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45)

지구의 전체 인구중 30%가 불면증을 경험했다는 통계가 있다. 

개중 9%는 만성 불면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조석희는 근 10년간 숙면을 취해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불면증 환자였다. 이틀에서 나흘에 한번 정도로 잠을 청하는게 그에겐 일상이었다. 

조석희는 조금이라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것들은 기꺼이 복용했다 술이든 약이든 여자든.

학교에서 잠이 오면 그는 이곳을 수면실로 이용했다. 양호실은 들락거리는 학생들 때문에 발길을 끊은지 오래였다. 옥상은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들려 애당초 수면장소로 포함시킬수도

없었다. 

동관의 도서관은 열쇠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는데다 수업종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외진 곳에 위치해 수면장소로는 최적이었다. 

조석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습관대로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두시간 반이면 나쁘지 않았다. 이정도면 이틀은 버틸수 있으니.

오늘은 평소보다 푹 잠을 잤는지 머릿속이 맑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까부터 코끝에 좋은 향이 느껴지는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목을 양 옆으로 차례대로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의 눈에 누군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뭐야.."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던 누군가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조석희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상원이 가방에서 노트를 주섬주섬 꺼내 뭔가를 적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위로 그 노트를 치켜들었다. 

[이경이가 들여보내 준거야 확인해 봐도 돼]

믿어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질 기세였다. 조석희는 김이경에게 확인할 생각도 없었다. 누가 들여보내줬건  눈앞의 상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조석희의 눈매가 여전히 험악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자 상원은 다시 노트에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잘잤어?]

아까 긴 문장을 섰을 때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쓴 세 글자였다. 조석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저건 벨도 꼴도 없는 건가 싶었다. 

"그게 선배랑 무슨 상관인가요"

쌀쌀맞은 후배의 대답에 상원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곧 평온한 얼굴로 노트에 글자를 적어 올렸다.

[엎드려 자면 팔도 저리고 소화도 안되는데...]

더 이상 대화할 가치도 없다 여긴 조석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상원이 재빨리 다른 글자를 적어 노트를 번쩍 들었다. 

[나 가도 돼?]

"가지 말라는 말은 안한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식으로 글자놀이 시킨 기억도 없고"

"...네가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해서"

그제야 상원이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잔뜩 목소리를 죽인채였다. 

조석희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얼핏 잠결에 조용히 하라고 말한 것도 같았지만 그렇다고 몇 시간 동안 바닥에 앉아 있는 융통성 없는 인간에 대한 책임감은

느끼지 못했다. 

"그럼 가야겠다"

상원이 바닥에 있는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났다.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상원은 한 손으로 위 부근을 움켜쥐고 얼굴을 붉혔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인데 바닥에

앉아 얼음 땡 놀이를 하느라 식사도 하지 못한데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식사 안 하셨어요?"

"어..... 응"

상원은 가방안에 있는 도시락을 떠올리며 어디든 다시 조용한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시간도 훌쩍 넘긴 지금 교실로 돌아가 도시락을 꺼낸다면 친구들이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끈질기게 물을 게 뻔했다.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그럼 여기서 하고 가시죠 저는 나갈 거니까"

"그래도 돼?"

"김이경한테 열쇠 받으셨다면서요"

상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용해도 되죠"

그 한마디에 상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푸르스름한 눈동자나 흰피부 때문에 차가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작은 변화만으로 풍부한 감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제가 사용하는 시간은제하고"

덧붙여진 단서에 상원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잠시나마 조석희에게 다정한 배려를 받게 되어 벨도 없이 기쁨을 맛보다 도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조석희와 단둘이

남겨지는 것도 나름 고역이었으니 어떤 의미에선 다행스런 단서였다. 

"...언제 오는데?"

"보통 이 시간"

"알겠어"

상원은 그럼 아침이나 수업이 끝나고 와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학과 맞바꾼 소중한 자료들이다. 정 힘들면 전학갈땐 가더라도 이 자료를 한번만이라도 훑어보고 가야겠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절대 이시간엔 안 올게"

선서를 하듯 진지한 어조로 말하는 상원을 조석희는 옆눈으로 흘깃 쳐다볼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상원의 옆을 지나 문으로 가려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

"응?"

"무슨 향수 써요?"

"향수? 아니 전혀"

혹시 누군가의 향수가 묻어난 것인가 싶어 상원은 자신의 소매에 고개를 대고 킁킁거려 보았다. 하지만 향수의 향이라 할만한 냄새는 조금도 맡을 수가 없었다. 조석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참 선배"

"어!"

오늘따라 조석희로부터 많이 불리자 상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약간은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안 좋았던 일을 계기고 이런 일도 생기니 세상은 참 살아

볼만 한 것 같다. 

"혹시 제가 한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아세요?"

