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난 후 뽀순뽀순 퀴의 사육 케이스에 고기를 넣어주고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는 상원의 모습을 발견한 승완이 그의 뒤로 스윽 다가왔다.
"너 뭐하냐?"
"응? 아니야"
"아니긴 왜 알렉스한테 중얼거려? 설마...."
승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상원은 속으로 철렁했다. 바퀴벌레를 살려 자신의 악업을 씻고 선업을 쌓으려던 사리사욕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해 하며 상원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설마 알렉스 죽으라고 제사지내는거 아냐?"
"아니야 내가 왜 얘가 죽으라고 제사를 지내. 안그랬어"
"하긴 우리 상원이가 그런 일을 할 애가 아니긴 하지"
승완이 흐믓한 얼굴로 상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처음엔 이방인으로 배척을 받던 상원은 현재는 6반의 자랑이요 양심이요, 지고지순한 미덕의 상징이었다. 머리 나쁘고 성격 포악하고 싸움박질 좋아하고
게으른 한승완은 자신과 180도 다른 상원을 무조건 신뢰하고 아꼈다.
"승완아 노래방 가자"
3분 만에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돌아온 대진이 가방을 들고 소리쳤다. 승완이 질렸다는 얼굴로 대진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특유의 끈질김을 자랑하며
승완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빨리 가자 시발 어젯밤 꿈에 나온 애들 노래 불러줘야 한다고"
"그 꿈이 18세이하 관람 가능한 내용은 아니겠지?"
"미쳤냐 꿈이란 자고로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을 꾸는거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29금 노모 리얼 라이브지"
낄낄거리며 잠시 회상에 잠겼던 대진이 이번엔 상원의 팔을 잡아 끌었다.
"상원아 너도 오늘 노래방가자. 건진이네 삼촌이 노래방이라서 맥주도 깔 수 있고 만원만 내면 무제한이라고"
"미안 나는 오늘...."
"공부할게 남아 있다고?"
대진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나타난 동석이 한마디 거들었다
"공부도 좋지만 가끔 머리 식히는 것도 좋은거다. 너한테 필요한 건 공부가 아니라 릴렉스니까"
"릴렉스? 그건 무슨 종류의 섹스냐?"
대진의 진지한 물음에 상원은 지지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그건 성교의 일종이 아니라 영어 단어야. 이완하다. 긴장을 풀다 정도로 이해하면 돼"
"이 미친 새끼한테는 설명해줘 봤자야. 어차피 다음번에도 릴렉스란 단어를 들으면 섹스라고 떠올릴 테니까."
"내가 무슨 그런 병신인줄 알아! 한 번 설명해준 건 그래도 이해하거든!"
대진이 발끈해서 소리치자 동석이 시크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릴렉스"
"......흠"
대진이 눈을 게슴치레 변하자 동석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한승완이 납두라고 손짓을 했다. 대진의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야한 생각을 야동으로 만들어 팔면 세계 갑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승완은 주장햇다.
그래서 그의 꿈은 사람의 생각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팔 수 있는 미래가 오면 대진과 동업으로 야동 판매업의 대부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가끔 머리 식히는 것도 좋지 않냐?"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맙다."
상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자신의 짝에게 감사의 말을 전햇다 동석이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투덜거리며 교실을 나갔다. 승완이 아직도 머릿속으로 24금
야동을 돌리고 있는 대진을 끌고 동석의 뒤를 따라 나섰다.
야간 자율학습은 철저하게 자율로 선택하는 유일한 반인 6반 학생들이 교실을 나가며 저마다 상원에게 한마디씩 인사를 건냈다.
상원은 다정하게 내일 보자 라는 인사를 하며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상원은 반 아이들의 절대적인 애정을 뽀순뽀순 퀴에게 빼앗겨 요즘 시무룩해
보이는 잉어 마호메트 나폴레옹 레오나르드 다빈치 미켈란젤로 링컨 아인슈타인 관우 장비 뽀순뽀순 잉에게 핑퐁을 주고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오며 문단속을
했다.
가끔 머리를 식혀야 한다는 동석의 의견에 공감하지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상원은 지나치게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빨리 날이 풀려야 하는데...."
복도의 열린 창 사이로 불어드는 아직은 싸늘한 봄바람에 팔을 어루만지며 상원은 복도를 자분자분 걸어나가며 중얼거렸다.
"읏--!!"
몇 번을 해도 익숙해 지지 않는 감각에 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위로 쏟아지는 찬물이 날카로운 두통을 유발했지만 체육이 있는 날이면 땀 냄새가
남아 있을까 기술 실습이 있는 날이면 니스 냄새가 남아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자연스럽게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조석희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쳐야 하기 때문에 상원은 망설임 없이 찬물로 온몸을 씻어내고 머리를 감았다.
집에서 가져와 준비해놓은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고 옷을 입고 나가니 조석희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어 안녕 일찍왔네"
"예"
이렇다 할 형식적인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조석희는 책상 위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손가락을 까닥거릴 뿐이었다. 상원이 수건으로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닦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처음 조석희의 아로마 테라피로 사용되던 날, 상원은 긴장으로 인해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밤을 새본 적이 없는 상원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수업시간을 보내고 도서관으로 오게 되었다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조석희가 손을 까닥거렸을 때 얼마나 떨리던지 상원은 걸어가다가 그대로 꼬
고꾸라져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자 조석희가 한심하단 표정이 눈에 들어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상원은 필사적인 이성을 발휘해
그날 하루 자신의 역할을 몸바쳐 수행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날 만큼 떨리지는 않았지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떨어요"
상원이 턱을 덜덜 떨면서 걸어오자 조석희가 힐끔거리며 물어싿.
"추워서"
"히터 틀어져 있는데요"
찬물로 샤워하고 나온 상원에게 초봄의 날씨는 너무도 잔인했다. 감기에 걸리면 혹시 조석희에게 옮길까봐 고민하던 상원은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에 히터를
틀어 놓는 것으로 도서관의 일과를 시작했다.
"뭘 그리 긴장하세요"
"......."
당연히 긴장되지.
느슨하게 매어진 네 남색 넥타이만 보아도 손끝이 떨려오고 침이 마르는데.
네 앞에 서야 한다니 당연히 긴장이 되지 않겠니.
"제가 선배 잡아 먹는 것도 아니고"
조석희가 손을 뻗으며 던진 농담에 상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지만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마나한 수고였다.
"어라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닌데요"
"아, 알아 신경쓰지마 그냥... 난 원래 이래"
난 원래 별거 아닌 너의 한마디에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놈이야. 라는 고백을 하며 상원은 손을 내저었다.
"먹으라고해도 안먹을 거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조석희가 상원의 팔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확 잡아끌며 중얼거렸다. 저대로 두었다간 여기까지 오는데 적어도 몇 분은 걸릴 거라 생각해서였다.
"맞아 난 먹어봤자 맛도 없을 걸"
조석희의 몸이 닿자 긴장으로 잔뜩 얼어버린 뇌에서 나온 말이다. 자신이 내뱉고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상원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렇겠죠"
조석희가 상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중얼거렸다.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피부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상원은 주먹을 꽉 쥐고, 얼른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도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루종일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가도 정작 조석희의 앞에 서게 되면 치과 의자에 누운
것처럼 눈을 감고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하게 되니.
"그래도 맛있는 냄새가 나긴 하는군요"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에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습기 찬 호흡이 어깨에 닿자 상원이 아, 하고 짧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쉿"
잠을 자기 위한 의례에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않는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한순간만이라도 고혹적인 저 입술에 닿은
손가락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과 치료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눈을 감고 기다리다 보면 끝나기 마련이다. 상원은 조석희가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조심조심 그를 책상에
엎드리게 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늘은 딱 20분이 걸렸다. 조석희가 잠이 드는 시간은 뒤죽박죽이었다. 아무래도 그날의 컨디션이나 기분에 따라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한시간 씩 끌어 안겨 아로마 테라피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상원은 조석희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건너편으로 가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고급 원목으로 짜진 직사각형의 테이블은 성인남자가 하나 누워도 남을
만큼 큼직하고 길었다. 조석희가 엎드려 누워도 반대편에서 책을 펼치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 것에 감사하며 상원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연필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에도 희미하게짜증을 내는 조석희를 본 이후로 상원은 무조건 필기감이 부드러운 펜만을 사용해 문제를 풀었다.
