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시발, 한승완 새개. 내가 그놈하고 말을 다시 하면 내 자지를 간다."
여기저기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눈 밑에 시퍼렇게 멍이 든 대진이 접시를 들고 걸으며 투덜거렸다.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하는
6반 학우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두들겨 팼고 주임이 달려와 그들을 뜯어 말리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오늘 수업이 끝나고 남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사라진 담임에게 뇌물을 바치자는 계획을 세운 그들은 그나마 먹을 만한 샌드위치를 공물로 지정했다.
원래는 반장인 승완과 상원이 가는게 맞았지만 싸움을 하다 신이난 승완이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는 바람에 그는 지금 상처를 꿰매러 병원 응급실로
보내진 상태였다.
"미친 새리 좆병신 같은 새리. 뭐 좋다고 유리창을 깨서 나한테 이 고생을 시키고 지랄이야"
거칠게 욕을 뱉고 있어도 대진은 친구인 승완을 걱정한다는 것을 상원을 알아차렸다.
"너는 좀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너는 안 다쳤냐?"
상원은 싸움에 끼어드는 일은 없었지만 가끔 날아오는 물건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본의 아니게 부상을 당하곤 했다 오늘은 다행히도 상원은 무사히 싸움을
관전할 수 있었다.
"괜찮아 나는"
"넌 조리실에서 싸움할때는 특히 조심해라. 괜히 날아드는 칼에 꽂히는 수도 있으니"
"그래 조심할게 고마워"
그때 싱긋 웃는 상원의 어깨를 누군가 툭하고 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상원은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담임을 회유할 공물을 떨어트렸다는
사실보다 착한 상원을 누군가 치고 지나갔다는 생각에 화가 난 대진이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복도를 걷던 누군가가 그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 새끼가 하늘 같은 선배도 못 알아보고 부딪혔으면 인사를 해야 할것 아냐"
명찰의 색을 확인한 대진이 잡아먹을 듯한 기새로 소리쳤다.
백금발 머리에 피어싱을 주렁주렁 매단 윤대진을 보고도 상대는 주눅 든 기색없이 고개만 꾸벅 숙였다.
"벙어리냐. 이새끼야 똑바로 사과못해?"
"됐어 대진아 그냥...."
복도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아 떨어진 샌드위치를 줍던 상원은 하마터면 자신의 눈을 의심할 뻔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는 상대는 다름아닌 조석희였다. 상원은 대진의 바지자락을 쥐고 빨리 가자고 눈짓을 했다. 하지만 조석희 특유의
건방진 말투가 거슬린 대진은 방금 전 사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나한테 말고 상원이한테 하라고 제대로 해 새끼야"
상원은 샌드위치를 담은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등 뒤에서 조석희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심장이 아플만큼
떨렸다. 상원은 일초라도 빨리 이 복도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이미 조석희에게 스토커에 바퀴벌레취급까지 받은터라 더이상 데미지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메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선배"
상원은 무심코 김이경의 환한 웃음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이경이 손을 흔들며 복도 저편에서 다가오자 상원은
반색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경아 안녕 반가워 오랜만이다"
"어제 만났는데 오랜만인가요?"
"그, 그렇구나 아무튼 반갑다"
상원이 이경의 손을 덥석 잡으며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어떻게든 이자리를 모면해보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대진은 그런 상원을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건 뭐예요? 웬 샌드위치?"
"실습시간에 만든거야"
"와 실습시간에 이런 것도 해요? 재밌네 6반은"
악의가 담긴 말이 아니었지만 상원은 그 말에 마냥 웃을 수 만은 없었다 다른 반과 커리큘럼이 다른만큼 그가 노력해야 할 시간이 늘어간다는 뜻이었다.
"하나 먹어봐도 돼요?"
"아 그게...."
떨어트리지만 않았어도 이 곤란에서 자신을 구해준 후배에게 얼마든지 줬을 샌드위치였다. 상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어쩔줄 몰라 하고 있는데 등 뒤에
서있던 조석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먹어"
"....?"
상원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조석희가 샌드위치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명확한 발음으로 이경에게 대답했다.
"먹고 싶으면 먹어 그래도 되죠? 선배"
"어... 그래도 되긴 하는데.... 그게..."
조석희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이 사고회로에 들어오자 상원의 뇌에 과부화가 걸리고 말았다. 이경이 그럼 잘 먹을게요, 하고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 대진은 땅에떨어진 샌드위치 따위 누가 먹든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맛있네요 선배가 만든 거예요?"
이경이 웃으며 물었다. 상원이 고개를 흔들며 주절주절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나는 그냥 빵에 버터만 바르고 삶은 달걀 껍데기만 깠고 다른 애들이 조금씩 도와 만든거야... 고마워"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인사는 샌드위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상원의 눈에 조석희 발이 보였다 저발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송할 정도였다.
"너도 하나 먹어봐라 조석희"
이경이 그래도 되죠? 하는 눈으로 상원을 봤다. 상원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뒤에서 뻗어나온 손이 접시 위에 놓여진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두번에 나누어 샌드위치를 입에 넣은 조석희가 음, 하고 맛을 음미했다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움직이자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맛있네"
조석희가 적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툭 던졌다.
그 한마디에 상원의 머릿속에는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져 나오고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방금 들으셨나요? 조석희가 샌드위치가 맛있다고 말했어요! 들으셨죠? 다들 들으신 거죠? 그 샌드위치 빵에 버터를 바르고 그안에 들어간 달걀 껍데기를
깐게 저랍니다.
"고...마워"
마음속의 외침을 간신히 억누르며 상원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혹시 방금 전 있었던 일로 일생의 행운을 모두 다 써버린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던 것이다.
"수업종 치겠다 가자"
이경이 석희의 어깨를 치며 턱짓을 했다 대진도 상원에게 어서 가서 공물을 바치자고 손짓을 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이 믿기지 않을 황홀한 순간에
빠져 있는 상원의 옆을 조석희가 지나갔다.
"공부는 때려치우고 샌드위치나 만드시는 게 낫겠네"
조석희의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 그것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어차피 당신따위 공부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는 쟁반 위에 놓인 샌드위치 하나를 더 집어들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경도 수업 끝나고 보자고 상원에게 인사를 한 뒤 수업준비를 하러
갔다.
"아는 새끼들이냐? 둘 다 싸기지 존나 없게 생.... 헉 야 너 괜찮아? 얼굴에서 피를 토하고 있잖아!"
대진의 외침에 상원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허둥지둥 복도 끝으로 달려가 버렸다. 상원의 얼굴색은 관동별곡 전체를 세번 반복해 외우고 난
후에야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그날 6반 담임에게 바쳐진 바닥에 두번 떨어진 샌드위치는 공물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기분 좋은일있냐?"
"어? 나?"
옆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는 동석을 보며 상원이 되물었다. 남을 속이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동석은 사람들의 표정과 기색을 읽는 것에도 능했다.
하지만 상원같은 경우는 그런 기술이 없다해도 누구든 그의 기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상원은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으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수학문제를 풀고 번뇌를 느끼면 관동별곡을 외웠으며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상기된 얼굴을
하고 원소주기율에 가락을 붙인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알게돼"
이 친구에게 포커게임을 절대 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동석은 말을 이었다.
"어제까지는 머리 위에서 천둥이 우르르 쾅쾅 거리더니 오늘은 웬일이냐"
"아, 하하하 그러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던 상원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고 동석에게 물었다.
