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53화 (35/45)

"젠장"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던 조석희는 짜증을 내며 손에 들고 잇던 감자를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혀 으스러지는 감자의 냄새가 그의 짜증을 부추겼다. 

빌어먹을 금발머리 자식이 자신을 엿먹이기 위해 더러운 공작을 할거라고 생각했지만.... 감자로 만들어진 무간지옥이라니.

귀찮은 것은 질색이라 껍질을 깎아야 하는 과일은 누가 깍아주지 않으면 먹어본 역사가 없는 인간이 조석희였다. 

고생이란 단어와 정반대의 인생을 살고 있던 그가 이런곳에서 감자를 깎고 있는 것이다. 

"후..."

조석희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칼을 집어 들었다.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고 잇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보다 다루는게 익숙해졌지만 가끔은 헛손질을 해

손을 베었다. 손에 생기는 상처는 참을만 햇다. 그러나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두통은 뭘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전에도 두통이 있긴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니 불면증도 심해졌다. 하루에 30분도 자질 못했다.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정도였다. 그 와중에 혹시 상원에게 연락이 올까 싶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도 

못했다. 

"미쳤군 진짜"

그렇게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까짓 사내 새끼 하나 때문에 이러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성질 같아선 이상원이건 감자건 신경 끊어버리고 싶은데

그게 가능하지 않으니 문제였다. 

이젠 오기가 발동했다. 상원을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믿음까지 생겨났다.

"어디 두고 보자고 선배"

조석희는 이를 갈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시발"

점심상을 보자마자 승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일식점 직원전체의 낯빛도 함께 어두워졌다. 며칠간의 식사를 생각하면 시발이란 단어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이게 뭐야!! 감자볶음에 감자전에 감자 국에  밥에 감자는 왜 또 넣고 지었어!! 누구야!!"

"나다"

주방장이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주방장님 여기가 감자농장도 아니고 이게 뭐예요, 하다못해 생선조가리 하나라도 얹어 주시지"

입이 댓발 나온 한승완의 반찬투정에 근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내가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면 동정심을 보이겠다면 ......한승완 너"

주방장이 스윽하고 시선을 돌리며 승완을 노려보았따. 승완이 쳇 하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 감자 전쟁 닷새째.

그 새끼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승완은 새벽에 나와 감시를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조석희는 말그대로 새벽같이 나와 특유의 싸가지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감자를 벗길 뿐이었다. 이틀이면 나가 떨어질 거라고 예상했던 조석희는 포기하지 않았고 승완은 계속 주문량을 늘려갔다. 그렇게 야채 저장고에 감자만 쌓여갈 뿐 사태는 

진전이 없었다. 

튀기고 볶고  삶고 으깨고  할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손님들께 서비스로 제공하고 직원들이 먹고 있었지만 도저히 쌓여가는 양을 따라갈 수 없었다. 

"너 내일도 감자주문 저따위로 해놓으면 진짜 가만 안둔다"

"아우 하루만요 하루만 더 하면 되요 딱 하루만"

"그놈의 하루 타령을 대체 며칠째 하는거야. 만에 하나 내일 감자가 더 늘어나 있으면 그 감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관해뒀다가 너만 먹일거다"

너만 먹일거라는 말을 듣자 승완이 헛구역질을 했다. 닷새 내내 감자만 먹엇다. 처음엔 집으로 가져가서 야식으로 삶아먹기도 했는데 지금은 보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승완은 자신이 감자를 혐오하게 되는 날이 올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하루만 더 버티면 된다고요 다들 힘좀 내요"

"....진짜 못 먹어 이젠"

"그러는 넌 왜 안먹냐. 막내"

"엇흠 감자가 몸에 얼마나 좋은데 다들 안먹고 엇흠"

승완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모두들 속으로 꼴통 금발새끼 라며 그를 욕했다.  그리고 핏줄을 끔직하게 생각하는 사장의 가문을 욕했다. 

"아무튼 난 경고했다. 내일도 그따위로 주문 넣으면 널 감자랑 같이 파묻어 버릴테니 그럴줄 알아"

주방장의 힘은 가게에서 막강했다. 요리솜씨가 워낙 뛰어나 그를 스카웃 해가려는 사람이 줄을 슬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장도 함부로 못할 정도였다. 

"알겠어요 알았어 방법을 모색해볼게요"

손톱을 물어뜯으며 눈을 희번덕 거리는 한승완의 모습을 보며 주방장과 직원들은 모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주문서 인데 다시한번 확인해주면 안될까?"

