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 카운터를 통해 탑승 수속을 밟고 짐을 보낸 상원은 마지막으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를 했다. 어제 기분 좋게 헤어지긴 했지만 막상 비행기를
탄다는 말을 하니 다들 목소리가 밝지만은 않았다.
특히 승완은 힘들면 언제든 한국으로 와버리라는 말을 세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상원은 습관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사실인데 그것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이기적인 것도 유분수지"
상원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나무랬다. 게이트를 지나 보안검색을 위한 기나긴 줄에 합류했다. 운항이 재개된 항공이 한두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난히 줄이 길었다. 멍하게 서 있던 상원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작은 열쇠고리가 띤 것은 우연이었다. 빨간색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열쇠고리였다.
고리부분이 낡아 어디선가 떨어진 것 같았다. 뒷면에는 1949. 12.24 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낡고 작은 열쇠고리였지만 새겨진 날짜로 미루어보건데 분명 당사자들에겐 소중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상원은 그것을 집어들고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혹시 이것을 빠뜨리셨나요? 이 열쇠고리가 혹시 당신 것은 아닌가요?
기다리는데 지쳐서 친절함이 바닥이 난 외국인들은 대부분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그냥 보안 요원에게 맡겨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상원을 어젯밤 위로해주던
노부부가 검색대 앞에서 당황한 얼굴을 하고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싶어 상원은 노부부 앞으로 가서 자신이 주운 열쇠고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노부부 얼굴에서 믿기 힘들만큼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백발이 성한 할머니가 thank you sweetie 를 연발하며 상원의 뺨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할아버지도 그의 손을 맞잡고 몇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상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의 친절에 인사를 따로 한다는게 갑작스런 운항 재개로 인해 노부부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마 두움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상원은 노부부에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이건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프러포즈를 하며 건넸던 선물이라며 열쇠고리에 대한 사연을 설명해줬다. 자신의 행운의 마스코트를 돌려줘서 고맙다고, 할머니는 상원의
두손을 꼭 쥐었다.
노부부는 검색대를 지나 출국심사를 받으러 가기 전까지 상원의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상원은 손을 흔들어 주고 잣니이 서 있던 줄의 맨 끝으로 돌아갔다.
그의 집을 나설때 상원은 맨손으로 나왔기 때문에 같이 했던 시간을 기념할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하나쯤은 챙겨 왔어야 하나 후회가 밀려왔다.
기억을 소유하고 있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꽤나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상원은 긴 줄의 끝에 서서 만약 그날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가져올까, 하는 백일몽을 꾸기 시작했다.
조석희는 아직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CD를 인질로 잡고 있겠지. 그 인질을 도로 가지고 오는 것도 좋았을텐데, 자신의 책상 안쪽에 조석희가 외국에 갔다 올때마다 사다주는
초콜릿 상자 포장지를 모아둔 것도 생각이 났다. 재수 공부를 하면서 받은 석희의 손글씨가 적힌 쪽지도 있었다.
많았다. 하나를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상원은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책맞게 눈물이 흘렀다. 상원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동석의 말이 옳았다. 모두 다 내가 결정한 일이니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일단은 새로운 곳으로 가서 정신없이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지내다보면 시간이 흐를테고 그러다보면 그리움이 조금은 퇴색되겠지.
그러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여 살만해질 때쯤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후의 문제는 그때 생각하면......
".....?"
등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게이트 앞에서 뭔가 소란이 빚어진 것 같았다. 별일 아니겠지 하던 상원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잠깐이면 된다고 비켜"
"안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여권과 보딩패스가 확인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합니다"
"비키라고 했잖아!"
설마했다. 그러나 보안요원 제지 사이로 영어로 욕설을 퍼붓는 소리를 듣는 순간 상원은 소란의 장본인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상원은 줄을 빠져나와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 환자복을 입은 조석희와 그를 막고 있는 보안요원 그리고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뒤엉켜
소란을 빚고 있었다.
"...석희야"
상원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안요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조석희가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지금 환자복을 입고 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모든것이 설명이 될 얼굴이었다.
"너...아직도 잠 못 자고 있어?"