"저기 있잖아 나 말이야"
"응"
동석이 가방에서 오토바이 잡지를 꺼내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나.... 샌드위치 가게 낼까?"
"뭐?"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는 듯이 동석이 되물었다.
"저기 나 샌드위치 만드는 재능이 있는것 같다는 칭찬을 들어서"
"....."
"아니 그러니까 내가 다 만든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말이야 버터를 바르고 달걀껍데기를 벗기는 정도로 도움이 된다면 말이야"
"미쳤냐. 공부를 때려치우긴 왜 때려치워 너처럼 공부 잘하는 놈이 공부 안하고 무슨 놈의 샌드위치 가게야"
동석이 냉정하게 상원의 백일몽을 박살내주었다
"그...런가?"
"그래 별 시덥잖은 소리하지 말고 공부나해. 얘가 아직 봄인데 더위를 먹었나"
짝의 면박을 듣고도 상원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조석희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어깨가 부딪치게 되어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는 친절하게
칭찬을 건낸것이다. 이 믿기지 않는 행운에 상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어제는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운이 좋다고 생각한 날이었다
상원은 자신의 운명에 드리워진 불운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물론 부정했지만 아예 인정을 하고 난 뒤에는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좋은 일을 반복하고 선행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 불운의 구덩이가 메워질 것이라 상원은 믿었다.
상원은 늘 상상해왔다.
자신의 불운이 끝나는 날을.
상원은 조심스레 추측했다. 어제의 그일이 구덩이가 메워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상원아!"
"응?"
"너 미술시간에 제출한 수행평가 작품 사라진거... 선생님께서 못 찾겠다고 그냥 다시 해서 제출하라는데? 학기 끝나기 전에만 내래"
...... 아직 안끝났구나.
상원은 미술 선생님의 불행한 전언을 전해준 친구에게 고맙다 인사를 하고 다이어리에 파란색 팬으로 미술수행평가라고 적어놓았다.
파란색 펜은 그날 있었던 안 좋은 일을 적는데 사용하고 빨간색 펜은 좋았던 일을 쓰는데 사용했다. .....자신의 빨간색 펜이 이 다이어리를 적기
시작한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단 한번도 교체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긴 하다. 그래도 간간히 빨간 글씨가 보이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예쁜 꽃을 봤다든가, 좋아하는 반찬을 먹었다든가.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했다든가 하는 일들.
상원은 그 소소한 일에 기쁨을 부여했다.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소중한 것들은 그는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어놓았다.
다이어리를 덮으려던 상원의 눈에 빨간색 펜으로 샌드위치라고 적어놓은 어제의 사건이 들어왔다. 옆에 하트를 그려 넣을까 무던히 고민하다
그는 별표다섯 개를 그려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최고의 별점은 일곱개의 별이다. 일생에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별,
그렇다고 다섯개의 별이 흔하게 벌어지는 사건은 아니었다. 초등학교때 아버지가 상원이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컴퓨터를 사준 날 이후로 단 한번도
없었으니.
어제의 일은 그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다. 그 일만 떠올리면 구름위를 걷는 것처럼 발끝이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붕붕떴다. 뭔가 자신이 행한 일로 인해
부정적인 기운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상원은 가능하다면 그 무엇인가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보호해 행운을 가져오게 할텐데,
"아이 시팍! 바퀴벨레잖아"
교실 구석에서 누군가 짜증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아이들이 욕설을 뱉으며 죽으라고 소리쳤다. 상원도 반사적으로 다리를 모으고 의자위로 올라갔다.
상원의 안색이 다시 창백하게 굳은 것을 본 동석이 교실 구석을 향해 엄하게 소리쳤다.
"잡아! 잡아서 족쳐. 밟아 죽여 알은 안터지게 죽여"
사살명령이 내려졌다. 동석은 승완다음의 실세였다. 자그만한 체구의 그를 얕보았다가 코뼈가 부러진 학생이 6반에만 다섯명이 넘었다.
그의 명령에 모두 바퀴벌레를 향해 무지막지한 스텝공격을 퍼부었다 어서 이 혼란이 끝나기만을 기도하고 있던 상원의 귀에 대진의 한마디가 흘러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우리 할매가 그러셨는데 살생을 하면 그 업보가 돌아와서 나중에 벌레로 태어난다던데 크크 니들 다음생에 바퀴벌레 찜"
별다른 의도를 가지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바퀴벌레 잡기에 혈안이 된 학우들을 놀리기 위해 짖궂은 말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대진의 한마디가
상원에게는 크나큰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자신에게 어제 있었던 일이 혹시 자신이 행한 일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 생긴 일이라면...?
"안돼!!"
상원이 의자 위에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바퀴벌레 사냥에 한참이던 6반 학생들이 모두 그런 상원을 바라보았다.
"잡지마 안돼 죽이지마"
상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안된다. 저 바퀴벌레를 죽이면 어제 있었던 일은 편의점에서 자신 대신 조석희의 발에 무참히 짓밟혀 죽은 바퀴벌레의
희생으로 생긴 행운이 분명했다. 그 당시 분명 조석희는 상원과 벌레를 동일시했다. 자신 대신 바퀴벌레가 죽음으로써 해서 조석희의 경멸로 부터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원은 카르마를 믿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벌레의 죽음을 방관한다면 그 업보가 돌아와 큰 불행으로 다가올 것을 확신했다.
별 다섯개짜리 행운은 되돌려 줘야 했다. 업보는 돌고 도는 것이므로,
"제발 죽이지마 바퀴벌레가 우리한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건 아니잖아"
"병균같은거 옮기잖아"
대진이 사타구니 사이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누군가 옆에서 쟤는 다른 병보다 머릿속을 최우선으로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속삭였다.
"그러면 바퀴벌레를 더러운 환경에서 살게 하지 않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게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상원의 간절한 목소리로 급우들을 향해 말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6반에서 이상원이라는 존재는 묵묵히 사람들을 도와주고
부탁을 들어주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호소하자 모두의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교실 끝에서 자고 있던 승완이 책상위에서 일어나 부스스 눈을 떴다. 동석과 승완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에 두사람은 합의를 이끌어냈다.
"죽이지마 다리하나라도 다치게 하지 말고 생포해라. 우리 상원의 부탁이다. 바퀴벌레를 생포한 자에게는 화장실청소 일주일 면제권을 주겠다"
승완이 이번에는 바퀴벌레 생포 명령을 내렸다. 교실바탁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을 휘두르던 아이들이 일제히 두손을 모으고 바닥을 더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분단 끝에서 잡았다! 하는 기쁨어린 외침이 교실안에 울려 퍼졌다. 그 아니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우유곽에 자신이 생포한 바퀴벌레를
넣어 동석에게 제출했다.
그것을 확인한 동석은 자신의 짝인 상원에게 건넸다.
"자"
"...어?"
"깨끗한 환경에서 키우자며"
깨끗한 환경에서 살게 하자는 것이 언제 키우자는 얘기가 된 것이냐고 상원은 차마 묻지 못했다. 바퀴벌레가 든 우유곽을 받아든 순간 머릿속이 창백하게
질렸기 때문이다. 사고는 정지했고 온몸은 굳어버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렇게 해서라도 바퀴벌레의 희생을 갚아줄 수만 있다면.
"자아 좋아"
승완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교단으로 걸어갔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것은 뭔가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기 전에 보이는 그의 버릇과도 같았다.
다들 바싹 긴장한 얼굴로 승완을 지켜보았다. 물론 상원은 우유곽을 한 손에 들고 자리에 굳어있었다.
