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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토깽- 럭키스트라이크
"좋아해"
애절한 목소리가 빈 교실에 울렸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진심을 끌어 모아 던진 한마디였기에 조용한 음성이었지만 힘이 담겨있었다.
상원은 초조하게 두 손을 모아쥐고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침묵뿐이었다. 혹시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는 다시 한번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널 좋아해 진심이야 나는...."
상원은 고개를 들었다가 발끝까지 얼어붙는 기분을 맛보았다. 고백을 결심했을 때 좋은 결과를 기대힜던건 아니었다. 같은 남자가 고백을 했으니
상대에게 욕을 먹을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한 대 맞을 수도 있다고 각오하고 왔다. 하지만 상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조석희?"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던 사내가 그제야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90이 훌쩍 넘는 장신의 거구였기에 살짝 얼굴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상원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상대에게 완벽하게 무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욕을 퍼붓고 주먹을 날렸다면 이정도까지 비참한
기분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각오로 던진 고백이 상대에게는 화를 낼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참함을 넘어선 참담한 기분이었다.
"몰랐네요"
조석희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자신에게 전달된 고백따위 조금도 관심없다는 표정은 여전했지만 대화에 참여할 기분이 이제야 든 모양이었다.
"상원선배 호모였어요?"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상대에 대한 조롱이 역력히 드러났다.
고백에 대한 호불호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의미와 약간의 조롱뿐,
"저 먼저 가볼게요 약속이 있어서"
예의바른 척하고 있었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백을 거절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곤혹스러움도 없었다.
그는 상원의 어깨를 툭 쳐보이고 음악실 문을 나섰다. 들어왔을 때 보였던 무표정에서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은 채.
그는 그렇게 음악실을 나가버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상원은 교복이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년이 넘게 진행시켜온 짝사랑이었다.
하지만 고백하는 날이 올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상대는 다름아닌 조석희였다. 조석희를 상대로 짝사랑이라니.
희재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조석희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머리가 어떻게 된거 아니냐고.
그럼에도 상원은 오늘 조석희에게 고백을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의 전근이 결정되지 않았더라면 그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평소의 자신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을 벌였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희박한 가능성을 꿈꾸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생각보다 몇 배는 더 참담했고 비참했다. 차라리 깨끗하게 거절을 당했으면 기분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내가.... 미쳤지"
상원은 자신의 헛된 기대에 자조 섞인 웃음을 보냈다. 마지막이랍시고 너무 기분을 냈다.
상대는 조석희다 s반의 조석희.
"후우...."
빗줄기가 걸음을 옮길 수록 더욱 더 거세졌다. 운동화에서 꾸덕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온몸이 흠뻑 젖고 말았다. 흡사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이렇게 참담한 기분인데 날씨까지 좋았다면 더더욱 최악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다고 믿으며 그는 더욱 부지런히 걸었다.
당장 내일부터 전학을 핑계로 학교에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상원은 스스로를 달랬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자 미처 느끼지 못했던 한기가 온몸을 스며들었다.
상원은 물이 흐르는 운동화를 벗고 가방을 내려 놓았다. 저녁 준비를 하던 그의 어머니가 놀라서 수건을 들고 뛰어 나오셨다.
"어머 우산은?"
"안가져갔어요"
"아침에 비온다고 그랬잖니, 얘는 정신을 어디다 두고"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침에 그런 애기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어젯밤부터 고백에 대한 생각때문에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해 한 귀로 흘려버렸을
것이다.
상원은 어머니가 내어준 수건을 받아들고 아직도 물기가 뚝뚝 흐르고 있는 머리를 닦아냈다.
빨리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그런다고 이 더러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았지만, 빨리 잠드는데는 도움이 될테니까.
잠이 들면 목구멍에 들러붙어 숨을 쉴때마다 들이마시게 되는 이 수치심과 비참함을 조금은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너 그 얘기 못 들었지?"