그 집을 나온지 열흘이 훌쩍 넘고 있었다. 원체 조석희의 불면증이 심하긴 했어도 그는 늘상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그가 타의건
자의건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상황이 아주 심각하단 소리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짧은 대꾸가 돌아왔다.
아, 그렇지 자신은 더이상 조석희를 신경 쓸 자격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걱정을 하는 것도 가식적으로 내비칠 뿐이었다.
자신의 뻔뻔함이 부끄러워진 상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소란의 장본인이 게이트밖으로 나오자 보안요원들도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도련님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던 남자가 조석희를 향해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퇴원했어"
"하지만 의사선생님께서....."
조석희가 고갯짓을 했다. 조용히 입다물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양복을 입고 있던 남자가 한발자국 물러섰다. 조석희가 상원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슬프거나 괴로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특유의 무표정하고 냉랭한 눈빛이었다. 상원은 조석희의 표정에서 그가 모든 것을 정리했음을 짐작했다.
"왜 왔어"
상원은 일부러 차가운 태도를 취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흔들릴게 분명했다.
"줄게 있어서 왔어요 선배"
"뭔데"
조석희는 대답대신 환자복에서 편지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자 조석희가 픽, 하고 웃었다.
"이거 받는다고 하나 변할 거 없어요 그냥 받아. "
"...그래"
변할 거 하나 없다는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상원은 편지봉투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조석희가 움켜쥐어 자신의 쪽으로 끌어 당겼다.
훅, 하고 와닿는 남자의 열기에 상원은 그대로 굳었다.
"5초만"
밀어내야 했다. 이러지 말라고 한살이라도 더 먹은 자신이 단호하게 끊어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 5초가 지나자 조석희는 상원을 놓아주었다. 상원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놓지 말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조석희가 작은 목소리로 Good bye 라고 속삭인 것도 같았다. 방금 전까지 끌어안고 있던 열기가 꿈결처럼 멀어졌다.
상원이 정신을 차렸을땐 조석희도 검은 양복도 이미 인파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상원은 그런것을 조금도 신경쓰지 못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로 인해 손이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심하다. 이 정도에 눈물이 날만큼 좋아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래. 이상원 이병신아. 멍청한 녀석아. 머저리야. 천하의 등신아, 쪼다 백치야.
자신을 향해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욕을 쏟아부으며 상원은 심장떨림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봉투를 발견하고 황급히
봉투 끝을 뜯어보았다.
거기엔 코팅된 작은 종이와 짧은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코팅된 종이는 로또 복권이었다. 1등 당첨이 된 로또 복권을 준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랬다면 당장 밖으로 나가 돌려줘야 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또 종이 뒷면에는 매직으로 꽝, 이라는 글씨가 큼직막하게 쓰여있었다.
상원은 한참을 그 복권을 들여다 보다가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의 성격만큼 간결한 내용이었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편지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원선배, 이건 내 부적인데 당신 줄게. 숫자 12개를 골랐는데 당첨번호와 하나도 안 겹치는 것도 나름, 행운이니까. Ps. 런던은 날씨가 똥 같으니까 감기 조심해]
상원은 이전에 조석희가 자신을 편의점으로 데려가 사주었던 복권이 떠올랐다. 그때 두사람은 서로 복권을 나눠가졌다. 조석희는 자신의 복권을 상원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건 자신이 써준 부적이니까 잘 간직하라고, 그리고 그는 상원의 복권을 자신의 부적, Lucky charm으로 간직해온 모양이다.
"....."
상원은 고리가 끊어진 낡은 열쇠고리를 찾아주었을때 보여준 노부부의 미소가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에겐 보잘 것 없는 물건이겠지만 몇 십년간 소중히 간직해온
이유를 설명하며 그녀는 매우 행복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던 조석희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냉랭하고 사람을 깔보는 듯한 표정, 꾹 다문 입술, 살짝 내리감은 눈.
그런 얼굴을 하고 상대방의 불운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의 진심과 차갑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인사.
"학생 뭐해요. 선반위에 가방 올려놓고 주머니 안에 있는거 모두 비우세요"
보안 요원이 상원의 어깨를 툭 치면서 검색대를 가리켰다.
