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9/45)

학년당 6학급이었기에 희재 고등학교의 학생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수에비해 교사는 큰 편이라서 3년간 서로의 얼굴도 모르고

졸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즉 마음만 먹는다면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

그런데 왜 아침부터 또 조석희와 마주치게 된 것인지에 대해 상원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옆에는 학생회장인 김이경도 

함께였다. 상원이 학생회 일을 그만두련느 데에는 별관에 처박혀 나오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다름 아닌 조석희가 학생회실에 가끔 나타난다는

이유가 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생회장이 조석희에게 의논을 청하는 일이있었다. 바로 오늘처럼 .

"하필... 또 오늘이야"

멀리서 걸어오는 조석희를 발견한 순간 상원은 어디로 숨어야 할지 주변을 둘러보다 재빨리 차 뒤로 몸을 숨겼다 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그는

바닥에 절을 하듯 넙죽 엎드려 두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상원에겐 수많은 차 중에서도 하필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할 차를 고르는 

특이한 재주가 있었다 

"헉!"

부릉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휭하고 주차장을 떠난 차 때문에 엎드려 있던 상원의 모습이 적나라 하게 드러났다. 학생회장인 이경과 걸어오고

있던 조석희의 표정이 단박에 구겨졌다. 

"상원선배?"

상원을 알아본 김이경이 깜짝 놀라 외쳤다. 

운이 더럽게 없는 것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차분한 상원이 학교 주차장 근처에서 넙죽 엎드려 있는 모습은 예상치 못한 그였다. 

"상원선배 거기서 뭐하세요"

"나? 하하 , 나 음... 렌즈찾아"

상원의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더듬는 시늉을 했다. 

"렌즈요? 선배 시력 양쪽 모두 1.5 아니었어요?"

"....."

상원은 속으로 망했다고 중얼거렸다. 하필 학생회와 관련된 사람이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 학생회장과 함께 마주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내것 말고"

"그럼 누구 렌즈요? 다른 사람 렌즈를 왜 선배가 찾아줍니까"

김이경의 목소리가 갑자기 험악해졌다. 아무리 이상원이 6반으로 입학을 했고 6반 소속이긴 했지만, 실력은 다섯 반 그 어디에 둔다고 해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학생회 간부이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이 꼴통 반 깡패들의 놀림거리가 된다는 사실이 자존심 강한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

이었다. 

"친구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와줄 수도 있지 뭐"

그는 바닥을 내려다 보며 말도 안되는 변명을 중얼거렸다 상원은 자신의 머리가 나쁜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따지자면 좋은편이었다. 

한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고, 이해력도 빨랐으니까. 그는 희재고 특수학급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상위권을 차지할 만한 수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말솜씨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한마디를 해도 천천히 곱씹고 나서 말을 내뱉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상대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는 무게가 있었다 그런데 자꾸 조석희 앞에서는 망언만 내뱉는 꼴이 되고 있으니 상원은 죽고 싶을 따름이었다. 

..... 아버지 그러게 왜 전근 이야기를 꺼내셨나요.

"여기서 계속 시간 낭비할 거면 난 먼저 들어간다."

희미하게 짜증이 묻어나는 어조로 조석희가 이경에게 말했다. 

대놓고 앞에서 시간낭비라고 일컬어진 상원은 잠결에 면도칼을 집어 양치한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경에게 말을 건냈다. 

"나중에 보자 이경아"

나는 됐으니 빨리 들어가 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김이경은 자신의 선배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렌즈를 찾고 있는데 홀랑 들어가 버릴 정도로

경우가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됐어요 같이 찾아드릴께요 넌 들어가"

학생회장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렌즈를 찾으려고 하자 상원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친절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둘이 가던 길을 가고 자신은 바로 일어서서 교실로 향하면 깨끗하게 끝날 문제였다. 아니, 애당초 차가 조금만 늦게 출발했다면.....

아니 그 차가 아니라 저 옆차에만 숨었어도.... 아니 오늘 5분만 일찍 출발했더라도! 아니 아버지의 전근이 그렇게 쉽게 번복되지만 않았더라도!

..... 아니다 애초에 이렇게 태어나버린 내 죄가 크다. 

오만가지 생각이 상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렇지만 침착하게 그는 김이경을 밀어냈다. 

"됐어. 금방찾아. 못찾으면 그냥 올라가지"

"그럼 그냥 올라가요"

김이경이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S반, K반, I반의 괴물 같은 라이벌을 제치고 학생회장 직을 차지한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사시미 칼날같은 결단력, 그리고 쇠심줄 같은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뇌와 판단력은 기본 조건이었다. 

조석희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아직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상원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경이 상원을 잡아 일으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야 했다. 

"별관으로 가실 거죠?"

"그래 안녕 잘가라"

상원은 두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별관을 향해 걸었다. 6반 소속이라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일이 되리라곤 상원은 생각지도 못했다. 

"선배"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별관으로 종종 걸음을 치던 상원은 그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귀와 뇌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 목소리는 꿈에서나 

그리던 바로 그 ...

"상원선배"

"응?"

방금 대답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해하며 상원은 고개를 돌렸다. 너무 빨리 돌리면 애가 달아 보일테고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돌려도

건방져 보일 테니 적당한 속도로,

조석희가 천천히 상원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느릿느릿하게 걷는 것 같았는데 키가 큰데다 다리가 길어서 상원의 앞까지 몇 걸음 걸리지 않았다. 

짧게 자른 머리 때문에 한 눈에 들어오는 두상이 매우 근사하다고 상원은 늘 생각했다. 

아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대가 아니었다. 

상원은 호흡을 조절하며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조석희를 마주보고 섰다. 

"왜 불렀어?"

"뭐 하나 물어보려고요"

"그래"

"선배 스토커예요?"

"...!!"

상원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면전에 대놓고 하는 조석희의 표정이 잔인하리만치 무표정하다는 것이 우선 놀라웠고, 혹여 저 앞에 서 있는 이경이 듣지는

않았을까 싶어 두려웠다. 하지만 상원의 입장이나 체면따위 관심없다는 얼굴로 조석희는 재차 그를 다그치듯 되물었다. 

"선배 스토커냐구요"

"아니. 나는.... 스토킹을 할 만한 사람은 못 된다고 생각하는데"

상원은 자신은 스토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킹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쓸데없이 솔직한 고백을 해버렸다. 