"바퀴벌레의 이름을 공모하겠다. 좋은 생각이 있는 자들은 손을 들고 말해라"
엄숙한 그의 제안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안에 있는 학생들의 손이 일제히 올라갔다 교실 뒤에 있는 '마호메트 나폴레옹 레오나르드 다빈치 미켈란젤로
링컨 아인슈타인 관우 장비 뽀순뽀순잉이 어항속에서 튀어오른것도 그와 동시였다.
"마리앙투아네트"
누군가 세계사 책의 한 구절을 손으로 짚으며 소리쳤다. 승완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바퀴가 암컷이라는 증거 있어?"
"아까 동석이가 알 밴거 안튀게 사살하라고 했잖아. 알 밴거면 암컷아냐?"
그럴듯한 추측에 승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리 아... 아무튼 그 이름도 후보로 넣도록 하지"
"그게 암컷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해. 날개 밑을 들추어봐서 보지인지 자지인지 확인을 해봐야지"
대진이 턱을 괴고 진지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아 이 발정난 개새끼야. 벌레가 보지, 자지가 어디 있냐"
"병신아. 그럼 벌레는 섹스를 어떻게 해. 벌레라고 섹스안한다는 증거 있어? 그럼 애를 어떻게 낳아?"
"시발 난 과학시간에 벌레가 섹스한다는 소리 한번도 못 들었거든?"
"맨날 과학시간에 쳐 자놓고 무슨 개소리야"
"그럼 책에 벌레 자지라는 단어가 나와? 어디나오는데? "
때아니게 불거진 곤충 성기 논란에 모두들 일제히 생물책을 찾으며 자신의 의견을 지지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우유곽을 손에 든채 서 있던 상원이
작은 목소리로 동석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동석이 손을 번쩍 들어 자신의 의견을 표했다.
"야 상원이가 그러는데 바퀴벌레는 자지그런거 없대. 무슨 기관이 있다는데"
"병신아 그게 바퀴들한테는 자지야"
대진이 끝끝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바퀴벌레의 암수구분을 확인할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여성의 이름과 남서의
이름을 함께 사용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자 그럼 다른 좋은 이름 없어?"
"우리나라 위인 이름은 어때? 쪽바리 새끼들 싹 다 몰아버린 이순신이나 에 또..."
"세종대왕은 어때?"
상원은 눈을 감고 자신 때문에 바퀴벌레에 이름이 붙어지게 될 위기에 쳐한 훌륭한 위인들에게 사죄를 했다.
"세종대왕 존나 짜증나 시발 국어시간에 그 시키 때문에 우리 머리 아픈거 생각하라고"
국어에 유난히 약한 대진이 다행히 세종대왕의 이름을 사용하는것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상원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수십 번 읊조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헤라클래스 어때? 이 새끼가 아주 힘이 세다잖아"
"그럼 짱이란 얘기인가?"
"그렇다는 뜻이지"
여기저기서 헤라클래스에 대한 이야기가 숙덕숙덕 오고간 후 모두들 찬성에 뜻을 더했다. 그중 누구도 헤라클래스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상원은 그나마 양심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을지문덕 어때? 얘도 한가락 했던 것 같은데? 근데 중국놈 피가 섞였나. 이름이 희한하네"
대진이 국사 책을 뒤적거리며 을지문덕의 후손이 이자리에 있었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안을 내놓았다. 을지문덕에 관한 지식이라곤 바퀴벌레의 더듬이만큼도
없는 인간들이 그거 참 좋은 이름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자 그럼 이만 후보 등록은 마치고 이중에서 제일 좋은 이름을 선정하자"
승완이 칠판에 빼꼭히 적힌 이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실안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모두들 자신이 내놓은 이름이 그중 제일이라는 주장을 펼쳐댔다.
누구도 자신이 내놓은 이름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담임이 들어와 제지를 할 때까지 소란은 계속되었다 그날 6반은 처음으로 정규수업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모두 모여 회의를 계속했다. 열띤 토론 끝에 6반의 두번째 마스코트로 임명된 바퀴벌레의 이름은 '알레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리 앙투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문덕 뽀순뽀순 퀴'로 정해졌다. 먹이는 '마호메트 나폴레옹 레오나르드 다빈치 미켈란젤로 링컨 아인슈타인 관우장비
뽀순뽀순잉' 먹는 핑퐁을 나누어 분배하기로 했다. 승완의 선창에 6반 아이들은 '뽀순뽀순 퀴'삼창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졸지에 바퀴벌레를 학급 애완동물로 사육하게 된 상원은 혼자 조용히 울 수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한바탕 울고 개운한 기분으로 오늘의 공부를 마친 상원은 밖으로 나온 후에야 시간이 제법 지나 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짙은 남색의 하늘에 은색별이 박혀 있는 모습을 보며 상원은 미술실에서 보았던 그림을 떠올렸다. 같은 재단의 선린예고 미술선생이 그렸다는 그림은
늘 상원의 눈을 끌었다. 화려한 그림도 뛰어난 그림도 아니었지만 상원은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을 얼굴도 알지 못하는 타인으로부터 이해받는것 같았다.
상원은 기지개를 크게 켜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큰길을 지나고 있는 그를 누군가 뒤에서 선배 하며 반갑게 불러 세웠다.
학생회 후배들이었다. 상원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눈으로 재빨리 조석희의 모습을 찾았다. 가끔 조석희가 학생회와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석희의 평상시 행동을 반추해보더라도 학생회와 그는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지만 학생회장인 김이경은 당연하다는 듯 조석희의 동석을 허락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석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배 지금 집에 가시는 거예요?"
김이경이 살가운 웃음을 지으며 상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마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흩날렸다.
이경의 눈가에 뛴 웃음이 진해지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태워다 드릴까요?"
상원은 큰길옆에 세워진 검은색 벤츠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김이경은 몇 번이나 이런식으로 자신의 벤츠를 통한 하교를 권했다. 상원은 자신의 주제에
맞지 않는 호사를 누렸다간 평생 맛볼 행운을 다 써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때마다 고개를 저어야 했다.
"버스타고 가면 돼 금방가는데 뭐 고마워"
거절을 하면서도 고맙다는 감사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는 상원이었다. 그런 그의 말이 가식적인 겉치레가 아니라는 것쯤은 함께 학생회 활동을
해온 그들이 잘 알고 있었다.
상원이 후배들에게 인사를 해보이고 뒤돌아 걷고 있는데 김이경이 그 뒤를 따라나서며 그를 불러세웠다.
"선배 잠깐만요"
"응?"
"상원 선배는 어떻게 한 번 제 부탁을 안 들어주세요?"
상원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쌍커풀 없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에 다정한 웃음이 머물렀다. 이목구비가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차가워 보일 수도 있는 상원의 인상을 해사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눈웃음이었다.
"그런게 아냐 너희 집하고 우리 집 방향도 반대잖아. 기름 아깝게"
기름이 아까운 사람이라면 애초에 벤츠를 타고 등하교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와아 선배 제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지금 기름타령하고 계신건가요? 너무하신데요?"
김이경이 새침하게 웃으며 상원을 바라봤다.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상원은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겨버렸다.
김이경의 단점이자 장점은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후회 안 하실거죠?"