"...아니"

조석희가 미국에서 다녔던 학교가 사립명문 고등학교였다는 얘기는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이사장과 친분이 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학교에서 쫒겨난 이유에 관한 소문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선생을 임신시켰다더라, 대낮에 약물에 취해 여자 기숙사에서 집단 섹스를 하다 걸렸다더라, 더 이상 건드릴 여자가 없어 질려서 자기발로 자퇴를 했다더라, 하는 등등의.

"누굴 좀 건드렸거든요"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석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어째서인지 그가 지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을것 같단 생각을 했다. 

꽤나 잔인해 보이는 미소를.

"제가 잘때 깨는걸 엄청 싫어해서요 덕분에 절 건드린 녀석은 아직도 누워있겠지만"

"....."

하마터면 자신도 침대에 누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숨을 쉴 뻔했다 싶어 상원은 등꼴이 서늘해졌다. 

"오늘은 운이 좋으시네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상원은 조석희가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아 창가를 바라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때문에 한층 더 처연해진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말을 연심을 품고 있는 상대에게 들었건만, 상원은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상원은 6교시 수업이 끝날 즈음에야 가방을 들고 도서관을 나왔다. 

자신의 반 앞으로 찾아온 상원을 보고 김이경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선배 안녕하세요"

차마 안녕 못하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던 상원은 대충 얼버무린 후에 이경을 복도의 끝으로 데리고 갔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이거"

상원이 열쇠를 이경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 여기 이용 못할 것 같아. 나말고... 다른 사람도 있더라고"

조석희라는이름을 직접 사용할까 하다 상원은 다른 사람이라는 대명사로 몽뚱그려 그를 지칭했다. 다른 사람에게 괜히 조석희를 피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은게 그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아 석희요?"

하지만 김이경은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 콕 집어 그 이름을 거론했다. 

"석희가 왜요 그 녀석 거기 자주 가지도 않아요 가끔 낮잠자러 가는 정도인데"

그 가끔이 자신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이 될뿐이었다. 상원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서로 방해되는 것 같아서"

"괜찮아요 그녀석 자는 것만 방해 안하면 웬만하면 문제 없을거예요"

"....."

침묵의 행간을 읽어낸 이경의 어조에 약간 경악이 실려 있었다. 

"진짜요? 설마 정말 석희 녀석 자는 것을 깨우셨어요?"

"....응"

우울하게 대답하는 상원을 보고 이경이 쳇 하고 작게 혀를 찼다. 

"선배는 운이 좋으신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네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평생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후자일걸"

김이경도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석희가 자는 것을 깨우고도 이런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다닌다는 것은 운이 좋다는 말로는 모자랄 사건이었다.

조석희가 도서관을 간느 빈도를 알고 있는 이경이 마주칠 확률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첫날 조석희의 잠을 깨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바란것은 잠을 청하러 온 조석희와 마주쳐 모진 말을 듣고 상처받는 상원이었거늘.

"아무튼 나 안할래 도서관"

상원이 다시 김이경의 앞으로 열쇠를 내밀었다. 상처를 받긴 받았는데 출혈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이경이 상원의 손을 밀어내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그녀석 점심시간 전후로만 가끔식 잠자러 가는 거니까 정 곤란하시면 그 시간 피해서 가세요"

"....."

"자료들은 좀 훑어보셨어요?"

"응... 대단하더라"

그곳은 대학 입시 자료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의 다양한 전공 자료들까지 구비되어 있는 보고였다.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선배들의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노하우가 담긴 자료들이었다. 사실 그 자료들 때문에 상원은 오늘 열쇠를 건네주러 오기까지도 수백번 고민을 한 것이다. 

"선배한테 도움 많이 되실거예요 수업때문에 많이 힘드실거 아니예요"

상원이 받는 수업은 6반 학생들의 수준에 맞춘것이었다. 전국석차에서 상위권을 랭크 하는 그가 그런 수준의 수업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시간낭비였다.

"도서관 시설은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들지. 당연히...."

냉난방 시설은 물론이고 인체공학적인 의자에 책상 심지어 샤워까지 할 수 있는 욕실과 화장실이 따로 구비되어 있었다. 

6반 학생들이 상원을 위해 마련해준 도서관도 쓸만 했지만 시설적인 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럼 사용하세요 저도 선배가 거기에 있는 편이 마음이 편하니까요"

자기가 거기에 있는 것과 니 마음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다 상원은 그만두었다. 후배의 친절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실례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수업종이 울리자 김이경이 그만 가보겠다고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상원의 손에는 여전히 그 도서관 열쇠가 들려 있었다. 동그란 열쇠고리에 손가락을 끼워 흔들자 찰랑, 하는

쉿소리가 청명하게 들렸다 상원은 손바닥으로 열쇠를 움켜쥐고 결심했다. 

이 열쇠는 자기에게 주어진 행운의 한가닥 일수도 있으니 놓지 말자고.

"---!!"

상원이 쥐고 있던 열쇠가 바닥에 떨어지자 쨍그랑 , 하는 소리가 조용한 도서관 공기를 갈랐다. 쇠사슬에 결박당한 사람처럼 상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졌다. 