한마디 말에도 신중을 가하려는 그의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조석희에게 그런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스토커가 아니면 사람 앞에 나타나는 짓좀 그만 두시겠어요?"

원래도 저음인데다 한국어 발음이 어눌한 편이기 때문에 조석희의 말을 끝까지 듣고 이해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온몸에서 페로몬을 분출하는 조석희가 반경 1미터 앞에 있는 이상원에게는 더더욱.

"....어?"

그는 막 조석희의 "stalker'발음이 끝내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 보자고요 아침부터 벌레 밟아서 기분 더러운 사람도 생각을 하셔야지"

아침부터 벌레로 전락한 상원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조석희의 감정 섞인 혼잣말에 상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조석희의 말이 옳았다. 

오늘은 그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정말 재수가 없는 아침이었다.

"내가 벌레 같은가."

아침부터 앉아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수학문제집을 풀어댄 상원이 입을 열고 처음 뱉은 말이었다. 

"엥? 쫒또 그게 무슨 소리야?"

자다가 귀신 오나니 하는 소리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윤대진이 물었다. 

"나 벌레같은 느낌이 들어?"

상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진에게 되물었다. 이게 드디어 미친 건가 하고 대진이 상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또같은 차분하고 단아한 얼굴 그대로였다. 

"벌레면 바닥에 기어다니거나 수풀을 날아다니거나 하는 그런 벌레 말하는거지?"

자신과는 다른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상원을 배려해 윤대진이 확인차 그의 말속에서 사용된 벌레의 사전적 의미를 물었다. 

"그렇지 뛰어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메뚜기나 사마귀 귀뚜라미 같은 애들까지 모두"

일단은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둬야겠다고 생각한 상원이었다. 

"푸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것들에 널 왜 갖다 대냐"

대진이 침을 튀어가며 웃었지만 상원은 따라 웃지 못했다. 오늘 아침 조석희로부터 면전에서 벌레취급을 당한 후라 감히 웃을 수가 없었다. 

"누가 너한테 벌레 닮았대? 크크 소심한 녀석, 그래서 반나절을 수학문제집을 풀면서 고민했냐? 졸라 웃기네. 어떤 십새끼가 농담 한마디 던졌다고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냐 이 겉똑똑아"

어떤 씹새끼가 조석희라는 것. 그리고 상원의 짝사랑 상대라는 것이 대단히 큰 문제였다. 하지만 그걸 상대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에 상원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병신아 너 진짜 설마 자기가 벌레 같다고 진지하게 3초이상 생각하거나 한건 아니지?"

대진이 키득거리며 상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지만 상원은 시선을 피해 무언의 긍정을 해버렸다. 

"에! 뭐야! 너 진짜 그딴 생각하고 있었어?"

"...가능성은 늘 있으니까"

"가능성이고 지랄이고 어떤 새끼야. 어떤 개씹새끼가 그런 말을 했어!"

대진이 읽고 있던 성인 잡지를 내려놓고 소리쳤다. 

윤대진이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받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때,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상원이었다. 선생들조차 내던진 돌머리 윤대진에게

이해할 때까지 단 한번도화를 내지 않고 천천히 설명을 해서 시험을 통과시킨 장본이인 바로 상원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6반에 어울리지 않는 병신샌님

이라고 상원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대진이 그 일이 있은 이후에는 상원의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데려와 어떤 개쉑인지 부랄을 네쪽으로 만들어 강판에 갈아 주스를 만들어 처먹여 줄테니까"

듣기에 거북할 정도로 상스러운 욕을 퍼부으며 대진이 씩씩거렸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마 끔찍하다"

"그 새끼야 말로 무슨 농담을 너 같이 고지식한 새끼한테 해서 애를 이지경으로 만드냐! 이 지경으로!"

"애 지경이 어떤데"

옆에서 오토바이 잡지를 뒤적이고 있던 동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수학문제만 풀고 있잖아 폐인처럼"

"...풀면안돼? 학생이?"

"아 시발 우리 반에서 누가 문제집을 풀어?"

윤대진의 말이 옳았다. 6반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두눈박이가 외눈박이 나라에 가면 병신이 되듯, 학생이지만

6반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미친짓이나 다름없었다. 

"지퍼나 올리고 말해 변태새끼야"

"여기서 왜 지퍼 얘기가 나와!"

대진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손을 짚어 교복 지퍼를 올렸다. 흥분한 상태로 지퍼를 올리는 바람에 살이 씹혀 대진이 괴성을 지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3초도 되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또 지랄이다 또"

"미친새끼. 저거"

상원이 한숨을 내쉬며 자기가 해주겠다고 대진을 간신히 진정시켜 지퍼에 씹힌 살을 풀어주었다. 

6반의 반장은 승완이었다. 가장싸움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반장 노릇을 하는 것은 상원이었다. 게다가 담임마저 버린 폐가 같은

교실에 등대가 되어주는 것도 상원이었다. 뿐인가? 각종 위급한 상황에서 차분하게 사태를 진정시키고 해결하는 것도 상원의 몫이었다. 

워낙 6반 학생들이 생각없고 거칠게 놀다보니 교실안에서 피를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원은 1학년이 끝날무렵 응급처치는 양호교사 못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6반에 이상원은 완벽하게 적응된 생명체였다. 

"거기 뒤에 약 상자 좀 가져다줘 약 발라 줄테니까 가만히 있어"

"아 시발 존나 아프네"

대진이 눈물이 고인 눈으로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동석이 가져다 준 약상자에서 능숙하게 소독약과 연고를 꺼내어 상원은 대진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상처가 난 곳이 거북한 부위여서 얼굴을 찡그릴 만도 한데 그는 그런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약을 발라주며 친구에게 참을만 하냐고 

친절하게 물을 뿐이었다. 이상원이 6반에 떨어진 것은 개인적으론 큰 불행이었지만 6반 학우들에겐 대단히 큰 행운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태여 입 밖에 꺼낼 만큼 성격이 어른스러운 인간은   한 명도 없었다. 

"시발 이게 무슨 벌레야 천사지"

"응?"

대진의 중얼거림에 상원이 눈을 치켜뜨고 되물었다. 

