의 입맛은 지독히 썼다. 

"상원아 오늘 수업끝나고 노래방 안갈래?"

한승완이 두 사람의 자리로 다가왔다. 오늘 실습 시간에 쓸 톱을 손에 쥔 그의 표정이 유난히 해맑아 보였다.  동석은 절대로 저 녀석에게만큼은 상원의 연애를 들키게 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나 공부해야 하는데"

"아 맞다 너 수능 얼마 안남았지"

승완이 자신의 머리를 탁하고 내리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너도 얼마 안남았을 걸"

"나? 음하하하하 수능 그까짓 거 대충 보면 되지"

"내가 장담하는데 니 수능 점수는 니 노래방 점수보다 덜 나올거다"

윤대진이 끼어들어 낄낄댔다. 한승완이 들고 있던 톱을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대진은 들고 있던 야망가 잡지책으로 그걸 받아냈다. 

"이런 시발놈! 이게 얼마 짜린줄 알아?"

"까불지마 윤대진 머리를 확 쓸어버릴라"

대진을 위협하기 위해 휘두르던 톱이 상원의 뺨에 닿은 것은 찰나였다. 

"앗!"

상원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옅게 파인 상처에서 새치름하게 피가 맺혔다. 그러자 한승완은 들고 있던 톱을 집어 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뭐해! 구급상자 가져와! 아니 119불러 시발!"

"괜찮아 크게 안 다쳤어"

"피 나잖아!"

자기네 반 다른 친구가 다쳐서 피를 흘리면 낄낄거리며 아프다고 물어보는 취미를 가진 한승완의 얼굴이 파리해져 대답했다.  상원은 몇 번이나 그런 승완의

손을 잡으며 자기는 괜찮다고 안심을 시켜줘야 했다.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응 이정도 상처는 침 바르면 나아"

"내가 발라줄까?"

윤대진이 혀를 내밀며 농담을 던지자 한승완이 아까 집어던졌던 톱을 다시 손에 들었다. 

"뭐, 뭐야 그걸 왜 들고 와"

"네 혀를 썰어줄려고 그런다"

이번엔 농담이 아니었다. 퍽 하고 박히는 날카로운 톱날에 놀라 대진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어딜 그 더러운 혀를 대겠다는 거야? 죽을래? 우리 상원이한테 입술이건 장난으로라도 들이대는 새끼 있으면 내가 썰어버린다."

들고 있는 톱이 전기 잭만 꽃아주면 저건 영락없는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 주인공 얼굴이었다. 동석이 눈으로 한숨을 쉬며 상원을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웃고 있던 상원도 그런 

동석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튼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고 너무 늦게 다니지마. 요즘 남학생도 잡아가서 새우잡이 어선으로 팔아버린다는 애기도 있으니까"

"걱정해줘서 고마워 조심할게"

새우잡이 어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악독한 인간과 만나러 가면서도 상원은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상원은 가방을 챙겨 들고 교실을 나섰다. 

동관의 도서관은 김이경의 허락하에 상원이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 열쇠를 돌려주려 했지만 그건 자신이 고백한 것과 별개의 문제라고 김이경이 딱 잘라 선언한 것이다. 

그간 학생회를 위해 노력해준 상원선배의 노고에 감사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게다가 자신의 고백을 상원이 거절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그래도 괜찮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너무나 쉽게 물러서는 김이경의 진심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상원은 도서관 사용권에

관한 것은 조금쯤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공부를 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다 그 안에 잇는 자료들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조석희를 학교에서 마음놓고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이건 확실히 이경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도서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원은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수학 문제집을 풀었다. 

10분쯤 지났을까.

"또 그거 들어요?"

익숙한 저음이 머리 위에서 들리고 이어폰 한쪽이 귀에서 멀어져 갔다. 물어 놓고도 음악을 확인하려는지 조석희가 귀에 이어폰을 가져다 댔다. 

"응 에피톤 프로젝트"

"그렇게 좋아요?"

"안 질려"

상원이 좋아하는 그 가수의 앨범은 음색이 조용하고 서정적인 노래가 대다수라서 특히 공부할 때 들으면 소음을 차단하고 집중을 도왔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잘 생겼나 보군요"

"어? 아니 경음악이 더 많아. 객원가수가 부르기도 하고 이 사람은 별로 안 부르는데"

어제 머리를 다듬었는지 살짝 스타일이 달라 보이는 조석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상원은 조금만 목소리로 아무리 잘생겨도 너보다 잘생겼을까 하고 덧붙였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상원은 얼굴이 붉어져 한동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조석희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선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뭔데요?"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이상한 제목이네"

"정말 좋아 너도 한번 들어봐"

상원이 이어폰을 조석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조석희는 귀찮다는 기색을 내보이며 몸을 뒤로 뺐다. 

"나중에 선배가 한번 불러줘요"

"응?"

"선배가 제일 좋아한다는 노래 말이에요"

"나.... 노래 못하는데"

상원이 웅얼거리며 말해보았지만 조석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 던진 말도 내일쯤이면 잊어버릴 터였다. 하지만 상원은 그의 한마디가 몸 안에 사라지지 않는 중금속처럼

쌓여갔다. 

"얼굴은 또 왜그래요"

조석희가 아까 만들어진 상처를 가르키며 물었다. 

"장난치다가 조금 긁힌거야"

조석희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한마디 했다. 

"피 냄새 싫어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자신의 얼굴이 다친 건데도 상원은 조석희의 소유물을 허락없이 훼손해서 꾸중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가 상원의 턱을 쥐고 상처를 살피며 영어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욕설까지 우아하게 들리다니

정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구나 하며 상원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자고 싶어서요"

"....어제 잤잖아"

처음에는  이틀, 혹은 사흘에 한번 불러내더니 요즘은 거의 매일 그는 상원을 호출했다 .얼굴을 자주 보는 것은 좋았지만 자꾸 이렇게 만나다가 조석희가 자신의 냄새를 싫증 낼까봐 상원은 벌써

걱정이 되었다. 

"저는 하루에 한 번 자면 안되나요?"

"아니 하루에 한 번 자면 좋은거지"

"그럼 얌전히 계세요"

조석희가 상원을 끌어안아 자신의 옆에 앉혀 놓고 얼굴을 묻었다. 오늘은 그래도 격한 행위는 하지 않고 넘어갈 모양이었다. 

상원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는 조석희의 뒤통수를 내려다 보았다. 

사람이 아무리 잘생겨도 하나쯤은 못난 부분이 있을 법도 한데 얘는 어떻게 된게 뒤통수조차 이렇게 멋진 걸까. 누군가 손으로 머리통을 일부러 빚어 놓아도 이런 모양은 만들지 못할 텐데.

대체 무슨 냄새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몸에서 조석희가 좋아한다는 그 냄새가 나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지지리 운이 없던 것은 이 하나의 행운을 위한 것은 아닐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잘해준다기 보다 뭐라고 해야 하나, ..... 인간다운 대접이라고 해야 옳을까.

모난 성격을 타고난 조석희에게 다정함을 기대하긴 애초에 글러먹은 것이다. 상원은 그가 자신의 문자에 답을 해주거나, 짧게 안부를 물어주거나, 아까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 약간의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 고마웟다. 

아직도 조석희와 하는 것은 무섭고 아팠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너무 느껴서 가끔은 아프기도 했고.....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해준다는 것이 상원은 기뻤다.  몸을 겹칠수록 상원은 깨달았다. 

자신이 얼만큼 조석희를 좋아하는지. 

상원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조석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머릿결의 느낌이 그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선배"

"으응!"

"자는 사람 왜 깨워요"

짜증섞인 목소리에 상원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미안해 자는 줄 알고... 다시는 안 할게"

상원이 두 손을 조석희의 몸에서 떼며 엄숙하게 맹세했다. 조석희가 잔뜩 졸린 얼굴로 상원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조석희가 주장하기에 손바닥에서는 기분좋은 고소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몇 번을 맡아보아도 고소한 냄새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문득 불안해진 상원이 어느날은 손바닥에 참기름을 살짝 바르고 온 적도 있었다. 

물론 바로 무시무시한 표정의 조석희에게 수돗가로 끌려가 손세척을 당했지만,

상원은 아까 조석희가 던진 말이 문득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노래 연습을 해야 할텐데. 오늘 당장 친구들과 노래방에 한번 가볼까. 아니, 열심히 연습해봤자 얘는 기억도 못 할게 뻔한데 

...그래도 만에 하나 불러 달라고 하면 어쩌지.

이내 고른 숨을 쉬며 잠이 든 조석희를 내려다보앗다 손바닥에 닿은 숨결이 마음을 간질였다. 조석희가 깊이 잠이 들면 자리를 피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상원은 결국 그가 잠에서 깰때가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상원은 그날도 점심식사를 건너 뛰었다.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게 된다. 나쁜 남자를 보면 그녀들은 자신이 그를 바뀌게 만들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만, 결국 남자는 바뀌는 거 없이 손쉬운 연애를 즐길 뿐이다. 어허 이거 괜찮은데?"

뒤에서 잡지를 소리내어 읽던 대진이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어쩐지 그 내용이 귀에 매우 거슬리는 상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뭔데? 하고 물었다. 

"여자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내용 말이야 좋은 남자 노릇하는 것보다 이쪽이 편하고 매력도도 증가한다니까 당장 나쁜 남자가 되어야 겟다."

"그건 아닐걸, 그 나쁜 남자들은 얼굴이 잘생겼다가 기본 전제야"

동석이 말려보앗지만 대진은 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정도면 충분해 괜찮아"

"미친놈"

그렇게 말하면서 동석은 얼굴에 여드름 약을 꼼꼼히 바르고 잇었다. 평소였으면 책상에 엎드려 꿈나라를 헤맸을 반장 승완도 교실 뒤 거울앞에서 왁스로 머리를 세우며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여기저기서 거울을 보거나 바닥에 엎드려 푸시업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상원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교실의 모습속에서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왜 다들 갑자기 신경을 쓰지?"

"오늘이 올해 처음으로 수영장 물에 발 담그는 날이잖아"

윤화 재단의 학교답게 희재고의 시설은 서울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수영장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5m잠수 풀과 다이빙대가 구비되어 있어 다른학교의 수영부나 다이빙을 하는 학생들이 희재고

시설을 이용하러 오기도 했다. 

"아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5월말이나 6월초가 되면 수영 수업이 시작되었다. 얼마 전부터 수영복을 준비해놓으라는 공문이 내려와 상원도 캐비닛 안에 수영용품을 가져다 넣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작년에는 6반 아이들이 뽀순뽀순 잉이 수영장에서 자유롭게 헤엄을 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어항을 들고 갔다가 수영 선생에게 들켜 한달간 출입을 금지 당했다. 

상원은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뽀순뽀순 잉이건 뽀순뽀순 퀴이건 둘 다 데리고 가지 말아야 겠다고 당부해야 겠다 마음먹었다. 

"그런데 오늘 또 다른 학교 사람도 오는거야?"

시커먼 남학교 내에서 수영수업을 한다는 이유로 저렇게 멋을 부릴 리 없는 것이다. 

"세화여고 다이빙 부 학생들이 오신다는 거 아니겠어. 음하하. 그것도 우리 수업시간에 딱 맞추어서! 아 시발 생각만 해도 선다" 

"너 또 그러면 퇴장이야"

걸핏하면 아래가 서버려 여학생들이 오는 날에는 퇴장 100%를 자랑하는 대진이었다. 하지만 대진은 이번만큼은 절대 세우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이번엔 절대 안 세워 진짜. 내 자지를 걸고 맹세한다. "

"저번에도 걸었잖아"

상원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친구의 다리 사이를 쳐다봤다. 

"넌 그냥 스탠드에서 수업관람이나 해 좆 병신아 6반 망신시키지 말고"

친구 때문에 옆에 서있다가 몇 번이나 동반 퇴장을 당했던 동석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충고했다.

"좆병신? 시발 좆까는 소리하고 있네. 내가 왜 좆병신이야. 내 좆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줄까? 어!"

대진이 지퍼를 내리며 자신의 것을 꺼내려하자 상원이 그의 손을 붙들고 뜯어 말렸다. 

"다들 많이 봤을거야 굳이 안보여줘도 되니까 흥분가라앉히고 앉아"

"에이 시발 아무튼 나 오늘은 절대 퇴장 안당해. 세화여고 다이빙 부 애들 완전 퀸카로 소문났는데 내가 미쳤어!"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은 애들이라면..... 좀 힘들지 않을까?"

상원이 진지한 걱정에 대진이 자신이 배신당했다며 소리를 지르며 교실을 뛰어나갔다 상원이 그를 뒤쫓아 나가려고 하자 동석이 내버려 두라고 한마디 했다 

"저 놈 저러다 3분도 안 돼서 돌아오는 거 알잖아. 그냥 냅둬"

세상사 지나치게 낙천적인 대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망각이었다.  동석의 말대로 3분도 되지 않아 대진은 몸을 섹시하게 보이게 만드는 로션을 가지고 왔다며 

6반 아이들을 교실 뒤로 불러 모았다.  상원은 친구의 저 낙천적인 점을 조금은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가?"

"수시 원서 다음주 부터 받는데 학생회 활동으로 추천서 확인 받아야 할게 있어서"

"오오 수시 너라면 누구든 추천해줄거다 .가서 잘 받아와"

"고마워"

상원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관 건물의 교무실로 가서 담임 선생님께 제출 서류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 나오니 뒤에서 김이경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이경이구나"

상원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였지만 그 다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뭘 또 그렇게 얼굴에 경련이 나게 웃으세요 예전처럼 대하시라니까"

"하하하 그래"

아무리 기억에서 지우려고 해도 그날의 일은 상원에겐 잊혀지지 않았다. 사람좋고 모범적이라고 여겼던 후배가 조석희와 주먹다짐을 하지 않나 한대 얻어 맞고 쓰러진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지 않나. 예전처럼 대하고 싶어도 자연스레 김이경만 보면 몸이 굳어버리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어디 갔다 오세요?"

6반이 사용하는 교실은 신관과 떨어진 별관에 위치했기 때문에 상원이 이곳에 온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수시원서 때문에 담임선생님께 서류 말씀드리고 왔어, 추천서 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슬슬 수시 원서 접수기간이긴 하네요 선배는 당연히 서울대 쓰실 거죠?"

"아니 연대 쓸거야"

"네?"

"거기에 배우고 싶은 교수님이 계셔서"

"선배 성적이면 당연히 서울대도 무사 합격아닌가요?"

김이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따져 묻는 듯한 그의 말투에 상원은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의고사 성적만으로 따지면 그렇지만.... 이것저것 고려해야 하니까. 게다가 난 꼭 서울대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어"

"아, 그러시군요"

그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어 상원은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고 인사를 했다.  

복도의 코너를 돌아올때까지 등 뒤에 꺼름직한 시선이 느껴져 상원은 일부러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누군가의 어깨에 정면으로 코를 갖다 부딪치고 말았다 

"미안"

얼른 보이는 명찰 색으로 후배임을 확인한 상원이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돌아오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누구하나테 쫓겨요?"

"아....."

"그렇게 다니니까 사고가 나죠"

"그냥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이요?"

조석희는 별다른 의도 없이 툭 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상대가 별 뜻 없이 던진 질문에 상원은 생각 없이 대답했다. 

"이경이가 좀...... 헉"

상원은 다짜고짜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가는 후배의 박력에 놀라 말을 잊지 못했다. 신관에서 별관으로 이어지는 구석진 계단 밑으로 상원을 

끌고 간 조석희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이경이가 뭐? 여기서 한 번 말해보시죠"

"아니 이경이가 그냥 대학얘기로 과민하게 반응해서... 그냥 이상하다는 뜻이었어"

"어디서 김이경이랑 만났는데?"

그날 이후로 조석희는 상원이와 김이경과 단둘이 절대 만나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렸다. 학생회일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을 했다가 상원은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방식으로.

"복도에서 사람들 많은 데서!"

상원이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깨끗한 눈동자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을 호소 했다.

"사람 많은 데건 없는 데건 김이경하고 말도 하지 말아요 만나지도 말고"

"학교에서 만나는 건 정말 불가항력이잖아"

"그럼 빨리 졸업하든가"

조석희의 질책에 상원은 두 눈을 깜빡거린다. 약간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너도 못 만나는데....."

"밖에서 보면 되잖아요"

짜증 섞인 그의 한마디에 상원은 구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지금 그것은 졸업후에도 만날 수 있다는 언약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하하 그래 밖에서 만나면 되겠다. 그때는 너는 고3인데 공부하느라 힘들지도 모르는데.... 만나면 금방 가야겠다. 그런데 너 잠은 어디서 자지? 커피숍 같은데서 갑자기 잠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지나치게 멀리간 상원의 걱정은 거기서 끝났다. 상원의 입술을 맛있다는 듯 한입 먹고 난 조석희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수업 빠지자고 하면 안된다고 하실 거죠"

"....응"

마음 같아서는 수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빨리 하던 키스나 마저 해달라고 조르고 싶었지만 상원은 필사적으로 이성을 끌어모아 대답했다. 

"그럼 빨리 가세요 마음 변하기 전에"

조석희가 상원의 앞을 막고 있던 손을 풀어주며 대단한 관용을 베푸는 투로 말한다. 상원은 그 굵은 팔뚝 밑을 지나가면서 머릿속을 스친 생각을 입에 담았다. 

"너도 오후에 수영수업있지? 그럼 조금 후에 볼 수 .....악!"

뒷덜미가 잡혀 다시 한번 벽에 처박히고 말앗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픈 등을 문지르며 상원은 조석희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웬만하면 수영 수업 들어가지 마시죠"

"무슨 말이야? 수업은 다 가야 해. 자꾸 빠지면 내신에 안 좋아"

"그럼 그냥 앉아서 참관이나 하세요"

여자라면 피치 못할 사정을 들어 수업을 빠질 수 있다지만 남자는 달랐다. 전염병에 걸리거나 수영선생으로부터 퇴장 조치를 받지 않는 이상 무조건 입수를 해야했다 게다가 상원은 수영수업을 좋아했다.

자신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 어릴 때 부터 수영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아프지도 않은데 내가 왜 수업을 참관해"

"거 참 , 귀찮게 하네"

조석희가 상원의 정수리를 한 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였다. 상원의 비명소리가 복도를 가른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너는 왜 수영복 안입어?"

"나? 하하 감기기운이 좀 있어서"

상원이 친구들이 의심어린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쿨럭대면서 체육복 깃을 올렸다. 다짜고짜 수영수업에 들어가지 말라고 목을 물어뜯어 버린 후배 때문에 상원은 울며 겨자먹기로 수영선생님을

찾아가 참관수업을 부탁한 것이다. 