"무슨 얘기요"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어머니가 워낙 반색을 하며 말을 꺼냈기 때문에 상원은 어쩔수 없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버지 전근 취소되셨대. 갑자기 인사발령이 바뀌어서 다른 사람이 부산으로 내려가게 됐다고 하더라. 그래서... 어머! 얘!!!!"
상원은 그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이 텅 비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구역질이 솟아나와 그는 재빨리 한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
막았다. 하지만 우웩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음악실에 먼저 가 있기 위해 3분만에 먹어버린 점심을 게워내고 말았다.
다 틀렸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간신히 삼켜서 목구멍에 붙어 있던 수치심을 게워냈으니 세상은 온통 수치심으로 가득 차고 말 것이란 사실을.
그리고 최악의 상황은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는 것을.
"너 전학간다고 하지 않았어?"
김동석이 삼 일 만에 나타난 자신의 짝을 바라보며 놀라서 물었다. 상원은 힘없이 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됐어.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몸살이 났다는 핑계로 학교를 빠지는것도 삼일이 한계였다. 아들의 일류대 진학을 바라는 부모님은 아들이 언제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방관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후우....."
상원은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삼 일 간 침대에 누워 온갖 생각을 다 했지만 딱히 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었고, 지금 조석희를 찾아가 그때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던진 그 말은 농담이었다고
둘러댈 수도 없었다.
....그저 졸업하기 전까지 최대한 조석희 눈을 피해 가며 죽은 듯이 사는 길밖에 없다.
우선 조석희가 자주 다니는 곳이나 아지트로 삼는 곳은 발길도 향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6반은 별관에 있어 잘만 하면 졸업할 때까지
별관안에서만 생활하는 것도 가능했다. 신관으로 건너갈 일은 학생회와 관련된 것을 제외하면 없으니 이번 기회에...
"이상원 회장이 불러"
"회장?"
상원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서며 책을 덮었다. 하필이면 이럴때 회자잉 자신을 호줄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하루의 시작이 좋지 않았다.
원래도 지지리 운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요즘들어 특히 더 불운해지는 것 같았다.
상원은 혹시 멀리서라도 조석희를 보게 되면 얼굴을 가려야겠다. 생각하며 책상위에 올려두었던 책을 집어 들고 교실을 나섰다.
회장인 김이경이 있는 2학년 교실은 별관과 신관이 이어지는 계단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조석희가 있는 S-1반은 바로 그 계단 앞에 있었다.
상원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으로 최대한 얼굴을 가리며 복도를 걸었다. 다행히 신관으로 갈때까지 그를 아는 척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이경아"
2학년 D반의 문을 열자 김이경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색을했다.
"선배 며칠간 안보이시더니 어떻게 되신 거예요"
"비를 맞았더니 몸살이 나서"
"전학을 가신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아아 그게...."
상원은 학생회장에게 일부러 전학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원래 학생회 임원은 2학년들로만 구성되어 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마 상원이
맡고 있는 서기직은 후임자가 생겼다가도 꼭 무슨 사정이 생겨서 공석이 되어버리곤 했다. 2학년 때부터 서기를 하고 있던 상원은 회장의 권유로
임시직을 맡았다가 지금은 아예 연임을 하게 되었다.
학생회에서 6반인 상원에게 서기직을 맡긴 것도 그로서는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그의 실력은 6반에 머무를 수준이 아니었지만
일단 6반에서는 학생회임원이 나온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헛소문이겠지"
전학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은 상원은 대충 얼버무렸다.
"선배 짝인 동석선배가 하신 말씀인데요?"
김이경의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상원은 잘못걸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회장인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전학을 가려 했다는것이
그의 심기를 거슬린 모양이었다.
"그런거 아냐. 전학을 가는 거였으면 벌써 가겠지"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은 성격이었기에 웃고 있었지만 상원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긴 그렇겠조"
상원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해야 했다면 천하의 김이경이 눈치채지 못했을리 없다.
"선배라면 다 결정된 전학도 어쩌면 물거품이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
이경의 뼈아픈 한마디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악의 없이 던진 한마디일지라도 자신에게는 현실이 되어 있었기에 도저히 농담으로 던지지
못했다.