책상위에 앉아 있던 조석희가 이쪽으로 걸어와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주워 상원에게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열쇠를 받아들긴 하면서도 상원은 눈앞의 광경이 이해가 가지 않아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상원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난 아니야"

상원이 핸드폰 화면을 가리키며 억울하다는 듯이 한마디했다. 조석희가 온다는 점심시간 전후를 피해도 한참이나 피한 시간이었다. 

"뭐가 아니에요"

"네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거야 하나님 걸고 맹새해"

"선배 크리스천?"

왜 갑자기 종교 이야기로 주제가 흐려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원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할 수만 있다면 신성모독이 될지라도 하나님을 끌고 들어가리라 다짐했다. 

상원은 목엥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크리스천인데 호모예요? 나중에 지옥 가시는거 아니에요?"

총알을 정통으로 이마에 박아 넣고 손가락으로 총알이 잘 들어갔는지 꾹꾹 수셔 확인하는 꼴이었다. 상원은 자신이 호모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을 뿐이라는 얘기를 하는 편이 

나을까 고민하다 조석희의 차가운 눈을 보고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가야 한다면 가야지  별 수 있나"

한숨과도 같은 말에 조석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함은 1 그램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웃음소리였다. 

"아무튼 나는 이만"

상원은 재빨리 가방을 고쳐메고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조석희와 같은 공간에 단둘이 5초 이상 머무르면 며칠간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받게 된다. 그저 자리를 

피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웃고 있던 조석희가 갑자기 표정을 거두고 상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얻어맞는다고 생각한 상원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은 상원의 뺨에 뭔가가 와 닿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떠보니 조석희의 얼굴이 목덜미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으악!"

상원이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서 뛰어 올랐다. 조석희는 그런 상대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번도 이런식으로 조석희의 얼굴을 가가이에서 본 적이 없는 상원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울상을 지었다. 

가까이서 봐도 조석희의 얼굴은 근사했다. 눈썹에서부터 이어지는 콧날과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매. 강인해 보이는 턱과 육감적인 입술을 도드라져 보이게 만드는 인중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가까이서 보는 소녀 팬의 심정을 상원은 한껏 맛보았다.  물론 이런 팬은 조석희 측에서 일찌감치 거부를 한 상태지만,.

"무슨 샴푸 써요"

"나?"

조석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여기 너말고 다른 사람이 또 누가 있냐는 힐난을 하려는 듯이.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은 상원은 차분하게 자신이 사용하는 샴푸의 브랜드를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머니가 사다주시는대로 관심을 두지 않고 쭉 사용을 해왔던 지라.

샴푸통의 색만 희미하게 기억이 날 뿐이었다. 

의식이 선택적 저장기능을 통해 기억을 만든다고 했던 책의 문구는 이렇게 또렷이 기억나는데 매일 사용하는 샴푸 브랜드를 떠올릴 수 없구나.

상원은 입을 뻐금거리며 자신의 기억력과 투쟁해보았지만 어떤 소득도 얻어낼 수 없었다.

"다음에 알려줄게"

상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조석희는 몸을 뒤로 뺐다.  그의 몸이 뒤로 멀어지자 풍선을 놓친 어린아이와 같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물어봐도 돼?"

조석희가 향수나 샴푸에 관심을 가질 타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향수를 뿌린 여자와 붙어 있어서 향이 옮아왔으면 옮아왔지 직접 향수를 사용할 남자는 절대 아니었다. 

상원은 혹시 그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글쎄요"

조석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도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 겁이 났다. 

....그럼 이건 무의식의 괴롭힘일지도.

"그럼 언제 알려줘?"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뵙죠"

상원은 처음으로 갖게 되는 두사람만의 약속인가! 하고 좋아할 수 만은 없었다. 상대가 자신을 바퀴벌레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좋다고 손꼽아 내일만

기다리겠는가. 

"그런데 너... 나랑 마주치기 싫어하지 않았어?"

질문을 던지면서도 스스로에게 머리 위로 칼을 집어 던지는 기분이었다. 조석희는 상대방을 배려해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할 위인이 아니었다. 

"네 싫어해요"

머리 위로 던져진 칼이 푹, 하고 정수리를 관통했다. 상원은 보이지 않는 피를 철철 흘리며 간신히 어색한 목소리로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잠만 잘 온다면"

조석희의 혼잣말에 상원은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나 싶어 대단히 곤혹스러웠다. 멀리서 그를 바라볼 때도 성격이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갑자기 자신을 끌고 가 ㅇ그런 이상한 행위를 시켜 놓고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지 않나, 샴푸 브랜드를 알아오라고 시키지 않나. 게다가 갑자기 잠자는 얘기는 왜 꺼낸단 말인가. 

하루에도 수십번 천국과 지옥을 왕복하는 상원은 과연 자신의 심장이 언제까지 버티어줄까 싶었다. 

