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38화 (28/45)

"그만둬요"

"...응?"

"그만두라고요"

3번의 연이은 사정으로 녹초가 된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려고 머리를 굴려보았다. ....답이 안나오는 인간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상원은 혼자 고민하다 오답을 내느니 솔직하게 묻는것이 낫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거 그만두시라고요"

"..."

침묵하는 상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조석희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선배가 쓸쓸해할까봐 부르라고 한건데 그냥 그만둬요"

"그래...생각해준건 고마운데"

어쩐지 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당신을 위해 참겠다는둥, 친구를 집으로 불러와도 된다는 둥, 그런말을 들었을때 감동보다는 두려움이 우선이었다. 

대체 얘가 왜이렇게 내게 잘해주는걸까. 죽기전에 사람이 변한다던데, 저러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님 헤어지기 전의 친절이라던가. 

"그 꼴  못 보겠어. 기분 더럽다고"

"...."

그나마 지금은 원래의 싸가지 상실 버전이라 그의 꿍꿍이를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게 불행중 다행이었다. 

"그냥 다른 거랑 놀아요"

원체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조석희는 사람을 사물화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강했다. 

"다른거라니... 친구들 말고 누구랑 만나라고"

안그래도 친구들에게 이 인간과 끝내지 않으면 절교를 하겠다는 선언을 듣고 온 뒤었다. 그런데 이쪽에서도 절교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거"

"...."

"내가 해줄게 다른거 아무트느 그 인간들 만나지 마요. 진짜 싫으니까"

...그 인간들도 너 싫데.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키며 상원은 몸을 반대로 돌렸다. 조석희 등 뒤에서 끌어 안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하고 왔어요"

"별 말 안했어"

정말 별다른 말이 오간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있다가 왔어요"

잠시 친구들을 만나고 오겠다고 하고 나간 상원이 돌아오지 않자 조석희는 처음에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후에 고개를 든 감정은 불안이었다. 

응급실에서 김이경이 한말이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굴길레 저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기절까지 하는거냐. 숨통을 쥐고 아주 사람을 잡아 족치는구나. 그런식으로 해라. 선배가 너한테 질려서 

나가 떨어지면 내가 그때 바로 낚아채 버릴 테니까. 

응급실 안이니 신경쓰지말고 반 죽여 놔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들었을때 창백하게 질린 상원과 눈이 마주쳤다  조석희는 자신을 보며 이죽거리고 

있는 김이경에게 다시한번 그런소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마디 해주었다. 

조석희는 자신의 품에 안겨져 있는 상원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요즘따라 골격이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왕따까지 당한다는 말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럴수도 잇고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빌미로 상원을 자신의 옆에 묶어 둘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숨통은 좀 틔어주자 싶어 기분은 더럽더라도 선배들 그 밥맛없는 한승완까지 포함해서 초대를 허락한 것이다. 

나름 배려심을 발휘해 저녁늦게 샌드위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상원은 술이 취해 자고 있고 윤대진은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양 포르노를 생중계하고 있었으며 

김동석과 한승완은 장식장의 술까지 꺼내 마시고 있었다. 

없는 관대함을 긁어모아 그것까지는 참아 넘긴다 하더라도  한승완이 자기가 뭐라고 상원을 싸고 도는 꼴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상원이 한승완의 팔에 매달리는 모습을 본 순간 머리가 아플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상식선에서 상원에 대한 빌어먹을 승완의 감정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섹슈얼적인 감정이 섞여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친구를 위해서 사람에게 칼을 휘두른다는 것은 상식선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니까.

지독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원에 대한 주변의 속절없는 비호도  그걸 허용하는 상원의 우유부단함도. 

"선배"

"응"

상원이 기계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속없어 보이고 일편단심인 사람이지만 돌아설 때는 가차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이미 한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강단있는 성격이다. 이상원은.

"선배"

여전히 상원은 몸을 돌리지 않고 왜 하고 대답한다.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나갔으면 그나마 불안이 덜 했을텐데 급히 나가느라 손에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들어와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방문을 열자 조석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구태여 스트레스를 받게 하기 싫어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침대에 기대어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스트레스를 받건말건  저 인간이 어디에도 가지 않고 이곳에 있을거란 확신이 필요했다. 조석희는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던지고 상원의 방에 들어와 

잠들어 있는 그의 속옷을 끌어내리고 다짜고짜 섹스를 시작했다. 

"선배 나랑 살아요"

"어? 무슨 소리야. 살고 있잖아"

갑작스런 발언에 상원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가련한 모습을 보면 측은지심이 들어야 하는데 아래가 바싹 당겨옴을 느꼈다. 

나라는 인간도 어지간 하구나. 

그는 상원의 양팔을 들게 한후 바짝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댔다. 잔인한 욕망을 부추기는 냄새였다. 