오늘 목표한 분량을 모두 채우고 기분 전환을 할겸 소설책을 읽는 중에 조석희가 잠에서 깨어났다.
"더 자지 않고"
아무리 길게 자봤자 3시간을 넘지 못하는 조석희를 상원은 안타갑게 여겼다. 사실 그 안타가움에 조석희의 옆에 일분이라도 더 있고 싶은 사심이 아예 섞여
있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해요"
조석희가 양팔을 뒤로 젖히고 쭈욱 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볼때마다 상원은 내셔널 지오그래프 속의 앞발을 땅에 대고 등골을 올리며 나른하게 움직이던
표범의 여유로운 자태가 생각났다.
전체적인 분위기나 느릿한 행동거지에서 표범과 조석희를 결부시킬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둘다 사나워서 감히 손대지 못하고 그 아름다움을 눈으로만
감상해야 한다는것이 비슷했다.
"사람 기지개켜는거 처음봐요"
"아니 그냥... 참 길구나 싶어서"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석희는 키도 컸지만 팔다리가 길어 움직임이 아름다웠다.
"선배도 길잖아요 팔"
조석희가 책을 쥐고 있는 상원의 팔을 턱짓하며 가리켰다. 칭찬받은 기분에 상원이 헤헤 하고 웃으며 자신의 팔을 다른 쪽 손으로 쓸어내렸다.
"목도 길고"
조석희의 가느다란 시선이 상원의 목에 매달렸다.
"아하하 뭘"
상원이 손바닥으로 뜨거워진 목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키도 꽤 크신 편이죠 180?"
"좀 안돼. 몸무게는 64정도에서 왔다갔다 하는것 같아 살이 좀 붙어야 하는데 먹어도 잘 안찌는 체질이라 하하"
조석희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기뻐 상원은 묻지도 않는 정보까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외가랑 친가 모두 장신들이라서 내가 작은편이야 더 클수도 있겠지만"
"그러시군요"
조석희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90을 넘기는 키였기에 일어서는 것도 한참이 걸린다는 느낌이었다.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또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선배 소용없지 않을까요?"
"응? 뭐가?"
"그렇게 쳐다보셔도 180 가까이 되는 남자를 안고 싶어지겠느냐 이말입니다."
조석희에 한해선 이해가 느린 상원은 두 번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나서야 그의 비아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조석희란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원망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자신의 운명을 나중에는 성격을...
지금은 키와 몸무게를 원망하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했다.
"...그럴리 없겠지만 내 키가 작았다면"
"하하하하"
조석희가 소리내서 웃었다. 도서관안이 울릴 정도로 큰 웃음이었지만 상원은 도저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아니요 절대"
그가 정색을 하며 한 가닥 남은 상원의 희망을 잘랐다.
"저는 여자가 좋은걸요"
당연한 것을 괜히 물어 자신의 무덤을 팠구나 싶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여자가 바뀌는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남자인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겠는가.
상원은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나긋하게 웃으면서 인사말을 건냈다.
"그래 그럼 잘가 나는 남아서 책 읽다 갈게"
"연락할게요"
상원은 매일 아로카테라피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간 계속 불면증에 시달려온 그는 이틀에 한 번만 숙면을 취하는 정도로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시간 약속을 정하기 위해 조석희는 상원의 핸드폰 번호를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했다.
조석희가 연락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좋은 시간과 날짜를 문자로 보낸다는 의미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는 그문자를
상원은 모두 영구저장해 놓고 심심할때마다 읽어보았지만 그게 모두 소용없는 짓이란 것을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조석희가 도서관 문을 닫고 나가자 상원은 책상위에 몸을 엎드려 누웠다.
그래,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럼에도 조석희가 사라지자 마자 그의 문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때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상원은 퍼득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선배 저예요]
핸드폰을 타고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실망감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상원은 액정을 보고 자신에게 전화한 저예요가 누군지 확인했다.
"응 이경이구나 웬일이야"
[선배 지금 도서관에 계시죠?]
"응 책 좀 읽고 있어"
[잠깐 들려도 되요?]
"당연하지"
솔직한 심정으론 지금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은 학생회장인 김이경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제공한 공간이었다.
손님주제에 주인에게 오지 말라는 말은 할 수 가 없는 것이었다.
[기다리세요]
통화가 끝나자 상원은 주머니에 핸드폰을넣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바로 문이 열리며 김이경이 도서관안으로 들어왔다.
"금방왔네"
"예 바로 앞에 있었어요"
바로 앞에서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심리는 대체 뭘까 싶었다.
김이경이 손에 든 커피를 상원 앞에 내밀었다 학교 앞 큰길에 있는 스타벅스의 로고가 찍혀 있는 종이컵을 보고 상원은 웬것이냐는
눈짓을 했다.
"집으로 가던 길에 커피를 마시다가 선배생각이 나서요 하나 사왔어요"
"집에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네"
대단히 번거로운 일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이경이 의자를 빼서 앉았다. 학교에서 마실 수 없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된 것은 고마웠지만 이런 친절을 받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상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후배를 바라보았다.
"독 안탔어요 드셔도 돼요"
"응 그래 고마워 잘 마실게"
상원이 뜨거운 커피를 호, 하고 불면서 한모금 마셨다. 입안에 향긋한 커피가 들어가자 절로 기분이 따스해졌다.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상원이 컵을 입에 대고 예의바른 후배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선배"
"응?"
"아무한테나 그렇게 웃어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김이경의 공격적인 어조에 상원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자신이 잘못한 것이라면 이해하겠지만 한 번 웃어 보인게 그리
큰 실수인가.
"그런 식으로 웃다니?"
상원이 되물었지만 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뿔테안경속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이다가 이내 평소의 온화함으로 되돌아갔다.
"농담이예요 선배 농담"
"놀랐잖아"
상원이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혹시라도 자기가 웃는게 기분 나빠 보인다면 어쩌나 하는 고민을 하던 차였다.
"요즘 공부는 잘 되세요?"
"응 덕분에"
"별일 없이 무탈하신 거죠/"
별일 없냐는 질문은 한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에서만 유효한 인사말이겠지만 이상원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틀에 한번 정도는 던져도 무방한 말이었다.
"음... 그럭저럭"
잠시 생각을 하던 상원은 한마디로 자신의 그간 일을 무마시켰다.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길에서 넘어지거나, 위에서 화분이 떨어져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거나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하는 등의 시시한 일이야 일상이니
상관없다고 여긴 것이다.
"공부도 잘되고 별일 없으신데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어떤데?"
"우울해 보이세요"
"아하하....."
이래서 김이경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경은 눈치도 빨랐다. 지나치게 빨라서 가끔 몰랐으면 하는 점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어 곤란할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 그런거 없어"
눈을 마주치면 거짓말 하는게 들통날까 봐 상원은 책을 읽는 시늉을 했다. 눈으로 종이에 쓰인 글자를 읽어가고 있었지만 머릿속에 내용이 들어오진
않았다.
"혹시 무슨일 생기면 언제든지 도와 드릴께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도와드릴께요"
학생회장인 이경의 든든한 발언에 상원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후배의 따스한 배려가 마음에 와 닿은 것이다.
"고마워 나는 너한테 해주는 것도 없는데 받기만 하는것 같네"
"부담감 느끼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나중에....."
말을 하려던 이경이 잠시 아차 하는표정을 지었다가 씨익 웃었다 귀족적인 외모 때문에 그의 시커먼 심중은 조금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나중에 선배 잘 되면 맛있는거 사주시면 되죠"
"그래 그럴께 먹고 싶은거 생각해둬"
상대를 의심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상원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흐트러졌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길고 우아한 목이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오뚝한 코를 중심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얼굴때문에 완고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그가 웃으면 누구보다 해사한 얼굴이 되었따 김이경의 눈에 처음 들어온 상원의 모습은 눈커플을 곱게 접으며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질리지가 않는군"
"뭐?"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에 있는 말을 중얼거린 모양이었다. 이경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볼게요 선배 더 계실거죠?"
