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55화 (36/45)

"죄송합니다. 히드로 공항 인근이 비행기가 운행할 수 없는 상태여서 오늘 런던행 항공이 모두 결항된 상태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티케팅을 하려고 항공사 카운터로 갔던 상원은 항공사 직원의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아이슬란드 화산 폭팔문제로 인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럽행 항공이 결항된 상태입니다. 죄송합니다. 저희 항공사측에서도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천재지변으로 인한 문제라...."

저 말줄임표에 무한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항공사 직원도 진심으로 미안하단 표정을 짓고 있긴하지만 별다른 해결책을 내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그게....천재지변으로 인한 문제라서 저희도 확답을 드리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다른 항공사 고객님들도 현재 기다리고 계시는 상황이구요"

다른 항공사 직원들도 당황스런 표정으로 열심히 뭔가를 설명중이었다. 인천공항 안이 북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변경사항은 어떻게 알수 있나요?"

"여기로 전화하셔서 항공사편명을 입력하시면 안내방송이 나갑니다. 불편을 끼쳐 정마로 죄송합니다"

직원이 전화번호가 찍힌 안내문을 건네주었다. 

"아니에요....어쩔 수 없죠"

상원은 여권과 바우처를 다시 가방안에 챙겨 넣었다. 비어있는 의자를 찾아 앉기는 했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티케팅을 하기 전에 부모님께전화를 드려 

영국으로 떠난다는 말을 어렵게 꺼낸 참이었다. 어머니는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들어오라고 울먹거리셨고 아버지는 갑작스런 아들의 말에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께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도착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쳤다. 

"하아....."

상원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불효를 지금 막 저지르고 난 뒤인데 항공사 결항문제로 인해 당분간 한국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을 부모님께 어떻게 꺼낸다는 말인가. 

급하게 준비된 도피처이기 때문에 수중에 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승완에게 돈까지 빌려 더이상 돈을 빌릴수도 없었다. 비행기가 언제 떠날지 모를 상황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었다.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한국을 떠나겠다고 결심을 굳힐때까지  수많은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이 방법이 과연 옳은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석희에게 한마디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가 외국으로 떠난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아니 그를 떠나 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집을 나온 이후 상원은 심각한 금단증세와 싸워야 했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고 신발을 신었다 벗었다. 

조석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평생 같은 실수를 반복할게 뻔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이기적이고 매력적인 남자곁에서 같은 문제로 상처받고 상처받고 상처받는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인간이 변하는 일은 없겠지. 그리고 자신은 시간이 지날 수록 그를 더 좋아하게 될테고 두려웠다. 

다른것이라면 어떻게든 참아내겠지만 남자의 곁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사람이 생길수도 있다는 생각은 온몸의 피를 창백하게 얼어붙게 만들정도로 두려웠다. 

결국 상원은 상대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를 택했다. 그런데 어렵사리 선택한 도피조차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운이 없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수 밖에 없는 상황에 상원은 입밖에 내어 중얼거렸다. 

그때 누군가 상원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맞아요 정말 운이 없죠. 선배는"

"...!!!!"

"하필 출국하는 날 모든 비행기가 결항되다니 정말 재수도 없죠"

"...석희야 네가 어떻게 여길..."

"택시타고 왔어요"

질문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석희는 일부러 엉뚱한 대답으로 맞받아쳤다. 

"다행히 길도 안 막히더라구요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하하, 진짜 죽여버릴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라 걱정했는데"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하는 조석희의 눈빛에 상원은 소름이 끼쳤다. 이상했다. 도망갔던 애인을 잡은 것인데 조석희는 차분하기 그지 없는 태도였다.  타고난 귀티는 여전했지만 

뭔가 평소와는 달랐다. 어딘가 어긋난 느낌.

"진부하다 선배는 어쩜 그렇게 레퍼토리가 똑같아요? 그냥 도망치면 끝인가"

"....."

레퍼토리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진부함을 토로하고 있으니 상원은 할말을 잊었다. 조석희가 손가락 끝으로 상원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선배 진짜 날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조석희가 묻는다. 상원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옆에서 큭큭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상원의 불안감은 점점 고조되었다. 

상대가 욕을 하고 화를 내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왜"

"...어?"

"너 왜 날 두고 가려고 하는거냐고"

갑작스런 조석희의 반말에 상원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 갖고 놀았어?"

그가 상원의 앞으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반말로 물었다 얼굴이 빨개진 상원이 고개를 재빨리 내저었다. 