"후회는 무슨 내일봐"
내일 있을 학생회 회의를 떠올리며 상원은 인사를 했다. 김이경도 체념한 태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길모퉁이를 지나 한참을 걸어 내려가는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상원은 가방에서 단어장을 꺼내들고 몇 번이나 읽어 첫 글자만 봐도 외울 수 잇는 단어들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단어장을 넘기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상원은 뺨에 닿는 시선을 느끼고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
하마터면 입밖으로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상원은 황급히 다시 단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광펜으로 그은 중요 단어조차 그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상원은 다시 조심스럽게 옆을 힐끗 보았다.
.....역시나였다.
조석희가 버스 정류장에 세워진 디스플레이 페널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김이경이 아까 던진 의미심장한 미소와 의미가 무엇인지 상원은 그제야 파악했다.
이것을 행운으로 파악해야 할지 불운으로 파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놀라운 일이었다. 같은 노선버스를 타기 때문에 가끔 버스안에서 그를
보긴했어도 이렇게 버스 정류장에서 직접 마주치는 일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상원은 알렉산더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리 앙투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문덕 뽀순뽀순 퀴의 영험함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석희가 말을 걸면 어쩌나 싶어 상원은 속으로 수만가지 시뮬레이션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조석희는 삐딱하게 선 자세에서 불편한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상원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세계대전을 치루는 중이었다.
선배로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야 할까? 아니야! 인사를 할 타이밍은 이미 놓쳤잖아. 하지만 여기 앉을 때는 단어장을 보느라 볼새가 없었는걸. 무시한 거라고 생각
하고 혹시 기분 나빠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 아냐 쟤는 내가 지금 여기 나타난 것도 어쩌면 스토킹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몰라. 나 스토킹하는거 아닌데...
스토킹한게 아니라고 한번 말해볼까..... 더 기분나빠하겠따. 그러면 자연스럽게 날씨얘길 꺼내볼까? ....날씨얘길 꺼낼 만큼 친근한 사이도 아니구나.
버스는 왜 안오지 아... 그냥 이렇게 영원히 버스가 안 오면 좋겠다.ㅏ 헉... 안돼. 이런 생각을 하면 정말 스토커 같잖아. 다리 좀봐 진짜 길다.
손가락도 길고... 아 한번만이라도 저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얽을수 있다면... 헉! 안돼 방금거 너무 변태같았어. 이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아서다행이다.
말을 한번 걸어볼까? 샌드위치 맛있었다고 칭찬했잖아.
.... 아 버스는 왜 안오는 거야.
상원은 버스정류장 전광판에 초조한 시선을 던졌다 그때 어디선가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빠르게 버스정류장을 향해 다가왔다.
상원이 고개를 돌리자 호피 무늬가 표범보다 잘 어울릴 것 같은 여자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걸어오고 있었다.
"석희야아!"
그녀가 애교스런 콧소리를 내며 조석희에게 달려 매달렸다. 눈물이 날 만큼 부러운 광경에 상원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누나 차는?"
"갑자기 고장나서 나도 지금 택시타고 내린 거야. 아 오늘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지 몰라"
재수가 없다.는 그녀의 표현에 괜히 찔린 상원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 가끔 그렇죠 재수가 없는 날이 있어"
조석희가 자신보다 너댓살은 많아 보이는 여자의 허리를 한손으로 바싹 끌어안으며 이죽거리는 투로 말했다.
"택시타고 갈까? 우리집 오늘 아무도 ㅇ벗어"
교태어린 여자의 맨트에 조석희는 망설임 없이 오케이를 했다.
상원은 그날 편의점에서 보았던 여자는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걱정했다가 조석희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떠올리고는 이 상황을 조용히 수긍했다.
동시에 들끓는 자괴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감히 자신이 어떻게 주제도 모르고 타인을 걱정한단 말인가. 좋아한다는 고백한 상대는 자신이 있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여자의 허리르
끌어안고 외설스런 말을 주고받는 이상황에서!
상원은 한시라도 빨리 아무 버스나 오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전광판에 마침 그가 타야 할 버스의 숫자가 반짝거리며 떴다. 상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스를 기다렸다. 밤공기를 가르며 버스가 나타나자마자 그는 재빨리 버스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리를 앉은 후 상원은 뒤따르는 풍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 그럼 어떡해 택시가 안오잖아. 이거 타면 10분이면 도착하니까"
호피 무늬 옷으로 몸을 휘감은 여자가 조석희 손을 잡아 이끌며 애교스럽게 그를 졸라댔다. 조석희의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버스의 계단에 올라섰다.
두 사람은 버스의 맨 끝 좌석으로 가 앉았다. 상원은 울고 싶어졌다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리 앙투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문덕 뽀순뽀순퀴가
다 무슨소용이란 말인가. 일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치닫고 마는것을.
버스의 문이 닫히고 출발했다. 상원은 앞자석의 손잡이를 쥐고 고개를 숙인채 빨리 다음정거장에 도착하기만을 바랬다.
자신을 무시하는 조석희도 슬펐지만 무엇보다 가장 슬픈건 다른여자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조석희였다. 그리고 그 여자들이 한없이 부러워지는 그 순간이 너무도
싫었다.
다음번 정거장의 정차를 알리는 방송을 들으며 상원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귀를 찢는 광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버스를 덮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상원은 간신히 자리에서 나뒹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뒷자석에 무방비하게 앉아 있었던 여자는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져 버스 뒷문까지 굴러야 했다. shit 이라고 소리친 조석희는 아슬아슬하게 버스자석 앞에 세워진
봉을 잡고 몸의 균형을 바로 세웠다. 놀란 버스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확인했다. 버스의 후미를 박은 트럭이 중앙선을 벗어나 세워져 있었다.
순식간에 도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사는 우선 뒷자석에 날아오듯 엎어진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옷은 이미 코에서 쏟아진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이게 괜찮아 보여요!!"
그녀가 코를 움켜잡고 울쌍을 지었다 앙칼진 목소리를 지르는 것을 봐선 목숨에 지장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상원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뒷자석에 앉은 조석희의
안녕을 살피려 고개를 돌렸다. ".....!"
상원은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죽일 듯이 보고 있는 조석희를 발견하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기분을 맛보았다 그 눈은 마치 이 모든 사고가 네탓이라고 말하는것 같았다.
"괜찮아? 어때요?"
그가 뒷자석에서 내려와 그녀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몰라 코뼈가 부러진 것 같아 아 시발 짜증나"
"집에 갈 수 있겠어?"
"집에 가긴 어딜가 병원에 가야지 코뼈 부러진 거면 다시 수술해야 한단 말이야 재수술은 돈이 두배로 든다고"
그녀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조석희가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내가 택시타자고 했잖아요"
"그럼 지금 이게 내탓이라는거야?"
그녀가 울먹거리며 조석희를 올려다봤다. 조석희는 짜증이 난다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제스처는 그가 어떤 생각을하고 있는지 아무리 둔한
상대라도 눈치 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태도에 상대에 대한 배려는 눈곱마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편하고 간단하게 섹스를 즐길 기회를 날려 심기가 불편할 뿐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짜증나 몰라 나 병원갈거야"
자존심이 상한 그녀가 조석희의 손을 팽개치고 버스에서 내려갔다. 기사가 보험에 관한 것을 설명해줄 요량으로 황급히 그녀의 뒤를따라 내렸다.
버스에 황량하게 조석희와 단둘이 남겨진 상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었다 고개들 들었다가 다시 조석희와 눈이 마주친 상원은 안되겠다 싶어서
후다닥 일어나 버스 뒷문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버스를 무사히 탈출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조석희의 손에 무자비하게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어디 가요"
"어? 나... 나 집에..."