"응 책좀 더 읽다 가려고"
상원이 한번 책을 손에 잡으면 완결을 볼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 것을 김이경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책장에 상원의 취향에 맞춘 소설책을
빽빽이 준비해두기까지 했다. 그는 상원이 되도록이면 이 도서관 밖으로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상원이 그냥 여기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책이나 읽다 무탈하게 졸업했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박한 첫번째 바람이었다. 쓸데없는 벌레가 붙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두번째 바람. 가끔 싸가지 없는 구제불능의 남자 조석희와 마주쳐서 상처를 받았으면 하는게 세번째 바람, 그 상처를 자신이 보듬어줘 자신이
결국 상원을 천천히 손아귀에 넣는것이 대망의 네 번째 바람이었다.
급할 것도 없었다. 김이경은 자신이 준비한 목줄을 상원의 목에 걸고 천천히 그것을 조여 나갈 생각이었다.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김이경이 나가자 상원은 커피를 들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악마의 열매라 불리던 커피는 우울해 있던 상원의 몸안에 좋은 온기를 전해 주었다.
6반이 가장 활기를 띠는 시간은 체육시간이었다. 희재고에서 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는 시간이기도 했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축구공을 차며
들짐승처럼 뛰어다니는 친구들을 상원은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운동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상원은 그래도 체육시간에는 친구들과 함께 꼭 어울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학교로 오는 길에 넘어져
손바닥이 홀랑 까진 관계로 조용히 스탠드에서 참관 수업을 하고 있었다.
"상원아! 뺘싸! 봤냐? 이형님의 현란한 드리블과 결정적인 슈팅능력을"
대진이 멀리서 달려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체육복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오는 모양이 한 번쯤은 넘어질 것 같았다.
"으악!"
대진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보고 상원은 황급히 달려갔다. 대진을 일으켜 세워주며 상원이 괜찮은지 물었다.
"이정도 쯤이야"
"푸하하 미친 피난다. 존나 쪽팔려"
뒤이어온 한승완이 배를 잡고 웃으며 친구의 부상을 즐거워했다 윤대진이 운동장의 흙을 한 움큼 쥐어 웃고 있는 승완의 얼굴에 뿌렸다. 두사람이 옳다구나
하고 엉겨 붙어 싸움을 시작했다.
상원이 한숨을 쉬며 그런 친구들을 말렸다.
축구시합을 하던 6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두 사람의 싸움을 관전했다. 그 가운데서 팔짱을 끼고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 동석을 발견하고 상원이
도움을 요청했다.
"냅둬, 쟤들은 그냥 저게 노는 거니까."
대진이 날린 로우킥에 다리가 꺽인 승완이 바닥에 쓰러지며 입술이 짖어졌다. 퉤 하고뱉어낸 핏물에 부서진 이빨조각이 섞여 있었다.
"이 새끼 죽인다."
"죽여라 이새끼야"
살벌한 두 사람의 대결 분위기에서도 6반 학생들은 화기애애하게 관전평을 늘어놓았다. 개중 한 녀석이 대진이 뱉어낸 이빨조각의 홀,짝수를 맞추는
내기에 돈을 걸자고 애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정말 안되겠다 생각한 상원이 승완의 팔에 매달렸다.
"이거 놔"
승완이 자신에게 매달린 상원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곰처럼 우악스럽고 난폭한 승완이지만 상원은 그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기에 매달린 팔을 놓지 않았다.
"반칙이야 너 때리려다가 상원이 때리면 나는 애들한테 맞아 뒈지라고?"
상원을 때리지 못하는 것은 대진역시 마찬가지였다. 6반 내에선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야할 존재가 이상원이었다. 물론 상원이 처음부터 그런 존재로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니었다 시도때도 없이 불거지는 폭력사태에 휘말려 중간에 얻어터지기를 수차례 그의 진정성에 감동하게 된 6반은 이상원불가침
조약을 맺고 상원을 다치게 한 자는 다구리에 처한다는 맹세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만해 둘다"
상원이 대진을 보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대진이 자신에게 골 넣은 것을 자랑하러 오다 발생한 일이었기에 상원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었다.
"너 오늘 상원이 때문에 산줄 알아"
"너야말로"
대진과 승완이 손을 맞잡고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하지만 웃고 있는 두사람의 얼굴에선 곧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발견한 상원이 억지로 그 사이에
몸을 던져 손을 놓게 만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이 맞아버린 대진과 승완이 자신들의 팔뚝 위에 얹고 꽃가마 놀이를 시작했다.
"으악 하지마 어지러워"
"으하하하 꽉잡아 날아간다"
대진이 입으로 비행기 엔진 소리를 내며 상원의 몸을 옆으로 흔들었다. 승완이 눈짓을 하자 두사람이 상원의 몸을 공중으로 부웅 띄었다.
6반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상원의 몸을 받아냈다.누가 먼저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상원의 몸을 공중에서 헹가레 쳤다.
이럴 때만큼은 대동단결이 잘 이루어지는 6반이었다. 상원이 내려달라고 통사정을 하자 5번쯤 공중에서 띄운 후에 내려줬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리는 상원에게 대진이 어깨를 빌려주었고 모두들 낄낄거리며 즐거워했다.
"재미있지?"
"응 그런데 어지러워"
대진의 어깨에 기댄 채 상원이 웃음 지었다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져 있어 상원의 눈웃음을 치면 어른스러운 그의 인상이 귀엽게 변했다 대진이 넋을
잃고 그런 상원의 웃는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조심해.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진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대진보다 반사신경이 둔한 상원은
목소리의 방향을 확인하느라 고개를 드는 바람에 날아온 공을 정면으로 맞고 말았다.
"상원아!"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동석이었다. 반장인 승완도 놀라서 쓰러진 상원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아.... 아프다"
상원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헉 괜찮아?"
"코피 많이 나냐? 코 다친 건 아니지?"
"양호실 가야 하는거 아냐?"
코피 따위 심심하면 서로 터트리는 것이 일상인 6반아이들이지만 상원의 피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괜찮아 좀 있으면 멎을 거야"
코가 얼얼한 것이 제법 부은 것 같았지만 상원은 웃으며 친구들을 안심시켰다.
"어떤 놈이 공도 하나 제대로 못 던져!"
한승완이 농구공을 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저쪽에서 누군가 당혹스런 얼굴로 달려왔다.
"선배 괜찮으세요?"
"....김이경?"
코를 막은채였기 때문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났다. 후배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은 상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바닥으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야 인마 고개들어"
동석이 상원의 목을 누르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니가 던진 공이냐?"
한승완이 농구공을 들고 살벌하게 김이경을 노려 보았다. 승완은 6반 내에서 뿐만 아니라 희재고 전체, 아니 같은 재단의 6개 학교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머리가 나쁜만큼 그는 무식하게 두들겨 팼다.
"죄송합니다 패스를 잘못하는 바람에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김이경이 깍듯하게 사과를 건네며 허리를 숙였다. 같은 학교 학생이었지만 6반은 희재고 내에서 특수학급 취급을 받았다. 겉으로는 예의를
차려도 뒤로는 선배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6반 아이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생회장인 김이경의 공손한 태도에 승완은 어느정도
화가 누그러졌다.
"앞으로 공던질 때는 조심하라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선배님들 죄송합니다."
"괜찮아 금방 멎을거야 공 맞은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상원이 아끼는 후배가 무안하지 않게 편을 들어주었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코피가 흘러 그의 체육복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버렸다.
체육 도구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잇던 체육선생이 멀리서 소란을 확인하고 6반 아이들에게 빨리 운동장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모여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제가 양호실까지 데려다 드릴께요 선배"
이경이 허리를 숙여 상원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상원이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나랑 같이가"
그렇게 말하는 대진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상원의 옆에서 그가 공에 맞는 것을 막지 못한 최책감때문이었다. 저멀리서 체육이 빨리 운동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악을 썼다. 한번 화가나면 몽둥이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휘두르는 체육선생의 성정을 아는 상원이 친구들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코피가 나서 양호실에 잠깐 간다고 말씀좀 대신 해줘. 부탁할게"
상원이 그렇게 말하자 동석과 대진 승완은 운동장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랑 둘만 남았네요"
김이경의 뜬금 없이 상원은 갑자기 언젠가 들었던 피에로 괴담이 떠올랐다 아이와 단둘이 남겨진 피에로가 입맛을 다시며 아이들에게 했던 말이
저것과 비슷햇는데 익살스러운 피에로의 입술과 하얀 얼굴이 떠오른 상원은 시답지 않은 자신의 생각에 피식 웃었다.