감자를 가져온 도매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전표를 승완의 앞으로 내밀었다. 승완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맞는데 왜 자꾸 확인을 하냐고 되물었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한꺼번에 감자를 1톤이나 시키는 경우는 드물어서....여긴 일식집이고"

시장에서 채소 도매를 10년이 넘게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주문은 처음이라 감자를 배달하러 사장이 직접 차를 몰고 온 것이다. 

"제가 주문한거 맞아요. 저기에 쌓아주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잔금은 바로 현금으로 드릴거고요"

"...그래요 그럼"

한승완은 자신의 돈이 주방 창고에서 척척 쌓이는 모습을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마지막 감자상자를 쌓아두고 온 아저씨에게 잔금을 치루고 있을무렵, 멀리서 조석희가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둘은 인사도 하지 않았다. 

조석희가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감자상자를 힐긋 바라보고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앞에 선 한승완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봐라봐라 나의 감자를 그리고 어서 패배를 인정해라. 

"이거 다 하면 되는겁니까"

"뭐?"

"오늘은 이것만 다 하면 되는 거냐고요"

"...다 할 생각이냐"

조석희는 대답하지 않고 주방안쪽으로 가 세워져 있던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았다.  한승완도 의자를 가지고와 그 옆에 앉았다. 이 많은 감자를 다 벗겨낼 것인지 자신의 눈으로 

감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석희는 재킷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손바닥에 알약을 덜어냈다.  의학상식이라곤 배아플땐 소화제 머리아플땐 두통약 뿐인 한승완 눈에도 한번에 먹기엔 많은 양의 약이었다. 

조석희는 손바닥위에 놓인 약을 입안에 털어넣고 물도 마시지 않고 씹어 넘겼다. 

"그건 뭐냐. 마약 같은건 아니겠지"

조석희는 양키놈이니까 마약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드는 순간 승완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조석희는 들고 잇던 약병을 던졌다. 약병을 들고 영어로 적힌 부분을 한참 보던 한승완은 짜증을 냈다 .

"시발 나더러 먹어보라는 말이냐?"

영어라면 소문자 a와 b의 구분조차 어려운 그에겐   약통을보고 약을 알아맞추라는 건 가혹한 처사였다

조석희는 약통을 빼앗으며 차게 말했다. 

"진통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수면제로 사용하는 약이지만"

"수면제? 수면제를 왜 먹냐? 오히려 잠 깨는 약을 먹어야 하는거 아냐?"

1톤이나 되는 감자를 받기위해 그는 새벽 3시에 나와야 했다.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승완은 지금도 눈이 가물가물했다. 졸리고 피곤한 것으로 치자면 조석희도 만만치 않을 텐데 

잠을 깨는 약이 아니라 수면제를 먹고 있다니 승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잠을 못자서요"

승완은 그제야 처음으로 조석희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조석희의 얼굴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까칠해보였다. 눈 밑도 시꺼멓고 눈을 충열되어 제 정신이긴 한 걸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잠을 왜?  설마 내가 새벽부너 일 시키고 있다고 시위하는 거라면..."

"원래 불면증입니다"

조석희가 승완의 말을 잘랐다. 

"하루 이틀 못 잔거 갖고 그러는 거냐. 내가 니 나이때는 사흘 밤낮을 새워도...."

"일주일쨉니다"

"뭐?"

"잠 못 잔지 일주일째라고요 됐습니까"

잠을 못자면 두통이 심해진다.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정도로. 거기에 감자깍기 노동까지 하고 있으니 컨디션은 날이 갈수록 바닥을 쳤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상원의 부재였다. 

"구라까고 있네 사람이 어떻게 일주일동안 잠을 안자 그랬으면 벌써 죽었지"

"....."

조석희는 대단한 수면장애였기 때문에 미국에서 내노라 하는 의사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태어나면서 갖게 된 불면증은 저주 받은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주변에서 나돌 정도였다. 

그는 상원을 만나 숙면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게 되었다.

상원의 목덜미나 귓볼 허벅지 근처등 체온이 높은 부위에서 맡을 수 있는 달콤한 체향이 자신을 감싸 안으면 조석희는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어떤 기분 나쁜일이 생겨도 

상원을 안고 있기만 하면 평안함이 온몬으로 번졌다. 

조서희에게 이상원이란 존재는 무엇보다 필요한 존재였다. 

아니 필요를 넘어서 필수적인 존재였다. 