"알았어 알아가지고 올게"

"내일 뵙죠"

그가 나가려는 것 같아 상원은 옆으로 몸을 틀어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 부근에 코를 가져다 대어 킁, 하고 냄새를 맡으며 물었다. 

"바디 클렌저는요?"

"----!"

자신을 올려다 보는 눈빛에 상원의 심장은 그대로 직격당하고 말았다. 

"바디클렌저도 알아오세요 내일까지"

상원은 얼굴은 물론 귓볼, 목덜미 심지어 손가락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조석희가 심상한 말투로 뭐라고 영어로 중얼거렸다. 정확한 문장은 듣지 못했지만

당신 지금 모습이 사과 같다는 뜻인 것 같았다. 

조석희가 도서관을 나가자 상원이 휘청거리다 책장에 몸을 기댔다. 

Apple이란 단어가 그렇게 섹시하게 들릴 수 있다니.

상원은 생각했다. 영어 한 단어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바로 조석희가 될 것이라고.

"헉 너 꼴이 왜 그래"

책상위에 가방을 올려 놓고 무심코 짝에게 시선을 돌렸던 동석은 깜짝 놀랐다. 문제집을 풀고 있던 상원이 혹시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인가 하는 얼굴로 동석을 바라보았다.

"너, 너 누가 이런 꼴로 만든거야"

웬만한 일에는 흥분하는 법이 없는 동석이 말까지 더듬어가며 손가락질을 했다. 한껏 멋을 부린 상원이 쑥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늘 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대체 누구한테 코치 받은거야"

동석이 상원의 어깨에 손을 얻고 물었다 옷차림에 관심이 없던 상원에겐 학교에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늘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단추를 채워 다니는 모범생 교복패션을 추구했다. 하지만 오늘은 교복 안에 시골에서 만든 고추장냄새가 날것같은 새빨간 가디건에  다리에 짝

붙는 교복바지 풀어헤친 넥타이까지 눈뜨고 봐주기 힘든 수준이었다. 게다가 무스로 떡이 진 머리는 강풍이 불어도 꿈적할 것 같지 않았다. 

"짜잔 형님의 작품이지"

뒤에서 나타난 대진이가 흐믓한 얼굴을 했다. 백금발에 피어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대진의 상태를 살펴본다면 지금 성원의 모습은 그나마 절제의 미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동석은

망설임 없이 주먹으로 그런 대진의 배를 후려 갈겼다. 

"억!!"

대진이 배를 잡고 쓰러지자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6반학생중 누가 다치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알뜰히 보살피는 것이 상원의 일이었다. 

하지만 동석은 그꼴을 그대로 지켜보지 않았다. 

"너 상원이 당장 원상복구 안 시키면 니 머리에 불 지른다"

"내가 뭘! 멋있기만 하구만"

자신의 패션 철학이 확고한 대진이 지지않고 대거리를 했다 그때 가방을 한쪽 어깨에 매고 나타난 한승완이 경악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으악!! 우리 상원이!!"

"....안 어울려?"

승완이까지 저런 반응을 보이자 상원은 슬슬 불안한 기색이었다.

"안 어울리는 문제가 아니잖아! 누구야! 누구짓이야"

동석이 손가락으로 씩씩거리고 잇는 윤대진을 가리켰다. 

"이새끼 너 설마 상원의 몸에 피어스 구멍을 만든것은 아니지? 그랬단 봐, 내가 직접 니 뇌에 피어스 구멍을 만들어줄테니까"

어둠의 자식들인 6반 학생들은 유일하게 챙기는 것이 상원이었다 그런 상원을 6반 학생들이 아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중 반장인 승완은 상원을 자신의 딸처럼 아꼈다. 딸의 몸에

피어스 구멍을 만든 놈을 눈뜨고 지켜볼 아버지는 몇 없었다.  한승완이 입에서 불을 내뿜자 상원은 자기가 먼저 옷을 갈아입겠다고 세사람을 진정시켜야 했다. 

"당장 갈아입어  머리도 머리도 감아"

엄한 아버지가 되어버린 승완이 상원의 떡 진 머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안 그래도 조석희에게 직접 건네줄 샴푸를 들고 왔던 승완이기에 어려움 없이 머리의 고난을 씻어낼 수 

있었다. 10분후 상원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상원의 청초한 분위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기에 승완은 흐믓한 얼굴로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동석이 물었다. 상원이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 상원은 거짓말을 할 바에 아예주제를 돌리거나 말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평소였으면 거기에서 그쳤을 동석이지만 오늘은 그냥 넘기지 못했다. 

"여자 생겼냐?"

"아니 그런거 아니야"

상원이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착하고 순진한 상원이 꽃뱀에게 걸리면 그 꽃뱀을 생으로 잡아다가 물어뜯어 껍질을 벗겨버릴 거라고 했던 승완만큼은 아니었지만 동석도 만만치 않게 걱정이 되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자신의

짝이 누구보다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앞뒤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감정에 뛰어들게 되니까.