"왜 웃으세요 혹시 머리 다치신 거 아니에요?"
"설마 괜찮아 걱정 안해도 돼"
"제가 데려다 드릴께요"
"코피좀 나는 것 같고 그러지마 내가 다 부끄럽다. "
상원은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한번 자신이 내뱉은 말은 왠만해선 꺽지 않았다. 물러서야 하는 타이밍을 잘 아는 김이경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정말 죄송해요"
"됐다 됐어 나 그럼 갈게"
거기서 후배의 계속되는 사과를 받기도 민망하다 싶어 상원은 재빨리 수도가로 가서 얼굴부터 씻었다. 양호선생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체육복을 보니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상원은 체육복을 벗어 수도가 위에 올려두었다 안에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 먼 농구코트에서 스탠드까지 잘도 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보다 이경이 힘이 좋구나 싶었다. 얼굴을 씻고 나니 옆에서 누군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고마워"
상원은 자신을 따라온 친구 중 하나라 생각해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인사부터 했다. 피가 어느정도 멎어 손수건으로 막고 있으면 괜찮을 거란 생각에
상원은 망설임 없이 손수건을 코에 가져다 대었다.
"다쳤어요?"
"...!!"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상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옆을 바라보았다. 체육복을 입고 있는 조석희가 옆에 서 있었다. 그러고보니 2학년 S반도 체육관에서
실내 체육을 하는 날이었다.
"실내체육 아냐?"
"답답해서 잠깐 나왔어요 그런데 저희 반 실내체육인것은 어떻게 아세요?"
.......2학년 S반의 시간표를 다 외워버린 사실을 들키고 싶지않았는데
상원은 자신의 철없는 입을 저주하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하하...하"
웃으면 웃을 수록 스스로가 비참해지기만 했다. 조석희가 상원의 얼굴을 손으로 살펴보고 인상을 썼다. 인상을 쓰는 모습도 끝내주게 멋지구나. 하고
생각하는 상원에게 그가 의외의 말을 던졌다.
"양호실 가세요"
"그. 그러려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한번도 받아 본적 없는 조석희의 친절에 상원은 몸둘바를 몰라 했다. 조석희가 상원의 손에 들려 있는 손수건을 빼앗아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상원은 숨을 멈추고 그자리에서 조각같은 후배의 얼굴을 올려다보앗다.
"선배 걱정해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
"피냄새 질색이라서"
조석희가 손수건에 다시 물을 묻혀 상원의 얼굴을 말끔하게 닦아주었다.
조석희의 말에 상원은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돌이켜 떠올렸다.
수면용 아로마 테라피로 이용되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스스로의 몸을 좀 더 신경써야 겠구나 하지만 아로마테라피일지라도 조석희가 신경을 써주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이경아 공 던져줘서 고마워, 그걸 또 얼굴로 받아낸 자신도 고마워.
"안가세요?"
"어? 어 응 가야지"
상원이 조석희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내려다 보았다.
"빨아서 줄게"
"됐어요 버릴 거니까"
"왜 버려 아까운데"
조석희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스쳤다.
100만원 짜리 병원검사를 365일 매일 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갑부집 아들에게 손수건 한장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지 떠올린 상원은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자신의 집도 제법 괜찮은 측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상대의 수준은 감히 상식적인 잣대로 잴 수가 없었다.
"뭐해요 안가고"
조석희가 상원의 코를 손수건으로 막아주었다. 그리 다정하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상원은 오늘 자신에게 농구공을 던져준 이경에게 벌써 열번쯤은 고맙
다는 인사를 하고 있었다.
상원은 손수건을 한손으로 쥐고 본관에 있는 양호실로 향했다 그런데 체육관 방향으로 틀어야 할 조석희의 발걸음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느낀 상원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조석희가 눈썹을 치겨 올리며 왜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체육관 저기인데"
"설마 제가 길을 잃었을까 봐 알려주시는 거예요?"
괜한 간섭말고 니길이나 가라는 뜻이었다.
상원은 하는 수없이 복도를 지나 양호실로 걸어갔다. 양호실 문을 열 때까지도 조석희는 뒤를 따라왔다.
"상원이구나 오늘은 또 어디가 다쳐서 온거니?"
다양한 사고와 상처를 자랑하는 상원은 양호실 단골 손님이었다.
"공 맞아서요"
"무슨 공"
"....농구공이요"
"야 축하한다. 이제 공은 다 패스했구나"
양호선생님의 농담에 상원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조석희를 뒤에 두고 굳이 자신의 불운을 잘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조석희 너는 또 왜"
"머리 아파서요"
양호실에 찾아오는 녀석들은 두가지로 나뉜다. 아픈 녀석과 그렇지 않은 녀석 , 후자는 전자로 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꾀병을 부렸다
전자와 후자를 구별하는 기술은 양호선생에게 필수 조건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이녀석은 굳이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어는쪽에 속하는지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고?"
'네"
조석희가 양호실 구석에 있는 간이 침대에 걸터앉아 평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태도나 표정어디에서도 두통에 관련된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상대를 속일 마음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파 죽겠는데요"
저런 뻔한 거짓말에 과연 누가 속아 넘어가나 싶었다.
"머리아파? 두통약 찾아줄까?"
"....."
그런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인간 하나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양호선생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상원에게 솜과 소독약을 건냈다
양호실 단골인 상원에겐 이정도 상처는 눈감고도 처리할 수준이었다.
"너는 니 걱정이나 해라. 나 볼일 있어서 문잠그고 나갈 테니까 열쇠 어디 있는지 알지?"
"네 선생님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피곤하면 좀 자다가렴"
"아니에요"
양호 선생이 나가면서 조석희에게는 타이레롤 한통을 건냈다.
"넌 이거 먹고 나가"
양호 선생의 쌀쌀맞은 태도에 당황스러운 것은 조석희가 아니라 상원이었다. 그녀가 양호실을 나가자 상원이 컵에 물을 따라 조석희에게 건냈다.
"먹어 두 개 정도면 괜찮을 거야"
"니 걱정이나 하라는 선생님 말 못들었어요?"
상원은 조석희 앞에 물 컵을 내려놓고 혼자 조용히 치료를 시작했다. 소독을 하고 코에 솜을 쑤셔 넣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조석희는 나갈
생각이 없는지 약통을 손에 쥐고 침대만 두드리고 있었다.
"약 안먹어?"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상원은 다시금 물었다. 그러자 조석희는 약통의 뚜껑을 돌려 연 다음 손바닥에 약을 한 웅큼 쏟아냈다.
말릴 새도 없이 그것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마시는 모습에 상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걸 다 먹으면 어떡해 너 큰일나"
"타이레놀은 몇 개를 먹어도 똑같아요"
입에 남은 알약을 씹어 삼키는 조석희를 보고 상원은 자신이 쓴맛을 느끼는 것처럼 인상을 썼다. 조석희가 일어서서 문가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상원은 자신도 따라 나가려고 했다 손잡이 위에 달린 잠금장치가 철컥하고 잠기는 소리가 상원의 걸음을 가로 막았다.
"자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이었지만 상원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 지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나 코피도 흘리고 엉망이야"
"상관없어요"
조석희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방 안쪽으로 걸어갔다. 상원은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다. 흰색 시트가 깔린 침대위에
조석희가 신발을 벗지 않고 누웠다. 상원은 그 앞에 오두커니 서서 자신에게 내려질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으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상원은 가끔 이런 식으로 조석희가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 몹시 좋았다. 조석희의 존댓말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기 보다 거리감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원은 조석희가 누워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손으로 코피가 나오지 않게 코를 누르고 .
조석희가 상원의 목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 당겼다.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은 상원은 그대로 침대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좁은 침대에 남자 둘이
누워 있다는 생각에 상원의 얼굴은 또다시 잘익은 사과가 되고 말았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코피가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감정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없는 조석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달콤한 손길도 다정한 말 한마디도 없었다.