"아니 절대 그런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랬어?"

"...."

"왜 그런건데 설명좀 해봐. 진짜 궁금해서 그래"

그렇게 말하며 그가 상원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닿은 온기에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흠짓 떨었다. 그걸 본 조석희의 입가가 살짝 굳었다.  

"나.... 그렇게 살 자신없어"

"그렇게 라니?"

"너한테는 별일 아니겠지만... 난 네가 다른 여자 번연히 만나고 맞선보고 돌아오는거 참기 힘들어"

상원은 이 문제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결국에 어쩔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별일 아니잖아요, 라고.

지금도 이렇게 옆에 있는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만큼 좋아죽겠는데 그때가 되면 저 말들을 자신이 수긍하게 될까봐 참기힘들었다. 그나마 실낱같은 이성이 남아 있을때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것뿐이야?"

"넌...."

상원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얘기해봤자 무한 평행선을 그을 화제였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난 너 설득시킬 자신없어"

세상에는 노력으로 되는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 있는데 조석희의 사고방식은 후자에 속했다. 

상원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며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잡힌 손이 뜨거웠다. 빨리 그가 손을 놓았으면 하고 바랬다. 

"그럼 내가 선배 설득시키면 안되나?"

"뭐?"

"내가 그럼 선배 설득시키면 되잖아요"

다시 본연의 존대말으로 돌아와 있었다. 상원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석희가 갑자기 상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잡고 있던 손을 얼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한테 한눈 안팔게요. 선배외의 사람하곤 손도 잡지 않을 거고, 마음도 주지 않을게요"

소리 높여 사랑고백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귀에 충분히 들릴만한 목소리였다. 개중에는 기겁을하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평생 선배하고만 살게. 상원선배하고만 섹스하고, 당신하고만 사귈테니까 나 버리지 마세요"

"서, 석희야"

상원이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눈에 띄는 남자가 여자도 아닌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랑고백을 하는 장면에 당연히 사람들이 이목이 쏠렸다. 

조석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상원의 무릎에 얼굴까지 숙이고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러지마 석희야"

당연히 상원은 당황스러웠다. 사람들 앞에서 본의아니게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것은 둘째치고라도 이 말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가슴 떨리는 자신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아는 조석희라면 지금 이 말들은 분명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거짓말일게 분명했으니까. 

일반인이 연극 대사를 읽는 것처럼 감정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지 않고 문장의 높낮이도 일정했다. 예전같으면 또 거짓말하고 있네. 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을텐데 이상했다. 

가슴이 쿡쿡 쑤시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상원선배 나 없으면 못 살잖아. 나도 그래요"

이젠 아예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조석희를 떼어내려고 손을 들었던 상원은 그의 손이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져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마 계속 잠을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타깝고 가엽긴 했지만 상원은 상대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이유가 짐작이 되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잠 때문에 그래? 너 며칠동안 못잔거지?"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나 없는 동안에도 잘 살아왔잖아. 그러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이건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조석희를 힘껏 안고 싶어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자존심이고 이성이고 집어던지고 첩이라도 

좋으니 평생 같이 사귀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살 수 없는 것은 상원, 자신이 될테니까. 

"어떻게든 살아진다고요?"

상원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조석희가 되물었다. 

초췌한 인상이었다. 얼굴이 퀭한 것은 둘째 치고 눈빛이 불안정했다. 이전의 일이 떠올라 상원은 덜컥 겁이났다. 

"너.,...어디 아픈거 아니야?"

"말해봐요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건데"

조석희가 상원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등 위에 난 자잘한 상처가 상원의 시선을 끌었다. 

"이건 또 어디서 난 상처야. 무슨 일 있었어?"

싸워서 생긴 상처같지 않았다. 시일을 두고 주기적으로 날카로운 뭔가에 베인 상처같았다. 상원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스치자 조석희가 피식 웃었다. 

"왜요? 자해라도 했을까봐요?"

"...."

"선배 없다고 내가 내 손목 칼로 긋기라도 했을까봐? 내가 그정도로 병신같아 보여요?"

"...그게 아니라"

조석희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상원을 찾기 위해 손놓고 맞아주고 주방 구석에 앉아 감자를 벗기는 노동까지 했다. 설득시켜 달라 해서 사람들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병신 같아 보이면 왜 그냥 집을 나갔어요?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그런거 아니잖아"

"선배 그거알아요? 당신 사람 갖고 노는데 천부적이야. 순진한척 지고지순한척 혼자 다 하더니 결국엔 자기 좋을대로 하는거잖아"

"뭐라고?"