하얗고 결 좋은 피부는 그의 차분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말을 하기 전 생각을 할때 살짝 내리감는 눈은 고급스러운 난초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180에 가까운 큰 키였지만, 손바닥으로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질 만큼 얼굴이 작고 몸이 비율도 좋았다. 

고양이 입 꼬리처럼 살짝 올라간 입술은 아주 약간의 미소만 머물러도 보는 사람의 가슴이 간질간질 할 정도로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늘 맏형 같은 성품으로 자신들을 돌봐주는 상원에게 감히 벌레라고 칭한 인간이 누구인지 대진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흠 아니 나 이제 바지 올려도 되냐고"

교실에서 사람이 있건 없건 꼴릴때 동영상을 보며 자위를 즐길 만큼 두께가 남다른 대진이었지만 낯부끄러운 말은 죽어도 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올려 제발"

상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담탱 온다"

앞자리 녀석의 외침에 모두들 슬금슬금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물론 담임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와 교탁에 서 있을때까지 자기 자리 찾기는 

계속될 정도로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다들 제발 좀 자리에 앉아봐라 수업 종 친지가 언젠데 여태 돌아다니냐"

"수업 종 소리 안들려요 스피커 좀 고쳐줘요"

한놈이 잔뜩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놈은 이틀 전에 스피커를 향해 손수 제작한 불꽃 폭탄을 날려 홀라당 태워버린 장본인이었다. 

3학년 6반의 담임은 학생들의 이런 작태에 포기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귀로 흘려버리고 자신의 할말만 전달햇다. 

"오늘 국어수업은 자습으로 대체된다 내일 대학입시 설명회가 있기때문에 학교가 지금 정신이 없으니까 다들 조용히 자습해"

"왜 또 자습이야 짜증나게"

"그냥 체육하면 안되요? 밖에서 공 좀 차게"

"체육은 무슨놈의 체육이야"

6반 학생들에게 체육이란 운동장에 나가 난동을 부리며 논다는 의미였다. 

내일 중요한 행사가 있는 만큼 담임 입장에선 그런 것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럼 집에 보내주시든가요"

"수업도 다 안끝났는데 가긴 어딜가. 이녀석들아. 자습이나 해!"

다른 반의 수업을 빼는 것보다 6반에서 수업을 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슨 행사가 있을때마다 선생들은 6반의 수업을 자습으로

대신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수업의 1g도 관심이 없었지만 상원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그럼 보충수업해주시는 건가요?"

상원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담임에게 물었다. 

"아 하하 그게 상원아"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상원은 단번에 알았다. 6반에서 3년간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학교의 선생들이 자신의 반을 어떤 식으로 취급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상원이 공손하게 대답하며 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학교의 이러한 처사에 매우 불합리 하다 생각하여 자신의 의사를 선생님들에게 피력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상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상원은 6반에 잘못 섞인 불순물일 뿐이었다. 하나의 불순물 때문에 전체를 바꾼다는

것은 어불성설 이었다.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데 일년이 걸렸다. 

상원은 환경에 자신을 매우 적절하게 맞춰가는 타입이었다. 

주어진 환경에 투덜거릴 시간에 그는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타고난 박복함 때문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생긴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상원이는 그럼 다른 반에 수업이라도 보내버려요"

딴에 반장이라고 승완이 그럴 듯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담임의 표정은 곤란하다는 뜻을 내비췄다. 6반인 상원이 자신들의 반에 와서 수업을 듣는

것을 반기지 않는 학생들이 많아서였다. 

1학년 학기초에 상원이 전교 석차 2위를 차지했을 때도 같은 논의가 불거졌다. 이상원을 저대로 6반에 둘 것 인가 말것인가. 

선생들은 상원의 반 이동을 모두 찬성햇지만 학생들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현재 성적은 현재 성적이고 입학성적은 입학성적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 위견은 상원의 거처에 대한 여론으로 이어져 그가 3년 내내 전반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그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번에 빠진 부분은 나중에 선생님께 프린트 받도록 할게요"

상원이 재빨리 수습을 해나갔다. 6반에서 생활하면서 포기와 단념이라는 단어를 먼저 배우게 된 그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6반 학생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들에겐 다른 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두뇌는 없지만 따스한 마음에 보답할 줄 아는 의리는 갖추고 잇었다. 

물론 의리를 그럴 듯하게 표현할 줄 아는 매너와 예의는 구비하지 못했다. 

"그래라. 아참 상원아 그리고 심부름 하나만 해줄래?"

6반의 담임이 챙겨 가지고 온 프린트를뒤적거리며 그에게 말을 건냈다 그러자 상원의 짝인 동석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드럽게 시키기는"

"뭐라고 했냐 ! 김동석"

"뭐요? 제가 뭐라고 했나요?"

동석이 책상에 고개를 대고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동석은 170도 안되는 작은 키에 여드름이 벅벅 난 꼬마였지만 근방에서 악명이 높았다. 

자그만한 체구를 얕보고 덤볐다가 콧대가 내려앉을 정도로 맞은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권투 국가대표 라이트급 선수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법을 몸으로 알고 잇었다. 저 조그만 꼬마 녀석은 평소에는 얌전하다가도 눈이 돌면 어떻게 돌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6반의 담임은 익히 들어왔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흠 뭘 비맞은 중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냐 이말이지 아무튼 상원아 심부름을 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샘"

반장인 승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심부름 간다는 놈이 가방은 왜 들고 일어서냐 한승완. 이자식, 너 저번에도 심부름 간다고 하고선 그대로 집에 갔잖아"

"눈치 한번 빠르시긴"

한승완이 집어 들었던 가방을 옆 자리에 내려놓으며 흥 하고 자리에 앉았다. 

다른 반에 심부름을 보낼 만한 제대로 된 인간이 상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담임의 심부름은 늘 그의 차지였다. 

평소에는 그런 사실을 다들 당연히 받아들였을 텐데. 오늘 상원의 기분 상태가 저조하다는 것을 눈치챈 6반 아이들은 격렬할 정도로 담임에게

반항을 시도했다. 

"그럼 절 보내시든지요 제가 우리반에서 생긴 것도 제일 잘 생기고 멋지잖아요"

지퍼에 그곳이 끼여 방금 전까지 눈물을 그렁거리던 대진이 손을 들며 말했다 아직 아래가 얼얼해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상원을 위한 그 

나름대로의 우정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표현이라는 것이 6반 담임에게는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백금발로 염색을 하고 입술과 코에 피어싱을 한 개날라리 녀석을 굳이 다른 반에 심부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녀석도 심부름을

보내면 99퍼센트 돌아오지 않을 타입이었다. 