"설마 저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전학을 가시거나 서기직을 관두시거나 하지는 않으시겠죠 선배가 그렇게 무책임한 인간은 아닐거라고 믿어요"
"다, 당연하지"
상원은 학생회 탈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번으로 미루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6반 학생인 상원이 s반 학생들과 함께 보충 활동을 할 수 있게 편의를
봐주는 것에는 다름아닌 학생회 일원이라는 자리도 크게 한 몫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학 입시 설명회 문제 때문에 불렀어요 저번에 회의때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들은 것은 잘 잊지 않는데도 꼼꼼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회의에 오고간 대화들은 모두 적어두었던 것이다.
그런 상원에게는 서기가 적임이었다.
"저희 재단에서 주최하는 것이라서 아마 당초 예상보다 더 크게 열릴 것 같아요. 물론 대부분의 일은 선생님들이 하시겠지만 기타 잡무는 저희
학생회에서 도와드려야 하는 거니까. 선배 듣고 계세요?"
"어?...어 응"
어디선가 분명 조석희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상원은 재빨리 주변을 탐색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근방에 조석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몸살이시라더니 아직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몹시 않좋아"
상원은 재빨리 이자리를 피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경이 자신의 손으로 상원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안 나는데요?"
"속이, 속이 안좋아"
상원이 한 손으로 자신의 위 부근을 움켜쥐고 인상을 썼다.
조석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이제는 진짜로 위가 아픈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양호실로...."
"됐어! 그냥 내가 알아서 갈게. 걱정하지마"
김이경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에 온화하고 차분한 사람이 뭘 저렇게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대나 싶었다. 게다가 지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럼 오늘 수업끝나고"
"끝나고 만나. 끝나고"
상원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 맞다 잠시만요"
이경은 상원이 부탁했던 책을 떠올리고 교실로 돌아가 책을 가지고 다시 나왔다 하지만 상원은 이미 복도 끝에서 거의 달리다시피 걸어가고 있었다.
"상원선배!"
이경이 책을 한 손에 들고 그를 불렀다. 그러자 상원이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예비종이 울렸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수업시작을 알리는 본 종이 울릴 시각이었다. 빨리 책을 건네주고 교실로 돌아가야 겠다고 김이경은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 서 있는 상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서, 초조하게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선배 이 책이요"
김이경이 책을 내밀려고 하는 순간 상원의 시야에 낯이 익은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
화들짝 놀라 김이경의 뒤에 자신의 몸을 숨기기 위해 달려나가려던 상원은 갑자기 팔을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조심해요"
이경이 재빨리 상원의 팔을 붙들어 주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몸의 균형을 금방 되찾았을테지만 상대는 다름아닌 이상원이었다.
"읏!!"
상원을 잡아주려던 김이경마저 함께 몸의 균형을 잃고 복도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이경의 몸 위로 넘어진 상원이 후다닥 일어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책을 집어 들었다.
"이책. 아, 그래 이것만 가져가면 되지?"
"네. 선배... 그런데 그쪽은 교실하고 반대방향인데요?"
"알아"
상원이 짧게 대꾸하고 이경이 건네준 책을 옆구리에끼고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대로 라면 5초후에 조석희가 저 계단을 올라올 것이다.
절대로 그의 ㅣ눈에 띄면 안된다고 결심을 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신은 그의 소망을 저버린 것이다.
니체는 그랬다. 신은 죽었다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짜라투스투라가 말했다. 아무튼 신은 죽었다고 그렇지만 상원은 믿지 않았다.
신은 살아있따. 살아서 이토록 자신을 잔인하게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전생에 유다였던 게 분명하다. 신을 팔아먹은 대가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 죄송해요 이제 그만 용서해주세요!
"상원아! 오늘부터 목재에 페인트칠하는 것 배운다고 했어 너 준비물 안 갖고 왔지?"
상원을 알아본 6반 친구가 친절하게 오늘의 수업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하긴, 니스랑 락카랑 페인트를 어떻게 알아서해. 인마. 흐흐, 그리고 오늘 수업 기술실에서 한다고 했어"
6반 학생이 기술실의 위치를 알려주려고 손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하필이면 몇 초 후에 조석희가 올라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계단과 일치되는.