안좋은 방향이긴 했지만 조석희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았다는 사실에 상원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혀가 꼬이는 것을 간신히 이빨로 다잡고 집에 가려고 라고 말을 마쳤다.
하지만 조석희는 상대방의 말따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기사가 전화번호를 적고 가라는 것을 들은척도 하지 않고 그는
상원을 질질 끌고 걸었다. 그의 손에 끌려가면서 상원은 황송함과 당혹스러움의 가운데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공원의 후미진 곳으로 상원을 끌고 온 조석희는 그를 구석에 내동댕이치듯 던지고 물었다.
"너 대체 뭐야"
"....어?"
"너 대체 뭐하는 인간이냐고"
조석희가 느릿한 발음으로 그렇게 두번 물었을때 상원은 자신이 잘 못들은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조석희의 손이 뒷덜미에 닿았다는 황송함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당혹스러움만이 그득 들어찼다. 조석희가 아무리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라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대놓고 자신에게 반말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뭔데 자꾸 이렇게 거슬려 재수없게"
조석희가 주먹으로 벽을 후리치며 말했다 상원은 그가 단순히 앞에서 알짱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심하게 대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조석희의 심기를 단단히 뒤틀리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뭐든 해야만 했다.
"미안... 그러려고 그런건 아닌.....!"
상원은 말을 잇지못했다 조석희가 그의 머리를 움켜쥔 채 앞으로 잡아 끌었다 머리카락이 다 뽑혀버릴 것 같은 고통이 전해졌지만 상원은 차마 아프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랬다간 진짜로 아픈게 무엇인지 조석희가 기꺼이 맛보게 해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선배 덜떨어진 사과 들으려고 데려온거 아니거든"
"아...어"
한대 얻어맞을 위기에서도 상원은 가까이서 본 조석희의 얼굴이 근사하단 생각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었다
"너 때문에 오늘 날린 거니까 네가 책임지고 빨아"
"응?"
"suck my dick bitch"
상원은 방금 전 들은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관용적인 표현인 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상원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 비치 아닌데 여자 아니야...나"
조석희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독하게 뒤틀린 웃음 뒤에 이어진 독설은 상원을 지근지근 밟아 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선배? 안아 달라는 눈으로 발정난 암캐 같은 눈으로 보고 있잖아"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 나는 그냥...."
"역겨운 사랑 타령 따위 또 할 생각은 아니지? 선배"
서걱 하고 잘려버린 마음에 상원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조석희는 바지의 퍼스너를 내리고 자신의 성기를 한손으로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상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가져다 댔다.
"빨아"
"...조석희 난..."
"시발 빨라고 못 알아들어?"
고압적인 어조였다.
상원은 무서웠다. 슬펐고 황당했고 두려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벌벌 떨리고 다리가 풀린 이 상황에서 도망쳤단 그 뒤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조석희의 살벌한 눈이 아마 그가 어느 한계점을 넘어섰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결심을 마친 상원이 마른침을 삼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자 위에서 피식 하고 비웃음이 들려왔다.
"뭐야 얌전빼는 얼굴을 하더니 내 좆이 그렇게 맛있어 보이나 보지? 침까지 삼키게"
"그게 아니라...."
긴장을 해서 그런 것이라고 상원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안으로 울컥 들어온 남자의 살덩이 때문에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닥치고 빨리 빨기나 해"
생리적인 혐오감과 목구멍을 찌르는 감각에 상원은 눈물이 왈칵 쏟았다. 하지만 조석희는 상대의 상태따위는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애초에 자신과 같이 있던 여자가 코피를 쏟은 상황에서도 섹스 가능여부만 신경쓰던 인간이었다
"이빨 세우지마 혀로 하라고"
조석희가 상원의 턱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오랄섹스에 대한 코치를 하기 시작했다. 상원은 입속에서 무게를 더해가는 무지막지한
크기의 살덩이에 숨이 막혀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조석희가 자신의 성기를 상원의 입 안에서 빼내고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선배 설마 처음해?"
"아... 응"
"흠 호모주제에 쓸데없이 버진이란 말이군"
여기서 버진이란 단어는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고 정정해주려다 상원은 입술을 다물었다. 어떤 단어를 사용한다 해도 자신이 처음이란 사실관계를
바로 잡기에는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갑자기 조석희가 손가락을 상원의 입안에 쑤셔 넣었다.
"...?"
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이러는 거냐고 눈짓을 해보였따 .
"이렇게 하라고"
조석희가 손가락을 상원의 혀위에 음란하게 문지르며 말했다 그가 턱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상원의 턱을 타고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흘러내렸다.
상원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닦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게 그의 솔직한 속내였다.
"선배 그런거 신경쓸거 없어요"
"응?"
갑작스럽게 돌아온 조석희의 존댓말에 상원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선배 얼굴 보면서 하는거 아니니까"
"....."
"빨리 입이나 벌리시죠"
그가 반쯤 선 자신의 성기를 손에 쥐고 상원에게 윽박질렀다. 상원은 체념한듯 입을 벌리고 다시 그의 것을 입안으로 받아들였다. 혀에 스치는 단단한 살덩이의 감촉과
코에 닿는 거친 체모의 느낌이 생경한 만큼 사실적이었다. 조석희는 사정을 봐주는법이 없었다. 그는 성격만큼이나 이기적인 구강성교를 즐겼다.
상대의 목구멍이 아플만큼 그는 허리를 놀려 상원의 입안에 자신의 살덩이를 밀어넣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원에게 그는 심상한 말투로 입술을 오므리라는
둥, 혀를 사용하라는둥 말 따위를 늘어놓았다. 상원의 움직임이 멈출때마다 그는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어 난폭하게 상대를 잡아 당겼다
곤혹스러운 시간이 끝나고 절정에 다른 조석희는 상원의 입안에 고스란히 정액을 토해내고 말았다 상원이 쿨럭거리며서 입안에 가득찬 정액을 바닥에 뱉어냈다.
"쿨럭 쿨럭 욱-"
바지 퍼스너를 올리는 소리가 들렀다.
상원은 손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악마같은 남자가 온몸이 자릿자릿한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어땠어요? 선배 오매불망하던 좃을 빤 소감이 좋았어요?"
상원은 하마터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응하고 대답할 뻔했다. 수치도 모르는 자신을 책망하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석희는 떨어진 가방을 주어들고 먼지를 털며 그런 상원에게 경멸에 찬 시선을 던졌다. 한손으로 가방 끈을 움켜쥔 그는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공원을 걸어나갔다.
상원은 수돗가로 가서 입을 헹구었다 하지만 이미 입안에 젖어든 그 비릿한 맛은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상원은 몇 번이나 입안을 헹구어야 했다.
상원이 열이 나자 그의 어머니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아들이 이상한 사고에 휘말려 어딘가를 다쳐오는 일은 종종 있었어도 이런식으로 몸이 아파 학교에
가지않겠다고 한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분명 심적으로 충격을 받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게 분명하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는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늘 하루 쉬고 내일 학교가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렴"
"네"
힘없이 웃어 보이는 아들의 이마를 손으로 만져주며 그녀는 방문을 나갔다
어머니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때부터 워낙 크고 작은 사고에 단련되어있다고 하지만 부모님한테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불 안에 몸을 둥글게 말고 들어가 상원은 아버지의 전근이 오늘이라도 다시 성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위의 현실성 없는 소원을 빌어보았다
"....전학가고 싶어"
건조한 음성이 방안에 조용히 울렸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그 바람에 우울해진 상원의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어제 있었던 그 일을 떠올리면 얼굴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이 그런 일을 하다니 믿기지 않았다 꿈을 꾼게 아닐까 하고 반문해보았디만 뜨겁게 부어있는 입 안 점막과 교복 재킷에 남아있는 희미한 얼룩이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조석희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까지는 파악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2년을 넘게 버텨온 학교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던 스스로를 추슬러 여기까지 온건데, 고작 이런 문제로 무너질 수.......