"미친 내가 너보다 잘 생겼지. 제가 다녀올게요"

이녀석은 97퍼센트.

"제가 갔다 올게요 담배도 한대 빨고 올겸"

.....101퍼센트.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주세요"

점점 흙빛으로 변하는 담임의 표정을 보면서 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6반의 담임은 누군가 심부름을 가겠다고 또 나서기 전에 얼른 상원에게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이거 2학년  S-1반에 가져다 주고 오기만 해라. 고맙다"

종이를 받아든 상원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ㅏ 

이젠 아버지를 원망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신관으로 가는 상원의 발걸음은 데드맨 워킹보다 무거웠다. 

아침에 그 꼴을 당하고도 S-1반으로 찾아간다면 조석희가 자신을 스토커로 생각한다 해도 반론을 펼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짝사랑이 진행 중일 때는 일부러 만나려고 해도 만나지지 않더니 피해 다니려고 할수록 만날 기회가 생기는 이 상황은 신의 장난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도 매우 악질적인 장난.

"어쩌지"

최대한 천천히 걷는다고 왔는데도 벌써 2학년 s-1반에 도착해버렸다. 그는 앞문에서 서성거리다 크게 숨을 내쉬고 예의바르게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교실안에서 수업을 하던 학년주임이 대답했다. 상원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최대한 조금 앞문을 열어 꾸벅 인사를 했다. 

"오 네가 웬일이냐"

상원은 대답대신 들고 있던 종이를 들여보였다. 누가 보낸 것인지 알아챈 학년주임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원은 그 자리에서 

꼼작도 하지 않았다. 수업중에 누가 찾아왔는지 궁금해진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지만 얼굴이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만 문틈이 열려 있었다. 

"들어와라"

학생주임 선생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상원은 참으로 예의바른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지키고 싶은 것은 있었다. 더 이상 조석희 앞에서 망가지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풋"

"뭐야 저거"

"하하하!"

작게 열린 문 틈 사이로 손만 넣은 채 종이를 내민 모습에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학생주임 선생은 대체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상원을 쳐다봤다. 저 녀석이 장난을 치나 싶었지만 이제는 아예 종이를 흔들며 가지러 오라는 시늉까지 해보이고 있었다. 

"뭐? 지금 너 뭐하는 거냐?"

"......."

상원은 입술을 깨물고 다시 종이를 흔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까지 버릇없이 변모해야 하는 이 상황이 참으로 싫었다. 

"이녀석이 버릇없이"

결국 수업중이던 선생이 화가 난 얼굴로 앞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상원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들고 있던 종이를 교실 안쪽으로 재빨리 날리고 복도를 가로질러 달렸다. 

계단을 내려와 별관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그는 숨을 고르며, 벽에 기대어 섰다.

"...하아"

다리가 풀려버렸다. 원래도 꼬인 인생이었지만 상식 밖의 세계에서 서성이고 있자니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최악이다."

최악이라고 믿으면 그 이상의 최악이 닥쳐오고 있었다. 이제는 입밖으로 최악이란 단어를 내뱉는것 조차 무서웠다. 

아무도 없는 별관의 복도에 주저앉아 상원은 먼지 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유유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니 눈이 부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멍하니 복도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가 교실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였다. 

담임은 브루투스 너마저 라고 말하던 시저와 같은 눈빛으로 돌아온 상원을 노려보았다. 

"뭐해? 안 가고? 영화보러 가야지"

"미안 너희들끼리 가. 나는 공부할 게 좀 남아서"

"인간이 양심이 좀 있어야지. 저번 달에 본 모의고사에서 네가 전국 100등 안에 들었다면서!! 공부할 게 뭐가 남아 있냐!"

대진이 버럭 외쳤지만 상원은 애매모호 하게 웃으며 그냥, 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의사표현이 분명한 상원이 저렇게 말할 때는 말하기 곤란하단 

뜻이었다. 눈치가 빠른 동석이 대진의 목을 조르며 그를 잡아 끌었다. 

"병신 쟤가 우리랑 같냐. 상원이가 좀 놀아주니까 이 새끼는 맞먹으려 들어. 좀 냅둬 얘 공부 좀 하게"

"미안"

"됐어 그럼 내일 봅세"

오늘 개봉하는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던 약속을 어겨가며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냐고 외치는  대진을 승완과 동석이 질질 끌고 교실을 나갔다. 

교실에 남은 상원은 부지런히 가방을 싸서 별관 구석에 있는 도서관안으로 들어갔다.  신관과 마찬가지로 별관 도서관이 구비되어 있었다. 

시설면에선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몇 년간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의미로 6반 학생들에게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성한 의자 하나 없는 도서관이었다. 

상원은 기술 시간에 배운 실력으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의자를 끌고와 구석에 앉았다. 

이곳은 상원의 아지트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상원이 6반에 들어오기 전에는 6반 연합학생들의 끽연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도서관 본연의

목적을 찾게 된 것이다. 상원이 이곳을 차지하기까지는 승완의 도움이 컸다. 그가 1학년 때 직접 2,3학년 6반 선배들을 찾아가 얻어낸 승낙이었다. 

물론 쉽게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일주일 내내 선배들에게 얻어터져가며 쫓아다녀 승낙을 얻어온 이야기는 6반 학생들 사이에 유명한 일화였다. 

6반 학생들을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담임마저 버린 어둠의 반이었다.. - 물론  그 어둠 자식들은 지들끼리 술 마시고 담배피고 본드를 불며

나름 오순도순 행복하게 지냈지만- 그 어둠의 반을 이끌어나가는 정신적 지주는 다름아닌 상원이었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은 그런 상원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내에선 뭐든지 해주려 했다. 그들은 묘한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2년 넘는 시간을 보내 왔던

것이다. 

"휴우..."

상원은 일단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꺼버렸다. 분명 내일 입시설명회 때문에 회장이 자신을 불이 나게 호출할 게 분명했다. 

회장과 같이 있으면 조석희와 만날 확률이 그만큼 커졌다 이럴 때는 조용히 잠수를 타는 것이 최고다. 