"너 수영수업 좋아하잖아 접영도 막 하잔항 이렇게"

대진이 두손을 허우적 거리며 접영을 해보이는 시늉을 했다. 주변에선 고질라가 물에 빠지면 딱 그짝이라고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 

"감기 걸렸으면 양호실에서 쉬지 왜 기어코 여기에 와서 앉아 있어"

검은색 수영복을 입고 팔다리를 풀고 있던 동석이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열도 없고 감기 기운도 없는 상원으로서는 목덜미에 물린 자국이 있어 참관수업을 하는 것만으로도 양심이 따끔거렸다. 아프지도 

않은데 양호실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그냥 구경하고 싶어서 그래"

"흐흐흐 하긴 우리 상원이도 남자인데 수영복 한겹만 입은 세화여고 미녀 군단이 왜 안보고 싶겠어 흐흐흐"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던 대진이 머리통을 옆에 서 있던 한승완이 킥보드로 호되게 내리쳤다. 

"죽고싶냐? 우리 상원이가 너 같은 줄 알아!! 이 드런 놈아!"

"상원이도 달릴 거 다 달린 남자인데 왜 그래!"

대진이 억울하다는 듯이 대거리했지만 승완에게는 그 논리는 통하지 않았다. 

"오호라 오늘 이 수영장의 물을 콧구멍으로 마셔서 똥구멍으로 뱉어봐야 네놈이 정신을 차리겠구나?"

한승완의 무서운 점은 저 무식한 협박이 협박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진이 재발리 정좌를 하고 미안하단 말을 건넸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화해를 마친 두 사람은 서로의 근육을 칭찬하며 다시 화기애애한 모드로 돌아섰다. 대진이 수영팬티안에서 뭔가 꺼내 몸짱을 위한 묘약이라며 승완에게 건네주자 

둘은 신나게 서로의 몸에 그것을 발라 주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은 선탠을 한 피부처럼 까맣게 변했다. 

"미친, 그건 또 뭐냐"

"원래 여자들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끌리는 거지. 생각해봐라 허여멀건한 몸보다 구리빛 자지가 아니 구릿빛 몸이 섹시한 법. 타핫!"

대진이 킥보드를 휘두르며 기합 소리를 냈다.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아이들도 들뜬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동석도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계속 준비운동을

반복했다.  수영선생이 들어오고 한승완에게 6반 아이들을 특히 조심시키라고 주의를 주었다. 문이 열리자 수영복을 입은 세화여고 다이빙부가 코치 선생님과 함께 걸어들어왔다. 수영장안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꽂혔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화여고 코치선생이 수영선생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나누었다. 다이빙대는 수영장의 끝에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학생들이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남학생들은 저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여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갖은 용을 썼다. 그건 6반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같이 수영합동을 하는 2학년 s반과 1학년 k반 학생들도 어색하게 준비운동을 하며 여학생들이 모여 있는 다이빙 방향을

힐끔거렸다.

세화여고의 다이빙부는 전국체전에도 몇 번이나 우승을 했을 정도로 실력이 좋은 축에 속했다.  체구가 작고 얼굴이 예쁘장한 다이빙 선수들은 주변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준비운동을 마친 그녀들이 한 명씩 플랫폼에 서서 기본적인 입수동작을 취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장신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수업시간에 늦었음에도 미안하다는 기색도 없이 그는 6반 학생들을 가로질러 s반 대열에 합류했다. 190을 훌쩍 넘기는 키에 치명적이다 싶을 정도로 잘생긴 외모, 거기에 온몸이 

빈틈없이 근육으로 맞물린 듯한 몸은 수영장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수영장 끝에서 다이빙 연습을 하던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준비운동을 하던 남학생들도 입을 벌리고 조석희를 쳐다보았다. 

상원은 아에 앉은 자세에서 턱을 괴고 몸의 방향을 그쪽으로 틀었다. 

"조석희 너는 늦었는데 뭐가 그리 당당하냐"

"죄송합니다"

느릿한 목소리가 수영장 안에 울리자 여학생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조석희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팔을 잡고 주욱 늘리며 물속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스탠드에 앉아 있던 상원은 눈이 부시게 멋진 그 모습에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조석희는 다리가 길고 어깨가 넓어서 수영장에 있는 누구보다 수영복이 잘 어울렸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견갑골이나 완벽한 Y자 형태로 이어지는 복사근이 압도적인 수컷의 페로몬을 풍겼다. 

수준별로 학생들을 나누어 레인을 배정했다. 조석희는 2미터가 넘는 풀장에서 깔끔한 자세로 물 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시작했다. 

오늘 2학년 s반과 처음 수영 수업을 하게 된 상원은 조석희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긴 팔이 물을 가르고 앞으로 나가는 속도가 웬만한 선수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상원은 마른 침을 삼키며 조석희가 한 번도 쉬지 않고 레인을 왕복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런 시발 자지에 스카치테이프까지 붙여가면서 노력하는 나를 두고 감히 저놈이 모든 시선을 끌다니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뭐? 거기에 테이프를 왜 붙여? 너 미쳤어?"

동석이 질색을 하며 대진의 옆에서 물러섰다. 

"서버려서 퇴장당하는 것보다 낫지"

대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조석희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뭐야 저새끼 s반 맞아? 저 반에는 다 허여멀건 한 샌님만 있는거 아니었어?"

"쟤 조석희잖아"

조석희를 알아본 한 명이 그의 이름을 말하자 대진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양키새끼 그래 양키라면 저 몸이 나올 수 있지 젠장 이젠 양키하고까지 대결을 벌여야 하다니 세상 살기 참 더렵군"

대진이 가슴근육을 두드렸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운동을 좋아하는 대진도 어디에서 빠지는 몸은 아니었지만 조석희와는 애초에 레벨이 다르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뭔 구경났어 빨리 수영이나 해"

한승완이 짜증을 내며 조석희를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을 물가로 몰아냈다. 수영 수업을 관람하기만 해야 하는 상원은 차라리 이렇게 된게 다행이다 싶었다. 수영하랴 조석희 구경하랴 6반 애들도 

신경쓰랴 벅찼을 시간이 이렇게 하나에만 집중하게 되었으니 .

"상원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원이 고개를 돌리자 사육담당이 어항을 들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뽀순 잉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 저번에 그래서 우리 반 퇴장 당했는데"

"아니 넣을 건 아니고 얘도 큰물이 그리울 것 같아서 같이 관람이나 시켜줄까 해서"

"알았어 내가 데리고 있을게"

"고마워 부탁할게"

상원은 어항을 받아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 얌전히 있어"

걸핏하면 어항을 탈출해 교실을 물바다로 만드는 잉어에게 상원이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뽀순뽀순 이잉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뻐끔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상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 너 잉어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 당장 가지고 나가"

수영 선생이 상원이 들고 잇는 어항을 보고 매섭게 소리쳤다. 조금만 큰 목소리로 말을 해도 천장이 높아 소리가 울리는 수영장 내부에서 수영 선생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수영장 끝에서 다이빙 연습을 하고 있던 여학생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상원은 새빨개진 얼굴로 어항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자 갑자기 그때까지 얌전히 어항안에 있던 뽀순 잉이 몸부림을 치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어......!"

뽀순 잉이 나가지 못하게 어항을 기울이며 균형을 잡던 상원의 노력이 무색하게 뽀순잉은 공중으로 화려하게 도약해 탈출하고 말았다. 

염소가 들어 있는 수영장 물에 들어가면 뽀순 잉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상원은 황급히 어항을 내려놓고 뽀순잉을 잡으려고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걸핏하면 교실 수조에 손을 

집어넣어 뽀순잉을 잡아라! 놀이를 하는 6반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뽀순 잉에게 는 것은 순발력과 눈치였다. 상원이 잡으려고 다가가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뽀순 잉은 반대방향으로 튀어 올랐다. 

때 아닌 잉어 탈출 사건에 수영 수업을 하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해 쏠렸다. 

"당장 데리고 나가!"

화가 난 선생이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상원은 점점 당황해 얼굴뿐만 아니라 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머리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가만히 있어요"

커다란 손이 뽀순잉의 몸뚱이를 단번에 움켜쥐어 들어올렸다 

"어항"

상원이 허겁지겁 스탠드로 가서 뽀순잉의 어항을 들고 왔다. 조석희가 손에 들고 있던 물고기를 그 안에 집어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어항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뽀순잉이 부르르떨었다. 

"뽀순잉"

상원이 놀라서 애완 잉어의 이름을 불렀다. 뽀순 잉은 쇼크를 받은 듯 어항 바닥에 붙어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 그 정도로 안 죽어"

조석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뽀순 잉이 어항 안에서 소심하게 유영을 시작했다. 상원은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며 어항을 끌어안았다. 

"선배는 가만히 있는 법을 모르는군요"

"어?,.,,,, 아 하하"

본의 아니게 또 사고의 중심에 서 있게 된 상원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사과가....."

"응?"

"아까 사과가 굴러다니는 줄 알았어요"

조석희가 수영장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뽀순잉을 잡으러 얼굴이 새빨개져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상원의 얼굴은 한층 더 붉어졌다. 

"....고마워 도와줘서"

상원의 인사에 조석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you`re welcome 이라고 대답했다. 

"빚진 건 갚으면 되죠 수업 끝나고 봐요"

조석희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상원은 그 뒷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수영선생이 어항을 들고 있는 상원에게 문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나가! 그 망할 물고기 들고 나가!"

"죄송합니다 바로 나갈게요"

상원이 허둥지둥 어항을 끌어안고 문으로 걸어갔다. 물속에서 놀고 있던 승완이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항의했다. 

"뭐예요 상원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리고 뽀순 잉이 해를 끼친 것도 아니잖아요"

"맞아 뽀순잉이 무슨 해를 끼쳤다고 , 참나, 직접적인 해를 끼쳤어요? 직접적인 해를 끼쳤냐고!"

"맞아, 상원이가 무슨 잘못이야. 우리 뽀순 잉이 뭘 잘못했어!"

"수영 샘. 너무 빡세게 구는 거 아니에요?"

6반 아이들은 입을 모아 상원을 퇴장시킨 수영선생을 비난했다.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영선생 표정이 점점 싸늘하게 변하다니 떨리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니들 당장 나가!!!!!"

6반 학생들이 무슨 일인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수영선생이 득음할 기세로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퇴장이야! 니네는 다시는 수영장 들어올 생각하지마!!!"

수영장 끝까지 분노에 찬 수영선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6반 학생들이 몸을 담근 물에는 거무죽죽한 썬텐 크림이 둥둥 퍼져나갔다. 

수영장 썬텐크림 사건으로 3학년 6반 학생들은 한달간 수영장 출입을 금지당했다. 모두들 세화여고 다이빙 부를 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지만 단 한사람만은 조석희의 수영복 차림을 볼 수 없음을

슬퍼했다. 

상원의 상실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대진은 자기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자책했다. 상원은 몇번이나 괜찮다고 웃어보였지만 대진은 너무나 쓸쓸해 보이는 친구의 미소에 가슴이 더 아플 뿐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찾아왔다. 등교를 하던 도중 누군가 대진을 불러 작은 쪽지를 건네준 것이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대진은 쪽지를 받자마자 전화를 걸어 그 여자가

도를 아십니까 아닌지 다단계 판매업자는 아닌지 확인했다 세화여고의 다이빙 부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다시한 번 놀랍게도 친구들과 함께 미팅을 하고 싶으니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말했다. 

대진이 교실로 헐레벌떡 달려가 이 소식을 처음 전했을때 그를 믿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유일하게 그를 믿어줄 상원은 아침 일찍 공부를 한다고 도서관에 간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대진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잡지를 아이들 앞에서 태워보임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우아아 진짜? 대박이다. 말도 안돼"

"걔들이 왜 우리한테 만나자고 해? 미친거 아냐?"

"진짜라니까 아 시발 내 유키코를 태워보였는데도 아직도 못 믿는거야?"

흥분한 대진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아니 네 말은 믿겠는데 걔네들 전의를 모르겠다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거 아냐?"

오토바이 신간 잡지를 읽던 동석이 거침없이 화제의 정곡을 찔렀다. 그러자 대진이 헤헤, 하고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걔들이 아주 약간 조금, 쪼오금 잘못 알고 있는게 있더라고"

"뭔데?"

"...우리가 다른 반인줄 알아"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s반이나  k반인줄 알더라고"

그날  s반과  k반 애들과 합동 수업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 그래서 뭐라고 했어? 우리반 속여서 대답했냐?"

"아니 내가 그런 놈으로 보이냐? 내가 우리 6반을 부끄러워하는 그런 놈으로 보여?"

"어"

동석이 책장을 넘기며 갈끔하게 대답했다. 

"이 존만한 꼬맹이가"

동석이 읽던 잡지를 내려놓았다. 동석의 키는 금구였다. 대진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나 그런 놈 아니야 속인 적 없다고"

"그럼 6반이라고 그랬어?"

흥분한 한명이 물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뭐? 다른 방식이라니?"

"그냥 영어로 말해줬어"

"영어? sex반이라고 말한 건 아니지?"

윤대진 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짜져, 씹새야 six잖아.  6은 six!"

"헐 나는 걔들이 너한테 쪽지 준 것보다 니가 영어로 6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김동석이 영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6반이나 식스반이나 그게 그건데 걔들이 뭐라고 안해?"

"아하하 뭐 그것이...."

대진이 또 머리를 긁적거렸다. 

"뭔데 뜸들이지 말고 사실대로 불어"

"그냥 줄여서 말해줬지. 한글자로"

"....뭐라고"

"S"

"에라이 이 사기꾼아!"

"그게 뻥친게 아니면 뭐야! 이 미친놈아"

다들 대진을 비난하기에 바빴다. 

"뭘! 우리도 s반이잖아 영어 머리글자로 s반 맞잖아!"

"이 개또라뱅아. 니가 가서 입 열면 5초 만에 그 s가 그 s가 아닌거 들킬 거다."

"아이.씹. 상원이 있잖아. 상원이 데려가서 지식 쪽 질문은 걔한테 답하라 하면 되지. 난 남자다운 모습만 보여주면 된다고!"

대진 답지 않은 그럴듯한 해결책이었다. 갑자기 자고 있던 한승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우리상원이를 어디로 데려간다고?"

"한승완, 상원이도 고등학교 시절 추억하나 정돈 있어야지. 넌 걔가 공부만 하다가 그렇게 시시하게 학교를 졸업했으면 좋겠냐? 공부만 하는 시시한 인간으로 상원이가 자랐음 좋겠어?"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대진을 보며 동석은 쟤도 궁지에 몰리면 머리를 쓰는 구나 하고 감탄했다. 

"무...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상원이 한테도 기회를 줘야 할거 아니야. 그놈도 여자를 한 번 만나보고 그래야 여자보는 눈도 길러지지. 대학가서 상원이가 어디 꽃뱀한테 걸려봐. 그때는 네가 옆에 있지도 못하는데 

어쩔거야"

상원이가 꽃뱀한테 걸리면 그 꽃뱀 가죽을 벗겨서 먹어버리겠다고 공연한 승완의 얼굴이 점점 파리해졌다. 고등학교 때야 같은 공간에 있으니 얼마든지 커버가 가능하겠지만 대학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잘 생각해라 한승완"

똑 부러지는 대진의 발언에 승완이 고민에 빠져 들었다.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그때까지 가만히 입 다물고 있던 동석이었다. 

"난 찬성이야"

"뭐? 상원이 미팅에 내보내는 걸 찬성한다고?"

승완만큼은 아니지만 상원에 대한 보호벽이 누구보다 높은 동석이었다. 그런 그가 찬성에 표를 던지자 아이들이 놀라서 술렁거렸다. 

"걔도 다른 사람을 좀 만나봐야해"

대진과 또 다른 의미에서 상원에게 경험이 필요하다고 동석은 생각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엄한 아버지도 여론이 거세지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야 근데 상원이가 미팅나가려고 할까? 걔 그런거 별로 관심 없잖아"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자 대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씩, 웃어보였따. 

"그건 내가 다 생각해둔 게 있지 한승완 너만 마음을 넓게 쓰면 된다고"

팔짱을 끼고 서서 생각에 잠긴 한승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다.  멤버는 4명 싸움짱 얼굴마담인 나와 일등공신인 윤대진, 통역사 이상원 나머지 한명은 이 공을 획득한 사람이 되는거다.  시작"

한승완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내 공중에 집어 던졌다. 

6반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을 흐믓하게 지켜보던 한승완이 자신의 친구인 동석에게 다가와 등 뒤로 몰래 뭔갈를 건넸다. 눈썰미가 

좋은 김동석은 방금 전 승완이 공중에 던진것이 공이 아닌 동그랗게 구긴 종이임을 알고 있었기에 의자에 태연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미팅의 네번째 멤버는 정해졌다. 

"저번에 갔는데 또 가?"

"너 노래 연습해야 한다면서 일주일에 한번은 가줘야 실력이 늘지"

"그런가?"

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동석이 맞장구를 쳤다.

" 야 너 연습많이 필요하겠더라, 노래라는 것은 꾸준히 연습해야 해"

"알겠어 연습 열심히 해야겠다. "

상원이 노래 연습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는 것을 보며 세사람은 눈빛으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주말에도 공부 해야 한다는 상원을 꼬셔 낸것은 대진이었다. 

물론 미팅을 한다는 얘기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먼저 얘기를 하면 상원이 그런것에 관심없다고 안 나올게 분명했지만 막상 미팅에 참가하게 되면 그의 성격상

자리를 뜨지 못할 거라는 게 동석의 분석이었다 대진은 이번 미팅에 동석이  평소답지 않게 상원을 끌여들이는 것이 의아했지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노래방에 가지 전에 배를 채우자고 들어간 피자집에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맞은 편에 앉자 상원의 표정은 단박에 굳어졌다.  친구들을 살피니 모두들 싱글벙글

웃으며 저마다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상원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다. 

"어 그때 잉어"

여학생 중 한명이 상원을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그때 잉어 잘 데리고 가셨어요?"

"아..... 네 잘데리고 들어갔어요"

여자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상원의 얼굴이 뜨근하게 달아올랐다. 승완은 그 모습을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s반이면 공부 엄청 잘하시겠어요"

"네? s......"

테이블 밑으로 대진이 상원의 발을 걷어차 버렸다.

"얘 공부 진짜 잘해요 모의고사 보면 전국 50위 안에 꼬박꼬박 든다니까요 그치?"

대진이 상원을 노려보며 잇새로 물었다. 

"....아 그렇긴 하지만"

"아하하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화창한 주말에 공부얘기를 하고 있을까?"

대진이 테이블에 턱을 괴고 발랄한 목소리로 묻자 여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원은 자신의 발 위에 얹혀 있는 친구들의 발이 오늘 여기서 더이상 진실

토론을 하지 않길 원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메뉴판에서 피자를 골라 주문을 했다. 