이번이 상원의 차례였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냐고 묻는 말도 없이 집주인은 문을 열어주었다.
"미안해"
"....."
상원은 현관문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쏟아냈다.
"제 발로 나갈때는 언제고 돌아오니까 어이없어 하는거 알아. 황당하겠지. 한 대때리고 싶겠지. 네 말 안 믿은 것도 내 멋대로 모든 상황 판단하고
결정내려 행동한 것도 사과할게.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 나중에 더 큰 상처 받을까봐 회피한거 맞아. 네가 안 변한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내심 전제로 깔아놓고
내맘대로 판단했어. 그것도 사과할게 혼자 상처받을 것만 생각하고 네 상처는 신경쓰지도 않았어. 이기적인 건 나였어. 미안해....정말 미안해.
석희야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각서를 쓰라면 쓸게. 다시는 널 두고 어디 가지 않을거야. 니가 나 버리기 전까지 절대 어디 가지 않을 거야. 아니 니가
나 버리면 그냥 죽을게. 죽어버릴게. 죽어버리는게 나으니까....용서해줘"
정확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상원은 몰랐다.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한번의 거름도 없이 그대로 쏟아냈다. 고개를 숙인 채였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석고대죄를 하라고 하면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겠노라고 상원은 다짐했다.
"때려도 돼. 화풀릴 때까지 맞을게"
"......"
"욕해도 좋아. 어떻게 하면 네 화가 풀릴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할게"
"....."
마주잡은 두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차가운 말이 돌아오거나 비웃음 같은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어색한 침묵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상원은 두눈을 꼭 감고 자신에게 돌아올 형벌을 기다렸다.
"화가 풀릴때까지 사람을 패는 과오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머리 위에서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상원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조석희의 옆에는 조석희의 어머니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그...저...그게...."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상원은 문을 열어준 상대도 확인하지 낳고 바로 고개를 숙여 말을 쏟아낸 자신을 저주했다. 최소한 누가 있는지 정도는 확인을 해야 했건만,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온몸의 핏기가 가셨다. 최악이었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었다.
"그런 짓 안해요. 아니 못하는거 아시잖아요"
조석희는 어머니를 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퍽이나 그러겠다"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들의 집으로 남자가 찾아와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다시 받아들여 달라는 사랑고백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표정이 좋을리가 없겠지.
상원은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1분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지금 이자리에서 배를 가르고 죽을 수도 있을텐데.
"그럼 당분간 네말대로 할테니 그견은 생각해 보도록 하렴"
"당분간이 아니라니까요"
벽에 기대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조석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미소를 보고 가슴이나 두근거리고 있다니 자신은 바닥에 머리를 박아 죽어도 마땅찮은 놈이라고 상원은 끊임없이 자책했다.
"알겠으니까 아까 네가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라"
"네 그러죠"
조석희의 어머니가 현관으로 와서 구두를 신었다. 그녀가 자신의 옆을 지나가자 상원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몸조리 잘하거라"
"예 나중에 영국에서 뵐게요"
"학생도 그만해요, 뭘 그리 잘못했다고 맞는다는 소리까지 해"
"그...... 죄송합니다"
조석희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더니 그만 가보겠다고 문을 열었다. 상원은 엉거주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햇다. 또다시 그녀의 한숨이 들려왔다
무안함과 수치 죄스러움으로 상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조석희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와, 이제 어쩌지"
"....미안하다"
죽고 싶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까 말까인데 어머니 앞에서 아들내미가 남자애인이 있다는 사실까지
까발리게 했으니 이건 한두대로 맞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상원은 또 고개를 숙이며 애끓는 사과를 토해냈다.
"내가 정말, 생각이 짧았어. 너만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네가 아프면 누군가 있을수도 있는데 정말 미안해 본의아니게 이런 실수를 .... 미안해
책임질게. 내 행동 모두 책임질게"
상원의 앞에 선 조석희의 입가엔 장난스런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90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하고 있는 상원에겐 그게 보일리가 없었다.