"....전학가고 싶다"
상원은 베개를 끌어안으며 다시 한 번 마음속의 말랑말랑한 부분을 뱉어냈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왔지만 상처받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든 힘들고 솔직히 무섭다고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참을 뿐이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것 같았다.
1년간 마음에 품어왔던 상대에게 비참하게 거절을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성적 배설을 처리해주는 일을 겪게 되다니..
"전학 가자"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음속의 결심을 다잡았다. 역시 전학만이 살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방문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원아 학교 후배가 문병왔는데"
"네?"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에 후배라는 단어에서 적합한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청 잘생긴 후배인데 누구니?"
엄청 잘생긴, 이란 수식어는 상원의 머릿속 뉴런을 재빠르게 통과해 뇌 속의 회색피질을 자극시켰다. 펑 하고 만들어진 얼굴은 상원을 패닉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들어오라고 한다?"
"예? 아 잠깐만, 세수도 해야하고 양치도... 머리도 감고 옷도 좀 갈아입은 다음에.."
상원이 허둥지둥 한 손에는 수건을 다른 한손에는 옷을 움켜잡고 일어서서 대답했다 어머니는 웃으며 현관으로 사라졌다 세수를 먼저해야 할지 옷을 먼저
갈아입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때 방문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부스스한 머리라도 빗자 싶어 상원은 책상위에 빗을 움켜쥐었다.
방문이 열렸다 그렇게 상원이 빗과 수건 옷을 움켜쥔 채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선배 아프시다면서요"
"어....."
상원이 빗으로 이경을 가리키며 입술을 뻐금거렸다
"표정이 왜 그래요? 제가 못 올때 온것도 아니고"
",,,, 우리집을 어떻게 알고?"
"학생부만 보면 되는건데 뭐가 어렵다고요"
이경이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감기 걸리셨다면서요 여기 푸딩이랑 과일 좀 사왔어요 열날때는 입맛부터 찾으시는게 좋을 거예요"
상원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봉투를 받아들였다. 키가 큰 남자가 둘이나 서 있으니 방이 비좁게 느껴졌다. 상원은 이경에게 아무데나 앉으라고 권했다.
침대 위에 긴 다리를 쭉 뻗으며 앉는 김이경을 물끄러미 보던 상원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는듯 중얼거렸다.
"와 너도... 제법 잘 생겼구나"
"네?"
"아니 예전엔 그런 생각한적 없는데, ...잘생겼구나 너도"
이경은 상대방의 칭찬에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서도 빠지지 않는 외모였다. 배경 두뇌, 성격에 외모까지
훌륭한 조합을 이루어 황태자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살아오던 그가 알게 된지 이년이 다 되어가는 사람에게 이제야 제법 잘 생겼다는 얘기를 듣게 된 것이다.
때늦은 칭찬이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김이경은 이번 경우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고맙긴 한데 설마 그걸 지금 아신 건가요?"
"뭐가?"
"저 잘생긴거요"
김이경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잘생겼다는 발언을 하자 이번에는 상원이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동안 제 얼굴을 안 보신 거예요?"
"아니 봤지"
"그런데요?"
"남자 얼굴에 그다지 관심 둘 이유는 없잖아 나도 남자고 너도 남잔데..."
상원이 자신과 이경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경의 무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의외의 곳에서 혀를 질린 기분이었다
상원은 가끔 이런식으로 상대방의 상식을 뒤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아무튼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위. 수업 끝난거야?"
"네"
김이경은 일부러 마지막 수업은 듣지 않고 학교를 나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겁이 많은 동물에게 성큼 다가갔다가는 신뢰를 얻긴커녕
검을 먹고 도망갈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냥 감기인데 괜히 여기까지 오게했네 걱정 안해도 됐을텐데"
"선배가 전화도 안 받으시고 무단결석을 하신것이 이번이 처음이니까 걱정이 되지요 혹시 무슨일 있는 것은 아닌가 싶잖아요"
"하긴 그렇긴 하겠다."
자신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경의 걱정이 별스러운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걱정을 앞세워 집까지 찾아온 후배의 노력이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매우 잘생긴 후배 라는 한마디에 밑도 끝도 없이 조석희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믿은 자신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역시 전학을 가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상원선배"
"응?"
전학의 꿈에 젖어 있던 상원이 이경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대에 앉아 있던 이경이 어깨를 뒤로 젖힌채,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경은 늘 행동거지가 바른 타입이었다. 저렇게 느긋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뭔가 속으로 꿍꿍이를 계획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어? 아니 없어"
상원이 대답해 놓고 자신의 대답이 너무 빨랐던 것은 아닌가 싶어 식은땀이 흘렸다 거짓말에 능하지 않은 상원으로서는 이렇게 화제 차단을 하는 편이 최선이었다.
"그럼 설마 진짜 아픈거예요"
이경이 상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약간의 미열에 그는 흠 하고 인상을 섰다.
"설마라니 진짜 아파"
상원의 이경의 손을 밀쳐내며 대답했다. 결석을 할 정도의 고열이 아니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쪄진 것이다.
"왠지 선배답지 않네요"
"나 다운게 뭔데?"
안 그래도 심경이 복잡했던 상원은 저도 모르게 울컥해져 가시돋친 말투로 대꾸하게 되었다.
"선배는 강하잖아요 조용하고 느린데 늘 보면 그 자리에 계시거든요"
후배의 어른스러운 칭찬에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의 반응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아무튼 제가 그래서 선배존경하는 걸요"
"어?"
의외의 발언이었다.
학생회장인 이경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조금 더 살갑게 구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생회 선배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3학년인 상원에게 서기직을 연임해줄 것을 부탁한 것은 다름아닌 이경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주는 부분에 상원도 특별히
부담감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한번도 이경이 자신을 존경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경의 태도에서 그런 감정이 묻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김이경이란 인물의 입에서 쉽게 존경이라는 단어가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희재고의 수많은 수재들을 제치고 학생회장에 앉은 김이경은
아까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수려함을 밝혔듯이 스스로가 잘났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존경한다니?
"선배가 늘 그자리에서노력하는 모습 존경한다고요"
"....어 하하"
방금전까지 전학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던 상원은 차마 그 자리에서 도망가려 한다는 소리를 밝히지 못했다. 천하의 김이경에게 존경한다는 고백까지 들은 이마당에
차마 상원은 그 얘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방어막이 필요하겠다 싶어 상원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기 네 얘기 정말 고마운데.... 나 부탁할게 있어"
"뭔데요 선배"
"...나 학생회 일 그만 두고 싶어"
상원에게 학생회일은 정말 특별한 의미였다. 특수학급이나 마찬가지인 6반 학생이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어디에도 소속감을 갖지 못하는 상원이 무게중심을 가질 수 있던 이유에 학생회가 제법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머리가 좋은 김이경이 모를리가 없었다.
최소한의 참여로 연임을 약속받긴 했지만 상원이 학생회일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에 그것도 가능했다.