상원은 이제는 정말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했다.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요?"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이 상원에게 물었다. 

"예 물어보세요"

"그 잉어 잡아준 분이요 친구예요?"

"후배예요 2학년"

"친해요?"

여기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상원은 고민하던 찰나 눈치없이 윤대진이 끼어들었다. 

"존나 친해요 완전 절친"

"아니 절친은 아닌데...."

상원이 대진을 말려보려 했지만 이미 그녀들의 머리에는 이상원= 잉어남 절친 으로 박혀버린 후였다. 

"그분 이름이 뭐예요?"

"조석희요"

"이름도 너무 멋있다. 키도 대빵 크던데 혹시 모델 같은 거 아니에요?"

"아니요 석희가 모델같이 생기긴 했지만 모델은 아니에요"

"그분 여자친구는 있어요?"

"아마..... 없는 거 같은데"

상원은 그가 누군가를 고정적으로 만나는 일이 없음을 떠올렸다. 게다가 요즘 학교 앞으로 여자가 찾아오거나 여자향수를 뭍혀 오는 일도 없었다. 

..... 이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플정도로 행복하다니  석희를 이렇게 좋아하는 구나.

"친하시면 혹시 오늘 여기에 같이 와서 놀자고 하면 안되요?" 

단발머리 여학생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상원은 아차 싶어서 고개를 너저었다. 

"아니요 그건 좀..."

"걔 학생회 후배라며 전화번호 모르냐?"

한승완이 쓸데없는 기억력을 발휘했다. 

"학생회 임원이세요?"

희재고 학생회는 나중에 서로 연줄이 되어 준다는 말이 돌 정도로 엘리트 집단이었다. 

"저는 그냥 서기예요 석희는.... 학생회이긴 한데."

상원은 아직도 조석희가 학생회에서 맡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 부르세요 전화번호 모르세요?"

"...알지만"

이런 상황에서 조차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상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왜? 그냥 불러  너 그놈하고 친하잖아"

동석이 사이다를 쭉쭉 마시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이상황에서 자신의 유일한 아군인 동석이 마저 저런 소리를 하니 상원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성격 더러운 조석희가 자신이 부른다고 나올 인물도 아니었지만 그에게 호감을 가진 여자들이 있는 그자리에 그를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불러주세요 네? 저 그 잉어 오빠 가까이서 한번만 보고 싶어요 네? 오빠 한번만"

"......어 그게..."

"조석희 석희.... 여기있다! 찾았다"

어느새 상원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빼어 전화번호부 목록을  뒤지던 대진이 소리쳤다. 상원이 황급히 휴대폰을 낚아챘다. 

"알았어 부를께..... 그런데 안 나올 수도 있어요"

여학생들이 상관없어요 하며 꺄르르 웃었다 상원은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안나올거야, 내가 아는 조석희라면 나올리가 없어 그런 믿음이 상원이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버튼을 누르게 했다.

"......"

말도 안돼, 거짓말.

상원은 멀리서 걸어오는 장신의 남자를 보며 절망했다. 여자애들은 환상의 잉어남이 나타나자 소리죽인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다. 분위기에 편승해 조석희를 부르라고 

부추겼던 대진과 승완은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동석만은 팔짱으르 끼고 냉정한 얼굴로 추이를 지켜보았다.

"오빠 저 석희 오빠한테 소개시켜 주세요"

아까 전의 단발머리 여학생이ㅣ 상원의 팔을 잡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당황한 상원이 눈만 깜빡거리며 여학생과 이쪽으로 걸어오는 조석희를 번갈아 보았다. 

조석희가 상원의 앞에 멈추었다. 

"왜 불렀어"

다짜고짜 던져진 반말에 대진은 역시 양키라 다르군 하고 생각했고, 승완은 둘이 정말 친하군 하고 감탄했으며 동석은 저 개새끼가 하고 발끈했다. 

"..... 안녕 석희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 앞에 여전히 단발머리 여학생이 눈을 빛내며 그의 팔을 붙잡고 서 있었다. 조석희가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아 챘다.

".....에?"

갑작스런 스킨쉽에 놀란 여학생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봤을 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놀랄 만큼 잘 생긴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who do you think you are?"

갑작스런 영어에 그녀들 뿐만 아니라 상원을 제외한 남자들도 당황했다. 

"후? 후면 제가 누구냐고요?"

완벽하게 오역한 그녀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문장의 뜻을 알고 있는 상원은 침중한 표정이 되었다. 

-네 주제파악 좀 하지 그래?

조석희는 정확히 저렇게 말하고 있었다. 

"선배"

그의 목소리에 넌지시 전해지는 날카로움에 상원은 몸을 흠칫 떨었다. 조석희가 상원의 주변에 있던 여자들을 스윽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 I think your taste is below the level, however do you force me suit your style?"

-선배 취향 수준이하군요 설마 그 취향을 저한테 강요하시는 건가요?

"......"

상원을 제외한 모두들 방금 뭐가 지나갔냐는 표정을 지었다 상원은 그순간 처음으로 친구들이 저질스런 영어 실력에 감사했다. 조석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영어에 그녀들은 조석희의 발음이 영화배우 같다고 좋아했다. 

자신의 비아냥거림조차 이해못하는 여자들을 보는 조석희의 눈에 경멸이 스치고 지나갔다. 영어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표정을 읽는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동석은

방금 전 그말이 결코 좋은 뜻이 아님을 감지했다. 

"원래 외국에서 계시다 오셨어요? 한국말 잘 못하세요? can you speak 한국말?"

단발머리 학생이 활짝 웃으며 조석희에게 물었다 조석희는 대답하지 않고 상원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선배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조석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의 갑작스런 퇴장에도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빚어졌다. 생긴것도 잘생겼는데 영어도 잘하고 한국어 발음도 너무 섹시하다는 것이 그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나..... 미안 먼저 가볼게"

상원이 친구들에게 말하고 여학생들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달려가 버렷다. 

"어? 이상원? 인마!"

등 뒤에서 친구들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상원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조석희를 저대로 보낸다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상원은 앞서 걷고 있는 조석희의뒷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어 그를 불러 세웠다.

"석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도 남았을 거리임에도 조석희는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상원은 온힘을 다해 달려 그를 따라 잡았다. 

"석희야 조석희"

"뭐야 거기서 노는거 아니었어요?"

조석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평연한 어조로 묻는다.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냉정함에 상원은 덜컥 겁이 났다. 

"아니야 나도 모르고 나간 거야. 정말이야 애들이 노래방가자고 불러서 나간건데.... 미안해 기분 나빴다면 아니 기분 나빴을 텐데 사과할께"

상원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 정말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조석희는 싸늘한 시선으로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는 이상원이 무슨 일로 주말 오후에 자기에게 전화를 걸었나 싶어 핸드폰을 열었을때까지는 그런대로 기분이 좋았다. 

바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석희야 저기. 하고 말문을 여는 순간에도 조석희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더듬더듬 이어지는 상원의 용건을 듣는 순간  그는 들고 있던 유리잔을 벽에

던졌다.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는지 전화 너머에서 무슨 일이냐고 하는 상원에게 조석희는 거기가 어디쯤이냐고 묻고 대답을 들은 후 통화를 끝냈다. 

"선배 호모 아니에요?"

"어?"

갑작스런 질문에 상원은 눈을 크게 뜨고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남자도 모자라 이제는 여자까지 만나시는군"

"아니야.. 정말"

상원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조석희는 그의 손을 잡아 눈에 보이는 가까운 호텔로 끌고 들어갔다. 

"서, 석희야"

"가만히 있어 로비에서 먼저 당하고 싶지 않으면"

조석희는 호텔 리셉션으로 가서 영어 체크인을 하고 키를 받아왔다. 미성년자끼리는 호텔 체크인이 어려웠지만 외국인을 가장하면 그게 좀 더 쉽다는 이점을 이요한 것이다. 여자랑 있을때는 굳이

영어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외모였지만 상원이 앳되 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런데 오면 안되잖아"

조석희에게 질질 끌려 가면서도 사원은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말렸다. 조석희는 상원을 엘리베이터 안에 밀어넣고 9층의 버튼을 눌렀다. 

"내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석희가 짧게 명령했다. 상원은 부들부들 떨면서 벽에 고개를 흔들었다. 조석희는 기다리지 않고 상원의 뒷덜미를 잡아 끌고갔다. 문을 열고 들어갈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손으로 상원을 침대에 던져버린 후 조석희가 입을 열었다.

"벗어"

"...석희야"

"벗으라고 다시한번 말해줘요? 옷 벗으라고 했잖아!"

놀란 상원이 딸꾹질을 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으며 조석희를 훔쳐 보았다. 그는 여느 때와 달리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차갑고 사막하고 누구보다 아름다운,

티를 벗어 침대 위에 놓고 상원은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다 벗어요 팬티 한장 남기지 말고"

"...."

상원은 자꾸 딸꾹질이 나와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다른 한 손으로 바지의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손은 떨리고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마음먹은 대로 바지가 벗겨지지 않았다. 

침대 맡에서 그걸 지켜 보던 조석희가 초조하게 혀를 차며, 상원의 손을 끌어 당겼다. 

"옷도 하나 제대로 못 벗어? 선배는 대체 할 줄 아는게 뭐야?"

"...미안해"

"그놈의 미안해 소리 좀 집어치워 질리니까"

상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질린다는 한마디에 벌써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조석희가 상원의 턱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 올리게 만들고, 낮고 사나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가지는 대로 끌려가서 모르는 년이 손을 대는 대도 가만히 있어요? 내가 말했지 다른 연놈들 냄새 묻혀오지 말라고"

조석희가 유독 자신의 체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상원도 모르는게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점점 심하게 간섭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손 집고 엎드려요"

조석희가 침대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상원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고 있었기에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따. 조석희는 상원의 어깨를 움켜 잡아 억지로 몸을 숙이게 만들고 다리를 걸어

바닥에 쓰러트렸다. 

바지와 팬티를 벗겨내자 하얗고 동그스름한 엉덩이가 드러났다. 그 사이로 보이는 조그만 구멍이 얼마나 탐욕스럽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지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랫도리에 빠듯하게 피가 몰렸다. 

조석희는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끝이 뿌옇게 젖기 시작한 성기를 손에 쥐고 상원이 엉덩이 안쪽에 가져다 비볐다. 

상원은 입술을 깨물며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선배 내 좆이 닿기만 해도 흥분되죠?"

"....."

"구멍에 넣어주길 바라고 있어요? 이렇게 문지르기만 해도 ...봐"

상원의 다리사이에서 힘을 받아 고개를 들기 시작한 성기를 보며 조석희가 짧은 웃음소리를 낸다. 상원은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 눈물이 핑 돌아 침대 시트에 고개를 묻었다.

"선배 내가 좋아요?"

"....."

"말해봐 선배 묻고 있잖아"

"좋아..... 좋아해 석희야.. 네가 좋아.. 너무너무"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진심어린 말을 드문드문 늘어놓았다. 조석희가 손바닥으로 상원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오늘 그나마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군요"

"...석희야"

"넣어 줄테니까 입으로 적셔요"

조석희의 말에 상원은 홀린 사람처럼 몸을 돌리고 앉아 다리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몇 번을 해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상원은 입안 가득 들어오는 살덩이를 혀와 입술을 사용해 열심히 빨았다. 

단단하고 커다란 성기의 끝이 목구멍을 자극해 저절로 침이 흘러 조석희의 음모를 적셨다.  상원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쥐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석희가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한 느낌에 침을 삼켰다. 

"선배..... 진짜 못하는거 알아요?"

"....미안"

상원이 손으로 입술을 닦으며 사과를 건넸다. 몇 번을 시켜도 서툴렀다. 아이처럼 서투르고 솔직하고 진솔한 사람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조석희는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따. 

조석희는 상원의 몸을 뒤집어 그 위에 올라타고 다리 사이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삽입에 상원이 으, 하고 눈썹을 지푸렸지만 조석희는 집어넣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좁은 구멍안에 끝까지 밀어 넣은 후에야 그는 하아. 하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조석희는 솜처럼 하얀 상원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달콤한 향취를 맛보았다.  그런데 상원이 몸을 떨면서 작은 소리로 울음을 주워 삼키고 있었다. 

"왜 울어요"

".....무서워서"

"아직도 넣는게 무서워요?"

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마다 바닥에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조석희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럼 뭐가 무서워?"

"네가..."

"뭐?"

"네가 날.... 질려 할까봐 나한테 질려할까봐 무서워"

상원의 말을 듣고 난 조석희가 하, 하고 기가막히단 소리를 냈다. 

"공부를 하는 머리는 있어도 생각하는 머리는 없나보죠?"

"...어?"

"당신한테 질릴거였으면 이미 예전에 질렸어. 지금도 이렇게 세우고 남자 구멍안에 넣어줬는데 대체 뭘 더 바래"

"......지마."

상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미워하지마 석희야"

그 말이 또 뭐 대수라고 얼굴까지 붉혀가며 말하는 건지. 그 나이 먹도록 대체 뭘 배우고 자란 건가 싶었다. 

조석희는 상원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알았어요 하고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선배나 헛짓거리하고 다니지 마요 진짜 성가셔서"

"석희야....."

상원은 갑자기 안쪽이 단번에 빠듯하게 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안에 있던 살덩이가 이전보다 훨씬 부풀어 있었다. 

"선배가 부르니까 아래가 확 당기는데"

조석희가 욕망에 갈라진 입술을 적히며 말을 이었다. 

"오늘 선배가 부른 거니까 ..... 각오하세요"

"아.....!"

상원은 왈칵 흔들리는 아래의 감각에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조석희가 빠르게 허리를 움직여 가며 상원의 몸을 흔들었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감겨드는 내벽의 느낌이 조석희의 욕망을 졸랐다.

"하아..... 선배 이런 모습.... 그 인간들한테 다 보여줘야 하는데.."

"응... 하아...응 응! 석희.... 앗."

느끼는 상원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 몸을 돌리게 만들어 그는 다시 허리를 추어올렸다. 

"음란하게 다리벌리고 .... 어디 더 졸라봐"

"....읏.. 읏 아아!"

상원이 힘껏 조석희의 어깨를 쥐고 길고 가느다란 다리로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상원의 흐트러진 숨소리를 내뱉을 때마다 조석희는 힘껏 허리를 움직여 단단한 성기를 찔러 넣었다.  호텔 방안에 

찰지게 질척거리는 교접소리와 짐승의 울음소리가 난잡하게 뒤엉켰다. 상원이 먼저 몸을 떨면서 조석희의 손에 토정했다. 절정으로 인한 몸의 수축이 뒤이어 조석희의 사정을 이끌었다. 

몸안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뜨끈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으며 좋아한다고 네가 너무 좋다고 말했다. 조석희는 상원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한참을 그렇게 두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조석희였다. 

"등 안 아파요?"

"....괜찮아"

카펫에 등이 쏠려 좀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참을만 했다. 조석희가 상원을 일으켜 세워 다시 침대에 눕게 했다. 호텔 방에 처음 들어와 본 상원은 그제야 민망함을 느끼고 시트로 몸을 휘감았다. 

"설마 추워요?"

"그냥.... 조금"

조석희가 상원의 등 뒤로 다가가 그를 시트째 끌어안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그의 자상한 행동에 상원은 놀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오늘은 편히 자겠군요 침대에서"

"..... 응 잘됐다."

둘은 밖에서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도서관에서만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상원은 이런 조석희의 모습이 더욱 낯설었다. 호텔에서는 누구에게든 이렇게 자상하게 해주는 건가 하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하고 가슴이

아팠다. 

"선배 노래 불러봐요"

조석희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었다. 

"뭐?"

"선배가 좋아한다는 노래 연습했다며"

상원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져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연습 거의 못했어 진짜 못 불러"

"괜찮아요 한번 불러봐 나 밖에 안 듣잖아"

상원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조석희가 다시한번 말했다.  상원은 어차피 너한테 불러주려고 연습한건데 하는 말은 가슴에 꼭꼭 숨기고 만다. 

"남의 주말 망친 대가는 해줘야지"

기분이 풀렸는지 그렇게 말하는 어조에 짖궂은 웃음기가 묻어났다. 

"알겠어"

상원이 그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몇 백번을 몇 천 번을 들어 외운 노래였다. 하지만 그 음정을 목소리로 옮기려하니 그렇게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상원은 머리속으로 조용한 피아노 선율이 들어간 전주를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떨려 수줍게 넌 내게 고백했지  내리는 벚꽃지나 겨울이 올때까지  언제나 너와 같이 있고 싶어]

소년이 첫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마 비 오던 여름날 밤이 었을꺼야  추워 입술이 파랗게 질린 나 그리고 그대   내 손을 잡으며 입술을 맞추고

 떨리던 나를 꼭 안아주던 그대  이제 와 솔직히 입맞춤보다 더 떨리던 나를 안아주던 그대의 품이 더 좋았어]

처음 서로를 끌어안게 된 비오던 날과 처음으로 입을 맞추게 되었던 날이 떠올랐다 조석희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원에게는 평생에 가도 잊혀지지 않을 날들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대를  잊을 수 있을까 우리 헤어지게 된 날 부터 내가 여기 살았었고, 그대가 네게 살았었던 날들

나 솔직히 무섭다 그대 없는 생활 어떻게 버틸지  함께한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생각할 수록 자꾸만 미안했던 일이 떠 올라]

지금은 이렇게 행복하지만 나중에 조석희가 자신에게 질리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벌써 가슴이 먹먹하고 무서웠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 두려움은 점차 커져갔다 

[나 솔직히 무섭다 어제처럼 그대 있을 것만 같은데  하루에도 몇번 그대 닮은 뒷 모습에   가슴 주저앉은 이런 나를 어떻게 해야 하니]

여기까지 부른 상원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끝, 하고 외쳤다. 웃을 거라고 생각했던 조석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연습하면 잘 할 수 있었을텐데"

"잘했어요 생각보다는"

그말에 상원이 곱다랗게 웃었다. 맑고 결곡한 눈동자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깃든채 빛났다. 

"나중에 연습해서 2절까지 불러줄게"

"그러세요"

별스럽지 않은 평범한 대답에 상원은 눈물이 차올랐다.  이사람이 너무 좋았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좋았다. 자상하게 대해주니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욕심이 생겼다. 

상원은 기도했다. 나중에 지옥에 가도 좋으니 이 사람이 한번이라도 자신을 바라보게 해달라고 늘 불운했으니 이번만큼은 자신에게 행운을 달라고,

상원은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다. 

"선배 나 조금만 잘게요"

어깨에 이마를 댄 체 조석희가 중얼거렸다. 상원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에 숨소리가 잦아질 때까지 상원은 움직이지 않고 마음으로 기도를 반복했다. 