"선배 어떻게 책임지실건가요. 저희어머니한테 그런 얘기까지 하시고"
"...네가 원하는대로 할게. 평생 을 다해 갚으라고 해도 갚을게 정말 미안하다"
조석희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어쩌지 웃음이 터져 나올것 같았다.
사실 그는 어머니를 불러다 놓고 자신에게 한번만 더 맞선을 강요하면 아예 아버지 쪽으로 적을 옮겨버리겠다고 물려받은 주식도 어머니와 적대 관계에 있는
주주들에게 헐값에 넘겨버리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은 조석희 본인이었다.
그런것을 모를리 없는 아들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하자 어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이전에 그 애, 때문이니 하고 물었다.
조석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초인종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선배 방금 제 인생 조졌잖아"
조지다. 라는 표현에서 상원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나는...."
"조졌어. 정말 조졌어. 내 인생 완벽하게 조졌어"
삼단 콤보였다.
"미안해 정말.... 일부러 그런건 절대 아니야"
일부러 하라고 해도 가능하지 않은 시기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이런 기막힌 불운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조석희는 가여운 이 남자가 좋았다.
"내 인생 어떻게 책임지실 건데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말만해 정말...진심으로 사과할게"
상원은 두손을 꼭 쥐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대로 두면 피를 토하고 죽을 기세였다.
조석희는 상원의 어깨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순진한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이 한 청년의 전도유망한 미래를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버렸단 죄책감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두 손 앞으로 내밀어봐"
"...응"
상원은 울면서 두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아무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자신의 양팔을 부러트려 놓으려는 모양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무서워서 두손이 벌벌
떨렸지만 원한다면 두 다리도 내어놓자고 다짐했다 .
"손 뻗어서 나 안아요"
"...응? 뭐라고?"
방금 막 머릿속으로 두 팔이 부러지는 장면을 떠올린 상원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되물었다.
"날 안으라고 그 팔로"
"....어?"
"안아. 당장"
조석희가 명령했다. 상원은 엉거주춤 팔을 뻗어 조석희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조석희도 팔을 둘러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한번의 몸짓으로
상원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받아 준 것이다.
"결혼 안해. 약속 다 받아놨어요"
도망갈 궁리만 했던 자신과 비교되는 훌륭한 석희의 태도에 상원은 왈칵 울음이 터져나왔다.
"....석희야 미안...."
"미안한줄 알면 나한테 잘하라고 앞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상원은 조석희를 양손으로 힘껏 끌어안고 미안하단 말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울음과 뒤섞여 나중엔 미양, 미양, 하는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조석희는 끝까지 괜찮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미안....흑....미안해"
"미안하면 더 세게 끌어안아"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을 다해 석희를 끌어 안은 상원은 미안하단 말을 반복했다. 조석희는 상원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어 체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잘할게. 앞으로 더 잘할게 미안해 네가 했던 말 믿을게. 다시는 너 상처주지 않을게 미안해"
"그래요 상처주지 마세요"
조석희는 상원으로부터 마음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건 회생이 불가능했다. 그는 진심으로 가슴이 아팠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괴로웠다
조석희도 인간이었다. 애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은 절망을 느끼는 . 그러나 조석희는 인간이되 보통의 사람과는 종자가 다른 인간이었다.
사실, 그는 상원의 머리를 움켜쥐고 집으로 끌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뿐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상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영영 놓아줄 생각따윈 이만큼도 없었다.
두통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기절을 해 병원에 입원한 와중에도 그는 상원이 타기로 한 비행기 편명을 알아냈다.
런던, 그곳은 외가의 본사가 있는 도시였다. 그 말은 즉, 자신이 원한다면 그곳에서 상원의 생활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망쳐놓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조석희는 덕분에 매우 바빴다. 이곳저곳에 전화를 넣고 사람을 불러다 지시를 내렸다.
일단 상원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그의 짐은 분실되고, 소매치기로 가진돈이 모두 털릴 예정이었다. 한국사람이 있는 가게에서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지 못할 것이고,
운이 좋게 일자리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다음날이면 이유 불문 해고를 당할 것이다. 어학원에 등록하면 그 어학원이 며칠 내로 문을 닫게 되어 돈을 날리는 불행도
그를 기달고 있었다.
