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지금 들으신 그대로예요"
밉살스럽게 지껄이며 빈정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투였다. 그렇기에 상원은 더더욱 의심스런 눈초리로 상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제 그렇게 석희를 방밖으로 내쫓긴 했지만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연애를 하면 한없이 상대에게 너그러워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치졸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들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이 딱 그런 때였다.
자신은 상대에게 차갑게 대해도 상대방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할 얘기가 있으니 소파에 앉으라고 말을 할때까지도 상원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선배 이번 주말에 시간있어요?
하고 물을때도 기분전환이나 하러 가지는 건가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이런 전개라니.
"이번 주말에 같이 엠티가요"
"엠티라니 무슨 엠티?"
"저희 과에서 가는거요, 같이 가요"
종전과 같은 말을 듣고도 상원은 이해가 되지 않아 얼굴을 찡그렸다.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상원의 이마를 누르며 인상쓰지마 라고 가볍게 타박햇다.
"석희야 너희과 엠티를 지금 나한테 가자고?"
"네"
",,,있잖아. 네가 자란 나라에선 어떨지 몰라도"
미국이나 영국의 관습따위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상원은 문화차이로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려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가 다르면 엠티에 참여하지 않거든 조인 그러니까 과끼리 같이 가거나 할 수는 있는데 개인적으로 한명만 다른 과에 참석하거나
하지는 않아"
이쯤되면 훌륭한 설명이었겠지.
"알아요"
"....."
아니 애초에 설명이 필요없었구나.
"그래서 제가 과대한테 부탁했어요"
"그게 가능.... 아니 그런 부탁을 왜해?"
"같이가요 엠티. 선배 그런거 안 가봤을거 아냐"
한숨이 나왔다. 이놈의 왕따설은 언제쯤 사그러들것인가.
"우리과 엠티 갈게"
"가도 누가 놀아주기나 한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의대 훈남과 경대 왕자님을 노리는 여학생이 상원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을텐데, 그러나 구태여 그런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어쩐지 그 얘기를 했다간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됐어 안가면 안갔지 왜 내가 너희 과 엠티에 가"
"선배 사람 친구 사귀고 싶은 거잖아"
"뭐?"
"사람 친구 말이에요"
"...."
"이번에 가서 만들어요 그러면 되잖아"
상원은 이 애가 교직쪽에 뜻을 두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반에서 왕따가 발생한다면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이들 몇명
불러다 지금부터 친구라하고 명령을 내리고도 남았겠지. 번호를 매겨 제비뽑기를 한 다음 짝을 지어 친구를 만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잖아. 게다가 난 너희 과도 아니고...."
이성적인 설득을 해보려 했다. 물론 조석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가 만들어 줄게요 선배"
마치 조립 부품을 사와서 로봇을 만들어 주겠다는 어투였다. 언제나 그런식이었겠지. 그가 가진 외모와 권력 재능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자신의
주변에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랏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그러니까 화는 그만 내요. 나 주말에 약속도 깨고 가주는 거라고"
그의 긴 팔이 상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것이 조석희 나름의 애교이고 신경 써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를 내려다보며
상원은 복잡 미묘한 심정이었다. 그냥 넘어가주자니 뽀순 멍 사건이 너무 컸고 그렇다고 계속 화를 내자니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이 남자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먼저 반한 사람이 죄였다. 이말이 요즘 상원에게 가슴속에 박히다 못해 뼈에 사무치고 피를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내죄가 크다"
조용한 중얼거림에 조석희가 고개를 들어 네? 하고 되묻는다. 미간을 찌푸린 그 얼굴조차 상원에겐 장인이 조각해 놓은 작품처럼 보였다.
업보다. 업보.
전생에 난 얘를 도살하고 그 집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현세에서는 보듬어 주고 너른 마음으로 이해를 해줘야 해.
상원은 손을 들어 조석희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업보야 업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상원의 입가에 씁쓸한 중얼거림이 머물렀다. 관광버스를 빌려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펜션으로 향하는 길에서 상원은
두통을 느꼈다. 다른 과의 엠티에 참여한 것도 부담스러운데 조석희가 자신의 선배- 친구도 아닌 무려 같은 학번인 선배! - 라고 상원을 소개하자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던진 것이다. 이후 쏟아지는 관심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원체 이런저런 불운한 사고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하긴 했지만 시선을 받는것과 관심을 받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여학생들의 접근이야 그렇다 쳐도 남학생들까지 눈을 빛내며 대체 둘이 어떻게 하다 친해진 것이냐는 질문을 해올 줄 몰랐건만,
"이것 좀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
상원은 정확히 여섯번째 받고 있는 캔커피를 받아들이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커피 캔을 가방안에 넣으려고 지퍼를 열었지만 이미 들어찬 과자로 인해 넣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마실래?":
상원이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석희에게 커피 캔을 내밀며 권했다. 조석희가 커피캔을 슬쩍 보았다가 도로 눈을 감았다. 상원은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저 왕자님이 원두로 내린 커피도 아닌 커피캔을 마실리 없는 것이다.
캔커피까지 넣으면 가방 지퍼가 닫힐 것 같지 않아 상원은 뚜껑을 따 커피를 마셨다. 그리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로 벌써 두번재 커피 캔을 비우는 중이었다.