"그런데 웬 중요한 약속"

"그런게 있어"

상원이 원소주기율표를 흥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동석은 속으로 혀를 끌끌찼다. 누구랑 만나는 것인지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상대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상태였다. 

"그런데 웬 샴푸를 가지고 다녀?"

머리를 해결하고 오라는 승완의 호통에 상원이 가방에서 샴푸를 꺼냈던 것을 떠올린 동석이 물었다. 상원의 노래가 뚝 멈추었다. 뭘 생각하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파랗게 변했다가 아주 가관이었다.

동석은 정확히는 몰라도 저 샴푸가 오늘 사태의 근원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있잖아 너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뭔가를 주면 싫어?"

"그게 무슨 말이야 뭔가를 주다니?"

"선물은 아니고 절대 부담갖지 않을 만한 것인데 뭘 물어봐서 그걸 대답해주기로 했거든, 그런데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상원이 묻지도 않은 것을 주저리 주저리 설명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득시키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동석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난 내가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뭔가 받으면 싫을것 같은데 아니 아예 안 받을 것 같아"

권투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인 아버지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동석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맺고 끊는 게 확실했다. 

"난 좋아 선물이라면 무조건 탱큐베리감사"

뒤에 앉아 있던 대진이 끼어들어 대답했지만 상원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뭔가 말을 건넬까 하던 동석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 상원이 우쭈쭈쭈 하는 육아방식을 유지하는 한승완과는 다르게 그는 냉철하게 상원을 대하는 편이었다. 

상원은 현명하니까 분명 고민하다 정답에 이를 것이라고 동석은 믿었다. 

그때 교실 뒤에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학교에 오면 일단 잠자리부터 마련하는 한승완도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려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뭔데 저래"

오토바이 잡지를 뒤적거리던 동석이 대진을 툭 치며 물었다. 대진에게 한대 얻어맞은 기억따윈 이미 블랙홀에 집어던진 윤대진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몰라 가볼까?"

하지만 두 사람이 교실 뒤로 가기도 전에 궁금증은 간단하게 해소되었다. 

"야아! 이거봐라 상원아 이거봐 너 보여주려고 연습했어"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리 앙투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문덕 뽀순뽀순 퀴의 전담 사육사 중 한 명이 대단히 자랑스런 얼굴로 상원을 불렀다. 상원이 고개를 돌렸을때 ,

6반의 교실에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퍼져나갔다.  

"으아아악!!"

상원이 악을 쓰며 의자 아래로 숨었다 한번도 언성을 높이거나 오두방정을 떠는 상원의 모습을 본 적 없는 6반 아이들은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상원을 위해 뽀순 퀴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켜온 사육사는 작금의 사태를 오도카니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손에는 물방개처럼 붕붕 날고 있는 뽀순 퀴의 허리에 연결된 실이 들려 있었다.

"....얘 나는데"

그가 소심하게 뽀순 퀴를 가리키며 말을 건냈지만 상원의 비명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승완이 뽀순뽀순퀴를 다시 케이스 안에 넣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 상원의 부탁에

의해 반에서 애완바퀴를 키우게 된 6반이었기에 바퀴 혐오증이 밝혀진 시점에서 뽀순퀴 과연 이대로 좋은가. 하는 찬반 논란이 불거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리 앙투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문덕 뽀순뽀순 퀴의 사육담당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이 아이는 날기도 하고 똥도 잘 싸고 잘먹는다는 원시적인 변론을

펼치자 대다수의 학생이 동정론으로 넘어갔다. 반장인 승완도 차마 자신의 나쁜 머리로 이름을 붙여준 애완곤충을 내다버리자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상원의 눈치만 살폈다. 

결국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날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고 6반 아이들은 뽀순뽀순퀴를 굵직한 목소리로 삼창하고 회의를 마쳤다. 

바라지 않는 선물을 억지로 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된 상원은 절대로 샴푸를 조석희에게 주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거라고요?"

조석희가 자신의 앞에 펼쳐진 샴푸와 바디클렌저를 보고 물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말뚝 박았다.

"절대 주는거 아니야 그러니까 냄새만 맡고 확인하고 돌려주면 돼"

어울리지 않는 상원의 자린고비 흉내에 조석희는 기가 차 웃음도 나지 않았다. 그럴 거 대체 왜 여기까지 들고 온건가 싶었다. 

하지만 조석희로서도 냄새만 확실히 확인하면 끝날 문제였기때문에 순순히 샴푸를 집어 들었다. 

뚜겅을 열어 코를 가져다 댄 조석희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을 보고 상원은 바디클렌저 병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바디클렌저의 냄새를 확인한 조석희는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표정을

펴지 않았다. 

"왜? 마음에 안들어?"