이 행운을 제발 빼앗아 가지 말아주세요 하나님.

몇 번이고 같은 기돌르 되새기며 상원은 눈을 감았다. 

상원은 행복하면 오히려 무서워지는 기분이 무엇인지 요즘 맛보고 있었다. 조석희가 언뜻언뜻 보여주는 다정함이 몸에 독처럼 쌓여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중에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중금속이 든 먹이를 먹는 참치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후우....."

상원은 우연히 마주친 조석희가 자신에게 건네준 캔 커피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이렇게 잘 해주면 착각하는데, 혹시 조석희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

상원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입을 손으로 막았다. 머릿속으로 떠올린 말이었지만 누가 들었을까 두려운 것이다. 상원은 그 말을 다시 자신의 안으로 삼켜버렸다. 

절대 입 밖에 내어선 안 될 소망이었다.  너무나 소중하고 간절해서 입밖에 내는 순간 색이 바래고 깨어질까 두려운 마음 이었다. 

상원은 캔 커피를 주머니에 넣으며 수줍게 웃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상원을 부르며 교무실로 가보라는 말을 전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상원은

교무실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담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감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상원은 담임이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을 딱 한번 본 적이 있다. 

1학년 초에 다른 학생들의 반대에 의해 반이동이 무산되었을 때 정확히 저것보다 덜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데.

"부르셨어요"

상원이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담임이 옆에 있던 의자를 빼주었다. 

그리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네 성적은 너무 좋다. 모의고사 성적도 상위권이고 행실이 바르고 학생회 활동까지 했으니 흠잡을 곳도 없다. 다만......

상원은 자신의 담임 선생님이 6반이라는 결점을 중요한 시험때마다 따르는 불운에대해  얼마한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 설명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자 담임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널 추천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네 성적이라면 연대는 물론이고 서울대까지 가능하겠지만...."

올해 발표된 입시전형에 따르면 상원이 가고자 하는 학교의 과는 학교장 추천 인원이 제한되어 있었다. 상원은 자신이 학교장 추천을 받아 그 기회가 한 장 사라져 버리는 것을

누군가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저 먼저 일어설게요"

"그래... 선생님 마음은 그게 아닌 거 알지?"

상원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고개를 숙인 후 교무실을 나왔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운명은 반격해온다.  그냥 정시로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울컥하고 서러움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를 점쳐 놓은 이 상황을 반박할 수 없음이 서럽고 답답했다. 

교실까지 걸어오는 길이 왜 이리 멀게 느껴지고 발걸음이 무거운지, 교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이 어느 때와 다름없이 정신없이 떠들며 놀고 있었다.  상원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표정이 왜그래"

역시 이번에도 동석이 가장 먼저 눈치를 채고 물었다.  표정이 그렇게 이상한가 싶어 상원은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아, 그냥 수시 원서 못쓰게 됐어"

"뭐? 수시원서를 못쓰게 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괜찮아 정시 쓰면되지 뭐, 그게 그거야"

웃어보이려고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상원은 가방에서 문제집을 꺼내 책상위에 펼쳤다. 

"야 너 똑바로 말 좀 해봐. 그런 식으로 대충 넘어가지 마라고"

동석이 상원의 팔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몸을 돌리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상원이 생각지도 못하게 버럭 소리쳤다. 

"내가 우리반이고 재수가 없어서 안된대. 그래서 못 써준대. 됐어?"

순간 6반 교실 안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끄럽게 떠들며 장난을 치던 아이들이 일제히 상원과 동석을 바라보았다.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가버렸다. 

"방금 뭐냐...."

대진이 놀라서 상원이 나간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시발!"

동석이 책상을 발로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자고 있던 한승완도 몸을 일으켜 동석에게 다가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저 자식 학교장 추천으로 수시 쓴다고 했는데 안된다고 했나봐"

"에? 상원이 우리학교 문과에서도 일이등 거의 안 놓치잖아 쟤가 안되면 누가 돼?"

"그걸 내가 아냐. 우리반이고 재수가 없어서 그 잘난 추천장 하나 못써준단다."

"시발 존나 개좆같네"

대진이 교실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게 말이 되냐. 반이랑 재수 없는게 추천장 받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뭐 이따위 학교가 다 있어?"

"상원이 기분 진짜 드럽겠다."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한마디가 던져졌다. 침중한 표정으로 팔짱을끼고 서 있던 한승완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녀석을 한 번 돕지도 못하고 끝까지 방해만 되는구나"

그이 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침묵했다. 

교실로 돌아온 상원은 가장 먼저 동석에게 미안하다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소리를 질러 미안하다고 기분이 안 좋아서 자신이 실수했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다. 어디서 혼자 울다 왔는지

눈이 부어 있는 상원을 보고 동석은 괜찮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문제집이나 풀라고 대답했다. 

상원은 조용히 앉아 이어폰을 끼고 공부를 시작했다. 교실안 분위기가 싸늘했다. 누구도 시끄럽게 떠들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상원은 자신때문에 교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미안해져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찾았다!!!"

교실 앞문이 열리고 흥분한 대진이 손에 뭔가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찾았다! 찾았어, 내가 드디어 찾았어!"

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등신, 동석은 대진을 사납게 노려보며 닥치고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눈짓했다. 그러나 대진은 결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이것봐, 이것 보라고 내가 뭘 찾았는지 좀 보라고"

대진이 뭔가 하고 고개를 들어 포스트 내용을 확인했다.  한달 전부터 붙어 있던 퀴즈 프로그램 참가에 관련된 포스터였다. 모두의 표정이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니가 쓰레기를 찾았다. 됐냐? 가서 앉아라"

"쓰레기가 아니라니까. 잘 봐 여기 우승한 학생과 우승한 반의 상품"

대진이 포스터 아래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글씨를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두꺼운 대진의 손가락에 가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자 동석이 네가 읽으라고 말했다. 

"한글은 읽을 수 있지?"

"죽고 싶냐. 자 여기 뭐라고 써 있느냐면, 끝까지 가장 많은 수의 학생이 남은 반과 우승학생에게는 푸짐한 상품과...."

"병신아 푸짐한 상품을 받아서 어디다 쓰려고!"

"아! 좀 ! 끝까지 들어봐! 아 시발 , 어디까지 읽었더라.  그래 여기 푸짐한 상품과 성적우수자 전형으로 원하는 대학에 원서를 쓸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한 반의

참여자는 10명으로 제한한다."

대진이 읽기를 마치자 6반 아이들 사이에는 불처럼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정말? 그러면 상원이도 원서 쓸 수 있는거 아니야?"

"그러게, 푸짐한 상품도 준다니.... 푸짐한 상품이 뭘까?"

"푸짐하다니까 아주 푸짐하겠지"

여기저기서 원서와 상품에 관한 이야기로 행복한 쑥덕거림이 시작되었다. 

"잘들 하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부터 드링킹하고"

동석이 시니컬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 퀴즈대회는 우리반만 나가냐? 날고 긴다는 다른 반 놈들은 그날 단체로 죽어?"

"죽이자"

대진이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어폰을 끼고 공부를 하고 있던 상원은 주변이 소란스러워 진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고개를 들고 상황을 살폈다. 

"죽여버리면 되잖아 교실 문에 못질을 해서 못 나오게 하든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윤대진"

"왜 말이 안돼? 우리 반이 우승하면 되잖아"

대진이 게시판에서 찾아낸 포스터를 들고 끈질기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우리반이 우승하지 못할 거라는 보장 있어? 그게 바로 평경이야"

".....편견"

"아무튼 편견이야"

털컥 책상이 움직이는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한승완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떴다.  기지개를 켜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는 어슬렁 어슬렁 교단 위로 걸어 나왔다. 

"상위 10% 될때까지 버티는 사람 졸업때까지 화장실 청소 면제 5%생존자 구명여고 소개팅 5회 티켓 , 우승하면 졸업하고 나서 뽀순이들 집으로 데려갈 수 있는 친권 부여. 참가할 사람."

반장 승완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 안에 있던 학생들의 손이 일제히 올라갔다. 

"상원선배!"

반갑게 손을 흔들고 다가오는 김이경을 발견한 상원은 얼른 신발끈을 묶는 척하고 허리를 숙였지만 .... 실내화였다. 상원은 손으로 실내화를 두어번 털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요즘 선배 얼굴 뵙기가 힘드네요"

조석희가 김이경 금지령을 내린 후 상원은 그를 복도에서나 학교 어디에서 발견하면 무조건 숨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조석희는 그 믿지 못할 뱀같은 녀석하고는 최대한 

얽히지도 마주치지도 말라고 몇 번이나 상원을다그쳤다. 

"그러게 하하 나도 바쁘고 너도 바빠서 그런가보다"

"전 안 바쁜데"

"학생회장이 안 바쁘면 누가 바쁘겠어"

김이경이 웃으며 상원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그런데 그건 뭐예요?"

"응? 아 참가 신청서"

"무슨 참가 신청서요?"

'퀴즈대회. 우리 반 애들도 참가한다고 그래서"

김이경의 웃음이 잠깐 멈칫한다. 이 얘기를 할때마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직접 목격한 상원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음, 3학년인데 그런 것도 참가하시네요"

"여기 참가해서 우승하면 성적우수자 자격으로 원하는 대학에 원서 쓸수 있다고 그래서 하하 난 괜찮은데 애들이 나가자고 그러네"

상원이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수시나 정시나 어차피 시험을 본 결과로 정해지는 것인데 괜히 오버를 해서 친구들이 신경쓰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그때는 담임 선생님마저 자신이

실패를 점치고 있다는 생각에 날카롭게 반응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하면 어쩌면 그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중요한 시험마다 사고가 나고 몸이 아프고 시험에 늦는 학생에게 누가 귀중한 학교장 추천 원서를 낭비하고 싶겠는가. 

지금은 퀴즈 대회에서 우승을 해 상품을 거머쥐겠다는 생각보다는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였다. 

"그런 것도 있어요?"

김이경이 놀란 듯 되물었다. 

"나도 몰랐는데  대진이가 찾아왔어, 우리반 애들 다들 신났다니까 하하 아무튼 나 가볼게 이거 내고 잠깐 어디 가야할 곳이 잇어서"

조석희에게 호출을 받은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참가 신청서를 내고 상원은 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김이경이 알겠어요 하고 길을 터주었다. 

상원은 눈으로 인사를 하고 복도를 걸었다 교무실로 가서 신청서를 내고 동관 건물로 가는 통로로 들어섰을 때 등 뒤로 다가온 조석희가 상원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교복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에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

깜짝 놀란 상원이 손바닥으로 목을 가리고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누, 누가 보면 어쩌려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상원이 말했다. 조석희는 느긋하게 앞서 걸을 뿐이었다. 상원은 붉어진 얼굴을 하고 그 뒤를 따랐다.  

"퀴즈대회 나간다면서요 선배는 별거 다하네"

어디서 얘기를 주워 들은 모양이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석희가 나간 김에 우승해요 하고 말을 건넸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한마디에 상원은 천군마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우승에 대한 욕심이 생기려 한다. 

도서관안으로 들어가자 조석희가 옷 벗어요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응? 지금......?"

"오늘 저녁에 누굴 좀 만나러 가야 해서요"

"....누구?"

물어놓고도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 상원은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아버지 오신다고 해서요"

상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란 생각에 조석희는 물끄러미 상원을 바라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요 별로"

조석희가 메고 있던 넥타이를 끌러 의자 위에 걸쳐두었다. 상원이 샤워하러가겠다고 햇지만 저지당했다. 

"시간 없어 1분도 아까워요 당분간 못 만나는데"

"땀 냄새 날텐데"

"선배 냄새라면 상관없어요"

조석희가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체취만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요즘은 혹시 하는 기대를 갖게 된다. 바로 방금 전과 같은 발언 때문이었다. 

상원은 하복셔츠를 벗어 조석희가 앉은 반대편 의자에 걸어두었다.ㅏ 조석희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자신의 무릎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상원은 주저하다 다소곳이 다리를 모으고 그 위에 앉았다. 

뒤에서 끌어안은 손이 상원의 목덜미에서 시작해 어깨 견갑골 갈비뼈를 차례대로 더듬어 내려갔다.  땀 냄새가 부끄러워 상원은 고개를 수그리고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선배는 여태 뭐 했어요?'

"응? 여태 뭐하다니?'

"섹스도 안해보고 키스도..... 그건 무효로 해둬요"

이전에 생긴 김이경과의 일을 떠올렸는지 조석희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맞아 그건 무효야"

상원은 진지하게 맞장구 쳤다 속아서 한 첫 키스니 기억속에서 몰아내고 싶은게 당연했다. 가능하다면 물어달라고 김이경에게 따지고 싶었다. 

"여태 첫사랑도 안 해보고 뭐했어요 내가 첫사랑이라며"

놀림 받는 기분이 들어 상원은 목덜미가 뜨근해졌다. 그 와중에도 조석희의 물음에 대답하려고 상원은 고심하며 말을 골랐다. 

"그냥.....싸우느라 삶이랑 싸우느라"

상원이 짙은 속눈썹을 내리감고 말을 이었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그의 단단하고 올곧은 심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런거에 눈 돌릴 시간도 없었어 간신히 수습하면 사고는 터지지 다치지 나는 지치지. 처음에는 나한테 마귀가 들린 건줄 알고 목사님께 가서 마귀 좀 쫒아주세요 하면서 울었다니까"

느긋느긋한 상원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죽고 싶어서 밥도 안먹고 운 적도 많아. 그런데 살다보니까 좋은 일도 있더라. 그래서 사는게 아닐까 ? 사람은"

"글쎄요"

삶에 대한 핍진한 사고를 가져 본적 없는 조석희로서는 상원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의 삶은 불면증과 약물 섹스와 여자로 얼룩진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비교해서 어쩌나. 솜처럼 하얗고 말강말강한 선배의 삶에 흙발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하지만 양심의 가책이 생기거나 ,놓아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건 여간해선 질리지 않을

특급품이니까. 

"아무튼 그래서 바쁘셨다.?"

"....응"

"지금은 안 바빠요?"

"바쁘지 퀴즈대회도 나가야 하고 원서 준비도 해야하고 공부도 해야하고 그리고....."

손을 꼽으며 진지하게 대답을 하던 상원은 조석희의 표정을 살피다가 이게 아니구나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바쁘긴 한데 .... 너한테는 안 바빠"

"그러시겠죠"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인다. 선배는 제가 좋아서 못 견디잖아요 상원의 흰피부가 물들어가는 모습을 훔쳐보며 조석희는 낮게 웃었다.

부드러운 살결을 얼굴에 가져다 대어 그의 체취를 담뿍 맡자, 당분간 만나지 못할 그 시간이 벌써 안타까워지고 만다. 

조석희가 나지막히 귓가에 속삭이는 이런저런 말에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느 초여름의 평화로운 오후였다.  

모 방송국에서 학교로 찾아와 마지막 학생이 남을 때까지 문제를 푸는 퀴즈 프로그램은 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했다. 물론 그것은 정치적 시사문제나 학문적 지식에 관심을 둔 학생들에 

한해서였다. 

퀴즈대회에 가서 우승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일단 파이팅을 하긴 했지만 공부와는 만리장성을 쌓아오며 지내온 6반 학생들은  퀴즈대회 준비가 곧 지옥이었다. 매 방송마다 나온 기출문제를 

구해와서 반복 세뇌, 암기학습을 시켰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중앙집권국가로의 발전이 늦었던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들이 모여 정치를 운영했습니다. 이런 전통을 유지한 것이 이 제도 인데요 귀족들이 단결해 국왕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실제로 신라 진지왕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 는 이유로 이 제도에 의해 폐위됐는데요  이제도는 무엇일까요?"

한승완이 앞에서 문제를 읽자 음란이란 단어에 꽂힌 윤대진이 재빨리 손을 들고 외쳤다.

"집단 정사"

"....."

정답은 화백제도였다.

"다음문제 [태왕의 업적은 황천에 달하며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번창하여 옥고이 풍성하게 익었다.] 이것은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하게 천하의

중심 국가임을 자부하면서 웅비전략을 진행시킨 이 사람에 대한 업적을 기록한 글입니다.  이사람은 누구일까요?"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웅비전략이 뭐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한 명이 자신있게 손을 들어 말했다. 

"관우 장비!"

"...."

정답은 광개토대왕이었다. 한승완은 기출 문제집을 세차게 닫고 소리쳤다. 

"이 미친 것들아! 오늘이 퀴즈대회 날인데 어떻게 기출문제 열개중 한개를 못 맞춰!"

"니가 너무 어려운 문제만 내잖아"

대진이 툴툴거렸다. 한승완이 이를 박박 갈며 문제집을 펼쳐 내밀었다. 

"야 이새끼야 이거 안보여? 내가 지금 낸 게 난이도 별 몇개인지 안보이냐고!"

"아 몰라 몰라 그냥 다른 반 애들 다 줘패서 죽여"

아직도 다른 반 애들을 죽여서 우리반만 참가하자고 대진이 책상위에 벌러덩 누우며 말했다. 

"그냥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자 꼭 우승 안해도 괜찮아"

상원이 패닉 상태에 빠져 잇는 승완을 침착하게 달랬다. 

"..... 우리는 망할 거야. 아마 첫 문제에서 너 빼고 다 떨어질걸...."

"......."

너무도 현실성 있는 예상에 상원이 차마 그렇지 않을 것이란 말을 하지 못했다. 

"김동석 너 기억력 좋잖아 이거 못 외워?"

대진이 친구에게 기출 문제집을 떠넘기며 물었다. 동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내가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면 이런 건 한번 보면 3초 뒤에 잊어"

"문제가 SOD사의 여배우 신장 체중 사이즈 브라 사이즈 구두사이즈면 내가 무조건 1등인데 젠장 왜 그런 문제는 안나오는거야! 가서 항의할까?"

상원이 대진을 말리며 안된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좋아하는 것은 19금이라서 문제로 출제될 수 없어"

"헐 난 섹스 관련된 게 다 19금인 것도 이해가 안가 아니 19금이라고 애들이 안봐? 섹스는 어른들만 하는 걸로 돼있어? 우리 같은 미성년자는 섹스안해? 그렇지? 상원아"

"어?.....어"

"좋은건 지들이 다하려고 하고, 시발 어른"

반년만 지나면 어른이 될 윤대진이 쓸데없이 성인을 비판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니놈의 좆철학은 그만 펼치고, 이제 어떻게 할거야 방송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동석이 기출 문제집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기억력이 비상하게 좋지만 관심이 없는 분야에는 기억력이 전혀 발휘되지 않는 동석은 책장을 넘기는 순간 읽었던 문제를 새까맣게 

잊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마지막에 가장 많은 학생이 남은 반과 그 반에서 우승자가 나왔을때 그들이 원하는 상품인 성적우수자 추천전형을 받을 수 있었다  6반 아이들 중에서는 상원이 혼자 남아 

우승하면 받게 될 도서상품권으로 무슨 만화책을 사야할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다른 괴물들을 제치고 이상원이 우승하기도 어려운데 그 괴물중에 6반의

다른 학생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시발! 몰라 옆에 놈들 거 커닝해. 무조건 우리반 옆에 앉지마. 다들 한놈씩 맡아 안 보여주면 패서라도 봐, 안보이면 공부잘하는 척 옆에 놈한테 오답이라도 흘려"

한승완이 칠판을 두드리며 필사의 작전을 설명했다. 