"먼저 가. 나 잠깐 들릴 곳이 있어서"
"어딜? 우리 교실도 저쪽인데?"
둔한 만큼 친절한 급우가 손수 상원의 손을 잡아 끌어 이끌어주기까지 했다 상원은 어떻게 해서라도 친구의 친절을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의 온화하고 침착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앞뒤 사정보지 않고 그의 손을 던지듯 뿌리쳐버렸다.
결과적으로 친절을 베풀어주려던 6반의 학생은 들고 있던 시너통을 놓치고 말았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시너통은 벽에 부딪히는 순간, 뚜껑이 열렸고,
퍽하는 소리와 함께 물줄기 처럼 쏟아졌다.
"...!"
불행인지 다행인지 단 한사람만을 제외하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시너가 튀지 않았다.
"...조석희"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처럼 터져나간 한맏.
누군가에게는 불행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다행일 수 있는 서막이 열렸다.
"미안"
그 와중에 날아 오른 시너 통 뚜껑에 이마를 얻어맞아 피를 보고 만 상원이 중얼거리듯 사과를 건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조석희가 그런 그를
어이없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일부러 그런것은 아닌데, 정말 미안하게 됐다"
선배로서 침착하고 차분하게 사과를 건네려 했지만 그의 손끝은 아까부터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조석의를 ㅈ
정면에서 바라보기에 상원의 용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체육복을 입었음에도 조석희 특유의 분위기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속된 표현으로 조석희는 눈만 마주쳐도 상대를 임신시킬 것 같은 남자였다.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재력으로 보낼 수 있는 서울의 수많은 명문고를
두고 이 학교를 택한 이유는 외국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킨 것인지 몇 번이나 퇴학을 당한 조석희를 받아줄 만한 학교도 희재고 뿐이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런 남자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울 판국인데, 자신은 삼일 전에 고백했다가 장렬하게 거절을 당하고 난 후가 아닌가.
상원은 속으로 지조없는 아버지의 회사의 인사발령 담당자를 탓하며 조석희에게 수건을 건냈다.
"이걸로 닦아"
"됐습니다."
매몰찬 거절의 말을 들은 상원이 몸을 움찔하며 들고 있던 수건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찌됐든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아무튼 오늘일은 미안하게 됐다"
속으로 말을 고르면서도 상원은 삼일 전의 일을 조석희가 꺼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조석희는 끝내 음악실에서의 일은 입에 담지 않았다.
아무래도 늘 하던 대로 상대를 개무시하겠다는 오만한 태도를 계속 유지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상원은 이번만큼은 상대의 더러운 성격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문을 닫고 나가려는 그의 등 뒤로 조석희의 낮은 이죽거림이 들려왔다.
"재수없긴"
"....."
보통사람이었다면 그냥 흘려들었을 수도 있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이상원에게는 비수처럼 날아드는 말이었다.
이상원에게는 예의상이라도 행운이 함께 하길 이라는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뒤로 넘어지면 등뼈는 물론이요 코뼈는 옵션이고 멀쩡했던 갈비뼈까지
살얼음판 금이 가듯 쩍쩍 갈라지는 인간이 바로 이상원이었다. 각종 중요한 시험 때마다 열병에 복통에 심지어는 교통사고까지, 그러한 상원의
불운은 희재고 입학시험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희재고를 포함한 근방 여섯 개의 학교는 사립 윤화재단에서 설립한 학교로 일명 육시랄 고등학교라 불리었다. 교복 원단까지 같았지만, 단추와
배지의 모양만으로 학교를 구분했다.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사실은 더 이상 어느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학생들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 곳이 바로 이 육시랄 고등학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쯤 되니 아무리 학교를 세운 목적이 특수하다고 할지라도 학교 유지에 대한 최소한의 명목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이사장은 희재고에
나름의 해결책을 마련해 놓았다.