조석희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야간 자율학습은 하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학교를 나서는게 그의 일상이었다.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1년간 그의 뒷모습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면 학교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떠올려볼때 밤 10시까지는 학교에 쳐박혀 있다가 가야겠다고 상원은 다짐했다 

".......!"

잠깐 엎드려 있다는 것이 아예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요 며칠 잠을 설친 것이 원인이 된 것 같았다. 

상원은 핸드폰을 켜서 시각을 확인했다 벌써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그는 후다닥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1,2,3 학년을 통틀어 

6반 학생 중에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기에 별관은 어둠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마 별관 현관은 수위아저씨가 잠가버렸을게 

뻔했다. 상원은 자신의 친구들이 알려준 개구멍을 통해 별관을 빠져나왔다 주머니 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을 시작했다 화면에 뜬 회장, 이라는

두 글자가 상원을 고민에 빠지게 했다. 전화통화를 하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머뭇거리던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선배]

"미안 배터리가 다 나가서"

[선배 진짜 요즘 무슨 일 있는거 아니에요?]

"응?"

[선배답지 않잖아요 오늘 바쁘다는 거 뻔히 알면서 이시간에서야 핸드폰 켠 것도 그렇고 무슨 일 있어요?]

오늘 학생회 일을 돕지 않고 땡땡이 쳐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니 상원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로 대충

통화를 끝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선배 무슨 일 있죠?]

"있는데 너한테 할 얘기는 아닌것 같다"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정보의 양을 조절하는 편을 택했다. 그쪽이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 상원 자신에게도 좋았다. 

[좀 서운한데요? 선배]

서운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잘도 말한다고 생각하며 상원은 슬그머니 웃었다. 

"미안하다 3학년이라 솔직히 좀 힘들어"

학생회 서기직을 2년간 연임하면서 받은 약속은 최소한의 참여였다. 아무래도 3학년에게 시시콜콜한 일까지 모두 챙겨야 하는 서기 자리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이경은 별다른 말없이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럼 잘 들어가고 내일 봐요 내일은 얼굴 볼 수 있는거죠?]

"혹시...."

내일 조석희도 참석을 하느냐고 질문을 하려다 상원은 아니다 하고 말문을 돌렸다. 

[왜요?]

"내일 보자 내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상원은 스칼렛 오하라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리며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오늘밤의 출출함을 달래기 위한 야식을 사러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낯익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눈인사를 하고 상원은 진열대로 가서 컵라면을 골랐다. 그때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가 편의점 안으로 걸어들어 왔다. 

반쯤 벗은 듯한 여자의 옷차림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눈을 떼지 못했다. 허리를 살짝 숙여 물건을 고를 때마다 푹 파인 그녀의 티셔츠 사이로

가슴골이 훤히 보였다. 

상원은 괜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죄를 짓는 것 같아 고개도 들지 못했다 

"여기요"

허스키한 음성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이 화들짝 놀라 네 하고 대답했다. 

"콘돔 이것밖에 없어요? 스킨레스 초박형은 없는 거예요?"

"예?..... 아 예 그것밖에..."

너무나 노골적인 질문에 알바생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상원은 아무 라면이나 골라잡고 빨리 편의점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뭐해 왜 안나와"

신이시여.....

상원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쯤 되면 자신이 조석희를 따라다니고 있는건지 그가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스킨레스 2000 없어서"

"아무거나 사"

"싫어, 다른건 너무 두꺼워서 느낌이 별로라니까"

그녀가 교태어린 몸짓으로 남자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냥 하자니까 오늘은 그냥 넣어도 되는 날인데"

조석희가 웃었다. 앉아 있던 상원은 자신의 심장소리가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어 손바닥으로 가슴부근을 꾸욱 눌렀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진열대 구석에 달린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긴장이 되거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좋아하는 여배우의 모습이 브라운관에 나타나기만 해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곤 했다 

상원은 얼굴색이 붉게 변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관동별곡을 외웠다. 

"그럼 그냥 할까"

"응 그냥해줘"

이어지는 여자의 애교스런 교태에 조석희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평연한 얼굴로 외설스러운 농담을 지껄였다. 

"그런데 넌 조금이라도 두꺼울 수록 좋은거 아냐?"

"뭐야 자기!"

그녀가 눈을 흘기며 장난스럽게 밀어내자 조석희가 콘돔 코너에서 아무거나 집어서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꺼내 아르바이트생

에게 던지듯이 내밀었다. 

"계산"

"...아 예"

알바생이 후다닥 캐시 박스 안에서 잔돈을 꺼냈다. 잔돈을 받아 든 조석희가 피식웃으며 어이, 하고 말문을 열었다 .

"네?"

아르바이트생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아까까지는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조석희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차였다.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남자가 자신에게 말까지 건네자 아르바이트생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너 얘랑 fuck하고 싶냐"

"네???"

"fuck, 하고 싶냐고"

조석희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귀로는 똑똑히 들려도 그 황당함 때문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물음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은 눈을 껌뻑거리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귀어둡네 애한테 박고 싶냐고 물었잖아"

"아, 아니요 저는 그럴 생각이....."

아르바이트생이 두 손을 내저었다. 노출이 심한 여자의 옷차림에 눈이 가는 것은 남자로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물론 박을 수만 있다면, 탱큐베리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살벌한 남자앞에서 토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거 아니면 쳐다보지 마, 내가 먹을 거 누가 쳐다보면 기분 더러우니까"

여자를 바로 옆에 두고도 저런 상스러운 말을 스스럼 없이 내뱉는 점이 조석희 다웠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도 여자는 기분이 나쁜 표정을 짓기는 커녕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조석희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사귀는 남자로부터 저런 취급을 받으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벗어버린 옷차림처럼 수치심도 함께 벗어버린 건가.... 아니 지금 누구를 

손가락질 할 주제가 되지 못했다. 저런 취급을 받아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조석희 옆에 서고 싶은 것이 상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말 구차하고 구질구질하다. 이런 마음을 들킬 바에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힉!!!!"

상원은 자신의 앞으로 달려든 무언가에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성격의 상원에게도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할 만큼 질색하는 

것이 있었다. 

"으악! 바퀴벌레!!!!!!"

바퀴벌레가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상원은 패닉상태였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며 비퀴벌레의 돌진을 막았다. 