"왜요?"
놀라거나 화내는 일 없이 김이경은 차분한 태도로 이유부터 물었다.
"아 나 공부도 해야하고..."
"선배 학생회일에 그렇게 많은 시간 뺏기는 것은 아니잖아요"
"...."
김이경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상원은 그 이상 변명의 말을 늘어놓지 못했다 상원이 하는 일이라고는 한달에 한 번있는 전교 학생회 회의록 정리나
가끔 학교 행사가 있을때 일을 도와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가끔있는 행사에서 간간히 조석희를 마주친다는 것이 상원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학생회 임원도 아닌데 조석희가 왜 학생회실에서 어슬렁거리냐는 질문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간 그 이해되지 않는 그의 출연을 즐긴 주제에 이제와
그걸 묻는것도 입장이 우스워지는 것이다.
"공부하시는거 많이 힘드세요?"
후배의 걱정스러운 어조에 상원은 염치없이 기대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이경이 알겠어요 하고 말을 이었다.
"선배 그러면 회의록정리만 해주세요 다른 업무는 제가 대신할게요"
이경이 2학년이라 할지라도 벌써 치열한 입시경쟁의 출발선에 서있음을 상원은 알고 있었기에 그의 제안에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동관에 있는 도서관 열쇠드릴께요"
"응?"
"동관 도서관이요"
이경이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관의 도서관은 학생회장에게만 열쇠가 주어지는 개인공간이었다. 그곳은 역대학생회장들이 모아놓은 최고의 입시자료들이
구비되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희재고 내의 비고였다. 거기에 쌓인 자료를 한번만 훑어봐도 서울대합격은 맡아놓은 당상이라는 얘기가 전해졌다.
상원은 자신에게 그곳 열쇠를 선뜻 내주겠다고 하는 후배의 의도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어 두눈을 크게 치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드세요?"
"아니... 대단히 마음에 드는 제안이긴 하지만... 왜?"
"뭐가요?"
"그렇게 해서 내가 학생회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상원의 성격과 재능이 서기직에 잘 어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수재가 발에 치일 정도로 널린 희재고에서 그를 능가하는 인재를 찾는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상원의물음에 글쎄요 라고 말끝을 늘린 이경이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보였다.
"존경하는 선배를 위해서 라고 해두죠"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원이 따라 일어서자 이경이 손짓을 했다.
"아픈데 쉬세요"
"현관까지는 바래다줄께"
"열 있으시잖아요 찬바람 쐬면 안 좋아요"
김이경이 상원의 이마를 다시한번 손으로 짚어주며 말했다.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스킨쉽이 잦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그럼 멀리 안나갈게 하고 손을 흔들었다.
"상원선배"
"응?"
"저희 집에서 예전에 키우던 개가 한마리 있었거든요"
이건 또 무슨 갑작스런 개타령인가 싶었다.
"원래는 주인이 있던 개인데 저희 집에서 키우게 되었거든요 정말 예뻐했어요 제가 목욕도 시켜주고 밥도 주고 저 그런거 귀찮아하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도맡아했어요"
"아 그렇구나"
어린 김이경도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가 개밥을 챙겨주는 장면은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이 열린 틈을 타사 목줄을 풀고 녀석이 집을 나가버렸어요"
상원은 뿔테안경 속에서 차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경의 눈에 왠지 모를 스산함을 느꼈다. 어색한 목소리로 그거 참 안됐네. 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원주인한테 되돌아갔더라구요 차를 타고 달려도 두시간이 넘는 거리인데 말이예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
결과는 확인해야 할 것 같아 던진 질문이었다.
"목줄을 바꿨죠, 다시는 도망 못 가게"
산뜻하게 돌아온 대답에 상원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김이경이 생각해 보고 연락 달라는 인사를 마치고 방문을 나설 때까지 상원은 석연찮은 이야기의
교훈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날 밤 동관 도서관과 전학의 기로에서 한참 고민하던 상원은 이경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동관의 도서관이 2학년 S반 정반대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위로 삼으며 상원은 잠자리에 들었다.
"상원아 알렉산더 아마데우스 갈릴레이 갈릴레오 마리 앙투아네트 헤라클래스 을지문덕 뽀순뽀순 퀴 말이다. 핑퐁만으로 영양섭취가 충분할까?"
동석의 진지한 물음에 상원은 자신이 짝이 왜 저머리로 공부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6반에서 애완바퀴의 이름을 정확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동석뿐이었다.
대진은 뽀순이라고 불렀고 승완은 알렉스라고 불렀다 헤라 라고 부르는 녀석도 있었고 을지라고 부르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한마디로 저 좋을대로 부르고 있는 셈이었다.
"다른 것도 같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단 한번 일을 벌이면 본격적으로 달려드는 6반 학생들의 성미대로 교실에는 이미 곤충사육 케이스까지 들어서 있었다.
아이들의 기행에 일찌감치 손을 들어버린 담임은 그 사육케이스 안에 있는것이 굳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다른거? 뭐?"
"글쎄 음 빵 부스러기 같은거?"
"오케이"
동석의 경쾌한 목소리로 대진에게 빵을 사러 가자고 소리쳤다. 쉬는 시간에 김이경에게 약속대로 동관 도서관 열쇠를 받은 상원은 가방에 도시락과 책을
챙겨 일어났다.
"어디 가?"
자고 있던 대진을 깨워 교실을 나가려던 동석이 그런 상원을 발견하고 물었다.
"오늘부터 당분간 혼자 먹을게"
"엑 왕따도 아니고 왜?"
"공부할게 좀 있어서"
상원이 혼자 있고 싶을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맨트였다. 눈치가 빠른 동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치라곤 엄마 뱃속에 고이 모셔두고 나온 대진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공부할게 또 있어? 맨날 공부만 하면 너 존트 큰일 난다. 운동도 좀 하고 그래야 사람다워 지는거야"
"상원이가 지금 너보다 백배쯤은 사람다울걸"
대진의 몸을 해부하면 장기가 다 페니스 모양일 거라는 설이 있었다. 동석은 윤대진 장기 페니스 모형 설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중 하나였다.
"아 맞다 그러구나"
대진이 대단한 생각을 떠올렸다는 듯이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친 후 상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너도 남자구나 그래서 혼자 있을 곳을 찾는거지? 내 잡지 빌려줄까?"
"...고맙지만 사양할게"
"왜? 원하는 타입을 말해봐 타입별로 다 갖추고 있으니까"
대진의 사물함은 성인잡지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니 영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6반 학생들은 가끔 대진의 잡지를 빌리러 오기도 했다.
대진은 넓은 아량을 베풀어 자신의 잡지를 그들에게 대여해 주었다. 물론 유료로.
"특별히 너는 공짜로 빌려줄게 부담갖지 말고 말해"
"상원이가 너랑 똑같은 줄 아냐"
동석의 핀잔에 대진이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내가 뭐! 상원이는 그럼 오나니 안하냐? 얘라고 평생 안해? "
"안해"
갑작스레 나타난 한승완이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대뜸 대답했다
"미친 이상원은 남자도 아니냐? 딸도 안 치게!"
대진이 지지 않고 맞받아 쳤지만 승완의 입장은 한겨울 피똥을 누는 시어머니의 기세보다 매서웠다.
"안쳐 우리 상원이는 절대 그런거 안해"
"어...."
중간에 선 상원은 친구들의 저 밑도 끝도 없는 오해를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줘야 할지 몰라 입술만 뻐금거렸다 당혹감에 할말을 잊을때마다 보이는 상원의
버릇이었다.