감정에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원색적인 비난도 아니었다. 조석희는 상원을 똑바로 보고 가지고 있는 불만사항을 

토로했다. 

"노력해서 안되는 문제는 그냥 회피하면 끝인가? 매사 그렇게 살거에요? 안되겠다 싶으면 도망가고 상처받겠다 싶으면 고개돌리고" 

"어차피 안되는데 그럼 어떻게해 나더러 고스란히 나중에 몇 배나 커져 돌아올 상처를 떠안으라고? 왜? 왜 나만 그래야 하는데"

"될지 안될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고. 그리고 언제 내가 선배한테 상처를 떠안으라고 햇어"

남녀 치정싸움도 쏠쏠한 구경거리였다. 하물며 남남  치정싸움은 오죽하겠는가. 평소였으면 내성적인 상원이 주변을 신경써서 그만하자고 했겠지만 지금 그에겐 

남들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럼 네가 상처받기라도 해? 네가?"

상원은 기가찼다. 헛웃음이 났다. 조석희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이번 것은 무리였다. 

도저히 듣고 넘어가줄 수가 없었다. 

"석희야 니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아?"

"전 상처 받으면 안되요?"

"아니 안될것 없어. 솔직히 나는.... 네가 나때문에 상처받았으면 좋겠어"

상원은 담담하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이기적인 진심을 드러냈다. 

"난 네가 나 때문에 상처받고 망가졌으면 좋겠어. 항상 여유있고 오만하기까지 한 네 모습도 너무 좋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때문에 상처받고 절망을 느껴봤음 좋겠어"

"나도 상처받고 선배 때문에 망가져요"

조석희가 손바닥으로 왼쪽 이마를 감싸 쥐었다. 두통이 심해져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한시라도 빨리 상원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몇날 며칠이고 침대에서 자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선배....."

상원을 설득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을때 지나가던 중년부부가 노골적으로 두 사람을 향해 혐오의 시선을 던졌다. 남들이 뭐라하건 조석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상원은 분명 수치를 느끼고 움츠러들 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연인이 남들에게 모욕을 느끼는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선배 조용한데 가서 얘기해요 우리"

그렇기 때문에 건넨 한마디였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상원에게 그 말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런 순간에서도 그는 스스로가 망가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국 넌 니가 제일 중요한거잖아"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예요 그거"

두통이 심해져 조석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 머릿속에서 도끼질을 하는것 같아 토악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발이라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영락없이 상원에게는 그 소리가 자신을 향한 불만으로 들릴 뿐이었다. 

"난 너때문에 친구도 가족도 버릴 뻔했어. 그런데 넌 대체 뭘 버렸어? 그저 원하는 것은 다 손에 쥐려는 거잖아"

"선배만 손에 쥐면 되요"

"나도, 겠지"

단호하게 덧붙여 지는 한마디에 조석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가 제발 이라고 중얼거리며 상원의 손목을 잡았다. 

"상원 선배 집으로 가요. 우리 집으로 가요"

상원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석희와 말을 나눌수록 상원의 결심은 굳어져갔다. 

"선배, 제발 좀...."

상원은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손목에 남아있는 온기가 지금도 눈물날 정도로 아쉬웠지만 상원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용기를 

모아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지 않을거야 미안해"

"...."

조석희는 한참 상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괴괴한 정적속에 갇힌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

"선배 마음대로 하세요"

꽤 잔잔한 음성이었다. 비꼬는 것도 아니었고 무시하는 어조도 아니었다. 다정한 음색도 아니었다. 처음듣는 익숙하지 않은 그것에 상원은 몸이 떨렸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하는지 안녕 이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상원은 결정하지 못했다. 

조석희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호모의 치정싸움이 의외로 싱겁게 끝나자 모여 있던 인물이 흩어졌다. 

상원은 공항에 혼자 남겨졌다. 

아이슬란드 화산 문제로 인해 유럽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운항이 취소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외국인들은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거나 

그조차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공항에서 노숙을 했다. 상원 역시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인천공항에 머물러야 했다. 

유례없는 항공기 결항 사태를 취재하러 왔던 방송사 카메라에 우연히 잡혀 방송을 탄 것이 상원에게 있었던 단 하나의 특별한 일이었다. 

덕분에 방송을 본 친구들이 인천공항까지 상원을 찾아와  때 아닌 이산가족(?)상봉 장면이 연출되었다. 