하지만 생존본능이 지구상에서 어떤 생명채보다 뛰어난 바퀴벌레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물체를 귀신같이 피하며 온힘을 다해 푸드득 날아올랐다. 

"으아악!!"

상원은 눈앞에 서 있는 벽 뒤에 재빨리 몸을 숨기고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바퀴벌레 소동 때문에 시끄러웠던 편의점안에 잠시간 침묵이 찾아들었다. 

바들바들 떨던 상원은 이제 끝난 건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앞에 놓인 벽이 벽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우"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유학생들 특유의 제스처 어색할 만도 한데 조석희는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서양인에 대한 편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상원은 조석희의 자유분방한 성격이 서양인과 닮았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믿었다. 

처음 조석희에게 눈이 간 것도 동양인 답지 않은 그런 제스처나 감탄사 때문이었다 

"선배 설마 바퀴벌레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요?"

"...어?"

미처 조석희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상원이 되물었다. 

조석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래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상원은 그제야 자신이 조석희의 팔을 힘껏 움켜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 미안"

상원이 재빨리 손을 놓았다. 

"정말 바퀴벌레 때문에 이런거면 꼴사납다 싶고, 아닌 거라면....."

정말 꼴사납게도 바퀴벌레 때문이었다고 대답하려던 상원은 입을 다물었다. 조석희의 눈동자에 스친 감정을 읽은 것이다 

"아닌 거라면 정말 기분 더럽잖아"

조석희가 웃으면서 발치에서 움직이고 있던 바퀴벌레를 짓밟아 버렸다. 그런 후에 그는 저만치 콘돔을 들고 웃고 있는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편의점 밖으로 사라졌다. 

상원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자괴감에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짓눌려 살해당한 바퀴벌레 시체보다 못한 자신의 처지에 서러움이 울컥 올라와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조석희란 인간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 몇 백번 아니 몇 천번째 거듭되고 있는 질문을 해보았지만 오늘도 역시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초여름이었다. 하복 소매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자명종 시계가 고장이 나고 어머니는 오늘따라 늦잠을 잔데다. 타고 온 버스가 고장으로

멈춰 도중에 탄 택시가 사고 났기 때문에 오늘 치르게 된 전국 모의고사에 늦게 되었다는 변명을 담임에게 늘어놓는 자신이 우울해진 상원은 어깨를 

늘어트리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상원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한 이사회에서 이번 시험 결과로 인해 그의 반 편성을 다시 하겠다고 했다. 

상원은 이번 시험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들 납득할 만한 성적을 내겠다고 다짐을 하며 정말 죽을 만큼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와 같이 참담했다. 운명은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려는듯이 또 한번 얄궂은 화살을 날린 것이다. 차라리 반편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실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상원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조심해! 라고 소리쳤고 상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또구나. 라는 생각에 상원은 아예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눈만 감았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몸 어디에도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원이 조심스레 눈을 떴을때, 그의 앞에는

커다란 이동 칠판이 놓여 있었다. 

"......?"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다른 사람이 다 무시해도 자신만 다치는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 그에게 이런 우연한 행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와우"

낮은 음색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지나갔더라면 본인이 크게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놀라거나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안 다쳤어? 괜찮아? 다친 사람 없어?"

야구부 학생들이 그제야 창가로 우르르 달려와 물었다. 상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조석희 넌 괜찮냐?"

그때 상원의 눈앞에 서 있던 남학생의 이름이 조석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전학 온 학생이 그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다는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대단히 화려한 전적을 자랑해 몇 명의 여자를 임신시켰다든가 전학 온 첫날부터 교문 앞에 여자들이 진을 치고 기다렸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상원은

자신과는 관련없는 소문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화제의 전학생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한 전학생의 발음이 조금 독특하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야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조금만 빨리 걸었어도 사고 났을 수도 있었겠는걸"

복도에 서 있던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조석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리 없죠 전 럭키하거든요"

자신에 찬 조석희의 모습이 상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Lucky. 행운

자신과는 평생 인연이 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것으로 인정한 그 목소리와 눈빛을.... 잊을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부터 상원은 조석희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원아"

"......."

"이상원!!"

"어? 어? 왜?"

동석이 상원에게 캔커피를 내밀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창밖에 뭐가 있어?"

"아니 그냥"

"비오는게 신기하냐? 공부 잘하는 네 눈에는 뭐 다른게 보이나?"

자신의 짝이 방금 전까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창밖을 확인하며 동석이 중얼거렸다. 상원이 캔커피의 뚜껑을 따며 조용히 웃었다.

오늘 아침에 그는 우연히 조석희와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다 평상시처럼 조심스럽게 조석희를 관찰하던 상원의 귀에 그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들린 것은

우연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젠장 체육하기 싫은데 비나 내리지.

그리고 수업종이 울리자마자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내렸다. 상원은 이얘기를 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 누구에게도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혼자만 간직한 행운이 가슴 속에서 따스하게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실실 웃어?"

"아니야 아무것도"

"에에? 아무것도 아니긴 너 여자친구라도 생긴거 아니야?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사람?"

동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자고 있던 대진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비 올때 섹스하면 더 맛있어, 자지털이 곱슬거려서 더 찰지게...아 시발 꼴리네"

가방에서 잡지를 뒤적거리는 대진을 보며 동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진짜 에휴, 미친 새끼"

"비가 오면 더 그러다잖아 어쩔 수 없지"

이런 순간에도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친구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상원이었다. 

"그게 어떤 여자인지 몰라도 좋은 여자이길 빈다."

"응? 뭐라고?"

"됐다 하던 생각 계속하라고 청소시간 끝나기 전까지 계속해"

동석의 말에 상원이 깜짝 놀라서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나 잠깐 회의실에 갔다 올게"

"그래라"

상원은 친구가 건내준 캔커피를 자리에서 다 마시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회의록을 정리해서 제출하기로 한 약속을

깜빡한 것이다. 비 오는 것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아 정말 왜 이러지"

요즘 들어 자신의 실수가 늘어났다는 것을 상원도 알고 있었다. 

물론 회장인 이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회장의 배려를 위해서라도 상원은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재빨리 회장 책상 위에 놓인 회의록을 집어 들었다. 

회의실을 나가려던 상원의 눈에 소파가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파에 누워 있던 조석희의 모습이 들어왔다.