조석희가 일어서기 시작한 자신의 사타구니를 상원의 몸에 비비면서 한껏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곤란한 듯 상원이 이마를 찡그렸지만 별다른 거절의 말은 

하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냥 가둬놓고 학교에도 보내고 싶지않았다.  조석희에게도 티끌만한 인간성이 존재하기에 상원이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자신하고만 밥을 먹고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 썩 나쁜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아 음식하나 잘못먹었다고 기절할 정도라면 그냥 두고 볼 문제가 아니었다. 

조석희는 자신의 팔안에 안겨있는 상대를 위해 차선책을 강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기주의의 절정체이자 안하무인의 완성판인 조석희가 아니면 말고, 라는 제멋대로의 신념을 누르게 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책상에 앉아 노트정리를 하고 있던 상원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무언가에 눈을 부릅 떴다. 

"받으세요"

",,,어?"

"선배 거요"

조석희가 다시 상원에게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상원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긴 했지만 대체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가늠도 하지 못했다. 

"대체 이게 웬 강아지야"

하얀 털뭉치 같은 강아지였다. 강아지라고 부르기엔 몸집이 좀 크긴 했지만 일단은 개수준으로는 온전히 성장하지 못한 생명체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강아지를 안고 있던 상원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키우시라고요 이거면 심심하지 않을거예요"

"....."

"선배 심리상태에 도움도 되고"

"......아하하"

강아지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 우울증 환자나 자폐아 아동에게 치료의 일환으로 사용된다는 상식정도는 상원도 알고 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은 자신이 대체 어느 쪽에 속하는지여부였다. 

"앞으로는 얘한테 정붙이세요"

아무래도 조석희는 이 강아지 한마리가 상원의 친구들을 대신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모양이었다. 

아아, 석희야 대체 넌 심성이 왜 그모양인거니.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머릿속이기에 친구 대신 개를 키우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니.

"잘 키우세요"

"나 개 키워본 적 없는데"

상원이 조심스럽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어렸을 적에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샀다가 처음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 이후에 -그것도 자연사도

아닌 병아리의 탈출로 인한 교통사고사였다.- 상원은 다시는 애완동물을 키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무언가에 남다른 애정을 주었다가 죽음으로 그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걸 메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일찍 배운 것이다.

"잘됐네 이번에 키워보면 되잖아"

조석희가 개털이 붙은 재킷을 벗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넌 개 키워봤어?"

"네 몇 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비인간적인 평소의 행각을 비추어볼때, 애완동물을 키운다든가 하는 과거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진짜? 우와 안 믿기는데"

상원이 자신의 품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강아지의 털을 손바닥으로 쓸어주면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조석희가 개를 몇 번 키워봤다하니 아까보다는 

불안감이 많이 줄어들어싿. 

"무슨 종으로 키웠어?"

"개요"

"...그러니까 무슨 종"

"글쎄 잘 모르겠는데 갈색 털이었던가"

이래야 조석희지.

그가 자신외의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 천하의 조석희가 자신을 위해 이런 방법까지 생각해냈다는 것이 어뚱하긴 해도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귀여워요?"

"...?!"

"그 개새끼 귀엽냐고요"

조석희가 손가락으로 상원의 품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강아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신의 생각이 들킨것같아 얼굴을 붉혔던 상원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무, 물론 귀엽지. 찹살떡 같잖아"

하얀 털 때문에 찹살떡 같아 보이는 점도 귀여웠지만 분홍색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고 있는 모습이 흡사 웃는 것 같아 보여서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났다. 

"이름 지어 주세요 선배 개니까"

이미 자신의 개로 낙점이 된 모양이었다. 상원은 눈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쉰후 강아지를 들어올렸다. 

"암컷이야?"

"아니 수컷"

상원이 으음 하고 고민에 빠졌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상희는 어때?"

"설마 선배이름 한글자 제 이름 한글자 따서 개새끼한테 붙이자는건 아니겠죠?"

"아하하하 노, 농담이지. 네 이름을 어떻게 갖다 붙여"

사실 석희를 짝사랑 하던 시절의 상원은 절세의 미녀로 다시 태어나 그와 결혼하게 된다면 자식의 이름은 상희나 석원이로 짓겠다는 즐거운 망상을 

하곤했다. 상원은 다시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아 생각났다."

"뭔데요"

조석희는 자꾸 자신에게 달라붙으려고 앞발을 바둥거리고 있는 강아지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대꾸했다. 

"뽀순 멍"

".... what the fuck...." 

잇새로 나지막하게 터져 나온 욕설에 상원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당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데려온 강아지가 또다른 스트레스거리가 

되면 안되겠다고 조석희는 생각했다.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 그걸로 해요"

"아니 다른걸로..."

"그걸로 해요 뽀순 멍"

조석희는 이백만원 가까이 주고 데려온 개에게 빌어먹을 정도로 촌스런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했다. 

뽀순멍이 조그만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상원의 배에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 귀여운 애교에 넘어간 상원이 어색한 손길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석희의 입가에 근사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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