"이상원도 존나 딸칠걸 상원이 딸친다에 내 손목을 건다"
대진이 자신의 두꺼운 손목을 승완의 얼굴 앞에 들이밀며 자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네 손목을 잘라서 목에 걸고 다닐거다"
승완이 잇새로 으르렁 거리며 대꾸했다.
한 떨기 고고한 난초 같은 이미지인 상원은 승완의 머릿속에서 이미 또 다른 생명체로 자라고 있었다 그가 상원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얻고 내말이 맞지? 하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상원이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시선을 돌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그것은 무언의 부정이었다.
"손목 내놔 오우 예!"
졸지에 반장의 손목을 얻게 된 대진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승완은 곱게 키운 딸이 외간 남자의 손을 잡고 나타난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며 상원을
노려봤다.
"....너... 무슨. 안돼 그럴리 없어"
"....."
아버지 정신차리세요 저도 남자랍니다.
"안돼! 상원이는 그런 짓 안해! 절대 안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승완이 염불을 외는 중처럼 중얼거렸다.
"손목 내놔! 손목. 니 손목으로 난 똥 닦아야지"
흥분한 대진이 승완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의 분노는 배가 되었다.
"에이! 시발"
승완이 홧김에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은 것은 불행히도 그 옆에서 히죽거리고 있던 동석이었다 동석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얻어맞고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었다.
동석이 승완의 허벅지에 로우킥을 정통으로 날렸다. 오랜만에 붙은 두 사람의 싸움에 6반 교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상원이 희재고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친구들의
싸움을 보며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될것이라곤 상상치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그는 교실을 빠져나왔다.
손등으로는 아직도 후끈 거리는 뺨을 슬근슬근 문지르며 상원은 동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몇 달 전에 승완이 똑같은 질문을 했더라면 상원은 부끄럽긴 하지만 해본 적
없다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을 것이다. 거대한 운명에 맞서 싸우는데 삶의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느라 상원은 미처 그런 분야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날 야릇한 꿈을 꾸다 잠에서 깬 그는 본능적으로 팬티 안으로 손을 넣어 스스로를 달래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절정에 다다르며 상원은 조석희의 얼굴을 떠올리진 않았다. 양심상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르진 못했다 대신 그는 조석희와 비슷한 넓은 가슴이나 손 따위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것이 절대 조석희 것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상원은 재빨리 복도를 둘러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조석희라도 만난다면 진짜 그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죽을 수도 있었다.다행해 조석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원은 주머니 안에 있는 도서관 열쇠를 손으로 확인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자물쇠를 열려고 열쇠를 꺼냈을 때 상원은 문이 열려 있는것을 발견했다.
청소를 하시는 분이 가끔 들어가 정리를 한다는 얘기를 이경에게 전해들은 상원은 별다른 생각없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나서 상원은 천천히 도서관 안을 살폈다 역대 학생회장들의 취향에 따른 책들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모습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책이 많은 곳 특유의 종이
냄새에 상원은 우울함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상원은 책을 읽는 것도 책이 많이 쌓인 장소도 좋아했다.
"그래 이걸 전화위복으로 삼자"
가만히 생각하면 자신이 전학가고 싶다고 해서 부모님이 오냐 하고 보내줄 문제도 아니었다. 이곳에서 조용히 1년만 보내며 최대한 조석희와 마주치지 않고 지낸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다이어리에 빨간 볼펜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졸업할때까지 조석희를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가끔 뒷모습을 보는 정도라면 괜찮을 지도.... 그래 . 뒷모습정도면 매우 괜찮을 거다.
조석희는 앞모습만큼이나 뒷모습도 아름다웠다. 균형잡힌 등근육과 긴 팔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은 몇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것이다.
"아니야"
상원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상대다 보고 있으면 괴롭기만 할테니 아예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 뒷모습은 괜찮을지도 몰라. 아니면 상대가 아예 눈치채지 못하게 잠이 든 모습도 괜찮을 텐데 바로 저렇게.....
"-----!!!"
상원은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저 익숙한 어깨 저 익숙한 팔 근육, 저 익숙한 허벅지 근육, 무엇보다 익숙한 저 등짝이라니!!!!
계산 능력이 탁월해 모의고사 수학문제를 다 풀고도 시간이 남아 한번 꼼꼼하게 검산을 하는 상원이었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의문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왜 조석희가 여기서 엎드려 자고 있는 것인가.
이곳의 열쇠는 회장만 갖고 있다던데 쟤가 어떻게 들어와 있는 것인가. 김이경이 들여보낸 거라면 왜 그는 자신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인가.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신은 정말 왜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는 것인가!
어떻게든 이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이 본능적으로 상원을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긴장한 탓에 상원에겐 뒤를 살필 여유조차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책이 쌓여 있던 책장을 팔꿈치로 건드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책이 와르르 쏟아졌다 상원은 허겁지겁 책장 위에서 쏟아지는 책을 받으려고 손을 허우적 거렸지만 이미
조용한 도서관의 평화는 책이 바닥을 치는 소리로 깨지고 말았다.
책상위에 엎드려 있던 조석희의 어깨가 움찔 하고 움직였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상원의 눈에 포착되었다.
"....."
"....."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상원은 유리케이스에 핀으로 날개가 꽃혀 박제된 나비의 심정을 절실히 느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뒤로는 책장으로 막혀 있어 더이상 움직일 곳도 없었따.
조석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 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여기 정말 너때문이 아니라 이경이가... 열쇠를... 정말이야 널 따라온게 아니야"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는데 상원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이 생각해봐도 상대방이 믿어줄리 없는 변명이었다 이틀전 그런 모멸적인 일을 강요당하고도 이렇게 뻔뻔하게
나타나다니 정말 말 그대로 스토커 아니면 이럴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정도면 경찰에 신고를 당해도 마땅한 수준이었다. 조석희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져 갔다. 한대 얻어맞을
각오까지 하고 상원은 눈을 질근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떤 물리적 충격도 전해져 오지 않았다.
"....?"
조심스레 눈을 뜨고 바라보니 조석희가 손으로 이마를 짚은채,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고 여전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눈빛이....
"...어디 아파?"
괜한 오지랖 때문에 스토커로 신고 당한다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이쯤에서 damm it 이나 fucking 정도는 중얼거려야 눈앞의 남자를 조석희라고 부를 수 있을텐데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볼 뿐이었다.
".....워"
"뭐?"
"시끄러워 잠 깨우지마"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험악한 목소리였다. 상원은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한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쥔 조석희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상원은 지금 이 상황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아 손바닥으로 뺨을 더듬어 찾아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철썩 내리쳤다. 그 소리에 다시 조석희가 몸을 일으켰다.
"i`m telling you for the last time"
갑자기 쏟아진 영어문장에 상원은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영어듣기를 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목소리가 영어듣기 평가 성우로 활약해준다면 테이프가 늘어날때까지 듣고도
남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스친 것도 잠시.
"hold your tongue"
이마에 총구가 겨누어진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스산한 저음에 상원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예스 라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그러자 조석희는 거짓말처럼 다시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상원은 책상을 등지고 선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석희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뀌고 나서야
상원은 천천히 바닥에 앉을 수 있었다. 바닥은 차고 허리가 아팠다. 상원은 핸드폰도 교실에 있는 가방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는 난폭한 맹수 한마리가 언제 깰지 모르는 낮잠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상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도서관에서 조난을 당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