"....!!"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상상하지 못한 인물을 만난 상원은 그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상원은 조석희가 소파위에서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조용히 다가가야겠다고 생각해 몸을 돌린 순간 갑자기 조석희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유는 아맂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 그저 조석희의 바로 앞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

상원은 말없이 조석희를 내려다보았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잘 생긴 얼굴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여자들 사이에서 칼부림이 있었다는 얘기가 뜬 소문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커다란 소파도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건장한 체격과 모델같은 외모까지 지녔으니 어떤 여자가 마다할 수 있을까.

게다가 목소리도 매력적이었지. 어눌한 한국어 발음까지 달콤하게 들릴 정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조석희는.....

"대단해..."

상원은 무심코 중얼거린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황급히 막았다. 다행히 조석희는 깊이 잠들어 있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틀어막긴 했지만

그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석희는 대단했다. 대단히 감탄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행운아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를 발견한 순간

상원이 처음 느낀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부러움이 동경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원은 조석희를 동경하고 있었다. 

뭘 해도 안되는 자신과는 다른 조석희에게 애초에 질투심 같은 것을 가질 깜냥도 없었다.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완연히 차이가 나는 행운의 정도에

상원은 상대를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상원은 조석희의 모습을 늘 눈으로 쫓았다. 조석희는 존재자체로도 반짝였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황홀하게 반짝였다. 

별과 같았다. 그 아름다운 별이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다 

저 별에 손이 닿는다면 자신도 혹시 그 행운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까?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멈추지는 못했다 

상원은 천천히 조석희의 얼굴위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따스했다 그 온기를 더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때 그는 자신의 입술이 조석희의 입술에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깨달을 새도 없이 상원은 화들짝 놀라 그대로 회의실 밖으로 뛰어나왔다. 소매 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이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자고 있는 조석희에게 키스를 하다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이 날 것 같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에 불이 난 것 같았다. 손끝이 벌벌떨리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상원은 그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토기가 느껴졌다. 상원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위에 있던 내용물들을 말끔히 비워냈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변기 물을 내리는 순간 그는 지감했다. 조석희에 대한 자신의 동경은 오늘로써 그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날은 상원의 조석희를 향한 짝사랑의 서막이 열리게 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이녀석들아. 떠들지 좀 마라. 손으로 실습하지 입으로 실습하냐?"

"에이 선생님 입으로 하는 실습도 잘해둬야 나중에 애인한테 사랑받죠"

대진의 너스레에 실습실은  돌아다니고 있던 기사선생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성적인 주제와 결부시키고 마는

윤대진은 선생들 사이에서도 악동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사립학교는 수업 과목과 시수를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결정할 수 있었다. 희재고등학교 교장은 예체능의 수업시수를 줄이고 그시간을 국영수 주요

과목으로 대체했다. 대학 합격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었다. 하지만 6반의 경우 기존의 예체능 수업은 물론 기술뿐만 아니라 가사 수업까지 듣고있었다. 

산만하기 그지없는 6반 학생들에게 학문적인 수업보다는 실습위주의 수업이 그나마 나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앉아 있어도 시끄럽고 어수선한

6반 학생들을 데리고 실습을 진행하는 선생들은 죽을 맛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요리를 하는 시간의 실습실은 난장판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 시발 짜증나 이거 왜 이렇게 안되는거야"

반장인 승완이 시커멓게 탄 닭다리를 건져 올리며 투덜거렸다. 승완이 속한 2조의 조리대 위에는 새카맣게 탄 닭다리들이 무덤처럼 수북히 쌓여 있었다. 

실습시간이 끝나면 맥주와 함께 치킨을 먹겠다는 일념하에 오늘의 메뉴를 닭튀김으로 정한 승완의 조는 이미 망조가 깃들어 있었다. 

"젠장 겉은 탔는데 왜 핏국물이 떨어지고 지랄인지 모르겠네" 

승완이 젓가락으로 새카만 페인트를 뒤집어 쓴 듯한 닭다리를 헤집어 보며 짜증을 냈다 옆 조인 대진이 낄낄 거리며 그럴 줄 알았다고 한마디 던졌다. 

"뭘 그럴 줄 알아! 그러는 너네 조는 아까부터 뭘 하고 있는건데!"

"떡볶이"

"떡볶이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게 떡뽁이냐? 떡국 아냐? 한강에서 낚시하는 기분으로 떡을 건지는 게 무슨 떡볶이냐?"

"구, 국물이 좀 졸아붙게 하면 되지!"

"하, 그 얘기는 아까 10분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좀 졸아붙어서 물을 더 부은 것 뿐이니까 신경끄시지 떡볶이 완성되고 한입만 먹게 해달라고 빌어도 절대 안준다. 이 개새야"

승완이 말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지 않고 대진도 주먹을 쥐고 손을 세워보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한강에 빠진 떡볶이나 겉다르고 

속 다른 이중인격의 닭튀김 따위는 입에 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못했다. 

"3조는 어떠냐?"

승완이 동석과 상원이 속해 있는 조를 향해 물었다. 동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대답을 대신했다. 3조의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재료만 제대로 사와 빵에 쳐넣으면 망할 수가 없다는 동석의 의견으로 선택된 메뉴였다. 동석의 해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조 음식들 사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어디 좀 보자 뭐 했는데?"

승완이 동석의 머리 위에 자신의 머리를 얹으며 물었다. 동석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며 승완을 떨어뜨렸다. 

"씨발놈아. 비듬 떨어져 머리 흔들지 마"

옆에 있던 같은 조원이 동석을 조리대에서 멀찌감치 밀어냈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고 있는 3조의 조원들은 샌드위치의 안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거 맛있냐? 나 한개만 줘"

대진도 침을 흘리며 나타났다. 

"나도 한 조각만 주라"

"나도 나도!!"

여기저기서 굶주린 짐승들이 몰려들었다. 3조의 조원들이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아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어디 손만 대봐라 니들 손을 잘라다 빵에 넣어 손드위치를 만들어 먹여 줄테니까"

"상원아 나 한개만 주라 응? 상원아"

동석의 으름장에 대진은 방향을 바꿔 상원에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원은 멍하니 계란 껍데기만 까고 있었다. 