"이번 퀴즈대회 나가는 놈들 무조건 S반 D반 I반 K반 놈들 코스프레하고 나타난다. 윤대진 넌......."

백금발로 염색을 하고 피어싱까지 주렁주렁 달고 있는 윤대진은 도저히 손 댈수 없는 수준이었다. 

"넌 그냥 6반 대표다"

"오! 내가 6반 이미지라고"

비꼬는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대진이 좋아했다. 다들 소품을 구하겠다고 교실을 떠났다. 상원은 동석의 옆에서 기출문제집을 읽었다. 30분이 지나고 범생이 코스프레를 마친 6반의 전사들과 함께

상원은 대망의 퀴즈대회를 향해 걸어갔다.

"이번 문제는 시사문제입니다. 얼마전 정부는 신용불량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것을 한시적으로 도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2개 이상 금융 기관에 빚을 지고 있는 다중

채무자의 연체 채권을 한 곳으로 모아 처리하는 특수 목적의 은행인데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이 자신의 칠판에 열심히 무언가를 적어내려갔다. 한승완의 작전이 초반에 의외로 잘 먹혀 들어가 6반의 철저한 방해공작으로

많은 학생들이 우수수 탈락했다.  문제는 6반의 수많은 논개들도 같이 죽었다는 점이다. 

결국 k반 학생 한명과  s반 학생 두명  D반 학생 두명 I반 학생하나, 그리고 6반 학생이 두명 남게 되었다. 

"....저거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거야?"

"글쎄"

기적적으로 남아 잇는 윤대진을 보며 한승완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주변의 다른 학생들은 다 탈락하고 혼자 구석에 우두커니 앉은 윤대진은 사회자가 내는 문제에 족족 정답을

써서 맞히고 있었다. 

"자 정답을 들어주세요"

사회자의 발언에 모두 한번에 칠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정답은 배드 뱅크 입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아쉬움의 장탄성이 섞여 나왔다. K반 학생과I반 D반 학생이 떨어졌다. 윤대진은 또 살아남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동석과 승완은 서로의 뺨을 후려 갈겨줘야

했다. 

"저건 기적이지"

얼얼한 뺨을 만지며 승완이 중얼거렸다. 이제 s반과 6반의 대결모드였다. 사회자가 남은 네명에게 돌아가면서 소감과 앞으로의 다짐을 물었다.  대진의 차례가 오자 사회자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이 학생은 개성이 매우 강한 학생인데요 짧게 자기소개 한번 해볼까요?"

"제 이름은 윤대진 입니다. 나이는 열여덟 취미는....."

"안돼!!"

"그만!!"

"멈춰!!"

윤대진을 아는 교직원 몇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벌떡 일어나 그를 제지 시켰다. 한승완과 김동석도 그 중하나였다  승완이 손으로 목을 그어보이는 시늉을 한 후 입을 꿰매 보이는 동작을 취했다. ]]

대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인터뷰를 평범하게 진행했다. 

"제 취미는 동영상 감상입니다. 특기는 끝내주는 운동시력입니다."

"아하하 그렇군요"

사회자도 윤대진의 비범함을 눈치채고 굳이 그것이 무슨 동영상이냐고 묻지 않았다.  간단한 포부를 밝힌 후에 인터뷰는 일단락되었다. 

동석은 한숨을 쉬며 승완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저거 완전 시한폭탄이야. 지금까지 칠판에 자지라는단어를 한번도 안 쓴게 용하다."

"....분명 한번은 쓸꺼야"

선수를 출전시킬때 자신이 포스터를 가져왔으니 꼭 나가겠다고 주장한 윤대진의 고집을 꺽지 못한 승완이 비통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대체 저놈이 저런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아는거지?"

기출 문제집 한 번 제대로 안 본 녀석이. 아까 그 문제는 기출문제집에도 없었던 것 같은데"

동석이 휘리릭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승완이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아까 전 저놈 특기가 뭐라고 했지?"

"운동이라고 했잖아"

"아니야 운동시력인가. 뭐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잘 못 말했겠지. 운동일거야. 저 놈 잘하는 게 운동밖에 더 있냐"

단거리 선수로 전국체전에 나가 국내 신기록을 수립했던 윤대진의 특기는 각종 운동이었다. 운동 신경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김동석의 아버지도 대진을 탐낼 정도였다. 

"저번에 너네집 놀러갔다가 너희 아버지가 저놈은 뭘 타고 났다고 했던거 기억나?"

"아아 저새끼 눈 근육이 좋다고"

권투 선수들은 상대방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에 동체시력이 좋아야 했다. 관장인 동석의 아버지는 평소에도 체육관 선수들의 동체시력을 향상시키는 수업을 한다고

선풍기에 단어를 쓴 조그만 종이를 붙여놓고 누군가 정답을 맞히면 다른 단어로 교체하곤 했다. 체육관에 놀러갔던 대진이 들어서면서 왜 저기서 아르헨티나가 돌아가고 있냐고 물었다. 

정답이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작게 적어놓아 아무도 못 맞힌 답이었다. 그걸 신기하게 여긴 김관장이 몇 번이나 다른 글씨로 시험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진은 힐끗 쳐다보고 정답을 맞췄다. 

그때부터 김관장은 윤대진을 범상치 않은 운동신경을 눈여겨 보며 그에게 끊임없이 권투를 권하게 되었다. 

"그걸 뭐라고 하셨지?"

"동체시력"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동석이 설마,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 설마가 사실일지도 몰라"

승완과 동석은 그때부터 대진의 행동을 뚫어져라 살피기 시작했다  문제가 출제되고 아이들이 답을 쓰려 펜을 움직이는 순간 대진의 눈은 희번뜩 빛났다. 

그것은 공중에서 먹이는 노리는 매의 눈이었다.  대진의 자리에서 그나마 손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은 상원의 오른편에 위치한 s반의 학생뿐이었다. 

상원이나 다른 학생은 대진에게 등을 진 형세였기 때문에 손의 움직임을 봐도 그것이 어떤 방향인지 파악하는게 불가능 했다. 

"정답은 오금법입니다. 아쉽게 한 학생이 탈락하는 군요"

S반의 남학생 하나가 탈락했다. 6반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상원과 대진의 이름을 불렀다 대진은 자신의 업무를 모두 끝낸것이다. 여기서 상원이 우승하기만 하면

6반 학생들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동석과 승완이 서로를 얼싸 안고 이제 다 되었다고 자축했다. 사회자가 긴장된 목소리로 다음 문제를 읽었다. 

"황석영이 지은 소설 '객지' 는 1970년대 민중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불리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1960년대 후반 근대화 작업중 하나였던 간척 사업의 현장을 무대로,

그곳에서 일하는 떠돌이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소설인데요, 그 충격으로 객지를 쓰게 됐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소설 객지의 모티브가 된 이 사건은 무엇일까요?"

대진의 눈이 재빨리 s반의 움직임을 쫒았다. 그는 무사태평한 얼굴로 칠판에 답을 적어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상원이었다. 

"어라 상원이 왜 답을 안 적지? "

"그러게 벌써 시간 다 돼 가는데?"

6반 학생들 사이에서 걱정스런 목소리가 일렁거렸다. 사회자가 5초가 남았다는 말을 했을때, 상원은 결심한 듯 펜을 움직여 나갔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우리 상원이 하는 눈빛이 오고 갔다. 

"자 정답을 들어주세요"

S반의 학생의 답은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물론 윤대진도 토씨 하나 안틀리고 그대로 적었다. 그런데 상원의 답은 그게 아니었다. 

"오 이상원 학생만 답이 다른데요 새마을 운동 제창, 답이 확실한가요?"

상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랏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동석과 승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아니야 그래도상원이가 맞을 수도 있어 기다려보자"

두 사람은 떨리는 심정으로 사회자가 정답을 발표하길 기다렸다. 

"정답은 전태일 분신사건입니다."

정답이 발표되자 6반 학생들이 절망에 빠졌다. 상원이를 우승시켜 그에게 성적우수자 전형수시 추천서를 안기겠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널찍한 강당에는

두꺼운 안경을 쓴 s반 녀석 하나와 전혀 성적이 우수하지 않은 6반의 윤대진이 앉아 있었다.

"자 이제 그럼 두 학생의 대결입니다. 각오 한마디씩 밝혀주시지요"

s반의 학생이 일어나서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꼭 우승하겠다는 파이팅을 외쳤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진은 저 멀리 떨어져나간 상원을 돌아보았다. 

"자 우리 윤대진 학생 각오한마디"

"어? 저요? 아 잠깐, 저 대신 상원이가 문제 풀면 안되나?"

"네? 하하하 이제 탈락한 학생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 각오 한마디"

대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바라보던 6반 친구들의 얼굴은 귀신같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발 자지나, 가슴 섹스 얘기나 그런 것만 하지마."

"내가 우승하면"

대진의 시선이 6반에서 선생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우리 상원이 원서 써줘요!!!!!!"

박력이 깃든 그의 일갈에 사회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윤대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희재고 선생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상원은 그런 친구의 모습에 가슴 깊이 

감동했다.  결과가 어찌된다 해도 상원은 이미 친구들에게 평생가도 갚지 못할 소중한 선물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윤대진 파이팅"

상원이 소리 높여 외쳤다.  6반 학생들도 한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친구의 예상외의 선전으로 여기까지 오긴했지만 이 퀴즈의 결과가 어찌 될지 알고 있던 동석은 걱정을 덜 수 없었다. 

"아무리 잘해도 동점이란 거잖아"

"저놈이 계속 정답만 쓰면 다행이게 오답을 썼는데 윤대진이 똑같이 쓰면.....시발 좆되는거지"

"그럼 계속 저 안경잡이 놈이 정답을 쓰길 바래야 하는구만"

동석이 초조하게 s반 학생을 바라보았다. 사태의 진실을 아는 승완역시 동석과 함께 적의 선전을 기원했다. 두 사람의 예상대로 몇 문제는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었다 s반 녀석은 정답을 적고

대진은 그것을 눈으로 훔쳤다. 한 획이라도 허투로 읽으면 털어져 버릴 위험한 외줄타기가 계속되었다. 

"와 두학생 실력이 정말 막상막하 입니다. 이제 50번째 마지막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두 학생 모두 맞히면 둘다 이번즈의 골든벨 장학생이 됩니다."

동석과 승완은 손을 맞잡고 s반 학생이 제발 이번 문제도 맞추길 기도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이것은 고생대 석탄기인 3억 5천만 년 전에 번성한 동물입니다. 이 동물의 구기는 전형적인 저작형으로 큰 턱이 발달했습니다. 시속 150km의 빠르기를 자랑하며 두개의 뇌를

가진 야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지개혁을 이끈 멕시코 농민들의 혁명 지도자였던 판초비야가 타고 다니던 마차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흐르는 멕시코 민요의 기원이라고 알려진 이 동물은 무엇일까요?"

잠시 가락이 낮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모두들 보도 못한 동물에 대한 설명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석이 상원의 팔을 치며 너는 아냐고 묻자 그조차 고개를 저었다. 

"괴물아니야? 시속 150km에 뇌가 두개라니"

"그러게...뭐가 그러냐"

6반 뿐만 아니라 다른 반 학생들도 당혹스런 얼굴로 수근거렸다. 난이도가 높은 50번째 문항에서 정답을 맞추지 못하고 떨어지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s반 저놈은 알고 있겠지"

한승완이 팔짱을 끼고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s반 남학생은 한숨을 포욱 쉬더니 펜을 들고 뭔가 적어 내려갔다. 

"옳지 그래 잘한다."

승완이 남학생을 응원하며 주먹을 흔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백하게 질린 대진이 6반 친구들을 향해 두 손을 교차에 보였다.  s반 놈을 가르키고 목이 잘리는 시늉을 했다. 

"....저 놈도 모른다"

그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낸 동석이 비통하게 말했다.

"뭐? 그럼 어떡해?"

"...둘 다 탈락이지 시발, 저것도 잘한거야 윤대진 저거 아무래도 진짜 권투시켜야 겠어"

"대진아! 힘내라 ! 너 우승하면 뽀순 퀴랑 뽀순 잉이랑 다 니가 해!"

어항을 가슴에 품고 뽀순 퀴의 허리에 실을 매달아 데려온 6반의 사육담당 학생이 애절한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그는 뽀순이에 대한 친권을 위해 퀴즈에 참가했다가 

첫번째 문제에서 고배를 마셨다. 6반 아이들도 목이 터져라 대진의 이름을 불렀다. 대진이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손가락으로 뽀순잉과 뽀순퀴를 반복해서 가리키다가

히죽 웃었다. 사람의 눈빛을 기막히게 읽는 동석이 끄응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사회자가 카운트를 세겠다고 말한 후 정확히 다섯을 셌다.

"자 정답 들어주세요"

두학생이 동시에 번쩍 칠판을 들어올렸다. 퀴즈대회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두사람의 칠판에는 다른 글자가 적혀있었다. 

s반 학생의 칠판에는 [엄마 미안해요] 라고 쓰여 있었다. 

"저거 완전 마마보이 아냐 크크 엄마 미안해요 가 뭐냐"

승완이 키득거리며 비웃었다.  동석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승완에게 대진의 칠판을 보라고 손가락질 했다. 

[SOD만세 ! 슴가 만세! 뽀순 퀴 바퀴벌레 만만세!]

얼마나 크게 써 놓았는지 강당끝에 앉아 있던 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동안 얼마나 대진이 슴가와 SOD만세를 외치고 싶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당황한 사회자가 사인을 주어 슴가 만세는 지워야겠다고 해서 간신히 슴가만세는 지웠다.  하지만 동석은 저 SOD라는 글자를 본 순간 풋하고 웃을 남학생들이 떠올라 도저히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뽀순퀴를 보고 바퀴벌레 그림까지 그려넣은 친구가 너무 쪽팔렸다. .

그때 사회자가 마이크에 손을 쥐고 외쳤다. 

"정답은 바퀴벌레 , 3학년 6반 윤대진 학생이 이번 주의 골든벨 입니다!"

사회자의 외침 후에 강당 안에는 순간 침묵이 찾아왔다. 누구도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사회자가 다시한번 정답을 설명해주었다. 

"아 정답은 바퀴벌레! 지금 흐르고 있는 라쿠가라차라 는 곡의 뜻이기도 합니다. 윤대진 학생 정답입니다"

"우아아아!!!!!"

"윤대진! 윤대진!!"

"윤대진 만세! 6반 만세!! 뽀순뽀순 퀴 만세!!"

6반 아이들이 아직도 어리둥절 하며 대진에게 달려가 그를 들어올렸다. 환호성을 내지르며 그들은 윤대진을 헹가래쳐주었다. 공중에서 두번쯤 올려진 뒤에야 대진은

자신이 우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세! 만세 ! 내가 해냈어!"

6반의 학생들은 서로를 얼싸 안으며 우승의 감각을 맛보았다. 다른 반 학생들과 선생들은 이 믿기지 않는 광경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상원아! 내가 해냈어. 너 원서 쓴다. 우리 6반이라서 원서 쓴다고"

대진이 상원에게 달려와 소리쳤다. 상원은 자신이 성적우수자 전형으로 원서를 쓰게 되었다는 기쁨보다 대진이 우승했다는 사실에 기뻐 소리쳤다. 

"축하해! 네가 우승이야 대진아 네가 우승했어"

"난 천재니까! 움하하하하"

대진이 두손을 허리에 얹고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6반아이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뽀순퀴와 대진의 이름을 연호했다.

 커다란 금색 종 앞에 선 대진이 허리르 추어 올려 그 무언가로 종을 울리려 하기전까지. 

"으악! 이 미친 놈아"

"편집해! 다시 찍어! 절대로 편집하라고"

선생들 뿐만 아니라 6반 학생들도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난생 처음보는 기괴한 학생의 형태에 방송사 관계자들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선생들 자리에선 차라리 골든벨 울리는 학생을 대타로 세우고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하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결국 자신의 거시기로 골든벨을 울리려던 윤대진의 꿈은 깨지고 그는 뽀루퉁한 얼굴로 평범하게 벨을 울려야 했다. 

희재고의 강당 안에 기적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하하하 교장 얼굴봤냐? 우리반이 우승하니까 다른 반 담임들 얼굴봤냐?"

"시발 난 우리 반 담임 표정이 제일 웃기더라 크하하하"

"아 진짜 오늘같이 행복한 날이 또 있을까.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이겼을 때보다 더 신난다"

촬영이 끝난 6반 교실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모두들 그 순간의 기적에 대해 입을 모아 칭송했다. 학급비를 더 걷어 뽀순퀴의 식사질을 높이자는 의견도 나왔다. 상원은 정말로 뽀순퀴가 

자신에게 다가온 행운의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내가! 윤대진 님께서 골든벨을 울렸다 이 말씀이지 . 음하하 난 천재야, 정말 천재지. 얼굴도 잘생기고 좆도 잘생겼는데 머리까지 좋으니 아 어쩌란 말인가!"

"정말 잘했어 나도 몰랐던 문젠데 진짜 대단한거 같아 대진아 정말 정답을 알고 있었던 거야?"

"응? 아니 당연히 찍었지 뽀순잉이랑 뽀순 퀴 둘중 하나만 출연시켜 준거야"

정말 어떤 의미에선  대단한 친구였다. 

"그래도 네가 우승했잖아 정말 대단해"

"너 이제 추천장 받을 수 있지? 우리반이라서 받는거야"

"아니야 네가 우승했는데 왜 내가 추천을 받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 추천장은 성적 우수자 한정인데 얘가?"

동석이 낄낄 거리며 대진을 가리켰다. 

"내 비록 성적은 우수하지 않지만 골든벨은 울렸거든? 크크"

"그래 너 잘났다."

교실안에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원은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왔다. 어떻게해야 친구들의 이 마음을 갚을 수 있을지 생각해봐도 영원히 불가능할것만 같았다. 