"....이게 아닌데"

"이거 맞아. 어머니께 여쭈어보고 분명 같은 걸로 사온거야"

대체 어디에 쓰려는 것이냐고 어머니가 물어봤지만 상원은 모호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이거 맞아요? 완전 다른데"

"그러면 확실히 한번 더 여쭤보고 알려줄.... 헉 나 너 한번더 보려고 일부러 다른 브랜드 가져온거 아니다. 절대 아니다."

상원의 머릿속을 스친 의혹에 스스로가 깜짝놀라 하지 않아도 좋을 변명을 막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네 부탁 들어주는게 귀찮거나 얼굴보러 오는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일부러 핑계 만들어서 보러온 것은 절대 아니야"

말을 마치고 나서 상원은 엄청난 자괴감에 빠졌다. 말을 이므면 이을수록 나는 당신의 스토커입니다. 라고 광고를 하는 꼴이었다. 

조석희는 아까보다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하게 구겨졌다. 

"손"

"어?"

"손 줘보세요"

그 말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얼어버린 상원의 손을 조석희가 낚아채었다 그리고는 손목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고 다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동물적인 그의 행동에 상원은 기겁을 하며

손을 뒤로 빼려했지만, 두 사람의 힘 차이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작은 아이의 손목을 꺽듯 상원의 몸부림을 제압한 조석희는 그가 확인하고 싶어 하는 향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가, 간지러워"

상원이 항의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조석희는 상원으 뒷덜미를 움켜쥐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조석희의 얼굴에 상원은 심장을 입으로 뱉을 뻔했다. 조석희는 상원의 머리카락과 목덜미 부근에 코를 가져다 대고 체취를 맡았다. 상원은 두눈을 질끈 감고 악마의 유혹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영원과 같은 순간이 지나고 조석희가 고개를 들었다. 조석희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사악해 보인다 하고 상원같이 눈에 콩깍지가 씌인 사람들에겐 섹시하기 그지없어 뵈는 눈동자에 불쾌감이

스쳐갔다. 상원은 혹시 자신의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여기저기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거렸다. 

조석희가 싫어할 만한 냄새의 정체는 찾지 못했지만 상원은 일단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

"미안하시겠죠"

"...."

습관대로 사과를 하긴 했지만 무엇을 미안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는 상원은 상대가 이유를 설명해주길 기다렸다. 

"향수 사용하시면서 왜 거짓말 했어요"

"응?"

"향수 사용하잖아요"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거짓말 한거 아니예요?"

그렇게 말하는 조석희의 입가에 고소가 걸렸다. 상원은 이 억울함을 어떻게 호소해야 하나 싶어 가슴이 먹먹했다. 상원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끄집어 내어 다시금 신성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하나님 걸고 맹새할게 정말 너에게 거짓말 한적 없다."

"선배의 하나님은 이미 선배가 호모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버린거 아닌가요?"

"......"

그러니까 나는 호모가 아니라 네가 특별히 좋다는 얘기를 하면 지금 이 분위기에 맞아 죽겠지.

"정말인데....."

상원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졸지에 조석희에게 말 한번 더 건네려고 얕은 수작이나 부리며 향수나 뿌리는 스토커가 되어버린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진 것이다. 갑자기 상원이 아, 하고 손가락으로 조석희의 

뒤를 가리켰다. 

"저거"

".....?"

조석희가 귀찮다는듯 뒤를 돌아본 곳에는 욕실이 있었다. 

"나가서 씻고 올게 샴푸랑 바디클렌저 사용안하고 물로만 그리고 확인하면 되잖아"

자신이 생각해 낸 방안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상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에게는 어떻게든 자신이 스토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게 중요했다. 조석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도서관안에 딸린 욕실은 대체 누가 이런 시설을 구비하게 한 것인가 궁금증이 일게 만들었다. 

상원은 한쪽 구석에 옷을 벗어두고 샤워 콕을 열었다. 차가운 물이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아직은 낮에도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추운 초봄이었다. 이 날씨에 냉수로 샤워를 했다간 감기에 걸릴 확률이

100%를 넘어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원에겐 주어진 다른 선택안이 없었다.  상원은 입술을깨물고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콕 아래로 걸어 들어갔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물로만 깨끗이 씻은 후에 상원은 다시 옷을 입었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지만 이렇게라도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얼음물에 들어가도 상관없었다. 

수건이 없어 손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고 밖으로 나가니 조석희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

이제 맡아보라고 하려던 상원의 말을 조석희가 가로막았다.

"선배의 같잖은 연애 감정 때문에 시간낭비하게 만든거면"

조석희는 다음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피식, 하고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의 눈매가 가늘게 이지러졌다.  상원은 그의 기분이 평소보다 좋지 않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목소리톤도 평상시보다 조금 낮아진 상태였다. 

상원은 머리속이 어지러웠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자아가 자신이 잠든 사이에 향수를 사용한다거나 다른 샴푸를 사용했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그의 정신을 잠식했다. 아무도 없는 동관의

도서관에서 저 무지막지한 후배에게 비오는날 먼지 나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했다. 