몇 개 더 손을 써놓긴 했지만 아마 그방법까지 가지 않아도 상원이 돌아올 것임을 조석희는 예감했다. 일단 한국에 돌아오게 하면 반은 성공이었다.
상원이 자신을 떠나는 이유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도피가 지속될 수 없음을 본인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사정범위 안에만 들어오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덫을 놓으면 된다. 자신의 발로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래도 보고 싶은 것은 어쩌지 못했다. 오늘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갔을만큼.
게이트 앞에서 상원을 끌어안았을때, 조석희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상원을 놓아주었다.
개똥같은 런던날씨 때문에 감기에 걸리지 말고 하루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삼키고 그는 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상원이 극적인 순간에 등장해 엄청난 불운을 턱, 하니 쏟아 낸 것이다.
"선배 아까 한말 사실이죠?"
"응"
뭐가 사실이냐고 묻는지는 몰라도 상원은 일단 대답했다.
어머니 앞에서 강제 아웃팅까지 시켜 창창한 인생 망쳐놓은 마당에 못해줄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조석희는 그럼 변호사를 불러 계약서를 작성해야겠네 라고 중얼거렸다. 무슨 계약서냐고 묻고 싶었지만 상원은 차마 입이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질문을
했다가 조석희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웠다.
"이제 선배 인생은 나랑 죽던가 나랑 살던가. 두가지 밖에 없어"
나지막한 속삭임에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이번과 같이 함부로 도피를 결정짓는 행위는 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좋아하면서 공항에서는 왜 그랬어"
"...미안"
"상처받았잖아. 선배는 그럴때보면 무서워"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진심이 섞여있었다. 이 빌어먹을 순댕이는 짜증이 날만큼 행동력이 좋다. 느릿느릿 온순해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에선 칼 같은
단호함을 발휘해 조석희로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하나도 안 무서워. 시시한 인간이야"
상원이 반론을 펼쳤지만 조석희는 허리를 으스러트릴 기세로 손에 힘을 주어 그 말을 반박했다.
"아 맞다. "
상원은 공항에서 받은 로또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조석희에게 건넸다.
"이거 네거잖아"
석희가 자신을 받아주면 가장 먼저 이것을 돌려주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래요 제것이죠"
조석희가 받아든 로또 종이를 자신의 지갑안에 고이 접어 넣어두었다 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상원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중얼거렸다.
"그게 네 Lucky charm 인거지"
중얼거림을 들은 조석희가 한쪽눈을 치뜨고 상원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대답이 바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 아니야?"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상원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조석희는 상원의 턱을 손가락으로 지고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지금보니 선배가 제 Lucky charm 인거 같네요"
"...아"
예기치 않은 고백에 상원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조석희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입술이 겹쳐졌다. 오랜만의 키스에 상원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황홀감을 느꼈다.
"선배 제가 준 부적 잘 갖고 있죠?"
"...뭐?"
"그때 내가 준 복권"
"...어?....?!"
부드럽게 이어지던 키스가 잠시 멈추었다. 상원의 어깨가 굳어졌다. 분명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조석희가 짐짓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했다.
"전 선배가 준거라면 소중하게 간직하는데"
"아, 아니 있을거야. 어딘가 있을거야 책상서랍이나 옷안에 분명히 있을거야. 버린 적은 없어"
"버려?"
"아니 안 버렸어. 정말이야"
"당첨된 복권을 그렇게 함부로 놔두면 어떻게 해요"
"당첨...됐어?"
상원의 얼굴이 한층 더 파리하게 질렸다. 사실 당첨 유무는 조석희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고른 숫자이니 최소한 3등 정도는 당첨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그였다.
사실 3등이건 1등이건 그에게 당청금액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소액 따위 있어도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상원이 자신이 건네준 것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시이 기분 나쁠 뿐이다.
"어떻게 하지? 당첨된 거면...... 아 정말 난 죽어야 해. 당장 찾을게"
방으로 달려가려는 상원의 어깨를 조석희는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
"선배 그런거 말고 다른 것 줄게요"
조석희의 말에 상원의 커다란 눈에선 눈물이 왈칵 맺혔다. 당첨된 로또 종이까지 잃어버린 자신에게 또다른 선물을 건네준다는 다정함에 감동한 것이다.