"아무튼 너 담임한테 가봐 꼰대들 괜히 나중에 딴소리 할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갔다오지 뭐"

"나중은 무슨, 지금가서 확답이라도 받아. 교장선생도 우리 학교주가 올라가서 지금 기분 좋으니까 이때를 노리라고"

동석이 상원의 등을 떠밀었다. 상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밖으로 밀려가면서 대진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너한테 이거라도해줄 수 있어서 난 진짜 기분 좋아"

"....대진아"

"너 때문에 내가 낙제 면한 게 대체 몇 번이냐? 자크에 내 자지 끼었을 때도 매번 니가 약 발라 주고, 내 북미판 프르노 잡지도 니가 몇권이나 번역해줬잖아"

그것말고도 상원에게 받은 대가없는 친절과 마음을 대진은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선생들도 포기한 자신을 도와준 것은 이상원 , 하나뿐이었다. 

"야 인마 내가 그랬지"

동석이 상원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네 성적에 우리반 들어온건 그게 행운이라고"

친구의 말에 상원은 활짝웃었다. 상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좋은자리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교무실에 갔다온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성적 우수자 전형으로 추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보다 상원은 자신을 믿고 노력해준 친구들의 마음이 더 기뻤다. 불운 때문에 실패할거라 여기던 이 학교내에서 자신을 믿어준 사람은 6반 친구들 뿐이었다. 

상원은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반드시 자신의 불운을 이겨내서 친구들의 믿음을 증명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좋아 힘내자"

상원이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한 후 교무실 앞에 섰다.  담임선생님 모습이 보이지않아 여쭈어보니 교장실에 계시다는 대답을 들었다.

상원은 교장선생님께 인사도 드릴겸 그 앞에서 기다리자 싶어 교장실로 걸어갔다. 

교장실앞에서 담임선생님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상원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가 우수하긴 하지만...."

열려진 문틈사이로 교장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신의 이름이 들린 것도 같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안되지 싶어 떠나려던 상원의 발길을 잡은건 울분에 찬 

담임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십니다. 우리반 애들이 공부도 못하고 말썽을 많이 피우는 녀석들이라 하지만, 이번엔 교장선생님께서도 보셨다시피 골든벨에서 당당하게 우승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그럼 추천장도 써주셔야죠"

"아니 박선생도 알다시피 그게 상원학생이 좀 특수한 사정이고..."

교장선생님의 당혹스런 목소리가 이어졌다. 입맛이 썼다  그래도 담임이 자신을 믿어준 것이 고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원은 그 다음순간 믿지 못할 말을 듣고 말았다. 

"선생님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추천장은 우승자에게 써주는 것입니다.  그럼 대진 선배가 그 추천장을 받아야죠 그런데 대진 선배는 성적우수자가 아니니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이어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학생회장인 김이경이었다.  상원은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이경아 상원이가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했고  그간 얼마나 성실하게 생활했는지 네가 더 잘 알지 않냐"

"네 잘알죠,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상원은 지금 저 안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정말 자신이 알고 있는 후배 김이경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손끝이 떨리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게다가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학교에는 수많은 성적우수자가 있습니다.  물론  상원선배도 그 하나지요 그런데 상원선배가 과연 그냥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선생님도 그걸 확신하지 못하시잖아요"

"그래도 상원이 성적이라면.....!"

"그 성적이 그대로 나와 줄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교장선생님께서도 이전에 동의하신 사항이지만 저희 학교의 특수한 반 운영체제가 효율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한명이라도 

많은 숫자의  합격생을 배출해야겠지요, 저희 큰아버지도 그걸 원하시고 이 학교 재단에 기금을 기부하시고 계실겁니다."

상원은 김이경이 재단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알았다.  그리고 그가 저런 차갑고 비열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솔직히 6반에서 골든벨 우승자가 나온것도  그리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반이라면 몰라도, 아무튼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두분이서 더 하실 말씀 있으면 

나누세요"

교장실 문이 열리고 김이경이 나왔다. 문앞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던 상원을 발견한 김이경이 잠시 놀라더니 이내 웃는 낯을 꾸몄다. 

"어 선배 언제오셨어요? 담임선생님 찾아오신거에요? 지금 교장선생님하고 대화중이신데요"

방금전 저 안에 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말투 목소리였다.  상원은 조석희가 이경을 믿을 수 없는 뱀같은 녀석이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원선배 여기 먼지가...."

김이경이 상원의 뺨에 손을 대려했다.  상원이 매섭게 그 손을 쳐냈다 손이 얼얼할 정도였다. 

김이경은 상원이 언제 도착했는지 알아차렸다. 

"너 따라와"

상원이 이경에게 싸늘하게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김이경은 곤란한걸 하고 중얼거리며 상원의 뒤를 따라 나섰다. 사용하지 않는 낡은 미술실안으로 들어왔을때

상원이 김이경을 향해 물었다. 

"너 그렇게 안봤는데 정말 최악이다."

"제가 왜요?"

김이경이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치미 뗄 생각이야? 다 들었어 얘기"

"아 그러시군요"

김이경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손가락으로 콧대를 누르며 말했다. 

"선배 추천장 받아서 연대 쓰실 생각이잖아요 나 그거 싫어요"

"뭐? 지금 뭐라고?..."

"연대 의대도 나쁘지 않지만 전 서울대 의대로 갈 생각이거든요 선배도 그 학교로 쓰세요 학교장 추천 따위없어도 시험만 제대로 치르면 오실 수 있잖아요"

상원은 귀로 듣고도 지금 이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왜 너랑 같은 학교에 가야해?"

"제가 선배 좋아하잖아요"

"뭐?"

"같은 대학 가고 싶어요 선배가 일년 재수해주면 더 좋고, 같은 학번으로 들어가니까"

"너 미쳤어? 대체 무슨 소리 하는거야?"

상원은 지금 눈앞에 후배가 돌아버린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하지만 김이경은 소름끼칠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전부터 생각해 온거예요, 전 의대조기 졸업하고 로스쿨에 들어갈 거예요 졸업하면 제가 부르는게 몸값일걸요, 이 정도 스펙이면 선배가 아무리 불운해도 제가 커버할 수 있어요 선배는 저만 믿으세요"

"...너 미쳤어"

상원은 소름이 돋았다. 사람좋고 싹싹한 후배 김이경은 거기에 없었다. 오직 자신의 방법으로만 목줄을 묶어 개를 자신의 집에 가두려는 비뚤어진 어린아이 하나 서있을 뿐이었다. 

"그까짓 이유로 지금 우리반 애들 우승한걸 그렇게 갂아 내렸어?"

상원의 질문에 김이경이 피식 웃었다. 

"깍아 내릴 것도 없잖아요 애초에 대진 선배가 실력으로 우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런 건 누구도 신경 안써요 6반은 어차피 우리 학교내에서도 내놓은 집단이니까"

상원은 있는 힘껏 이경의 뺨을 후려쳤다 처음으로 사람을 때려보는 것이라 힘 조절을 하지 못해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선배"

상원에게 얻어맞은 이경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온화하고 상냥한 이상원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네가 날 우습게 보는 건 참을 수 있어. 내가 불운때문에 실패할 거라 떠들어도 상관없어, 그런데 네 오만한 욕심때문에 우리반 애들까지 불운하게 만들지마"

상원은 처음으로 남에게 그런 분노를 퍼부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려고 입술을 짓이겨 피가 흐를 정도였다..

"오만한 욕심?"

김이경이 되물었다. 

"난 너 같은 거 좋아하지 않아. 지금고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넌 우리반 애들 비웃을 자격없어 걔들이 너보다 머리가 나쁘고 공부가 뒤쳐진다고 해도 걔들은 최소한 마음은 병들지 않았으니까. 

너 같은거 다시는 후배라고생각하지도 않을거다"

내뱉는 것만으로 힘겨울 정도로 독한 말을 퍼부었다.  더 이상 같은 공간에 있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상원은 몸을 돌렸다 김이경이 그런 상원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거 안놔?"

상원이 소리쳤다. 김이경이 손목을 잡아끌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후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가 언제까지 조석희 옆에 있을 것 같은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선배 조석희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미국으로 가버린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뭐?"

"걔네 집안은 미국에 적을 두고 있다고 , 애초에 걔가 한국에 들어온 건 사고를 쳐서이지 여기에 살려고 온게 아니란 말이야"

김이경은 눈이 새빨개져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마음먹은 대로 미래를 결정하는게 아니라고 내가 왜 의대를 졸업하고 로스쿨을 가겠다고 하는건데! 내 앞가림은 해야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거라고, 나야 승계권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막내라 그게 가능하다 쳐도 조석희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얼마나 세게 손목을 움켜 잡았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 상원은 손이 저릿했다. 하지만 상원은 손목의 아픔은 상관하지 않았다. 

조석희가 졸업하면 미국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이 상원에겐 모든 것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선배 걔가 운이 좋아서 좋아하지? 그런데 그 운 때문에 조석희를 필요로 하는 게 선배뿐만이 아니거든. 걔네 집 늙은이는 그 새끼 없으면 심지어 회사가 망한다고 생각해 걔를 두고 걔네 친가랑 외가에서

승계권싸움을 할 정도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 걔는 선배랑 어울릴 수 없어 사는세계가  달라"

"그건 네가 나한테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상원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선배 선배 머리는 좋은데 왜 그렇게 생각이 없어요? 이미 진로가 설계되어 있는 인간이 그짝도 하나 안 구해놨을까?"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조석희 그새끼 이미 약혼했어요 미국으로 가서 대학가면 바로 결혼한다고요"

"거짓말 하지마"

"조석희한테 그럼 직접 물어보세요  그녀석이 뭐라고 하는지 "

상원은 김이경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석희가 그런 얘기 안하죠? 아니 할 필요가 없겠지 그때까지 선배랑 같이 있을 것도 아닌데 걔는 한국에서 잠깐 즐기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니까"

김이경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켜갔다. 귀에서 윙 하는 기계음이 울렸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난 앞으로 선배 옆에서 계속...."

"놔"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몸도 마음도 싸늘하게 식었다. 

"선배 나는 선배 옆에 계속 있을 수 있다고요"

"놓으라고햇어"

"선배"

"놔"

상원이 이경의 손을 뿌리쳤다. 더 이상 이경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경을 떨어트려 낼 때 벽에 손을 부딪힌 곳이 잘못된것 같았지만 

상원은 그런 아픔 느낄 여유가 없었다. 복도를 걸어나왔다. 머리가 어지럽고 토기가 올라와서 그곳을 어떻게빠져 나왔는지 알수 없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도서관으로 오라는 조석희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도서관 문을 열때까지도 상원은 지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믿지 못했다.  김이경이 모두 꾸며낸 것이라고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지어낸 잔인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조석희의 말대로 김이경은 믿으면 안될 나쁜놈이니까.

"선배 우승했다면서요  추천장 받겠군요"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던 조석희가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나.... 원서 못써"

상원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상원의 표정을 살피던 조석희는 음, 하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정시로 시험...."

"너 미국가?"

갑작스런 질문에 조석희가 네? 하고 물었다. 

"너 졸업하면 미국가?"

 아니라고 해줘 제발,

상원은 자신의 ㅣ발밑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조석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누구한테 들었어요?"

대답이 아닌 질문이 돌아왔다. 그 행간에 숨겨진 사실을 읽어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는구나....."

상원이 자조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 아닌 자신에게 건네는 말투로,

"상관없잖아요 아 선배도 차라리 대학을 미국으로....."

"너 약혼했니?"

"....."

이번 질문에는 조석희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무표정에 잠시 흔들렸다 마뜩찮다는 듯 짧게 혀를 차는 입맛이 썼다. 

"너 결혼해?"

조석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상원이 또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뭐."

심상한 대답이 상원에게 툭 던져졌다. 

그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에 상원은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조석희가 거짓말을 하거나 대답을 하는데 조금이라도 망설여주었다면 이런 비참한 기분까지 들지는 않았을텐데.

"왜 아직 생기지도 않은 얘기를 미리 꺼내요 기분 잡치게"

"아하하... 기분 잡쳤구나 미안해 석희야"

상원이 웃으며 사과를 건넸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 조석희는 책상에서 내려와 상원에게 다가왔다. 

"선배 화났어요?"

"아니 화 안났어"

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차분하게 앞으로 모은 손이 떨렸다. 

그때 조석희는 그의 손가락 하나가 부러진 상태임을 발견했다. 

"선배 손가락이 왜 그래요? 누가 이랬어?"

"가서 치료하면 돼 괜찮아"

"지금 당장 가 당장"

조석희가 상원을 데리고 도서관을 나가려 했다 상원은 고집스레 고개를 흔들었다. 

"나 할말있어 석희야"

"나중에 해요 손가락이 부러져 놓고 무슨 말이 중요해"

"중요해 너한테는 안 중요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안 중요하겠지만 난 중요해"

상원은 조석희를 자신에게서 떼어내고 말했다. 

"나 너 진짜 좋아해 너무너무 좋아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 네가 좋아"

상원이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지금도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그는 조석희가 좋았다.  너무 좋았다. 몇번을 곱씹어도 더 이상 이런 사랑 하지 못할 거란 결론이 나올 정도로, 조석희가 좋았다. 

"알아요 알고 있으니까 나중에...."

"그런데 이제 못하겠어"

"네?"

조석희가 눈을 부릅뜨며 돌아보았다. 

"이제 나 더 이상,,, 너 못 좋아할 것 같아"

말을 내뱉으며 상원은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이 숨구멍을 막아버린 것인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차분히 말을 건넸다..

"너무 아파서... 너무 힘들어서 더이상 안되겠어 , 나 이제 너 안 좋아할래"

"무슨소리를 하는거야 선배"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를 붙들었다.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화나서 그래? 나중에 결혼한다고 해서 투정부리는거야?"

"아니"

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선이 고운 그의 턱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화 안나. 그냥 내가 우스워..... 내가 그냥 못 견디는 거야"

"계속 만나. 미국가서도 계속 만나고 선배 계속 보면 되잖아"

화를 내는 조석희의 얼굴을 보며 상원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큰 오해를 해왔는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같은 공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선배 설마 다른 사람 생긴거야? 누가 사귀자고 했어?"

조석희의 말에 상원은 웃음을 삼켰다. 

그랬으면 좋겠다 다른 누군가가 좋아지면 정말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석희야. 

"누구야 말해. 가만 안 둘거야 선배든 그 녀석이든 학교생활 할 수 있을 것 같아? 가만 안둔다고"

짓씹어 내듯 조석희가 분노를 퍼부었다. 상원이 처연한 시선을 던지며 조용히 대답했다. 

"나 학교 그만 둘거야"

"뭐?"

"나 자퇴할거야"

"지금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선배 대체 왜 fuck!.....시발"

분노가 머리끝까지 스며들어 말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조석희가 몇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문을 열었다. 

"누구 마음대로  학교를 그만둬 누가 허락해 그걸"

"괜찮아 부모님은 전부터 자퇴하고 검정고시보라고 했어"

졸업을 몇 달 안남긴 시점에서 자퇴한다고 하면 조금 놀라긴 하겠지만, 아들의 선택에 크게 반대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조석희는 지금 상원을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여기서 상원을 놓치면 정말 자신의 손을 놓고 가버릴 것이다. 

"앞으로 정말 잘해줄게요 선배"

조석희가 상원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상원은 자신이 생각없이 주워삼킨 독이 이제야 몸속에서 타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혈관을 태우고 세포를 찟고 결국 심장에 들러붙어

독은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지마"

"네?"

"나한테 왜 잘해줘 왜 헛된 생각을 하게 만들어 왜 기대하게 만들어 하지마"

상원이 담담하게 조석희를 밀어냈다. 초조해진 그는 상원을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마!!!"

상원이 비명같은 소리를 질렀다. 

"왜 잘해줘! 그냥 처음처럼 날 무시하지 그랬어 날 벌레보듯  경멸하고다가오지 못하게 했어야지 더러운 호모라고 욕하고 지나가버렸어야지 처음부터 주질 말아어야지. 아예 꿈도 꾸게

하지 말았어야지...."

한번 맛본 사탕의 맛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달콤했다. 더 이상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음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 상실감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파 미칠 것 같았다. 

"왜 그래요 ! 대체!"

조석희가 옆에 있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Damn!! 내가 대체 어떻게 해줘야 하는데 ! 말해 선배가 말해보라고"

그가 상원의 어깨를 으스러 지듯 잡고 소리쳤다. 시선이 맞닿는 것만으로 날카로운 면도칼로 눈을 도려 내는 것 같아.상원은 눈을 내리감았다. 

"예전으로 돌아갈래 이젠 그 짝사랑도 못하니까 그냥 너 모르고 지내던 그때로 돌아갈거야"

"누구 맘대로 , 누구 마음대로 돌아간다는 거야!"

부릅뜬 조석희의 눈에 핏줄이 보였다. 이전이었다면 그것이 자신에 대한 마음이라고 착각했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것을 손에서 놓기 싫어서 화를 내는, 어린애의 욕심일 뿐이었다. 

"안돼 선배 못 그만둬. 당신이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외침이었다. 

"맞아.... 너 없이 못살아"

"......"

"그래서 나 너 좋아하는걸, 그만 둘거야. 여기서 떠날 꺼야"

두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투명한 막이 서로에게 손이 닿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조석희는 처음으로 상원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더이상 그를 자신의 마음대로 휘젓지 못함을 알았다. 

늘 수줍게 던지던 그 시선이 이제 거두어졌음을, 해맑은 미소를 끌어안을 수 없음을, 부드러운 몸에 입 맞추지 못함을 더 이상 이상원은 조석희를 좋아하지 않음을 알게되었다.

"그러니까... 안녕"

상원이 자신의 어깨에 얹어져 있던 조석희의 손을 내려놓았다.  조석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상원은 그대로 학교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음날 이상원이 자퇴서를 냈다는 얘기가 퍼져나갔다. 

"상원아 다시 생각해봐 응? 나 같은 놈도 학교 다니는데 왜 니가 안다녀? 응?"

대진이 상원의 눈치를 보며 끈질기게 칭얼거렸다. 다른 아이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짐을 싸는 상원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상원아 너 없으면 얘들은 어떻게 하라고"

풀이 죽은 한명이 뽀순퀴와 뽀순잉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별을 아는 것인지 두 마리 모두 유난히 힘이 없어보였다.

"나 없이도 너희들이 잘 키우잖아. 걔들도 훌륭하게 잘 자랄 거야"

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 없으면 누가 내 잡지 해석해줘? 응? 나 지퍼에 자지 끼면 누가 빼줘? 응?"

"그만해라 윤대진"

보다 못한 동석이 대진을 말렸다 대진이 화를 벌컥 내며 동석의 손을 쳐냈다. 

"뭘 그만해! 얘 학교 그만둔다는데 그럼 그걸 보고만 있어? 시발 빌어먹을 학교 불질러 버릴거야! 이까짓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대진이 교실 뒤에 붙여놓은 골든벨 울리는 자신의 사진을 뜯어내며 소리질렸다. 