하지만 상원은 조석희가 숨을 쉬는 것을 자신이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들러붙지 마요 기분 나쁘니까"
"..... 응"
소박한 행복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지만 상원은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었다. 몇 달 전에는 조석희 몸에 닿기는 커녕 가까이에서 말을 나누는 것
조차 생각지 못햇는데 면박 받고 무시당하는 것이 90%이상을 차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석희의 숨소리가 고르게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상원은 고개를 들어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자신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양호실 밖으로 걸어 나가도 무방비하다. 아니 나가야했다.
과연 앞으로 몇 번이나 조석희가 잠든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최대한 많은 시간을 그의 옆에서 보내고 싶다는 헛된 욕심 한자락이 생긴다.
상원은 한참을 조석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6:00 PM 도서관]
상원은 짧은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던 동석이 무슨 일이냐는 듯 시선을 던졌다.
"아무것도 아냐"
"연휴 때 뭐 할거야"
개교기념일과 놀토가 연이어져 희재고에는 때 아닌 연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윤대진은 2박 3일 동안 쉬지 않고 야동을 관람하며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고 한승완은 건립일이 같아 같이 연휴가 생긴 근방 육시랄고 학생들과 행복한 패싸움을 계획중이라고 밝혔다.
"그냥 공부해야지 별거 있나"
"시시하긴"
"그러는 넌?"
"글쎄 하루 정도는 윤대진네 집에 가서 야동구경, 하루는 승완이랑 같이 싸울테고 하루는 아버지한테 얻어터지면서 운동?"
동석의 익살스런 농담에 상원은 그게 뭐야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밝아진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동석은 그제야 안심했다. 오늘 아침부터 짝의 머리위에
먹구름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복잡하면 가끔 공부는 멈추고 기분 전환좀 해라. 그러다 미친다. 우리 옆집 고시생도 공부만 하다 미쳐서 매일 속옷차림으로 조깅하잖아"
뼈가 썩인 농담에 상원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요즘 자신의 기분이 하루에도 열두번씩 변하니 주변에서 이상하게 여길만도 했다
오늘만 해도 콧노래를 부르다 등교를 하다 차에서 내리는 조석희를 보고 아침 일진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자동차 도어 유리가 열리고 피부가 까만
라틴계 미인이 긴 팔을 뻗어 조석희의 목을 끌어 안고 뜨거운 키스를 퍼붓기 전까지.
교문 앞은 삽시간에 벌어진 뜨거운 러브신에 소란스러워 졌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조석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영어로 그녀에게 밀어를 속삭인뒤 교문을 지나 당당히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원은 아침에 보았던 광경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마음으로 조석희를 만난다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지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짝사랑 하는 입장이라도 오늘같은 날은 만남을
피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생각"
상원의 대답에 동석이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원은 욕심이란 단어와는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원은 욕심이란 단어와는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상원이 욕심을 좀 부려서 자신의 이익을 좀 차렸으면 하고 바랐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을 정도였으니.
"넌 욕심 좀 부려도 돼"
"...그런가"
"욕심이 너무 없으면 사는 게 좆같아지는 거야 욕심은 국에 들어가는 소금이야. 너무 쳐넣으면 윤대진 처럼 입에 넣기도 싫어지는 상태가 되지만
없으면 아무리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르게 되는 거라고"
상원은 동석을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철학은 소탈했지만 나름의 진리를 담고 있었다. 상원이 동석의 손을 잡고 흔들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고마우면 음료수나 하나 사. 나 목마르니까"
"알겠어 그럴게"
상원은 주머니에서 천원짜리를 꺼내며 생각했다.
오늘만큼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자고,
돌아오는 길에 상원은 핸드폰을 꺼내 조석희에게 오늘은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답문은
오지 않았다.
터덜터덜 학교를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조석희에게 문자를 보내놓은 상태라 수업이 끝나자 마자 상원은 가방을 싸서
학교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별관 구석에 있는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양심상 학교에 머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시간에 집에 간다면 어머니께 괜한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서 집으로 가지도 못했다. 상원은 근방에 있는 커피 전문점으로 가서 커피를 사서 2층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집중력이 좋은 편이었지만 주변의 모든 소음을 무시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상원은 가방에서 아이팟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좋아하는 노래만 모아놓은 폴더를 클릭해 음악을 재생시키고 상원은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상원의 문제집을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들자 김이경이 반갑다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어 네가 여기 웬일이야?"
"커피나 한잔할까 했는데 선배가 보여서요"
김이경이 커피 전문점의 전면 유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상원은 후배의 눈썰미에 놀라며 앞에 놓인 의자를 빼내어 주었다.
"앉을래?"
"네 그러죠, 그런데 선배는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도서관은 어쩌시고?"
"답답해서 기분전환하려고 "
"기분전환이 커피 전문점에서 수학문제집 푸는 거예요?"
"별수 있나 시험도 얼마 안남았는데"
대학입시에는 또 어떤 말도 안되는 불운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상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같이 공부할까요?"
"응 나야 상관없지만..."
"저도 상관없어요"
모 대학교수로부터 받은 한 번에 백만원짜리 수학과외는 미룰 수도 없는 것이었다. 김이경이 기꺼운 마음으로 그걸 재껴야 겠다고 마음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방 좀 가져올게요"
"가방?"
그러고보니 교복을 입은 김이경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경이 큰길에 세워진 벤츠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기사님이 차를 저쪽에 세워놔서요, 저도 커피 주문해가지고 올게요"
이놈이나 저놈이나 별세계 왕자님이었다. 계단아래로 내려가는 후배의 뒷모습을 보며 상원은 요즘 부쩍 김이경과 자주 마주친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연이겠지.
상원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방금 전까지 풀고 있던 문제지에 다시 집중했다. 해답을 내기 직전에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의 이어폰 한쪽을 빼내었다.
"금방 왔네?"
상원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미소가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초도 되지 않았다. 조석희가 상원의 이어폰 한쪽을 자신의 귀에 대고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누구"
"응?"
"이거 누구냐구요"
조석희가 이어폰을 흔들어 보였다. 흘러나오는 음악이 누구의 것인지 묻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원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팟의 액정화면을 확인했다.
"에...피톤 프로젝트라고 우리나라 가수야"
"흐음"
조석희가 이어폰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상원은 다시 그걸 귀에 꽂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약속을 파기할 만큼 급한 일이 고작 커피전문점에서 혼자
앉아 노래를 들으며 문제집을 푸는 것이라니 처량한 만큼 부끄러웠다.
"hey, sweetie"
커피를 들고 있는 여자가 조석희를 불렀다.
.....아침엔 라틴계 저녁엔 금발이냐. 그것도 둘다 슈퍼모델급.
조석희가 여자에게 영어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충격에 빠져 있는 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자신의 커피를 들고 김이경이 올라왔다.
"아침엔 흑발아니었어?"
이경이 조석희 뒤에 서 있는 금발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사람 사이에서 충분히 오고갈 수 있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김이경을 발견한 조석희의 표정에는 희미한 짜증이 서려있었다. 김이경이 상원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자 그의 표정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선배 케이크 좋아해요? 드시면서 공부하세요:"
"어? 응 ..그래"
김이경이 자신에게 치즈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지만 상원은 그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하필 여기서 두사람을 모두 만날 건 뭐란 말인가.
저기 앞에 있는 할리스 , 길 건너편 엔젤리너스 조금더 가면 커피 빈도 있잖아!
상원은 뭐라고 변명이라고 해야겠단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석희였다.
"중요하고 바쁜일?"
그의 손가락이 김이경을 가리켰다. 고개를 내젓기엔 이미 강을 건넌지 오래였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빠른 영어로 조석희에게 불만을 늘어놓았다. 조석희는 상원을 힐끗 쳐다본 후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른채 사라졌다.
"뭐가 중요하고 바쁜일이예요?"
김이경이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묻는다. 상원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소금을 한 티스푼 넣었을 뿐인데. 요리를 망쳐버린 기분이었다. 상원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지만, 조석희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조용하고 무거운 연휴가 예감되었다.