이런 석희를 내버려두고 바다 건너까지 도피하려고 했다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 이번에는 절대로 어디에 흘리면 안돼요"
"그래 약속할게"
엄숙한 목소리로 상원은 맹세를 했다.
"좋아 그럼 벗고 소파에 올라가 엎드려요"
"....응?"
"엎드리라고요. 서서는 불편하잖아"
"뭘? 엎드리고 서서....."
"서서하고 싶으면 벽 짚으세요 응 그렇게"
조석희가 상원이 당황해 하고 있는 틈을 타 그의 양 손목을 쥐어 벽에 갖다 붙였다.
지금은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미어지는 서정적인 재회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요사스런 분위기가 형성된단 말인가.
상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조석희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농담일게 분명했다. 차가워보이긴 해도 그는 본심이 매우 따스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런 인간이니까. 당연히 지금 하는 행동도 분위기 전환을 위한 장난일테지.
"선배 안에 행운을 나눠드릴께요"
"어? 뭐?"
"그러니까 절대 흘리지 마세요, 내가 좋다고 할때까지"
상원은 설마 싶었다. 조석희가 바지 퍼스너를 내리고 단단하게 발기한 그것을 꺼내들자, 짧은 시간동안 상원의 머릿속에 머물렀던 설마는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훅 하고 끼쳐졌다. 뒤어어 난입한 숨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상원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남자는 서정적인 애틋한 재회의
장면에서 19금으로 건너뛰어 버릴 줄 아는 기괴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둥 뒤에서 뻗어온 팔이 상원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을 고스란히 전하듯이.
그 모든 것은 본인이 결정한 선택이며, 결과는 그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그 몫이 크고 무겁긴 해도 조석희의 심장에 자신과 같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에 상원은 의의를 두었다. 일단은 그 의의에 기대어 마음의 평화를 찾기로 결심했다.
상원은 조석희로부터 그날 엄청난 양의 행운을 받아내야 했다. 실로 행운으로 가득 찬 하루였다
"어, 너 학교 자퇴했다면서"
"자퇴한거 아니에요"
"휴학했다고 하던데 유학간다는 소문도 있고"
"일이 좀 있어서요"
상원은 벌써 오늘 몇번이나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으니 같은 과 동기나 선배들이 상원을 볼때마다 깜짝 놀라서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비단 같은 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석희때문에 안면을 트게 된 사람들까지 상원에게 아는척을 해왔다.
"어라 선배"
이번엔 김이경이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원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선배 학교 그만두셨다면서요"
"...그만둔건 아니었어"
"거의 보름동안 무단결석했다던데 학점 포기하신거예요?"
"안 그래도 교수님 찾아뵈려고"
그동안 성실하게 수업듣고 과제를 제출해왔으니 F는 면하겠지만 무단결석만큼 가서 사과를 드려야겠다고 상원은 생각했다.
"같이 밥 먹을까요"
김이경이 자신이 들고 있던 식판을 상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상원이 강하게 거부의 뜻을 밝혔다.
"안돼 석희 조금 이따가 오기로 했어"
"너무하신다. 이젠 대놓고 차별하시네요"
"미안해 그렇지만 너랑 같이 있는거 보면 석희 안 좋아할거야 상처받으면 어떻게해"
"상처받다니? 누가 누굴 때려서요?"
"그런 상처 말고 . 마음의 상처"
"...지금 선배 조석희 얘기하고 있는거 맞아요?"
"그래 석희"
"...."
김이경은 잠시 상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배를 부여잡고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선배 상원 선배 말이 되는 소리를..... 하하하하"
면전에서 비웃음을 당하자 상원은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왜 말이 안돼. 석희도 사람이야. 걔도 똑같은 사람인데 뭐가 말이 안돼"
"선배 걔는요, 하하하 미안하지만 여기가 병든 놈이라고요"
김이경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부근을 가리켰다. 누가 뭐라해도 김이경은 조석희가 어떤 놈인지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아니야 선입견이야. 석희 그런 사람아니야"
상원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김이경은 대체 조석희 새끼가 이 순진한 사람에게 무슨 수를 쓴 것일까 싶어 안타까움을 느꼈다.