"상원아 절대 주지마 한 놈한테 먹이면 다 몰려와 쳐먹을 거니까"

"맞아! 결국엔 점수 매길 마지막 한 조각도 안 남을걸"

"나 한조각만!! 한조각만"

여기저기서 샌드위치 한 조각만 달라고 손을 내밀고 아귀처럼 아우성쳤지만 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달걀 껍데기만 벗겼다. 

가사 선생이 와서 자리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친 후에야 간신히 아귀 떼가 흩어졌다. 

"무슨 일있어?"

눈치 빠른 동석이 상원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응? 무슨소리야?"

상원이 달걀을 손에 쥔채 놀라 대답했다. 방금전까지 있었던 소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게 분명했다. 

동석은 혀를 찼다. 오늘 하루 종일 저런 식이었다. 아침부터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하고 말을 걸어도 한참 후에 응? 하고 대답하는게 전부였다.

"너 기분이 참 좆같아 보여서"

"......아"

상원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못해 그냥 그는 웃어 보이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동석은 매가리 없는 짝의 미소를 보고

안심할 만큼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또 무슨 일 있어? 누가 뻥이라도 뜯어? 아님 부모님하고 싸웠어?"

"아니 그런 일 없어"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기분 잡치게"

"어 미안해 기분나빴다면 사과할게"

상원이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며 사과를 건냈다. 자신이 무심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상대방이 불쾌함을 느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미안해진

것이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아니고 됐다 관두자"

"미안해 동석아 일부러 그런건 아냐"

"됐다고 인마 쓸데없이 착해빠져가지고"

동석은 자신의 짝인 상원을 진심으로 아꼈다. 농담으로라도 너 참 재수없구나 라는 말을 건네지 못할 정도로 불운한 것이 상원의 인생이었다. 

그런 불운한 삶을 살면서 늘 꿋꿋하게 말없이 노력하는 상원을 보며 동석은 아버지가 늘 신조처럼 말씀하시던 7전 8기의 용기를 떠올렸다. 

조용하고 얌전해 보이는 상원이 얼마나 강한지 그간 곁에서 지켜봐온 동석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상원은 어떤 이상한 일이 생겨도 우는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겨울에 다 같이 얼음낚시를 하러 가도 상원이 서 있는 곳만 균열이 생겨 사람 하나가 빠질 구멍이 생긴 일도 있었다 덕분에 얼음물에 빠져 목숨이

위험했을 때도 구조된 후 상원은 덜덜 떨면서도 이번이 119구급차를 서른여덟번째 타는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던졌을 정도다. 

그런 상원이 요 며칠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힘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으니 동석으로서는 마음이 좋을리 없었다. 

"있잖아 동석아"

"응 왜"

상원이 주저주저하다 아니야. 하고 말끝을 흐렸다. 답답해진 동석이 빨리 말하라고 상원을 재촉했다. 

"그러니까 어... 바퀴벌레를 남자가 무서워하면 많이 꼴사나워?"

"바퀴벌레? 왜? 바퀴벌레 봤어?"

동석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상원이 바퀴벌레를 봐서 저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든 찾아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니 여기서 본 건 아니고 음... 아무튼 남자가 바퀴벌레 때문에 막 소리지르고 그러면 확실히 꼴사납지?"

"좀 그렇긴 하지.... 헉 아니 사람이 무서워하는게 있을 수도 있지. 암 그럼"

자신의 대답을 듣고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는 상원의 표정을 알아챈  동석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저기 있는 한승완 새끼도 무서워하는게 있어"

"승완이도?"

"그래 무서워서 아주 그냥 보기만 해도 오줌 질질 싸는게 있지"

"나도 질 좋은 AV를 보면 그냥 질질 싸지"

뒤에 서 있던 대진이 친구를 위해 한마디 거들었다. 물론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승완이도 무서워 하는게 있어?"

상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한승완은 희재고뿐만 아니라 근방 학교에서도 유명한 싸움꾼이었다 상대가 몇 명이 오든 어떤 놈이랑 붙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겁대가리 상실한

놈으로 유명했다. 혹자는 승완이 머리가 나빠 상대방의 숫자도 제대로 세지 못해 그런것이라고 비난했지만, 그의 강단이 세다는 것에는 이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 승완도 무서워서 질색하는 것이 있다 하니 상원으로서는 반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게...뭐드라. 기억이...."

동석이 머리를 긁적거리자 상원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동석은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들고 있던 칼을 집어 들어 승완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귀신 같은 감으로 승완이 몸을 틀어 자신을 향해 날아든 과도를 피해냈다. 

"어떤 씨발새끼야"

동석이 손가락으로 그런 승완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 무서워하지?"

".... 그건 무서워 하는게 아닌것 같은데"

"아니야 저 새끼 존나 쫄았을 거다."

"물론 쫄았겠지만.... 그게...."

과도가 날아든 방향을 확인한 승완이 씩씩거리며 동석에게 다가왔다. 

"너냐 김동석. 나한테 이걸 집어 던진게?"

범행을 자백하면 과도를 그대로 이마에 꽂아 넣을 기세였다. 

"아니 윤대진이 던졌어 내가 봤어"

그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뒤에서 어묵을 자르고 있는 대진을 가리켰다. 인간은 평균적으로 3분에 한번씩 거짓말을 한다는 연구내용이 발표된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전해들은 동석은 배를 잡고 웃으며 자신은 태어나서 1분이상 진실을 말해 본적이 없다는 얘기를 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김동석이라는 인간은 30초에 한번씩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양치기 소년이었으니까.

"윤대진 시발 새끼야"

이번에도 그 거짓말에 홀딱 넘어간 한승완이 과도를 치켜 들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과도가 대진의 손가락 사이에 꽂혔다. 

윤대진이 기겁을 하며 뒤돌아보았다. 일단 그는 손을 더듬어 자신의 다리사이를 확인했다.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사함을 확인한 대진은 사정

볼 것 없이 승완에게 덤벼들었다. 그바람에 대진이 속한 4조가 심혈을 기울여 졸이고 있던 한강떡볶이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분노에 사로잡힌 4조가 2조의 이중인격 닭튀김을 향해 돌진해 엎어버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2조와 4조의 전쟁에 반 전체가 휘말려 실습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석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상원에게 말했다. 

"봤지? 다들 무서워하는게 있잖아.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마"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내려지는 지 알 수 없는 논리에 상원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결국 살아남은 음식은 3조의 샌드위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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