연휴가 끝난 월요일에 늦은 봄비가 내렸다. 대지의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고 건조한 대기를 촉촉히 적시는.... 비가 되어야 했지만 오늘 내리는
비는 강풍을 동반한 소나기였다. 자신이 나오자 빗줄기가 두배로 거세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상원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두 손으로 우산을 꼭 쥐었음에도 앞으로 걷는것이 힘들었다. 게다가 운이 없게도 아니 이 정도로 운이 없다는 표현을 쓰면 안될 것 같지만,
아무튼 오늘따라 만원버스 인파에 밀리는 바람에 한 정거장 전에 내리게 된 것이다. 덕분에 상원은 과연 우산을 쓰는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흠뻑 젖어버렸다.
"으앗!"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치고 지나가던 차 때문에 상원은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불어버린 돌풍 때문에 우산이 휙 하고
뒤집어 졌다. 교복에 튄 흙탕물과 뒤집어진 우산 사이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원을 향해 아까 지나갔던 차가 후진으로 다가왔다.
"학생 괜찮아?"
은색 외제차의 유리도어가 내려가고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냥 지나가도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데, 상원은 흙탕물을
뒤집어 썼다는 원망보다 고마움이 앞섰다.
"괜찮아요 어차피 다 젖었는걸요"
"희재고로 가는거죠? 태워다 줄게요"
미인의 상냥한 제안에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시트가 더러워 질거예요"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가죽 시트에 냉큼 올라갈 만큼 상원은 뻔뻔하지 못했다.
"그런 걱정말고 그냥 타세요"
"괜찮습니다"
"괜찮다잖아 그냥가"
낮익은 저음에 상원은 그제야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조석희였다.
"그래도 나때문에 젖은건데"
얼굴만큼 마음씨도 고운 미인이었다.
"데려다 주고 병원가봐야 하는거 아냐? 아침에 회진 돌아야 한다고 해서 일찍 깨웠잖아"
조석희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 말하자 여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찍 깨웠다는 말에 상원은 혹시 두사람이 닮지 않은 오누이나 친척관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저 멀리 내던질 수 있었다.
"미안해요 드라이클리닝 금액이라도 드릴까요?"
"정말 괜찮습니다. 먼저 가보세요"
상원이 웃으며 말하자 여자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손수건으로 닦아낼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였지만 이것마저 거절하긴 힘들겠다
싶어 그냥 받아들였다. 여자는 다시한번 미안하단 사과를 건네고 자동차 유리를 올릴때까지 조석희는 끝내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차가 중후한 엔진소리를 내며 멀어질때까지 상원은 그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질투라는 말을 사용하기엔 벅찬 감정이었다.
그냥 슬플 뿐이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소매로 닦아내고 상원은 다시 분주하게 걸음을 옮겼다 간신히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바지밑단으로 빗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나마 자신에게만 닥친 불행은 아닌지 6반 아이들도 여기저기서 짜증을 내며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상원도 가방을 내려놓고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가져왔다. 꽁꽁언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푸르고 있을때 뒷문에서 한 녀석이 상원을 불렀다.
"이상원 호출"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과연 누가 있나 싶어 상원은 고개를 돌려 뒷문을 확인했다......또 조석희였다.
오늘은 아마 이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배"
조석희가 그를 부르며 손짓을 했다. 선배라고 부르고 있지만 누가봐도 그건 아랫사람 거느리는 상전의 태도였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된 동석이 잔뜩
인상을 쓰고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저 싸가지 없는 새끼는 어린 놈이 새끼가 누구보고 오라가라야"
상대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주눅드는 법이 없었다. 170 도 안되는 키에 작달만한 체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시당하지
않는 법을 동석은 알고 있었다.
"선배님한테 드린 말씀은 아닌데요"
조석희가 동석을 바라보며 느릿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의 눈에 불쾌함이 스친 것을 감지한 상원은 얼른 동석의 팔을 잡아 말리고 뒷문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교실까지 다오고"
"도서관"
조석희가 짧게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상원이 교실 뒤에 걸린 시계를 보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20분 후면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조금 후에 수업 시작할 텐데"
"제가 끌고 갈까요 아님 선배 발로 가실래요"
상원은 조석희의 신경이 유난히 날카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교기념일 때문에 금요일부터 놀토를끼고 삼일간 연휴였던 것을 떠올린 상원은 그제야
조석희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성격이 더러운 인간이었지만 수면 부족일때에는 성격이 더럽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잠깐 나 옷만 갈아 입...."
교복을 마저 벗고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상원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뒤에서 뻗어온 손이 상원의 목을 끌어안듯 잡아챘다.
"그냥 벗어 내 옷 줄테니까"
".....!"
거절하기도 전에 조석희가 자신이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어 상원의 몸에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상원을 그대로 질질 끌고 걸어갔다.
동석이 교실에서 바로 뛰어나왔지만 상원은 괜찮다는 손짓을 해보였다.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하나 둘씩 두 사람을 흘깃 거렸다.
조석희와 이상원
상상해본 적 없는 조합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조석희는 넥타이를 풀어 던졌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걸터 앉아 상원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나 비 맞아서 .... 일단 샤워부터 하고 올게"
"됐어요 그냥와"
"냄새날지도 모르는데"
"그냥 오라고!"
상원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조석희가 shit이라고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사흘간 잠을 자지 못한 것이 이전에는 그리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불면증이 가장 심했을 때는 일주일 동안 두시간 채 잠을 못잔 적도 있었다 그때 잠을 자려고 무슨 방법을 썼는지 지금은 떠오르지 않았다.
통화목록에 있는 여자중 아무한테나 전화를 걸어 밤새 섹스를 했지만 잠이 오기는 커녕 머리가 더 아플 뿐이었다. 빨리 잠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학교로 오던 길에 비에 젖은 상원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 욕구는 완벽히 그를 지배했다. 조석희가 상원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들고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교복셔츠의 물내음이 체취를 가리자 조석희는 억지로 상원의 옷을 끌어 내렸다.
"아 잠깐...잠깐만"
"바둥거리지 마요 짜증나니까"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에 고개를 대고 중얼거렸다. 미약과도 같은 향이었다. 이것을 다른 사람과 그것도 김이경과 약속 때문에 며칠 간 맡지 못햇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울컥 치밀었다.
조석희는 일부러 상원의 어깨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상원이 아프다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그는 상원의 채취를 들이마시며 숨을 골랐다.
맨살에 직접 닿는 조석희의 감촉에 상원은 그야말로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였다. 애국가를 일절에서 사절까지 불러도
떨쳐낼 수 없는 슬픈 본능이 상원을 괴롭게 했다.
"뭐야 선배 흥분했어요?"
바싹 끌어안긴채 자신의 욕심을 채우던 중이었기에 조석희는 바로 상원의 몸상태를 눈치챘다. 상원이 홍옥보다 더 새빨개져 조석희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팔을 풀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예요?"
짖궃은 속삭임에 상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계속 힘을 주어 빠져나가려 바둥댔다 그럴수록 조석희는 손아귀의 힘을 더할 뿐이었다.
"걱정해 주는 척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만 하시는군"
"아니야 난 진짜 네가..."
눈이 마주쳤다.
네가 너무 걱정되서 그래. 라는 말은 목 근처에서 머물다 심장으로 다시 스며들어갔다.
"좋아요 나도 아침에 제대로 못했으니까"
"....??"
조석희가 손을 놓아주자 상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는 것은 그 다음 행동으로 알게 되었다.
조석희가 상원을 책상아래 무릎 꿇게 한 후 퍼스너를 내렸다. 이전에 한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 후로는 두사람 모두 그에 관한 것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상원에게 그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빨고 싶죠?"
"아니야 나는...."
"선배 내것 빨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늘 쳐다보고 있잖아"
조석희가 상원의 턱을 쥐고 말했다. 머리로는 그 말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상원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눈을 하고 조석희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말을 과연 자신있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어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눈을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게다가 분명 자신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조석희에게 흥분한 상태가 아니던가.
"빨아"
조석희가 명령하듯 상원에게 말했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턱을 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그것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입벌리라고"
조석희가 재차 상원을 재촉했다. 살벌하고 건조한 목소리에 스며든 분노가 자신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아 두려웠다. 상원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대책이 서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상원이 입에 페니스를 문채 자신을 올려다보자 조석희가 나른한 눈을 하고 혀를 사용하라고 말했다.