상원은 그 자리에 서서 조석희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제발 한 번만 자신의 몸에 닿길 원했던 조석희의 기다란 손가락이 뻗어와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너무 가까이 붙지마"

"왜요"

조석희의 나른한 음성이 바로 턱밑에서 들려왔다.  상원은 일부러 시선을 위로 돌리고 말을 이었다. 

"머리카락에서 물기 떨어져. 옷 ...젖어"

침착한 척 하려 했지만 조석희의 코가 목덜미에 닿는 것이 느껴져 상원의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조석희는 상원의 목덜미에서부터 귀밑, 정수리와 뺨 부근에 천천히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상원은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거짓말한건 아니군."

공기가 진동시킨 목소리가 척추를 타고 전해졌다. 긴장으로 목구멍이 딱 붙어버린 것 같았지만 상원은 억눌린 목소리로 거짓말아니야 하고 다시 한번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거기에서 그만 떨어져 주었으면 좋으련만, 조석희는 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점점 그는 자신의 몸을 상원쪽으로 기대기 시작했다. 상원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상대와는 키는 물론 체격에서부터 엄청난 차이가 났다. 두손으로 그의 팔을 붙들고 

상원은 무게를 견뎌냈지만,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선배"

자신을 다정하게 부르는 그 목소리에 상원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 했다 맹새코 조석희는 자신을 이런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위협하거나 귀찮다는 듯이 혹은

무관심한 어조로 선배, 하고 부를 뿐이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상원은 스스로의 혀를 깨물어 보았다 연한 살덩이에 밀려드는고통에 눈물을 찔금 흘리며 그는 후배늬 부름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그래"

"부탁 좀 할게요"

조석희의 목소리가 유난히 가라앉아 있었다. 

"무, 무슨 부탁을?"

그의 부탁이라면 지구 세바퀴 반이라도 돌 각오가 된 상원이었다. 

"잠시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석희의 무게는 모두 상원의 몸으로 쏟아지고 말았다 상원은 휘청거리며 그의 몸을 간신히 받아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싶어 

자신의 몸 위로 쓰러진 조석희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잠이 들었다는 결론 밖에 내릴 수 없었다. 

상원은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몸을 움직여 조석희를 안은채 바닥으로 앉았다. 조석희가 고른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이 잘생긴 

이 남자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자는 장면을 몇번이나 꿈꿨던가.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이 숨을 쉴 때마다 샤르륵 움직이는 모습을 상원은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워 눈물이 날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상원은 조석희를 지켜보았다. 

상원은 그렇게 오매불망 그리던 상대에게 자신의 무릎을 내주었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붉은 별들을 그리며,

조석희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네시간이 지난 후였다. 

"나흘? 나흘동안 잠을 못잤다고?"

상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조석희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원은 시험기간에도 최소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야 한다고 믿는 주의였다. 그래야만 머리도 맑고 집중이 잘 되기 때문이다. 평소에 늘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해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법이 없었지만 

밤새 공부를 안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듬이 깨져 그 다음날까지 악영향을 미쳐 상원은 될 수 있으면 밤을 절대로 새우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그렇다쳐도 나흘간 잠을 자지 않았다니.

"그러고도 어떻게 생활이 돼? 안졸려? 머리안아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조석희의 눈에 귀찮은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원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셋 중 하나만 답해도 된다고 덧붙였따. 

"생활이 되고 졸리면 저한텐 잘된일이고, 머리는 아픕니다. "

"대체 왜 나흘동안 잠을 안잤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안잔게 아니라 못 잔 건데요"

"왜?"

"그 이유를 알았으면 나흘 동안 잠을 못자지 않았겠죠"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오자 상원은 자신이 정말 쓸데없는 질문을 던졌구나 싶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상원의 상식으론느 사람이

나흘간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병원은 가봤어?"

"하, 진짜 끈질기네"

넌더리 난다며 조석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상원은 사람은 살리고 봐야겠단 생각에 걷어차일 각오를 하고 끈덕지게 질문을 던졌다. 

"병원 가봤어? 검사 같은거 해봐, 뇌에 이상 있는 거면 어떡해"

"상원 선배"

"응...."

대답을 하면서 상원은 조석희가 발음하는 자신의 이름이 정말 감미롭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될 수 있으면 선배 앞에 계속 이름을 붙여주면 좋을텐데...

이름 더 안불러 주나.

"뇌파나 전신 MRI검사하는데 비용이 어느 정도 드는지 아세요?"

"아니...."

가족 병력이 없기 때문에 병원검사 비용에 대해 한번도 관심을 기울여 본 적 없었다. 조석희의 입에서 비용에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봐선 꽤나 많은

금액이 드는 모양이었다. 상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아놓은 적금 통장을 깨서라도 가능하면 석희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검사 받으려면 한국 돈으로 음, 백만 원 정도 들죠"

"저기 혹시 비용때문에 그런 거라면...."

어떻게 말을 꺼내야 상대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을까 고심하며 상원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배려는 악어가죽보다 더 딱딱한 상대의 마음에 와 닿을

리 없었다. 