"야야 너  진짜 일주일 동안 잠 안자고 여기서 감자 까고 있는거냐 시발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해"

승완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같잖은 동정심을 보이는 건가 싶어 조석희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남의 일에 신경 끄시죠"

"아니 그게 아니고 괜히 우리 가게에서 너 죽었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손님들이 오겠냐고 사람 뒈진 가게에 누가 좋다고 음식을 먹으러 와 안그래?"

"....."

"죽으려면 꼭 네집에 가서 죽어라. 니네 동네 집값도 떨어트릴겸"

한승완이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상원선배 찾기전엔 죽는일 없을 겁니다"

남의 가게 주방에 앉아 감자를 벗기며 던진 말에 박력이라던가 비장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남자가 적어도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 대체 상원이를 왜 찾는 거냐. 싸워서 너 싫다고 나간 애를 "

승완도 자세히 상황을 아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원이 퉁퉁 부운 눈을 하고 찾아와 자신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을때 둘 사이에 큰일이 있음을 짐작했다. 한승완은 자세한 

내막도 돈의  사용처도 묻지 않고 상원에게 돈을 바로 내주었다. 무슨일이 있어도 반드시 갚겠다는 친구의 말은 그자리에 잊어버렸다. 

어차피 받을 생각으로 빌려준 돈이 아니었다. 

조석희가 자신을 찾아와 상원을 만나게 해달라고 지랄을 할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다. 물론 그 지랄이 이런 감자전쟁으로 번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너 설마... 상원이 찾아서 죽여 버리려고..."

"선배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조석희가 섬뜩한 문장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비쳤다. 그리고 잠시 뒤 덧붙여 말했다. 

"선배 찾는 이유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그 지랄을 하고 있냐?"

"이유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찾을 겁니다"

자신의 기준에서 정상 범위를 한참 벗어난 녀석을 보며 한승완은 미친놈하고 중얼거렸다. 

"꼭 해야 할 말 있다며 설마 그것도 모르고 있는건 아니겠지"

"일단 만난 다음에 생각하면 됩니다"

할말은 정말 많았다. 

왜 그렇게 자신을 쉽게 떠난 것인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두번이나 떠났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인지 . 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 할말이 넘쳐났다. 이후의 일은 모두 만나고 난 다음에 하면 된다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

잠시 딴 생각을 한 탓인지 칼날이 조석희의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 크게 베이지 않았지만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상처가 났다. 조석희는 조그맣게 욕을 내뱉으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대충 손에 감았다. 그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에 꽤 아물지 않은 상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승완은 입을 다물고 조석희를 지켜봤다. 초췌한 꼬라지를 하고 있으면서도 제 잘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조석희는 여전히 싫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 

"야 그만해"

".....?"

"그만하고 가"

"무슨 소리 하는겁니까"

만약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면 조석희는 들고 있던 칼을 감자의 껍질이 아닌 한승완의 머리가죽을 벗기는데 사용하리라고 맹세했다. 

"그만 가보라고 상원이 만나려면 지금 가야 출발시간에 맞출수 있을거다. 8시에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한승완은 며칠전에 동석이 전화로 했던 말이 이것이구나 싶었다. 조석희가 상원이 어디있는지 직접 찾게 하는 것보다 우리가 알려주는 게 나을거라고. 그러니 적당히 하고 상원의 

연락처를 알려주라던 그 말에 승완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석의 말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출발시간? 무슨 출발....설마"

"저 앞으로 가면 공황으로 가는 버스가 30분마다 한대씩....쌍"

승완은 자신의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섬뜩한 금속소리에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목덜미 부근이 뜨근한 것을봐서 귀옆이 찢어진게 분명했다.

"야 이 개새끼야. 알려줘도 지랄이야. 빌어먹을 쌍놈새끼"

조석희가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5분만 늦게 알려줬으면 선배 귀가 아니라 목을 찢어났을 겁니다"

"이런!! 씨발 !! 개늠이"

한승완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석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털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야! 이 좆서퀴! 개새끼야!  너 상원이 한테 손끝하나 대기만 해봐라 내가 너 죽인다"

나쁜 놈에게 자신의 딸을 넘겨줘버린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 담긴 외침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선배 죽으면 저도 죽으니까 전 이제 상원선배 없으면 못 살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난 뒤 조석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혼자 남겨진 승완은 한손으로 피가 흐르는 귀를 붙잡고 입맛을 다셨다. 

방금 전 조석희가 던진 말에서 떨쳐내기 힘든 불길함을 읽은 그였다. 

그사람이 없으면 나는 못산다. 그 사람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라니 어디 유행가에서나 쓰일 법한 말인데도 대단히 기분 나쁘게 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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