"너희들이 여긴 웬일이야 어떻게 알고 왔어?"

"텔레비전에서 봤어. 야 진짜 꼴이 말이 아니다"

상원이 계면쩍게 웃으며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아무리 신경쓴다 해도 모양새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고 니가 여기에서 왜 이러고 있냐. 외국가서 유학한다는 놈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텔레비전에서 상원을 찾아낸 장본인 한승완이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상원이 힘없이 화산때문에 하고 얼버무렸다. 

"넌 어찌 된 놈이 외국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한테 말 한마디도 없냐. 서운하게"

 동석이 상원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인상을 썼다. 상원이 미안하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지만 동석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상원은 몇번이고 

승완에게 자신이 한국을 떠나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떳떳하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환송을 받으며 갈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뭐야 진짜 외국가? 승완이 새끼가 너 한국에 없다고 했을때 뻥까지 말라고 했는데 아오 근데 여기 진짜 넓다. 나 공항 처음 와 보는데 ...역시 가슴은 서양이군"

공항을 둘러보다가 자연스레 서양 여자들을 시선으로 뒤쫒고 있는 대진을 보고 동석이 혀를 찼다. 

"밥은 좀 먹었냐. 이거 먹어"

승완이 도시락 통에 싸온 삶은 감자를 꺼냈다. 동석은 말없이 음료수를 상원의 무릎에 던졌다. 

"고맙다 같이 먹자"

상원이 같이 먹기를 청했지만 모두들 질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감자 됐어. 진짜 역해"

"아 시발 보기만 해도 목구멍에서 좆물이 올라온다. 치워라"

",,,,응 그래"

상원은 조심스레 감자 하나를 베어 물었다. 승완은 인천공항이 자신의 감자를 사들이면 참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상원은 동석이 

옆에서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땐 모르는척 하는 것이 자존심이 센 승완을 위한 행동이었다. 

"가서 지낼 곳은 정했어? 학교 같은데 들어가는 건가?"

"아직 정해진 건 없어"

상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앳되 보이는 상원의 얼굴 때문에 친구들은 한층 더 걱정스러워했다. 

"아. 근데.... 흐음"

갑자기 승완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주변을 살폈다. 뭔가 말하기 어려운 주제를 꺼낼 모양이었다. 

".....안 왔디?"

"누구?"

"시발개호로쌍놈새끼"

한번의 쉼 없이 내뱉는 욕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엿다. 상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택시를 타고 왔다던 조석희가 누구에게 

정보를 들었는지 예상이 가능해지는 순간이었다. 

"...왔었어"

"와서 뭐라디. 시발놈. 혹시라도 욕하고 너 때린 거라면 지금이라도 내가 가서...."

"없어 그런거"

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와서 너 보고만 갔어? 끌고 가거나 그런 것도 없이?"

승완이 기겁해서 물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끄엑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의자로 몸을 늘어트렸다. 

"이상하다 그럴리가 없는데"

동석도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친구들의 반응에 상원이 먹고있던 감자를 내려놓았다. 

"왜? 뭐가 그럴리가 없어?"

"그 미친 새끼가 너 얼굴 보고 보내주자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거 아냐"

"그런 짓이라니?"

동석이 승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래도 상원이 가지 전까지 연락을 하던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이쪽을 통해 혹시 이야기가 흘러 갔을 것이라 생각해서 였다. 

"아 시발 솔까 말하기 싫었다. 됐냐?"

"무슨 말을 하는거야"

상원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동석도 승완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결과야 어쨌든 유치한 심술로 조석희를 골탕먹인 것이니 말을 꺼내는 것이 

께림직 했던 것이다. 

24금을 제외하면 머릿속이 누구보다 순수한 대진이 해맑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좆서퀴가 너 내놓으라고 우리 도장에 찾아왔는데 동석이가 안 알려준다니까 존나 굽신굽신대면서 제발 알려 주십셔 형님 딱 이래서 우리가 다섯대씩 때렸어"

"...."

"....."

"....그게 뭐야"

고등학교 시절 언어영역이 전국하위 0.0001% 에 속해있던 대진의 줄거리 요약은 도저히 들어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동석이 입을 열었다. 

"그놈이 찾아왔었어. 네 연락처 달라고"

"...그랬구나"

"너 나한테 연락처 안줬잖아. 그래서 모른다고 했지 알아도 안 가르쳐준다고 했고"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조석희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그놈이 너 있는 곳을 알려주면 뭐든 하겠다고 해서 좀 맞으라고 했지"

"뭐?"