"비용이 무슨 상관이예요"

"응?"

비싸서 검사 안 받는다는 얘기를 하려던게 아니었다. 

"전 하루에 한번씩 365일을 받아도 돼요 돈이 무슨 상관이냐는 얘기를 하려고 한 겁니다."

조석희의 말투는 느릿했다. 필요할 때가 아니면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흑자는 그게 타고난 조석희의 개 같은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일이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냐는 일관된 태도.

조석희를 짝사랑한 지 일년이 넘어가는 상원이었지만 여기에는 이견을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원은 오늘 , 거기에 개인적인 성격뿐 아니라 배경적

부유함도 한 몫 할 거라는 가설을 덧붙였다 상원은 지금 태어나서 자신이 원하면 이루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을 남자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제가 불면증 이유를 밝힐 수 있음에도 검사를 안 받아 봤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해서요, 말씀드렸다시피 돈이라면 썩어 넘쳐날 정도로 있거든요."

아버지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잇는 굴지의 IT 재벌 CEO고 외가는 미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석유 재벌이라는 소문이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었다. 

썩어 넘처날 정도로 돈이 있다는 표현을 저렇게 내뱉는 것은 상류층 자제들로 넘쳐나는 희재고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그럼 아까 잠깐이라도 잘 수 있어서 다행이다."

조석희는 네시간이면 자신에게는 며칠은 충분하다는 애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뭐 그렇긴 하군요"

그의 대답에 상원이 활짝 웃었다. 얇은 입술 끝이 꽃잎이 말려 올라가는 것처럼 보기 좋게 움직였다. 

"그럼 내일도 이시간에 오시죠"

웃고 있던 상원의 미소가 망치로 후려친 석고상처럼 부서지듯 와르르 무너졌다. 방금 전 조석희가 던진 한마디에 유체이탈을 경험한 것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상원이 눈을 깜빡이며 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자리에서 일어난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상원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너랑 만나?"

"선배 저 만나러 오시는거 싫어하지 않잖아요"

"당연히 좋... 아니 그러니까 그건 내문제고, 너는 나 싫어하잖아"

휘리릭, 하고 다시 공중에 칼이 던져졌다. 바람을 가르며 칼이 내려오는 소리를 상원은 똑똑히 듣는 중이었다 제발 빗겨나가라. 

제발 제발 한번만.

"네"

짧은 대답과 함께 이번에도 정수리에 날카로운 칼날이 박혔다. 

아프다. 몇번을 들은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상원은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잠이 오니까'

"응"

"선배 냄새 맡으면 잠이 오는 것 같거든요"

"....."

이게 또 뭔 소리냐. 내 체취에 수면제라도 섞여 있다는 애긴가?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비과학적 얘기에 상원은 겁에 질린 눈동자로 이리저리 굴렸다 

"....아로마 테라피 같은거?"

자신의 체향을 그런 향긋한 풀들에게 비교하는 것이 좀 민망하긴 했지만 상원은 더 이상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해두죠"

조석희에겐 정확한 명칭이나 메커니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오케이였다 섹스든 술이든 약이든 잠을 이루게 

하기위해 닥치는 대로 하던 시절도 있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호모 스토커라 하더라도 불면증을 달래는데 유용하다면 이용해줄 용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의사따윈 중요치 않았다. 

싫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붙들고와 이용하면 그만이니까. 

"알겠어 좋아. 그런데 나도 조건 하나만 붙일게"

상원이 결의가 가득 찬 눈을 빛내며 말했다. 조석희가 고개를 끄덕했다. 

"내가 널.... 너를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해줬으면 좋겠어."

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 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난 후 상원의 얼굴은 어디 아픈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을 무시한느 상대에게 두번이나 고백을 한 셈인 것이다. 

"아 그거"

조석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저랑 상관없으니까"

"......"

그날의 목소리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무심함이었다. 

"저한테 그 불운만 옮기지 않으면"

조석희는 누군가 자신의 행운에 흠짓을 내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벌써 몇 번이나 저 재수없는 선배에게 휘말려 기분 나쁜 경험을 한 것이다. 

"응 안옮겨 절대 안 옮아"

역병환자 취급을 받아도 그저 좋은 상원이었다. 더 이상 볼일이 없다고 생각한 조석희는 그럼 내일봐요 Apple선배, 라고 인사를 한 후 도서관을 나섰다. 

남겨진 사과 인간 이상원은 몇 번이나 입속으로 Apple 이란 단어를 중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상원은 집으로 돌아가 다이어리에 빨간 펜으로 별을 7개나 그려넣었다. 오늘은 스토커 바퀴벌레에서 사과로 격상된 해방의 날이었다. 뽀순뽀순 퀴를 

키우게 된 그 선업이 그대로 돌아온 것이라 믿으며 상원은 그날 저녁 난생처음으로 바퀴벌레에게 먹기를 주기위해 고기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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