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내일 수업없죠?"
저녁을 먹던 중 조석희가 물었다. 낮 동안 내 말이 없던 터라 불안하게 그의 눈치만 살피던 상원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림받았던 애완동물이
주인의 손길을 타는 듯한 눈빛으로.
"응 없어"
"그럼 집에서 좀 쉬세요"
"안그래도 그러려고"
중간 리포트 준비도 해야 하고 다음주에 있을 쪽지 시험도 공부해야했다. 상원은 학교 도서관보다는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편을 선호햇다.
"저는 내일 볼일이 있어서 늦어요"
"그렇구나"
그는 요즘따라 가끔 저렇게 볼일을 본다고 하고는 나가곤 했다. 무슨 볼일이냐고 물으려다 상원은 그만두었다. 너무 스토커 같이 보이면 큰일이니까.
"친구들이라도 불러서 노세요"
"응"
무심코 대답을 하던 상원은 응? 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친구들 부르라고요. 선배 친구라고 해봤자 그 사람들 뿐이겠지만"
그 사람들. 이라고 말하는 조석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상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끔뻑 거렸다.
"선배들 불러서 집에서 노시라고요"
"집에서?.... 우리 집으로 가라고?"
샐러드를 자신의 접시로 옮기던 조석희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는 자신의 집에 타인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들과 만날때 가끔 불러들이기도 했지만 그게 반복되다 보면 귀찮은 일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집으로 누군가를 부르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 어떤 여자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친하지 않은 타인이 자신의 공간을 휘젖고 다니는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상원과 함께 살면서 정한 제 1규칙이 사람을 부르지 말것, 이었다.
아들이 사는 집 구경을 하고 싶다는 어머니를 상원이 아직까지 부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어머니가 이곳을 구경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석희는 거기에 관해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다.
그런 그가 친구들을 불러도 된다는 허락을 했는데 상원은 고마워하기는 커녕 그 관대함을 축객령으로 이해한 것이다.
"제가 언제 선배한테 나가라고 했습니까. 여기가 선배 집이지 또 무슨 집이 있어요"
"그렇지. 그렇긴 한데.... 친구들 부르라고?"
자신이 알아들은 것이 맞는지 상원은 다시금 확인했다. 이런것은 삼세번을 확인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네"
"...고등학교 친구?"
상원의 고등학교 친구라면 6반 아이들밖에 없었다. 학생회 후배나 선배 중에도 간간히 연락을 하는 애들은 있었지만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상대가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네"
"동석이나 대진이가 오면..... 승완이도 올거야"
승완의 이름이 상원의 입에서 나오자 조석희가 잠시 인상을 구겼다. 이전에 있었던 일때문에 두 사람은 대놓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상원은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승완의 앞에서는 석희의 이름을 석희의 앞에서는 승완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죠 저 오기 전에만 내보내세요"
"진짜?"
"네"
답지 않는 그의 관대함에 상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체 쟤가 뭘 잘못 먹고 저러는 건가.
"왜? 너 걔들 집으로 오는거 싫어하잖아"
"싫어요"
조석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선배가 좋다면 참아볼까 하고요"
"...어?"
상원은 들고 있던 젖가락을 놓쳤다. 입이 쩍 벌어졌다.
"제가 싫어도 참는다고요. 음식물 보여요 입은 다무세요"
조석희가 쌀쌀맞게 면박을 주자 상원은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싫어도 상대를 위해 참는다니 그건 조석희 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상원은 조석희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뭘봐요"
"..."
평소와 다름없이 끝내주게 잘생기고 끝장나게 싸가지 없는 조석희가 맞느데 대체 왜....
"제 방에는 들어가지 마세요. 저 오기 전에 내보내시고요 그정도만 지켜주시면 되요"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나중에 만나도..."
"만나세요"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권유형의 어미였지만 그속에 담긴 명령의 의미를 상원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집 밖에서 만날게"
사실 아직 친구들에게 조석희와 산다는 말은 하지 않은 그였다. 그저 집에서 나와 산다고만 살짝 흘려놓은 상태였다.
"몸도 아픈 사람이 밖에 왜 싸돌아 다녀요 됐어요"
"..."