"선배 그놈은 개새끼예요"
김이경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석희 오해했어. 그런데...... 아니야. 정말 그런 사람 아니야"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상원이 조석희에게 단단히 넘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김이경은 하는 수 없지 싶어 자신의
비장의 카드를 내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상원선배 선배가 그때 저한테 말씀하신거 저 아니에요"
"응? 무슨 소리야 갑자기?"
"선배네 집앞에서 키스...."
여기까지 말하자 상원이 으악, 하면서 김이경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말하지마 안하기로 했잖아"
김이경이 상원의 손을 내리며 친절하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거 저 아니라고요"
"뭐? 네가 아니라고?'
"예. 저 아닌데요"
"그때는 네가...."
"선배가 저랑 맨정신으로는 죽어도 안한다는 둥, 제가 억지로 했다는둥, 소리를 하시니 열받아서 그랬어요"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술에 취한 선배한테 키스를 할 기회가 있었다면 전 키스에서 안 그쳤을거예요"
"...너"
"전 애초에 왜 선배가 절 지목하셨는지 그 자체로도 이해가 안간다니까요"
거짓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인상착의로 범인을 추렸는데 거기서 조석희를 뺀 것일테지. 상원이 자신과 키스를 했다는 오해르 하고 있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었지만 더 이상 그 개새끼 대신 오명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럼누가...."
"글쎄요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중에 봐요 하하하핫"
김이경이 경쾌한 목소리를 내며 식판을 들고 사라졌다. 남겨진 상원은 혼란에 빠졌다. 분명히 아버지가 그때 키가 크고 허우대가 멀쩡한 남자 변태 라고 설명하셨는데
....설마
"아닐거야"
상원은 고개를 저었다. 조석희가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보란듯이 키스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랬다간 집에서 쫓겨날게 불보듯 뻔한......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생각에 상원은 날짜를 따져보았다. 그때쯤 분명 같이 살자는 석희의 제안이 점점 거세어졌다. 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닐 것이다. 절대 그걸리 없어. 우리 석희는 자신을 배려해주는 따스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니까. 맞아 확인해보자.
상원은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 다시 머무르겠단 말을 전해드린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어색한 관계였지만 이 의문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몇 번의 신호음 뒤에 무뚝뚝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에요 아버지"
[웬일이냐 네가 이시간에]
"다름이 아니라 뭣 좀 여쭤보려고요"
[설마 유학에 관한 걸 물어보려는 거면 당장 끊는다]
"아니에요 아버지 그런거 절대 아니에요"
아들의 떠난다는 전화를 받고 어머니가 며칠을 우셨다는 애기를 전해들었을때 상원도 눈시울을 붉혔다.
"저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시겠지만"
한참 뜸을 들인 상원은 말을 이었다.
"그때 집앞에서 보셨다는 그 변태에 대해서 여쭤볼게 있어서요"
[아 그 변태녀석 왜? 혹시 그녀석 잡힌거냐? ]
"그건 아니고요 잡힐 수도 있어서요 혹시 인상착의 같은거 특별히 기억나는 거 없으세요?"
[글쎄다 워낙 어두워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충격적인 상황이라 세세한 것보다 전체적인 장면만이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그 변태를 잡을 수 있는 단서라고 하니 상원의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기억을 더듬었다.
[그놈 얼굴은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그때 그런 생각이 들긴 했구나]
"무슨 생각이요?"
[그 자식, 쓸데없이 잘생겼다. 이런 느낌?]
"...."
[어째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다. 키도 엄청 크고 허우대가 멀쩡한 놈이었으니까 경찰들한테 잘 설명해라. 다시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예 아버지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쳤다. 상원은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알려준 인상착의를 따지자면 떠오르는 사람이 딱 한명 있었다.
"헉 저기 걸어오는 사람봤어?"
"우리학교 학생 맞아? 정말 잘 생겼다"
여기저기서 여학생들이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상원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상대가 식당안으로 진입했음을 직감했다.