상원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혀를 사용해 곧추선 살덩이를 빨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힘들정도로 두께가 더해지자 구멍으로 쿠퍼액이
흘렀다. 남자라면 알 수 있는 특유의 냄새와 맛에 상원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조석희가 쓰게 웃으며 한쪽발로 상원의 다리 사이를 꾸욱 눌렀다.
"선배 흥분돼요?"
"...!!"
얼굴은 물론 목덜미까지 달아오른 모습을 조석희는 위에서 즐겁게 내려다 보았다. 조석희가 상원을 일으켜 세웠다.
"선배 흥분하면 체향이 진해지네요"
그가 상원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말했다. 상원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아까보다 한층 체향이 진해져 있었다. 조석희는 상원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그의 교복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
상원이 기겁을 하며 몸부림쳤지만 애당초 상대가 되지않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조석희가 상원의 것을 손에 쥔 채 힘을 주며 으르렁거렸다.
"좋아서 어쩔줄 몰라 하면서 순진한 척 그만해요"
"아....파"
살짝만 쥐어도 저릿저릿할 정도로 민감한 부위였다. 그것을 힘껏 움켜쥐고 있으니 눈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하하 수그러들었네"
"놔줘 제발....."
놔달라고 해서 놔줄 위인이 아니었다. 조석희는 상원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벽에 몰아 세우고는 손을 움직였다. 힘없이 수그러들었던 살덩이에 다시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상원은 입술을 깨물고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아... 읏"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원은 가느다란 신음을 내며 조석희의 팔에 매달리고 말았다. 조석희가 큭큭 거리며 상원의 목덜미를 혀로 핥았다.
"선배 표정 진짜 야한거 알아?"
"읏...응"
"혼자 순진한 척은 다하시더니.... 몸파는 년들보다 더 야한 소리를 내는군요"
조석희가 흥분하기 시작한 자신의 것을 상원의 다리 사이에 대고 한 손으로 그러쥐었다.
딱딱한 성기에 부딪혀 오는 느낌, 남자의 손바닥이 스치는 느낌 눅눅한 피부에 전해지는 느슨한 호흡과 목소리, 미칠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몇 번 자신의 손으로 달랜 경험은 있었지만 맹새코 상원은 이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처음 겪는 엄청난 성적 쾌감에 상원은 석희의
팔에 매달려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흘렸다.
순진하고 올곧은 상원의 흐트러진 모습이 남자를 자극했다. 발음이 명확하고 청명해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욕망에 젖어 신음만을 내뱉고 있었다.
그 소리와 야릇한 체취가 섞여 조석희를 흥분시켰다.
그는 단단하게 부푼 살덩이를 겹쳐 손에 쥐고 손의 움직임을 빨리했다. 상원이 거의 울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상원은 어깨를 떨면서 희뿌연 정액을 토해냈다. 조석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상원을 향해 몸을 바싹 들이대고 사정을 했다 교복 바지가 벗겨져 드러난
다리 사이로 다른 남자의 정액이 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상원의 시야는 그대로 어둠에 점령당했다.
시야에 빛이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던 상원은 자신이 도서관바닥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 위에 덮어져 있던 스웨터를 발견하고 상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석희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조심조심 일어나 상원은 조석희의 겉으로 다가갔다.
몇번을 봐도 끝내주게 잘 생긴 얼굴, 저렇게 생겼으니 라틴계미인이건 이지적인 여의사건 넘어가는게 당연하지.
그래도 이렇게 자는 모습은 자신만 볼 수 있단 생각에 상원은 기분이 조금 누그러 들었다.
조석희가 깨어나기 전에 빨리 나가야겠다 싶어 상원은 벗겨진 셔츠를 찾아 주섬주섬 입었다. 단추를 채우고 있는데 뒤에서 뻗어온 손이 상원의
허리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
"가지마 잠 좀 자게"
잠꼬대 인가 싶어 손을 풀어보려 했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걸 어쩌나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상원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헉..."
아침 보충 수업을 땡땡이친 정도가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대체 몇 시간 동안 저기 누워서 기절한 것인가 상원은 속으로 계산했다.
"보충해요 누구 덕분에 사흘간 한숨도 못잤으니까"
"....내탓은 아닌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런 논리가 통한다면 조석희는 조석희가 아니었다.
조석희는 상원의 날개뼈 부근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아까 잔뜩 흥분했을 때 났던 체향도 좋았지만, 평소 상원의 몸에서 나는 체취에 두통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선배가 나 좋아하는거 허락해줫잖아요 내 것도 빨게 해주고"
대단한 인심이라도 베푸는 말투였다.
"선배 기분좋았잖아요"
"....."
그걸 또 부정 못하는 서글픈 짝사랑 소년 A였다.
"점심시간 끝날때까지만 옆에 있어요"
".....응"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상원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조석희가 그의 허리를 끌어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몸에서 그의 손이 떨어져나가자 상원은 아쉬움을 느꼈지만 그걸 표현해내진 못했다
"앉아 있을게"
조석희가 눈도 뜨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상원은 그의 앞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선배"
"응"
"상부상조하고 살자고요"
조석희의 말에 상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부상조의 뜻을 떠올렸다. ....여기에서 과연 그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 맞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조석희는 외국에서 학교를 나와서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것일수도 있으니 상원은 굳이 자존심 상하게 지적하지 말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리고 급하고 중요한 약속은 최소한 하루 전에 말씀해주세요"
뜨금해진 상원은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상원의 대답을 들은 후에 조석희는 안심했다는 듯이 다시 잠이 들었다.
그날 그 일이 있은 후에 상원은 정말 자신의 일과를 조석희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줄줄이 자세하게 나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단히라도 무슨일을 해야 한다고 문자를 보내야했다.
성격이 더럽고 이기적인 조석희가 그런 문자에 다정하게 답을 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답문이 오기도 했다.
[ㅇㅇ]
처음엔 오케이의 오타인줄 알았는데 가끔 같은 내용으로 오는 것을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짧은 문자에도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니 정말로
좋아하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원은 방금 전 받은 문자를 계속보면서 히죽거렸다. 저 동그라미 두개가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사람들을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미친놈 취급받을 일밖에 없었다
상원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활기찬 얼굴로 교실에 들어섰다. 6반 아이들은 여전히 난장판으로 떠들고 있었다.
"안녕"
상원이 동석에게 먼저 인사를 건냈다. 오토바이 잡지를 읽고 있던 동석이 눈인사를 해보였다. 대진은 여전히 pmp로 야동을 보면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고, 승완은 엎드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몇은 자기들끼리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며 시시덕 거리고 있었고, 창문을 열어놓고 끽연을
즐기는 녀석들도 있었다.
처음 6반에 들어왔을때는 무서워서 고개도 들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런 모습들이 정겹게 느껴질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
상원은 나름 평온한 일상에 감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다행히도 버스도 놓치는 일도 오다가 넘어지는 일도, 새똥을 맞는 일도 계단에서 구르는 일도
없었다.
"기분 좋은 일 있어?"
"아니"
콧노래를 부르며 잘도 아니라고 한다며 동석은 생각했다.
"시발 짜증나"
뒤에서 이달의 신작 야동을 감상 중이던 대진이 투덜거렸다.
"왜 짜증이 나?"
"2학년 새끼들은 오늘 수학여행가고 1학년 새끼들은 오늘 소풍가잖아! 근데 왜 우리는 안가냐고"
"우리 고 3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
너무나 당연하게 버럭하는 친구를 보며 상원은 할말을 잃었다.
"나도 수학여행 가고 싶어"
대진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1년 전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비행기에서 니들이 담배 피우는 바람에 다시 돌아왔잖아. 하는 말을
해줄수가 없었다.
"2학년 애들도 제주도로 안가고 강원도로 갔다 오잖아"
동석의 말에 상원은 여행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의견이 대다수여서 3박4일 제주도 일정을 학교 측에서 조정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아 불쌍한 후배놈들, 평생에 한 번 가는 수학여행을 달랑 2박3일 가다니 쯧쯧"
대진이 후배라고 일컫는 것은 2학년 6반에 한해서였다. 6반은 대대로 6반끼리만 선후배 대우를 해주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병신아 우리는 아예 못 갔잖아"
동석이 짜증난다는 듯 잡지로 대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대진은 몰라. 하고 토라지는 시늉을 하며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너도 가고 싶냐?"
갑자기 대뜸 동석이 상원에게 물었다.