"음식준비는 아주머니께 말해놓을게요 올때 선배가 좋아하는 샌드위치 사다줄게요"
"...응 고마워"
찜찜하긴 했지만 일단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조석희가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상원이 식탁앞으로 상반신을 내밀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쪽하고 입 맞추는 소리에 상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식사 끝나시면 후식으로 뭘 준비해드릴까요"
조리대에서 음식을 정리하던 아주머니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가 먹고 싶냐고 조석희가 상원에게 물었다.
상원은 아무거나 다 좋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는 과일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상원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다른 사람 앞에서 키스를 한 부끄러움보다 조석희의 목소리가 세상의 어떤 과일보다 더 향기롭다는 생각이 앞선 것이다.
이러다가 이내 상사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문득 드는 어느날이었다.
집으로 초대했을때 세사람의 반응은 제각각 이었다. 대진은 텔레비전 화면의 인치수를 물은 다음 오케이를 했고 승완은 거기에 술이 있는지 확인했고
동석은 음식이 있으면 가겠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 모두 정오 쯤에 상원이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오기로 약속이 되었다.
옆구리에 세제를 끼고 나타난 승완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괴상한 감탄성을 날렸다.
"흐에엑, 이건 뭐야. 이 집은 대체 뭐야?"
신발을 벗던 대진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집안 내부를 둘러보았고 동석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상원은 승완이 내미는 세제를 받아 들였다.
"이런 걸 왜 사왔어. 괜찮은데"
"집들이 한다는데 당연히 사와야지. 집들이 맞지?'
"하하하 그런가?"
상원은 애매한 대답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가 진짜 네가 사는 하숙집이냐? 집 주인이 누군데 이런데 하숙을 놔? 이런 집에서 살면서 돈이 궁할 리도 없을텐데"
가끔 쓸데없는 부분에서 날카로운 감을 발휘하는 승완이었다.
동석이 상원을 힐끔 쳐다보았다. 눈썹을 찡그린채 어색하게 웃는 친구의 모습에서 진실을 읽어내릴 수 있었다. 집에서 나와 산다고 했을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사실을 눈으로 보게 되니 입맛이 썼다.
"하숙이 아니고 그냥..음..."
"한승완 병신아. 서울대생이니까 나라에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자취하게 해주는 거잖아. 그런 것도 모르냐"
대진이 가방에서 태그도 붙어있지 않은 씨디를 주섬주섬 꺼내며 아는척을 했다.
"오, 그런가. 역시 일류대학생이라 나라에서 지원도 해주는 거야? 존나 장난 아닐세"
"서울대는 역시 다르군"
"...."
듣도 보도 못한 정책론이었다.
"술이다! 술이 잔뜩 있어"
냉장고 문을 연 승완이 신이 나서 외쳤다.
"야아 존니스트 비싼 맥주가 잔뜩 있네. 크어 이건 또 뭐야 와인인가?"
"그거 내 거 아닌데...."
맥주야 상관없지만 와인가격이 어느정도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곤란했다. 평범한 사람과 경제관념이 다른 조석희였지만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특히 한승완이 자신의 와인을 마셔버린 것을 알면 얘기는 달라진다.
"집 주인거야? 조금만 마실게 조금만"
손이 빠른 승완이 잽싸게 글라스에 와인을 부으며 말했다.
"상원아 이거 화면 죽이는데? 장난아니다!"
대진이 자신이 가져온 씨디를 DVD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시킨 모양이었다. 거실안에 간드러지는 여성의 교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동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냉장고를 뒤져 음식을 한아름 안고 소파에 앉아 대진과 함께 동영상을 관람했다. 승완은 연신 괴성을 지르며 이술 저술 맛보았다.
가격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가죽소파에는 음식물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뭔가 말하려던 상원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어차피 말을 한다고 들을 인간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와 놀라고 조석희가 발언한 시점에서 이미 끝난 문제였다. 애당초 무슨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한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나도 이제"
상원은 석희가 평소보다 늦게 오길 바라며 동석의 옆으로 가 앉았다. 승완이 술잔을 쟁반에 담아와 세 사람에게 돌렸다.
"나 저녁에는 일이 좀 있어서 못 마실 것 같아"
상원이 유하게 거절했지만 승완은 코웃음을 쳤다. 저녁에 일이 있는것은 너뿐만이 아니라고 일언지하에 상원의 말을 날려버렸다. 상원은 하는수 없이
술잔을 받아들었다.