"딱 열대만 맞으라고 했어 방어 없이. 그럼 생각해 본다고"

"그래서 ...때렸어?"

"그래서 걔가 맞았느냐고 묻는 쪽이 더 정확한 질문이겠지"

조석희의 더러운 성격을 고려하자면 동석의 말이 맞았다. 상원은 질문을 다시 고쳐했다. 

"그래서 맞은 거야?"

"응. 열대 다 맞았어"

"나도 다섯대 때렸어. 졸라 힘껏 패서 갈비뼈 나갔는데 끽 소리도 안내더라 독한 새끼"

상원은 자신이 맞기라도 한듯 잔뜩 인상을 찌푸린채 옆구리에손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어떻게 됐어? 넌 나 어디 있는지 몰랐잖아"

상원은 승완에게 연락을 취했다. 동석은 고지식한 부분이 있어서 자신의 유학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지. 난 생각해본다고 했지, 말해준다고 한적은 없다고"

"..."

상원은 온몸에 피가 싹 가시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조석희 성격에 살인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냥 넘어갔냐고?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놈 머릿속을 내가 알게 뭐야"

상원도 하긴 하고 한숨을 쉬었다. 2년간 교제를 했으면서도 대체 이 남자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뭐 그래도 한마디는 했다. 한승완한테 가보라고"

상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승완에게 옮겨졌다. 승완이 쳇하고 입을 열었다.

"왔어. 와서 시발놈이 너랑 할말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알려준거야?"

"아니야 그냥 알려준거 절대 아니다. 내가 그렇게 의리 없는 놈으로 보여?"

승완이 펄쩍 뛰며 말했다. 상원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를 탓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두 사람 사이 안 좋잖아"

"사이라고 할 것도 없이 난 그자식 존나 싫어 완전 밥맛이야"

팔에 붙은 벌레를 털어내는 것처럼 한승완이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왜 알려줬어?"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동석은 그래도 어렸을 적부터 운동을 해와서 페어플레이 정신을 갖추고 잇었다. 승완에게는 페어플레이 정신은 고사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심도 없었다. 

".....그놈이 감자껍질을 깠거든"

"뭐?"

"감자 껍질을 깠다고, 새벽에 와서"

상원은 두눈을 깜빡거리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들려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조석희가 설마 감자 껍질을 벗겼다는 거야?,,,,,왜?"

그의 집을 드나들고 같이 살기까지 했던 상원이지만 조석희가 자신의 손으로 집안일을 하는 것은 손에 꼽을 만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몰라, 내가 감자 껍질 벗겨야 하니까 꺼지라고 했더니 자기가 해준다잖아.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먼저 시킨거 절대 아니다. 걔가 껍찔 깐다고 했을뿐"

며느리 시집살이 시킨 것은 절대 자신의 문제가 아니며 며느리가 거기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는 시어머니의 어조였다. 

"얼마나?"

"그, 그게 좀 많이...... 으아 진짜 맹세코, 내가 먼저 하자고 한거 아니다. 지가 자청했어. 웃기지도 않은 새끼. 누가 그러면 감동할줄 알고, 찌질한 놈. 

혼자 잘난척은 다 하더니 며칠동안 와서 일만 하더라고"

조금 많이 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무리가 따르는 양이었다. 아직도 승완의 가게에서는 넘치는 감자를 주체하지 못해 매일 저녁 억지 감자파티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마지막 날 조석희가 거의 감자를 손도 안 대고 나가서 1톤 가량의 감자는 저장이 가능하다는 사실 정도. 

아마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상원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한에선 조석희는 그런 일을 묵묵히 할 위인이 아니었다. 

"결국에 석희가 약속한 만큼 일을 다 한거야?"

"아니 처음부터 그런것은 없었어. 그냥 내가 오케이 하면 그때 알려준다고 했지"

"...."

이런 말도 안되는 약속을 냉철한 조석희가 받아들였단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더불어 한승완이 결국엔 오케이를 했다는 사실 역시.

"내가 절대로 감자 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오케이 한 것은 아니야. 대진이 씹쌔끼야. 웃지 말라니까"

"크크크 애 통장 빵구 났다 크크크크"

"나 때문에 그렇게 된거야?"