희재 고등학교의 반 편성 시스템은 일반 고등학교와는 사뭇 달랐다. 희재고등학교는 학년 당 여섯 반이 편성되어 있었다.
s-1반 , s-2반, D반, K반. I반은 흔히 말하는 특수 학급이었다.
약간 모자라는 학생들을 위한 특수 학급이 아닌 뛰어난 수재들을 위한 학급이었다. 저 무분별해 보이는 학급의 이니셜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s-1반은 s대 진학을 목표로 두고 있는 문과학생, S-2반은 같은 등급의 이과 반이었다. D반은 일명 Docter반으로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를 목표로 하는
학급이었으며 K반은 카이스트를 비롯한 일류 공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의 반이었다. I반은 아이비리그 즉 담쟁이덩굴 로 뒤덮인 8개의 일류대 유학을
꿈꾸는 소수의 학생들의 반이었다. 각 반의 학생들은 목표로 하고 있는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업을 받는다.
최고의 교수진이 만들었다는 교재는 주변 학원에서 가장 탐내는 비급이었다. 교사진 역시 어떻게 이런 사람을 초빙해왔을까 싶을 정도로 최강의 팀을
이루었다. 뿐인가? 따로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빵빵한 방과 후 활동 지원과 학생 일인당 한 자리씩 분배되는 도서관의 자리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수준이었다. 학급 목표에 맞는 학교에 진학했을 경우 대학교 입학급이 장학금으로 지원되는 제도 역시 주변에 칭찬이 자자한 것중 하나였다.
문제는 나머지 한 반의 보통 학급이었다. 그 반의 이름은 다름아닌 6반,
.......단지 6반, Just 6반 , 그냥 6반이었다.
한마디로 희재 고등학교의 진정한 의미의 특수반은 6반이었던 것이다. 6반의 학생들은 여타 육시랄 고등학교이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수업시간에 늘 잠을 청했으며, 무단 조퇴와 결석은 기본이고, 대학 진학에는 관심도 없고 고등학교 졸업에만 의의를 두는 무리들이었다.
그 중 군계일학의 학생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이상원이었다.
희재 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넣었을 때만해도 상원은 자신이 6반의 일원이 될 것이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입학시험 당일 날 열이 39도에 이르는 열병과 설사가 겹치지 않았다면 그는 당연히 S반에 입학했을 수재였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희재고 6반 합격.
합격이었지만 불합격과 마찬가지인 결과에 상원은 엄청난 고민을 했다. 차라리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보라는 부모님의 만류도 있었지만 상원은
어디에서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에 희재고 6반에 입학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 그가 입학후 첫 모의고사에서 S-1반 학생을 제치고 전교
석차 2등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희재고에서 유명해졌다. 더불어 그의 불운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혀를 차며 그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마리 공부를 잘 한다 해도 실전에서 운이 따라주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수준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상원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다. 언젠가,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운이 따라주길 바라며.
그런 그였으니 조석희가 던진 한마디에 다리가 휘청일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뭐....?"
"재수가 없으려니까"
조석희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말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탓에 그의 한국어 발음은 조금 어눌하고 느릿느릿하다.
하지만 사막의 모래처럼 버석거리는 그의 어조와 어울려 큰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거지같은게 다 붙느다. 까지 말하면 선배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죠"
"....."
이미 말해놓고 뭘, 이라고 대답한다면 너무 구차하겠구나 싶어 상원은 입을 다물었다.
"웬만하면 다시는 보지말죠. 선배님"
".......어"
대답을 하면서 상원은 등을 돌리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비참한 순간에도 조석희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두근 거렸을
테니, 이 이상 어떻게 더 초라해질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여러의미로 미안하게 됐다."
상원은 작게 고개를 숙이고 양호실을 나섰다. 수업시간이었지만 그는 별관의 도서관으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그고 한참을 울었다.
아무리 불운한 일이 닥쳐도 그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어쩌면 자신이 불행한 인간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그는 한참을 울었다.
"어디 갔다왔어? 어울리지 않게 웬 땡땡이?"