"뭘?"
"수학여행"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아니 저 미친놈들 때문에 못 갔잖아"
동석이 책상 밑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는 대진과 그무리를 가리켰다. 상원이 6반으로 들어와 자신들 때문에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대진의 말을 듣고 보니 수학여행을 가고 싶은 것이 분명 자신들 뿐만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아아 그거"
상원이 웃었다.
'어쩔수 없잖아. 이미 지난 일인데"
비행기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려 6반 전원이 비행기에서 강제 추방 당한 사건은 희재고 내에서도 전설처럼 전해졌다 상원은 그것이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니었음에도 왠지 자신의 불운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함까지 갖고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긴 하지만 가고 싶은건 가고 싶은거잖아"
상원의 눈빛을 읽은 동석이 말했다. 이런 것조차 제대로 욕심한번 부리지 못하는 짝의 성격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그였다.
"고3인데 무슨 수학여행이야"
6반 내에서 유일하게 고3의 삶을 살고 있는 상원이었다. 동석은 짝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다시 잡지에 눈을 돌렸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원도 수학여행을 가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석희와 함께라면......
학년이 다르니 가능할 리 없는 소망이었다. 오늘 수학여행을 간다고 해서 안 그래도 어제 도서관에서 조석희와 만났던 상원은 오늘 아침 학교에 오면서
수학여행을 잘 갔다 오라는 문자를 보낸 것이다. 그 문자에 대한 답문의 예의 그 [ㅇㅇ] 이 온 것이지만 기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어제 잠들기 직전에 조석희가 가져갈 수 있다면 선배를 가방에 넣어가는 건데, 라고 던진 한마디에 상원은 코피를 쏟을 뻔했다.
아로마 테라피가 자신의 용도라지만 조석희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상원에게는 중요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한다면 조석희와 함께 가는 수학여행이라면
아무리 고3이라 할지라도 가고 싶었다.
"담탱이 온다."
교실로 들어오며 누군가 던진 말에 어수선한교실이 정리되었다. 정자세를 하고 눈을 빛내며 담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것도 상원이 아이들을 간신히 설득해 얻은 결과였다.
교단 앞에 선 6반 담임이 헛기침을 하며 교실을 둘러보았다. 눈치가 빠른 동석은 담임이 분명 얘기하기 힘든 안건을 가지고 왔음을 직감했다.
"쌤 또 뭔 얘기를 하시려고"
동석이 말문을 열었다.
"아, 그게 말이다 오늘 방송국에서 우리 학교 촬영을 온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사립고등학교 입시 성공케이스로 소개한다고 그런데 하하 알다시피 우리 반은 입시하고는
거리가 좀 멀지 않냐"
담임 입장에서 참으로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아무리 희재고에서 6반을 특수학급 취급하며 특별 운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가 멀긴요 아예 관계가 없지"
"크하하하 맞다 맞아 관계가 없지 물론 상원이 빼고"
그 중에 아이들은 상원을 착실하게 제외시켜 주는 배려를 발휘했다.
"관계가 없는데 왜요 그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동석이 턱을 괴고 담임을 바라보며 말했다. 6반 담임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저 여드름 난 키 작은 녀석이 가끔 저렇게 날카롭게
질문을 던져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다.
"...잠시 학교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바람을 교장선생님께서 ..."
본론이 담임 입에서 나오자 6반 아이들의 표정이 단박에 구겨졌다.
"아 시발 그런게 어디있어요 나도 티비 나올래"
"짜증나 우리는 이 학교 학생 아니에요?"
"PD가 훌륭한 내 외모보고 찍어서 연예인 시켜주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교장할배가 나 연예인 못하면 책임진대요?"
"야 윤대진 미친"
"미친놈 똥싼다."
대진은 그 와중에 말도 안되는 짜증을 부려 주변의 구박을 받기도 했다 동석은 텔레비전 출연 여부야 상관 없지만, 학교측에서 대놓고 6반 학생들을
흉물 취급하는 것이 달갑진 않았다.. 옆에 앉아 있는 상원도 어지간히 속이 상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게 말이다. 그러니까 하하하....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너희들원하는 곳이 있다면 오늘 하루 비용을 대줄테니 견학을 가라고 허락을 하셨단다. "
1학년은 소풍을 가고 2학년은 수학여행을 가니 남은 것은 3학년 6반 뿐이었다. 자신의 반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담임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6반 아이들에겐 억울함이 우선이었다.
"짱나요 견학이라면 무슨 박물관가고 이러는 거잖아! 누가 오래된 물건 따위 관심있대?"
"맥주공장 견학시켜주세요 맥주나 퍼마시게"
"SOD사 가면 안돼요?"
대진이 손을 들고 진지하게 물었다. 6반 담임이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타카하시 가나리가 세운 일본 최고의 야동 제작회사"
"...."
6반 담임은 할말을 잊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그게 좋겠다는 찬동이 쏟아져 나왔다. 대진은 자신의 의견이 탄력을 받기 시작하자 우쭐해져 큰 소리로
SOD를 외치기 시작했다. 쓸데 없이 단결력이 좋은 6반 아이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SOD! SOD! 를 외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원하는 곳이라는 단서를 잘못 붙인 6반 담임은 이 사태를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나 아득해졌다. 그때 책상위에 엎드려 자고 있던 승완이 부스스 일어났다.
싸움실력으로 뽐은 반장이었지만 아이들이 승완의 말이라면 잘 듣는 것을 알고 있는 6반 담임이 승완에게 SOS를 보냈다.
"승완아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한승완에게 제발 한가닥 이성이 남아 있길 바라며 그는 눈빛으로 호소했다. 잠에서 덜 깬 승완이 옆에 있는 녀석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히 SOD죠 말해 뭐합니까 SOD지. 남자라면 SOD지"
"......"
저놈에게 이성이 있길 바란 자신이 죄인이었다.
6반 담임이 마지막 희망인 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상원이 애매하게 웃으며 이걸 어쩌지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금 해협을 건너 일본 최대의 포르노 제작사를
갈 꿈에 부픈 아이들에게 그건 안된다는 얘기를 했다간 폭동이 일어날 게 뻔했다.
상원이 조그만 목소리로 죄송해요 하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6반 담임은 머리가 핑 돌았다. 하지만 정말 의외의 곳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야 SOD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미친 또 비행기에서 담배 피우다 쫒겨나라고"
김동석 이었다.
"미친놈아 너는 비흡연자니가 흡연자의 괴로움을 모르니까 그딴 소리를 하는거지"
동석은 아버지 지도 아래 본격적으로 권투를 배우고 있었기에 담대는 입에 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담배는 금하는 아버지였지만 아들의 싸움은 적극 권장했기에
동석은 그 스트레스를 싸움광인 한승완과 어울리며 풀어댔다.
"일본에 가도 미성년자인 우리가 잘도 그 회사에 들어가겠다."
"그,그런가?"
"하긴 갔다가 못 들어가면 그것도 짜증나네"
6반 담임은 이성적인데다가 아이들에게 영향력까지 있는 동석을 눈물이 글써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 김동석이 될것이라는 생각은
꿈에서도 못했거늘.
" 그럼 동석이 너는 어디를 갔으면 좋겠니?"
"전 현실적이예요"
동석이 턱을 괸채 , 건방진 표정으로 씩 웃어보였다.
"수학여행이요"
"...뭐?"
"수학여행 가죠 우리반도"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6반 담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학년이 가는 곳으로 가면 되잖아 안그래?"
동석이 반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한마디에 6반 아이들이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눈을 빛냈다. 참으로 선동이 쉬운 아이들이었다.
"그게 말이다. 하하 수학여행은 2박3일로 가는 거고 너희들은 당일치기로 견학을 가는건데....."
"아 그럼 당일치기로 SOD가든지. 안에 못들어가도 밖에서 신음소리만 들으면 되겠죠"
동석이 배째라는 듯 소리쳤다. 대진이 얼른 집에 전화를 걸어 녹음기가 있냐고 확인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비행기 내에서
흡연을 참아보자는 의견이 불같이 번졌다.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려볼테니까 기다려라"
결국 백기를 든 6반 담임이었다. 몇 시간후 운동장에는 6반 학생들을 태우러 온 관광버스 한대가 추가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