"아니야 나 그것 때문에 그런 것 아니야. 원래 전부터 검정고시 볼까 했었어 우리학교에 있으면 내신도 별로 안좋고 걱정 안해도 돼"

떠나는 길에도 상원은 대진의 기분을 살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문과에서 일이등 왔다갔다 하는 상원이 내신때문에 자퇴를 한다는 얘기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에서 그에게 추천장을 써주지 않았다는 것은 6반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교장선생과 이야기를 마친 담임이 술에 잔뜩 취해 미안하다고 그네들을 잡고 울었던 것이다. 

축제 분위기였던 6반 교실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아이들이 상원을 찾으려고 교내를 뛰어다닐때 그는 이미 모습을 감추고 난 후였다.

그리고 다음날 자퇴서를 낸 상원은 교실로 짐을 가지러 왔다.  대진이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꺽꺽대며 울자 상원은 에휴 하고 한숨을 쉬고 친구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나 어디 가는거 아니야 학원도 이 근처로 다닐거고 독서실도 근처야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도 볼 수 있어 진짜야"

"그래도.... 그래도 우리 교실에선 못보잖아"

"그만좀해라 등신아"

동석이 대진이 등짝을 호되게 후려쳤다. 대진이 등을 부여잡고 몸부림 치고 잇는 사이 동석이 상원의 등을 밀었다. 

"짐 다챙겼으면 가. 선생님께 인사는 드렸지?"

"응 아까 교무실에서 다 인사드렸어"

상원은 그간 신세졌던 선생님들을 한 명 한명 찾아가서 모두 인사를 드리고 온 뒤었다. 

교무실 앞에서 마주친 김이경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상원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그옆을 스치듯 지나왔다. 

"다른 사람한테는 인사했어?"

"어?....응"

상원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고 동석은 이번 일에 그 빌어먹을 개새끼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그걸 굳이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래 그럼 가자 책 들어다 줄게"

"고마워 교문 앞까지만 들어다주면 돼"

상원이 책 박스를 들고 나가면서 승완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상원이 교실에 들어온 이후 한번도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지 않고 있었다.

"야! 한승완 상원이 간다"

동석이 승완에게 소리쳤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승완이 얼마나 잘 대해주었는지 아는 상원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승완아 나 갈게 잘 지내"

상원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승완은 끝내 뒤돌아 보지 않았다. 동석과 둘이 복도를 걸어나오면서도 상원은 마음이 좋지 못했다. 꺽꺽대며 울던 대진과 입을 다물고 

앞만 노려보던 승완을 교실에 두고 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됐어 신경쓰지마 네 말대로 영영 안볼것도 아닌데 뭘"

".....고마워"

많은 마음을 담아 상원이 동석에게 말했다. 

"고맙긴, 우리가 고맙지 니가 해준거 하나도 못 갚아줘서 미안하다. "

"내가 뭘, 아니야 그런거 없어 너희들이 나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상원이 펄쩍 뛰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 유일하게 그의 마음에 걸린 것은 6반 친구들이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아마 아무런 문제도 없이 예정대로 s반에 입학했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하고 공부만 했을 것이다.  6반아이들이 상원에게 공부외에 소중한 것들로 

그의 고교생활을 채워주었다. 상원은 그것이 늘 고마웠다. 

자신 때문에 6반 친구들까지 비웃음을 당하고 불운한 일들이 생기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불행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두사람이 건물을 나와 운동장을 걸어가는데 등뒤에서 갑자기 야! 하는 외침이 들렸다 한승완이었다.

"이상원!!"

"잘 있어"

상원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런데 같이 인사를 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승완이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 나왔다.

"가지마! 상원아!! 가지마!!!!"

남자는 절대 우는거 아니라고 늘 어깨를 펴고 말하던 승완이 펑펑 울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상원아! 가지마 가지마!"

6반아이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들어 상원에게 가지말라고 소리쳤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상원은 얼른 뒤를 돌아 운동장을 가로 질러 걸었다.  동석은 교문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됐어 이 앞에서 택시타고 가면돼"

"택시 타는거 까지 보고 갈게"

"괜찮아 그냥 들어가"

상원은 동석이 들고 있던 책 박스를 건네 받았다. 

"잘 가"

동석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더오른 말이 있는지 어이 하고 불러세운다.

"응?"

"저번에 내가 그랬지. 너 그 성적에 우리반 들어온거 행운이라고"

상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원의 성적에 6반에 들어간 것은 말도 안되는 사고였다. 그것을 행운이라 칭해주는 동석의 마음이 고마워 상원은 활짝 웃어보였다. 

"근데 그거아냐? 우리반에 너 들어온게 우리에게도 행운이라는거"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마워,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하고 상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안고 있는 책 상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상원은 동석이 교문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지만 끝내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행운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과 작별을 고했다

"예 걱정마세요 길 잘 찾아갈 수 있어요 또 전화드릴께요"

상원은 통화를 마치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처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했을때 그의 부모님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상원은 다음날도 차분한 목소리로 자퇴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무슨일이 있어도 우는소리 하는 법이 없던 아들이 저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학교에서 짐을 챙겨오고도 상원은 며칠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것은 아닌가 하고 방문앞에서 서성이는 부모님때문에 상원은 제대로 눈물한번 쏟아내지 못했다.

그간의 일들을 떨쳐내고 새롭게 시작하련느 의미에서 상원은 부모님께 여행을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혼자 여행을 한다는 얘기에 걱정스러워하시긴 했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오겠다는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유난히 운이 따라주지 않는 아들을 안쓰러워하며 어머니가 기차역까지 배웅했다. 상원은 어머니께 미안하고 감사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몇 통씩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가 상원에겐 조금 버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상원은 기차의 차창 밖으로 변해가는 풍경에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이전에 있던 일들이 뒤쳐져 가는 풍경처럼 멀어져갔다. 그동안 왜 그렇게 작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마음을 썼는지 모를 정도로 여행은 상원의 기분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excuse me  i want to...."

상원은 복도 건너에서 들려 오는 영어에 화들짝 놀라는  자신을 발견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외국인이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자신이 내릴 역에 관해 묻고 있었다. 

바보 같았다.  목소리가 비슷한 것도 아니고 억양도 저렇게나 다른데 그와 연관 지을 수 있는 것 하나라도 옆을 시치게 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웅크리게 되는 것이다. 잊을 것이라 말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과 콧마루가 떠올랐다. 눈을 감으면 조석희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달리는 차장너머로 풍경은 계속 바뀌어 가는데 그에 관한 기억들은 유독 고스란히 남아 상원을 지치게 했다.

얼만 좋아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감정의 깊이가 마음 속에서 출렁거렸다. 상원은 가방에서 아이팟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귓가에 맴도는 그의 목소리를 지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좋았다.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상원은 집으로 돌아가면 새로운 앨범 부터 사서 그 안에 넣어야 겠다고 생각했다ㅏ.

호텔에서 그에게 안긴 채 시트를 뒤집어 쓰고 부르던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댄 다 잊었겠지 내 귓가를 속삭이면서 사랑한다던 고백]

상원은 그가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던 다정한 말들을 떠올렸다. 나지막이 속삭이던 말보다 귓볼에 닿던 그 숨결과 나른한 목소리가 좋아서 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좋아했는데

상원은 자신이 얼마나 그를 좋아했는지 조석희는 절대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예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인간이었다. 조석희가 잘돗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마음을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 자신이 잘못된 것이다. 

졸업을 하고도 그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그를 독점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자신이 멍청했다. 상대는 다름아닌 조석희인데.

상원은 창가에 얼굴을 대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조그맣게 흥얼거렸다.  다음역은 모량역이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상원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고 기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박해수 시인의 모량역이란 시를 떠올려 경주로 가던 길에 충동적으로 내리기로 결정한 곳이었다. 워낙 작은 역이었기에 내리는 사람은 상원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승강장에 풀이 자라고 그 위에 잠자리가 날아다녔다. 

상원은 혼자 낡은 역사에 앉아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경주로 가는 버스는 한 시간 뒤에 온다는 역무원 아저씨의 대답을 들은 후라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시간이 멈추어버린 역사 주변의 모습을 구경하던 상원은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뭇잎 위로 빗줄기가 툭하고 떨어졌다. 

버스로 가던 길에 결국 상원은 온몸이 흠뻑 젖고 말았다. 경주로 가면 우산부터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버스 정류장에 앉아 비를 피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버스가 예상보다 일찍 와서 경주로 출발할수 있었다. 

버스에서 상원은 친구들에게 연락이나 해볼까 하고 핸드폰을 꺼내었다. 동석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 뽀순퀴는 잘 지내냐는 시덥지 않은 내용이었다. 바로 답문이 올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상원은 이번에는 대진에게게

문자를 보냈다. 권투는 잘 배우고 있냐고 물었다 그날 이후 동석이 대진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끌고 갔다는 얘기를 전해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답문자는 오지 않았다.  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동석이라면 그렇다 쳐도 대진은 밥 먹을 때도 손에 핸드폰을 쥐고 먹는 타입이었다. 

상원은 뺨을 긁적이다가 승완에게 무슨 일이 있냐는 문자를 보냈다.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전화를 걸까 하다 셋다 연락을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ㅏ 싶어 상원은 핸드폰을 주머니안에 넣었다.

경주 시내에서 덜 미처 내렸다. 호텔에 먼저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싶었다. 아직 법적으로 성인이 아니라서 호텔예약은 모두 부모님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가끔 확인전화를 요구하는 곳에서는 직접통화를 시켜드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보통은 그냥

넘어가 주었다.

작은 비지니스 호텔 로비에 들어서며 상원은 늘 하던 대로 예약정보를 말하고 직원의 응대를 기다렸다. 

"저 이성철 고객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으시다고요?"

"네"

"이상하다"

여직원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예약이 잘못된 것인가 싶어 상원은 가방에서 확인증을 꺼냈다. 

"여기 예약한거 영수증 있는데요"

소소한 일정은 발길 닿는 대로 하고 있었지만 숙박만큼은 부모님 관리하에 모두 예약을 마치고 온 상태였다.

"네 예약이 되어 있긴 하신데..... 왜 다 취소가 되어있지?"

"취소요? 취소 안했는데"

오늘 낮에 전화를 걸때만해도 어머니는 그런 얘기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카드로 계산하셨죠?? 돈은 다 환불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냥 새로 예약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아 감사합니다."

가슴이 철렁했던 상원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큰 돈 쓸때는 카드를 사용하라고 부모님께서 아예 신용카드 한장을 넣어주신 것이다.

여직원이 카드를 받아들고 계산을 하려다가 화면에 삑하고 경고문구가 뜨자 당혹스런 눈길을 보냈다. 상원은 또 무슨 일인가 하고 몸으르 리셉션 테이블에 기대어 내밀었다.

"이거 본인 카드 맞으세요? "

여직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상원이 아니요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여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원은 불안했지만 여차하면  어머니께 전화를 걸면 되겠지 

하고 리셉션 앞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학생 잠깐만 봅시다"

그런 그의 주변에 경찰이 들이닥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상원은 깜짝놀라 호텔 접수 여직원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러시는데요/"

"학생이 사용한 신용카드가 도난당한 것으로 신고되어서 그러니까 잠깐 서에 같이 가줘야겠어"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상원의 손을 잡아끄는 태도는 단호했다. 덜컥 겁이 난 상원은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그거 저희 부모님 카드인데요 아버지거예요 확인해 드릴께요"

"그래 가서 확인하고 다시오면 되니까 걱정말고 따라와"

호텔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눈빛에 상원은 얼굴이 달아 올랐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일들을 겪어봤지만 이런 식의 일은 처음 이었다. 

차라리 가서 확실히 확인을 하고 오해을 풀어야 겠다 생각해서 상원은 경찰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간단히 조회를 하면 될 것이라고 여겼던 일은 갈수록 꼬여만갔다.

"네? 없는 번호라니요? 아까 낮에도 어머니랑 통화했는데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학생 우리가 그럼 학생을 앞에 두고 거짓말이라도 한다는거야? 지금 학생이 불러준 번호로 몇번이나 걸어봤는데 그렇게 나온다니까"

"그럼 여기 제 전화로 해보세요 전화번호 잘 못 누르신 걸 수도 있잖아요"

상원은 어머니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르고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그간 가출 청소년들의 숱한 거짓말을 들어왔던 경찰관은 귀찮다는 듯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가 대었다. 

"없는 번호라는데?"

"네?"

상원은 깜작 놀라 핸드폰을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었다. 전화기 너머 이 번호는 당분간 고객의 사정에 의해 착신이 금지되었다는 목소리가 반복해서 들릴 뿐이었다. 

상원은 얼른 아버지의 핸드폰으로 걸었다. 마찬가지였다. 

"이상해요 저희 부모님하고 연락이 안돼요 아저씨 어떻게 좀 해주세요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통화했어요"

상원은 울상이 되어 경찰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이봐 학생 아침까지 통화했던 번화가 그새 없어진다는게 말이 돼? 거짓말을 하려면 좀 그럴듯 하게 해야지"

"저도 안 믿겨요 안 믿기는 데 사실이에요"

"부모님 둘 다 연락이 안된다니, 그걸 어떻게 믿으라고 ? 누구 연락되는 사람없어?"

상원은 우선 동석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지없이 들려오는 기계음에 그는 굳어버렸다. 대진도 승완도 마찬가지였다. 

상원은 자신의 핸드폰이 고장난 것일수도 있다 여기고 전화를 빌려달라고 간청했다. 경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주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누구 전화받아?"

"아니요...... 아무도"

상원은 구석에 놓여 있는 의자에 힘없이 주저 앉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경찰은 상원을 어서 보호자에게 인수인계를 해주고 싶어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으니 귀찮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정말 학생 아버지 카드 맞아?"

"예 정말 맞아요"

"집 나올때 몰래 들고 나온거 아니야?"

"아니에요 아버지가 주신거 맞아요"

"너 고등학생 아니야? 고등학생이 왜 이시간에 학교는 안가고 이런데를 다녀 가출한거 맞지?"

경찰들은 이미 상원을 가출 청소년으로 결론 지은 상태였다.  이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지 상원은 가슴이 답답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대체 누가.....

"...하하"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상원은 이미 두명이나 알고 있었다. 

조석희와 김이경.

이런 짓을 저리르고도 남을 성격인데다 이 말도 안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춘 인간들 상원은 핸드폰을 한참동안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그 중 한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오랜만이네요"

생각보다 일찍 나타난 후배가 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경찰서 의자에 앉아 있던 상원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해드릴께요 저한테 하나 빚지신 거예요"

김이경이 손짓을 하자 뒤에서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경찰에게 다가가 뭔가를 설명했다. 김이경이 상원에게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상원은 어깨에 가방을 매고 일어났다. 경찰서를 나오자 김이경이 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방 무거우시죠? 들어드릴께요"

"됐어 필요없어"

상원이 단호하게 김이경의 손을 거절했다. 민망해진 손을 거두며 김이경이 웃었다. 

"선배가 먼저 저한테 연락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비행기타고 온건데"

상원은 전화를 한지 두시간만에 서울에서 김이경이 경주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상원의 예상대로 김이경의 전화번호는 막혀 있지 않았다. 

핸드폰 너머 김이경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을때 상원은 이 흑막의 주인공이 누군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네? 무슨생각이라니요?"

안경을 뿔테에서 은테로 바꾸어서인지 김이경은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운 인산을 풍겼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상원에게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묻는것이 중요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남의 부모님하고 친구들 전화까지 다 착신을 금지시켜 게다가 카드도난 신고는 뭐야? 사람 매장시키려고 작정했어?"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 손을 썼다는 것이 불쾌했던 상원은 오랜만에 보는 후배에게 살벌한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김이경은 곤란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혼잦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 정도까지 손을 썼다고요? 음 생각보다 심각하네"

"그래 너한테는 이게 아무것도 아니고 장난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난 심각해. 불쾌하고 그러니까 당장 그만둬"

상원의 말에 김이경의 어조가 조금 굳어진 듯 보였다 장난기 어린 웃음이 거두어진 어조로 그가 대꾸했다. 

"선배 저 선배한테 장난친 적 없어요"

"그럼 이게 대체 뭐야"

"제 방식을 선배한테 이해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 마음은 이해받지 못할 것은 아니었어요"

"무슨 말을 하는거야"

"선배 저랑 선배가 처음 만난게 언제인지 기억하세요? "

뜬금없는 이경의 물음에 상원은 눈을 치뜨고 입을 다물었다. 

"제가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을거예요 복도에서 선배랑 우연히 마주쳤어요 선배는 잘 모르시지만, 학교에서 선배 유명하거든요"

이경은 그날의 기억이 선연했다. 복도를 지날때 옆에 있던 학우가 그의 팔을 툭 치며 상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재수 없는 선배 지나간다고,

처음에는 그 말뜻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상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처럼 선량하게 생긴 사람한테 왜 그런 별명이 붙은거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선배 머리 위로 갑자기 복도 형광등이 떨어졌거든"

"가끔 그래"

마땅히 두려워 하거나 기분나빠해야 할 상황에서 상원은 태연하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도 그랬다. 다들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혼자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상원은 옆에 있던 친구를 걱정하며 말했다.

괜찮아? 나? 나는 괜찮아 가끔 이래. 

예사롭게 웃으며 대답하던 그 얼굴이 김이경의 시선을 끌었다. 감탄했다. 부드럽게 휘어져 자신의 불운을 감싸는 그 강인한 모습에 김이경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것이 애정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형광등 얘기하려고 여기까지 온거야?"

상원이 물었다. 김이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날 이후부터 선배를 보게 됐어요 선배 존경해요"

"....."

이 말을 곧이듣기에 상원은 김이경의 너무 많은 모습을 알게 된 후였다. 자신을 향한 의문의 눈초리가 걷히지 않자, 김이경이 포기한듯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말씀대로 저는 마음이 병들었는지도 몰라요"

"....."

상원은 자신이 후배한테 던졌던 모진 말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아무리 화가 난다해도 그런 말을 하는게 아니었는데,

"선배가 그걸 고쳐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나는 그럴 능력이 없는사람이야"

뜨거운 초여름의 바람이 두 사람 곁을 휘감아 지나갔다. 김이경은 이것이 또한번 정중한 거절임을 알았다. 

"그래도 한명은 성공하셨으니 능력이 없다는 말은 못하겠네요"

".....?"

모든 일을 처리했는지 김이경과 같이 왔던 중년남자가 경찰서에서 나와 이경에게 눈짓했다. 김이경은 차에서 기다리라고 대답한후 다시 상원을 향해 눈을 돌렸다. 