상원의 짝인 동석이 그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자신들이야 땡땡이를 치고 학교 담을 타 넘는게 일상이라지만, 6반에 잘못 떨어진 상원은 단
한번도 수업시간에 빠진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얌전한 슈퍼마켓 개가 갑자기 미쳐 상원의 발목을 물어뜯어 응급실에 실려 갔던 경우나, 멀쩡하던 간판이 떨어져 그의 손가락이 부러지는 바람에
응급실에 택시를 타고 간 경우나 하늘에서 갑작스레 우박이 떨어져 우산살이 부려져 그의 안구를 건드려 응급실에 갔던 경우 등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냥 좀 일이 있어서 "
상원은 사물함에서 문제집을 꺼내와 풀었다.
6반의 학급분위기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교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기본이요 유리창은 하도 깨트려 먹으니 아예 떼어내버린지 오래였다.
다른 학급에 구비되어 있는 최첨단 컴퓨터와 모니터 시설은 6반 교실에선 철수시켰다. 세번의 절도와 다섯번의 파손 후에 교장이 내린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꿋꿋이 공부를 하는 상원의 집중력은 선생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뒷자리에서 PMP로 야동을 보면서 오늘도 꿋꿋하게 딸을 치고 있던 윤대진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상원아 무슨 고민되는 일... 오예 하아! 죽인다. 아무튼 무슨 고민되는 일 있냐?"
".....아니 왜?"
"....너 골치 아픈 일 있으면 수학 문제집 풀잖아. 솔직히 그딴 거 안 풀어도 늘 백점이면서"
뒤에서 늘 야동만 보고 성인잡지만 뒤적거리는 줄 알았던 급우가 날카로운 지적을 하자 상원은 뜨끔했다. 문과생치고 상원의 수학실력은 수준급이었다.
D반의 수업을 무리없이 따라갈 정도니 고등학생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수학문제집을 푸는 것은 마음이 혼란스러워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안정을 찾으려고 할때였다.
"고민은 무슨"
상원이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상원은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하고 선이 가는 외모였다
흐트러짐 없이 단아한 태도는 순결하고 금욕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의 진지해 보이는 눈빛과 조용한 목소리는 상대에게 무한한 신뢰감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왜? 혹시 밤마다 어떤 여학생이 생각나서 막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고 잠이 안와? 이 형님이 다리 좀 놔줄까?"
대진이 깔깔거리며 농을 던졌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께"
철없는 농담 같지만 친구가 딴에는 자기 걱정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상원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던진 농담에도 가만히 고민을 하다가
해답을 던져줄 정도로 고지식하고 진지한 성격이었다. 때 묻지 않은 상원의 순수함에 6반 학생들은 처음에 적응을 못했지만 이제는 그의 장점으로 받
아들여 익숙해진 상태였다.
"혹시 누가 너 괴롭혀? 언놈이냐. 누가 감히 우리 상원이를 괴롭혀! 씨발, 다 죽여 버린다."
자고 있던 승완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어디에 싸움이 나면 신나게 달려가는 쌈닭의 본능이었다. 상원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잠이나 자"
"하암... 아무튼 뭐 싸울 일 있으면 깨워. 시발 요즘 싸움이 뜸해 좆이 쑤셔서... 이놈의 학교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시발, 특수반이 왜 일케 많아..시발"
잠꼬대를 하는 것인지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었다. 그 외중에 생물 해부 수업을 위해 들였다가 반의 애완동물이 되어버린 잉어가
어항에서 또 탈출을 해서 교실이 물바다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악! 시발 저 새끼 빨리 잡아서 처넣어"
"무슨 놈의 잉어새끼가 핑퐁만 처먹고도 저렇게 힘이 세고 지랄이야!!!"
교실은 탈출한 잉어를 잡기 위해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상원은 가만히 한숨을 쉬며 문제집을 다시 펼쳐 들었다.
진흙탕 속에 핀 연꽃은 오늘도 홀로 고매한 향기를 흘렸다.
그 향기를 알아주는 이 드물었기에 그 자태는 처연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