상원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차 올랐다. 안그래도 승완에게 비행기 값을 빌렸는데 석희와의 내기에 사용된 감자값 얘기까지 더해지니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왜 너때문이야. 그놈 때문이지. 감자는 왜 까겠다고 지랄을 해서, 암튼 내가 너 간다고 말해줫어. 말해주고 나서도 잘한 짓인지 백번 고민했지만"

"대체 왜 얘기해준거야?"

마음속에 의문이 남아있던 상원이 다시 입밖에 내어 물었다. 

"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뭐랄까"

표현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승완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그 아리송한 감정을 설명 못해 머리만 긁적였다. 

"그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겠다 싶어서"

동석이 입을 열었다. 

"맞아! 바로 그거야! 그거였어"

승완이 맞장구를 쳤다. 자신이 어떻게 골탕먹인다 해도 조석희는 상원이 있는 곳을 언제가 되었든 찾아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매우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동석이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한국에 있을때 마주치는 편이 나을 거 같았어. 나는 그래야 무슨 문제가 생겨도 해결하기 쉬울테고...."

사실 동석은 조석희가 자신의 친구를 찾는다면 당연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끌고 갈거라고 생각했다. 이왕 끌려갈거 외국에 나갔다 한국에 오는것보다 

한국에서 해결을 보는게 나은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널 두고 그냥 갔어? 깽판 놓다가 공항 보안요원들한테 끌려 나간건 아니고?"

"아니 내가 그냥 같이 안간다고 했더니 돌아갔어"

"그게 이해가 안간다는 거야. 그 새끼가 개고생을 하고 순순히 물러났다는 게 말이 되냐고, 뭐 다른 꿍꿍이가 있는거 아니야?"

승완 역시 조석희가 상원을 어떻게든 설득해 집으로 데려갈 거라고 믿었다. 사실 그놈이랑 사는 것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외국으로 가는것도 탐탁치 않았다. 

일단 한국에 머물게 한 다음 조석희를 떼어놓아야 겠다고 승완은 통통한 꿈을 꾸었다. 

"난 석희가 애초에 고생을 자처했다는게 이해가 안가"

이해가 가지 않는건 피차일반이었다. 

"...그런애가 아닌데"

상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애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조석희는 뭔가를 위해 희생하는 법을 몰랐다. 희생하지 않아도 원하는것은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는 남자였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완전 그런 놈이던데"

대진이 감자를 입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너한테 미쳤잖아. 그새끼 그러니까 그 지랄을 한거지. 걔라고 뭐 별수 있어 다 똑같이 좆달린 남자지. 어 자기가 두번이네 좆 달린 남자. 자지 , 크크크"

이상한 언어유희를 발견한 대진은 혼자서 키득거리며 좋아했다. 그러나 나머지 세사람은 웃지 않았다. 상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승완과 동석은 서로 곤란하단 

눈짓을 주고 받았다. 

응원해주고 싶지 않은 연애를 갈라놓자니 친구가 폐인이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조석희를 두둔해주는 말을 해주자니 입이 썩을것 같았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동석이 묻자 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있다가 비행기 다시 뜨면 가야지. 별 수 없잖아"

그런 친구를 물끄러미 보던 승완이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몸을 돌렸다. 자기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던 동석은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중요한 결정을 하는건 결국 너잖아. 조석희가 아니라"

"...."

"그러니까 선택권이 없다는 투로 얘기하지마. 결과야 어쨌든 니가 선택한 거다"

"그래 고마워"

마음이 무거웠지만 상원은 친구의 진심어린 조언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이 모든 사실은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자신에게 왔던 단 하나의 행운을 놓아버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행운이 언제 자신에게서 달아날까. 평생을 조마조마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을 지탱하기란 불가능했다. 

사람이란 간사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었다. 가지지 못했을 때는 손에만 넣는다면 세상 그무엇도 필요없다고 생각하며 기도했는데, 막상 손에 넣고 나니  그것을 지킬 힘이 없어 전전긍긍 할 뿐이었다. 

상원은 그날 저녁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친구들을 보내고 의자에 누워 높은 공항 천장을 바라보았을때 그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갑작스럽게 울음이 터졌다. 조석희의 집에서 나온 그날 이후 처음으로 상원은 소리내어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옆에 누워있던 노부부가 상원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달랬다. 

그리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 어떤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좋아질거다. 지금보다는 분명 좋아질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름도 모르는 노부부의 친절이 상원의 눈물을 간신히 멈추게 햇지만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알고 있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지난 일년여의 시간을 떨칠 수 없는 것임을.

그보다 좋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 또한, 

다음날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의 운항이 재개되었다는 희소식이 공항에 안내방송으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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