"으..."
매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상원은 빈 캔을 좌석 앞 그물 안에 넣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다행히 아무런 사고 없이 평탄햇다.
상원이 커피를 들이켜는 것을 본 여학생이 자신의 커피를 또 그에게 선물한 것을 제외하면,
그 모습을 본 조석희는 그것봐, 라고 조금은 으스대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친구 만들 수 있잖아요"
"아니 이건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미보다 너때문에...."
상원은 말을 맺지 않았다.조석희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득의만면한 미소에는 오만함이 듬뿍 묻어났다. 내가 손댔으니 당연히 당신 같은 사람도
친구가 생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 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상원은 속으로 아이고 하며 한탄했다. 자신이 정말 전생에 큰 죄를 지은 게 분명하구나. 후생을 위해서는 현세에 조석희에게 잘 대해줘서 선업을 쌓아야 겠다.
"주세요"
"응?"
조석희가 턱짓으로 상원이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상원이 놀란 눈으로 이거? 하고 되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상원의 손에서 가방을 뺏아듯 건네받아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놓았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조석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원은 스스로의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호리호리한 편이긴 하지만 상원은 키가 180에 가까운 성인 남자였다. 그런 자신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대신 들어주는 것이 얼토당토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기뼜다. 석희가 저런식으로 자신을 배려해주는 행동을 보이면 남자주제에 소녀와 같은 감성으로 다시 한번 반하게 되는 것이다.
조석희가 뒤쳐져 있던 상원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상원이 정신을 차렸을때 여학생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기울었다.
"선배 빨리 오세요 피곤하실 텐데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답지 않은 다정한 발언에 상원의 뺨이 훅 달아올랐다. 그것은 상원의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이 단번에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첫 인상과 달리 어딘지 부족하게 느껴지는 소년다운 매력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상원에게 시선이 쏠렸다. 상원은 허둥지둥 조석희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나자 조석희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어라 비오네 오늘 비온다는 얘기 없었는데"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조석희의 동기가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한마디 했다. 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여행을 동석할때마다 비가 오고 자잘한 사고가
생겨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은 늘상 있어 왔다. 이전에 수학여행을 가다 버스가 고장나 조석희와 도중에 내린 적도 있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에도 콘도에 도착하자 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상원은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다.
"선발대 애들이 바비큐 파티 준비해놨다던데 가서 치워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게 아 짜증나게 비가 갑자기 쏟아지냐"
상원이 얼굴색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던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튕겼다.
"선배 신이야?"
"어?"
"자기 마음대로 비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정도면 자의식 과잉인데요"
조석희는 한국어 발음은 서툰데 저런 식의 어려운 어휘를 사용하곤 했다. 상원은 그 캡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캡을 마냥 좋다고 해실 댈
상황이 아니었다.
"자의식 과잉이라니"
"선배 때문에 비 온다고 생각하면 그게 자의식 과잉이라고"
"....그래"
참 그다운 위로방식이었다. 차갑고 쌀쌀맞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한마다. 얼음위에 잠시 내리쬐는 햇볕처럼 미약한 따스함이었지만 상원은 거기에서
위안을 찾았다.
"조석희 지금 나올 수 있냐"
버스 안에서 자신을 과대라고 소개한 키 큰 남학생이 문앞에서 소리쳤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나도 가서 도와줄게"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일손이 필요한 모양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혼자 방에 있기도 뻘쭘하고 석희가 비를 맞으며 일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됐어 쉬어요"
조석희가 지나가면서 손등으로 상원의 뺨을 툭 쳤다. 방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모두 방을 나간것을 확인한 뒤에야 상원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아, 어쩌면좋아. 이렇게 속절없이 좋아만 해도 되는 것일까. 이러다 종래엔 미쳐버려서 조석희의 스토커가 되어버리겠지. 그러면 안되는데 버림받는다
해도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텐데 , 그래야 마지막 기억이라도 좋게 남을 텐데.
상원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 즈음 이었다.
"예 들어오세요"
"...어 저기"
버스에서 봤던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상원은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세요?"
"다들 나갔어요?"
"비와서 뭐 치우러 가야 한다고 나갔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원은 미안함을 느꼈다. 자의식 과잉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자신이 이곳에 따라와서 아무래도 하늘이 노해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언제쯤 오려나"
여학생의 혼잣말을 들으며 상원은 죄책감이 한층 더해졌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그냥 같이 게임이나 하자고 온건데...."
"그럼 제가 같이 해드릴까요?"
평소였으면 숫기 없는 상원으로서 입 밖에 내지 못할 말이었다. 겉다리로 따라온 엠티에 비까지 내려 여학생들이 놀 상대가 없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이라
생각한 그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게다가 조석희가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고 데려온 것이 아닌가.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어? 진짜요? 그럼 그러실래요?"
"예 같이 해드릴게요 게임"
두 손을 모으고 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거 해보셨어요?"
자신의 불운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며 지내온 남중, 남고 6년의 세월이었다.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그에겐 낯설기만 한 게임 이름이 적힌 상자였다.
"설명해주세요 한번 해볼게요"
상원은 더없이 진지한 자세로 여학생에게서 게임의 법칙을 들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이해력이 좋은 그는 시범 게임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규칙을
외웠다.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