멀리서 상원을 알아본 조석희가 한 손을 슬쩍 들어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러자 근처 여학생들 사이에서 일제히 작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중 한명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쟤가 경대 킹카지? 오늘 나 실물 처음 봤는데 심하게 잘생겼다 뭐랄까 아 적절한 표현이 안 떠오르네"
"쓸데없을 만큼 잘생겼다?"
"응 ! 맞아 그거"
상원은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어느새 조석희가 저만치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서 한층 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 미소와 마주친 순간 상원의 머릿속에도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말았다.
정말 넌 쓸데없을 만큼 잘생겼구나.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 애 그런 짓을 저지른 거니. 왜 대체 왜왜왜왜.
"선배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방금 왔어"
"저 주문 좀 하고 올게요"
조석희가 가방을 상원의 앞에 내려놓았다. 상원은 잠시 고민하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있잖아 석희야 혹시 말이야"
혹시나 누가 들을까 상원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조석희가 어깨너머로 고개만 돌려 상원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우리 집앞에서 나 술 취했을때 키스한 적 있어?"
"네"
그가 너무도 순순히 자신의 죄를 시인하자 상원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또 술에 취해 집앞에서 키스를 한 날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그때 우리 아버지가 나와계셨는데 못봤어?"
"글쎄요 어두워서"
조석희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 고혹적인 자태에 상원은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또다시 석희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를 의심할뻔 했던 것이다.
아 정말 이러면 안되는데,
"배고프겠다. 빨리 음식 주문해서 받아와"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ok싸인을 만들어 보였다. 상원은 거기에 또 얼굴을 붉혔다. 저런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지닌 사람이 그런 잔인한 짓을 할리가 없지.
자신을 사지로 내몰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 아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그가 상처받고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것을 믿어줘야 했다.
석희가 비록 성격이 좋지 않고 냉정한 구석이 있고, 오만하고 사람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고 고생은 모르고 자랐고 다른 사람 배려할 줄 모르고
싸가지는 좀 없지만 그래도 가슴은 따뜻한 인간이니까.
조석희가 음식을 받아와 상원의 앞에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상원은 나긋하게 웃어주었다. 문득 조석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선배는 어머니 닮았나 봐"
"어 그런 소리 많이 듣........"
"왜요"
상원은 거무스름한 눈썹과 얄미울 정도로 예쁜 눈을 하고 있는 사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지, 한번도 상원의 부모님을 본적이 없는 석희가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어머니 뵌적 있던가"
상원이 넌지시 돌려 물었다. 조석희가 아니, 하고 고개를 흔든다.
그다음 나올 질문이 무엇인지 분명 감이 올텐데, 그는 평안한 얼굴이었다. 상원은 젓가락을 입에 문체 왜 그랬어 하고 중얼거려본다. 질문의 의미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조석희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그냥 이라고 대답한다.
뒷목이 빳빳하게 굳어온느게 느껴졌다.
그래 , 그냥.
너는 그냥 남의 아버지 앞에서 나한테 키스를 했구나. 내가 너희 어머니 앞에서 고백을 했을때는 니 인생 조졌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더니 .
내인생은 그럼 어찌하라고 그런거니. 석희야. 네 표현대로 내 인생 조지려고 그런거야? 정말 그런거니?....... 이경아. 네 말이 맞구나. 얘는 개새끼야. 하지만
말도 하고 아파할 줄도 알고 나를 사랑해주는 개새끼구나. 그러니 어쩌겠어. 내가 키우는 수밖에.
"내가 그렇게 좋아요?"
자신을 향한 눈길을 영 엉뚱하게 해석한 조석희가 대뜸 묻는다. 상원은 엉겁결에 응, 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조석희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도 선배 좋아, 라고 말을 건넨다.
답답함과 설레임이 동시에 가슴 속으로 치받쳐 올라 상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할 뿐이었다.
그렇다. 이것도 모두 자신이 선택한 결과니 받아들여야만 했다.
비록 결과가 영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긴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상원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 한가한 하루의 늦은 점심이었다.
ㅡ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