"선배 학교 그만두시고 며칠 뒤에 조석희가 6반 교실 찾아갔던건 알아요?"

"뭐? ,,,,,,석희가 왜?"

"선배 전화번호 달라고요"

상원은 학교를 그만두고 핸드폰 번호를 먼저 바꾸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친한 친구 몇명에게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물론 조석희나 김이경에겐 바뀐 번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난리가 났었죠 동석선배가 조석희 멱살을 쥐고 옥상으로 가자고 소리지르고 그런데 동석선배는 선배가 석희 좋아하는걸 어떻게 알았을까?"

"......"

자신의 입으로 그걸 말해버린 것이 후회가 되었다. 

"아무튼 승완 선배랑 대진선배뿐만 아니라 6반 전체가 모여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 다친 사람 없었어?"

"다행히 선생님이 달려와서 일단락 되었죠"

상원은 숨을 몰아쉬며 안도했다 괜히 친구들과 조석희가 싸우게 되어 누군가 다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문제는 그날이 아니었어요 그 다음 날 승완선배가 회칼 들고 석희를 찾아갔거든요"

"뭐?"

"6반은 회뜨는 실습도 하나봐요 흠 아무튼 그날 난리였어요 승완선배가 조석희를 교실에서 칼로 찔러서요"

"......"

상원은 머리에서 피가 가셔 얼굴에 푸른 기가 돌 정도로 해쓱해졌다. 

"아 걱정마세요 조석희도 그 칼을 뺏어서 승완선배 찔렀거든요 그래서 서로 고소는 안하기로 합의 봤대요"

그걸 지금 걱정말라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냐고 후배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 그래서 둘 다 어떻게 됐어"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분노가 아니라 두 사람의 안위였다. 상원은 입술을 깨물고 김이경의 말을 기다렸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죠 그런데 저희 학교 모토 아시잖아요 웬만하면 퇴학시키지 말자. 두 사람 다 근신 징계받고 끝났죠 뭐"

"둘 다 괜찮아? 어디 잘못된 곳은 없지?"

상원은 이경의 팔을 붙들며 물었다. 김이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불운에는 한없이 의연하면서도 다른 사람일, 아니 조석희의 일이라면 이렇게 변해버리는 걸까.

"둘 중 누구요? 한 명만 알려드릴께요"

"무슨 소리하는거야 둘다......"

둘 다 알려달라고 말하려던 상원은 입을 다물었다. 한 명은 자신의 입으로 앞으로 얼굴도 보지 않고 잊어버리겠다고 했던 상대였다. 

"둘 중 누가 궁금해요  선배가 골라봐요"

"....승완이"

"승완 선배 진자 건강체던데요  칼로 복부를 세번이나 찔렀는데  걸어서 병원갔어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얼굴 표정하나 안 변하시더라구요"

"세 번?"

"괜찮아요 조석희도 두번 찔렀으니까"

"....."

"걱정마세요 다음 날 승완선배 병원 탈출해서 컵라면 먹다가 다시 잡혀 들어갔다는 소문은 이미 전설이 되었으니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상원은 친구가 무사하단 소식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아직 묻지 못한 나머지 한명의 안위가 그에겐 남아 있었다. 

"석희는 안 궁금하세요?"

"......"

"키스해주시면 말씀, 아, 알았어요 그렇게 노려보실 필요는 없잖아요 알았어요 가지마세요 말씀드릴게요"

김이경이 몸을 돌리려던 상원의 팔을 잡아 세웠다. 

"석희는 좀 재수가 없었어요 하필 칼이 장을 찢어서 장 파열이 됐거든요 그녀석 운도 다 했나 봐요, 그런거 같지 않아요?"

"뭐라고? 석희 그래서 어떻게 된거야? 지금 괜찮아?"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상원의 눈이 붉어졌다. 파르니 떨리는 속눈썹에는 애절함이 묻어났다. 자신을 위해서는 이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다는 사실이 김이경은 조금 분했다. 

"지금 걷는 것은 무리일텐데"

"뭐?"

"저기 오니까 직접 물어보시죠"

김이경이 손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상원이 몸을 돌렸다. 검은색 차에서 내린 조석희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병색이 완연할 정도로 창백한 조석희를 본 상원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늘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며칠간 눈을 붙이기는 했는지 의문스러운 꼴을 하고 있었다.  조석희가 고개를 들어 상원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상원은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그를 피할 이유도 없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원은 어깨에 가방을 메고 달리고 있었다. 

"상원선배!"

뒤에서 조석희가 상원의 이름을 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조석희가 김이경의 옆을 지나갈때 그가 자신의 발을 밀어 넣은 것은 확실한 고의였다. 조석희가 바닥에 넘어지자 김이경이 한마디 던졌다. 

"꼴좋다"

어떤 상황에 대한 복수인지 그 자리에 있던 세사람 모두 단박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조석희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틈이 없었다. 

"너.....나중에 두고보자"

한대쯤 맞을 각오를 했는데 조석희는 그냥 가버릴 모양이었다 김이경은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라고 혀를 차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석희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뛰어갈뻔했다.  하지만 다시 맹렬한 기세로 후배가 자신에게 돌진하자 그는 힘껏 달렸다. 도로를 지나 사람들 사이를 해쳐 야트막한 어덕이 나올때까지

상원은 달렸다. 체육시간에도 이렇게 달려본 적이 없었던 그는 금방이라도 목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숨을 헐떡거렸다.  언덕을 넘어 철길을 건너면 다리가 있어 그 밑에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를 돌아 조석희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잡혀, 그의 손에 몸이 찢겨지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경찰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 매서운 눈은 정상적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

언덕위를 올라가던 상원은 갑자기 뒤로 몸의 균형이 쏠리는 바람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조석희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였다. 두 사람은 그대로 넘어져 언덕 밑으로 한참 굴러 내려왔다. 상원의 등이 나무 등걸에 

부딪혀 멈추기까지.

"악...."

상원은 고통에 찬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그 위에 올라타 있던 조석희는 숨을 헐떡이며 상원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나한테서 도망가려고?"

"....."

"어디 한번 도망가봐 어디라도 가서 잡아줄테니까"

상원은 아까 전 김이경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챘다. 조석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연락끊고 이런데 와 있으면 ....하아.. 못 찾을 줄 알았어?"

"너...괜찮아?"

숨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거칠었다. 상원이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조석희가 웃었다.

"걱정돼? 그렇게 걱정해주는 척 하더니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그렇게 사라져? 그래놓고 김이경한테 연락을해?"

",,,석희야"

"선배는 좋겠어 당신 좋다는 사람이 아주 줄을 섰잖아 얌전한 척, 그렇게 사람을 홀리는 건가? 김이경으로도 모자라서 김동석, 한승완하고도 붙어먹은거야?"

앞뒤가 맞지 않은 조석희의 말에 상원은 무서워졌다.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하게 번져서 열에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몸의 상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도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우선 너 병원에....."

"닥쳐!"

그가 사납게 소리쳤다. 악을 지르는 듯한 목소리에 상원은 놀라 흠짓. 하고 몸을 떨었다. 

"그렇게 힘든 척 하더니 선배는 이런데서 노닥거리고 있었군 좋았어? 날 싹 잊는다며, 정말 이제 잊은건가?"

"석희야 병원부터 가자 너 지금...."

상원은 배에서 느껴지는 뜨근한 감각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경악을 금치못했다.   상처가 찢어진 것인지 조석희의 배에서 피가 세어 상원의옷을 적시고 있었다. 

"너 피나 빨리 병원가자 응? 빨리 가자"

상원이 조석희의 손을 잡고 일어서려 했지만 마음먹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병원? 가서 뭐하려고 이까짓 상처 뭐 대수라고 아 선배한테는 중요해? 내 몸 좋아했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울음 섞인 상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랑 할때 선배 항상 엄청 느꼈잖아.  미칠 것 같은 얼굴로 나한테 매달렸잖아. 그렇지? 내 몸은 좋아했지? 선배"

그렇게 묻더니 조석희가 자신의 셔츠를 벗어 상처를 덮고 있던 거즈를  떼어냈다. 칼에 찢긴 상처가 드러나자 상원은 시선을 돌려버렸다. 

"선배가 좋아하던 몸이잖아. 이제 이렇게 흠집나서 싫다 이거야?"

조석희가 벌어져 피가 흐르고 있는 상처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상원은 놀라 울음을 터트리며 하지말라고 매달렸다.

"하지마 석희야 빨리 병원가자 빨리"

"상처가 나으면 뭐해 !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은데. 벌레같은 호모새끼 나 싫다는 새끼 하나 때문에 잠도 못 이루는데!"

풀냄새가 진동하는 언덕에 소년이 광기어린 마음을 처음으로 상대에게 내비쳤다.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렀다. 

조석희가 무슨 생각인지 상원의 손을 잡아 끌었다. 

"빨리 병원가자 부탁할게 석희야"

조석희의 억센 손에 끌려가면서도 상원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간청했다.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짙은 분노가 스며 있었다. 상원이 아무리 말을 건네고 손을 잡아끌어도 그는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철도 앞에 선 조석희가 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선배 나 없이 못 산다고 했지"

"석희야...."

상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부르는 목소리가 애달팠지만 조석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했던가. 해말간 이 얼굴을 떠올렸던가. 얼굴을 붉히며 지어보이던 수줍은 미소를 상상했던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원망의 눈동자를 기억했던가. 

상관없다. 지금은 그에게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이것을 놓치고 싶지 않을뿐이었다. 다시 한번 놓치게 된다면 견딜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상원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나직이 말했다. 

"그럼 살지마"

멀리서 들리던 기차소리가 아까보다 가까워져 잇었다. 상원은 조석희를 레일 위에서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점점 시커먼 기차가 찢어지는 경적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조석희는 심상한 얼굴을 하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적막을 쏟아부은 듯한 그의 눈동자를 보며 상원은 울부짖었다. 

"이러지마 정말 왜 그래 왜 나한테 그래 나 없이는 너는 잘 살잖아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내가 선배없이 잘 사는지 어떻게 알아! 기회도 주지 않고 가버렸으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

기차 소리가 점점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상원은 조석희의 손을 붙들고 다시 간곡하게 부탁했다.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이러지마 조석희 제발..."

"왜. 선배 나 없으면 살 수 없다며 그러니까 살지 말라고"

"아니야 석희야 그러지마 정말 시키는 대로 할게"

조석희는 상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화도 받지 않고 집앞으로 찾아가도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없는 번호임을 혹인해주는 기계음을 들었을때 조석희는 알았다. 좋아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모질게 상원이 자신을 밀어냈음을.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찢어질 듯한 경적을 울리며 다가오는 기차를 노려보았다. 

"네가 시키는대로 할게 석희야 믿어줘"

더 이상 레일 위에 서 있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두사람을 발견한 기관사가 제동을 걸었는지 찢어지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급제동으로 무거운 화물기차를 멈추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상원은 조석희를 감싸 안았다. 자신은 죽는다 해도 그가 다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던 것이다. 그 순간적인 행동이 상원의 진실한 마음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조석희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몸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상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향한 상대방의 완전한 애정을 확인한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덧그려졌다. 

우지끈하는 소리와함께 화물차가 레일 위를 밀고 지나갔다. 

"기적입니다."

의사가 침대에서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 환자를 보며 거침없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기적입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둘 다 즉사했을 겁니다. 기관사의 말로는 갑자기 차량이 분리되어 속도가 늦혀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둘 다 밀고 지나갔을 거라고 하더군요 운이 엄청 좋은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조민혁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단순히 운이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들이 기차 사고에 휘말렸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믿기 힘든 행동이었다. 일부러 직접 뛰어들었다면 모를까.

"아드님은 며칠간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셔서 그런지 병원에 이송되자 마자 그대로 쓰러지듯 잠이 드셨습니다. 복부상처는 다시 소독하고 봉합해두었으니 아마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별 문제 없을 겁니다."

"이 학생은...."

"아, 그 학생은...."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면서 조민혁의 눈치를 살폈다. 이 병원에서 10년 넘게 일하면서 그는 환자 전용헬기로 이송되는 광경은 처음 목격한 것이다. 그의 보호자인 조민혁이 병원 로비에 도착했을 때 병원장으로부터 시작해서 각과의 과장들이 줄지어 서서  

그를 맞이했다.

"같이 있다가 사고에 휩쓸린 학생인 거 같은데 운이 없게도 구르면서 어깨뼈와 손목뼈가 부러진 것을 제외하면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다만....."

의사가 다시한번 조민혁의 눈치를 살폈다. 

"....저 손은 아드님께서 기절하면서도 놓지 않아서....무의식적으로 놓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것 같습니다."

두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와중에 놓은 손을 놓지 않고 있는 환자를 설명하면서 의사는 진땀을 흘렸다. 사실, 그들은 왜 조석희의 피를 흘리며 기절을 하면서도 저 손을 놓지 않은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요"

조민혁이 아들과 그 옆에 누워있는 소년을 감정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나가보셔도 됩니다."

의사가 고개를 숙인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자 조민혁은 의자에 앉아 아들과 그 옆에 누워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운이 지나치게 좋아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던 아들이 욕심사나웉 태세로 뭔가를 그려쥐고 있는 모습은 처음 마주하는 광경이었다. 저것 때문에 약혼을 파기해 달라는 얘기를 꺼낸 것일까. 

처음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소년을 찬찬히 뜯어볼 마음이 들었다. 

해사하고 곱다란 얼굴이 아들보다 한참 앳되어 보였다. 친구가 아니라 후배인 건가 하고 입원차트를 들어 확인해 보니 아들보다 한살이 많은 나이였다. 행실이나 성품이 불량하기 짝이 없는 아들과 나란히 누워 있으니 

소년은 한층 더 선량해 보였다. 

하지만 의아함은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에서 아들이 끼고 다니던 파티걸들을 떠올리면 이 소년은 아들의 취향안에 두기엔 너무 심심한 맛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부터 아들이 남자에게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던가. 

약간 골치가 아팠다. 저 못돼 먹은 아들이 또 다른 방향으로 문란해졌다는 생각이 조민혁의 심기를 거슬렸다. 게다가 다짜고짜 미국에 계신 아버님께 전화를 걸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약혼도 파기해 달라는 말을 했으니.....

닥쳐올 후폭풍을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가 고민에 빠졌을 무렵, 누워있던 소년이 의식을 차렸는지 눈을 깜빡거렸다. 

"......"

눈을 뜬 모습이 감고 있던 모습보다 한층 더 선량하고 해맑아 보였다. 조민혁은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석희야"

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었다. 외모가 많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보고 아들의 이름을 부를 정도니.

"나는...."

이 녀석의 애비되는 사람이라고 말을 꺼내려고 했을 때  소년이 활짝 웃어보였다. 

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말갛고 깨끗한 미소였다. 

"....안 다쳐서 다행이다"

"....."

"다행....이다"

목소리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소년은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빠져 들었다. 어깨뼈와 손목뼈가 부러졌다고 했던가 지금 아무리 진통제를 맞고 있다고 해도 통증이 심할텐데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의 무사함에 기뻐하는 것인가.

조민혁은 다시 잠들어 있는 아들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석희가 불면증을 고쳤다는 얘기를 들어 본 기억이 없었는데...

".... 뭐 당분간이라면"

한숨 썩인 중얼거림이 끝나기 전에 그는 조심히 병실 문을 닫고 나왔다 병실에 남겨진 아들은 근 10년동안 봐오던 중 가장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상원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조석희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꿈결에 잠시 보았던 것도 같은데.

상원은 손을 뻗어 조석희의 얼굴을 더듬어 만졌다. 조석희가 그런 상원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손바닥에 와 닿는 부드러운 입술 감촉에 지금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석희야"

"네 선배"

"무사해서.... 다행이다"

어깨뼈가 부서지고 손목이 부러졌는데도 상원은 그 말만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무사해서...."

누구의 무사함을 다행으로 여기는지 조석희는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선배는 괜찮아요?"

"아, 응"

사실 눈을 뜨자마자 이곳저곳 타고 전해오는 아픔에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상원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같이 굴렀는데 선배만 뼈가 부러져요?"

"...하하 그러게"

이럴 때에도 자신의 불운이 돋보이는 것 같아 상원은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조석희가 허리를 숙여 그 붉어진 뺨에 키스했다. 

"그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요"

"...어 ...응"

이것이 다행인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상원은 다시 콧등에 내려앉는 조석희의 입술때문에 정신을 빼앗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조석희가 쪽 하고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물러섰다. 오래간만의 키스에 상원은 눈도 제대로 

마추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조석희가 선배 아래는 괜찮죠? 하면서 환자복 안으로 손을 집어 넣은 것도 동시였다. 

"서,석희야"

"왜요"

".....병실이잖아"

누가 들을 새라 상원이 목소리를 죽여 말한다. 조석희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상관없어요 하고 다시 손을 움직인다. 몸을 피하고 싶어도 어깨가 부서진터라 상원은 꼼짝하지 못하고 그의 손에 가두어졌다. 상원이 신음을 죽이며 몸을 바르작거리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조석희가 문득 물었다. 

"선배 싸우는 거 자신있어요?"

"어?"

갑작스런 질문에 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석희는 갈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빨리 뼈가 붙어줘야 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텐데 아쉽다. 

"앞으로 좀 시끄러울 수도 있거든요... 음 다리좀 벌려 주실래요?"

"무슨... 아 ...잠 ...잠깐만"

상원이 그나마 멀쩡한 오른손으로 그의 환자복 소매를 붙들었다. 그렇다고 그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조석희의 소매에 매달린채  그대로 절정을 맞이했다. 조석희가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동안 상원은 자기혐오에 빠져 침대에 고개를 묻은 채  일어서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녀석을 상대로 2년 가까이 짝사랑을 진행시켜온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그짝사랑을 유지시켜나갈 수 있을 것인지 벌써부터 앞날이 까마득해졌다. 

"선배"

조석희가 침대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는 상원을 불렀다. 

"....왜"

"선배 각오 되었어요?"

"뭐가?"

"제 행운을 나눠가질 각오"

"...."

상원이 놀라 말을 잊지 못하고 눈을 똑바로 뜬 채 오도카니 조석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날 떠나면 선배는 더 불운해질거예요"

"....."

조석희의 말대로 후에 그의 행운이 사라진 자리에 불운이 들어가버릴지도 몰랐다. 여기서 더 운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상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없으면 선배는 아마 살지 못할거야"

나직한 목소리가 주문을 걸었다. 

상원에게 수학의 공식이 적용해 변환된 진실이 전해졌다.

- 나는 선배가 없으면 살지 못해요.

그 다운 고백에 상원은 살그래 미소 지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불운이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손에는 결국 불운조차 남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상원은 자신의 삶으로 걸어 들어온 행운에 손을 내밀었다.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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