"내가 요즘 빠져있는 여배우인데 가슴 열라 빵빵하지 않냐? 내가 점찍으니까 역시 조금 있다 바로 뜨더라고 흐흐"
대진이 화면에서 요염하게 뽐내고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꼭 여기까지 와서 그걸 봐야겠냐. 미친놈아"
"어때 내 완소 영상인데 남의 취미생활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라고 아 시발 존나 꼴린다"
대진이 화면 속에서 뒤엉켜 있는 남녀를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동석이 뒤에서 그런 대진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 갈겼다. 대진이 뒤통수를 붙잡고
동석에게 흰눈을 흘겨 떴다.
"에이 대진이 취미잖아. 남들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닌데 뭘 공공장소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볼걸"
"...저놈은 보고도 남지"
"헉, 설마"
"헤헤, 헤헤헤헤"
대진이 멋쩍은듯 웃으며 그 사실을 시인했다.
"으악 안돼 너 그런거 공공장소에서 보다 잡혀가. 교실에서 보는거와 차원이 다르다고"
상원은 기겁을 했다. 친구의 기괴한 취미를 이해하기까지 쉬운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저마다 특이한 취향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대진을 이해하기로 한 그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걱정마 여자있는데선 안보니까. 그 정도 상식쯤은 있다고 에헴"
"애초에 상식이 있으면 그런건 혼자 있을때 보라고. 이 변태새끼야!"
동석이 구박을 해봐도 대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니네 그 소식 들었냐?"
자신에게 돌려진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 했는지 대진이 대뜸 화제를 돌렸다.
"무슨 소식?"
과자를 통째로 입안에 털어 넣던 동석이 무심한 어조로 대물었다.
"뽀순 퀴 사망소식"
"컥-!"
웬만한 일에는 흥분하는 법이 없는 동석이 과자가 목에 걸려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소리야? 뽀순 퀴가 왜 죽어? 성동이가 금이야 옥이야 키우고 있는거 아니야?"
승완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최성동은 6반의 사육담당이었다. 대진이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말마라. 그새끼가 뽀순 퀴 살라고 목재로 집까지 만들어 줬잖아. 그런데 퀴년이 집에서 탈출해서 바퀴벌레약을 집어 먹었나봐. 쯧쯧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니 좀 짠하지"
"아! 시발 바퀴벌레 키우는 주제에 바퀴벌레 약은 왜 설치해! 왜!"
"애완 바퀴랑 그냥 바퀴랑 같냐. 천지차이지 하, 그나저나 인생허무하군. 뽀순 퀴 3층 집 마련했다고 성동이 싸이에 사진 올라왔던게 어그제 같은데"
"아 기분 진짜 더럽다. 술이나 좀 줘"
"...."
상원은 이들에게 뽀순퀴가 천수를 누리다 가다 못해 최고의 호사를 누리다 갔다는 얘기는 평생 못하겠구나 싶었다. 동석이 가장 속상해하며 술을 언거푸 마셨다.
"그래서 장례는 언제한데?"
"다음주에 모인다던데 다들 갈거지?"
"당연히 가야지. 무슨일이 있어도 다들 와"
승완이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엄숙하게 말했다. 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가도 되려나?"
"그럼 넌 그럼 6반 아니야?"
6반으로서 졸업장을 받지 못한 것이 상원은 이내 맘에 걸렸다. 하지만 6반 졸업생들은 상원을 당연히 자신의 반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답잖은 소리 집어치우고 너도 꼭 와"
"그래 알겠어"
다른 친구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지만 그래도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던 반의 애완곤충의 사망소식에 상원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특히 뽀순퀴는
그에게 이런저런 사연들을 안겨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성동이는 다른 바퀴 분양 받는대?"
"아니 세상에 뽀순 퀴 만한 애는 없다고 다시는 바퀴벌레는 키우지 못할 거래"
"하긴 그렇겠지"
상원이 힘없이 맞장구를 치자 대진이 뭐가 생각났는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넌 뭐가 좋다고 웃고 자빠졌어!"
"상원이도 바퀴벌레 키우고 있잖아"
"뭐? 바퀴벌레? 이 집에 바퀴벌레가 있다고?"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 상원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대진이 손을 흔들며 아니, 하고 말을 잇는다.
"그 바퀴 말고 조석희말야. 빨리 발음하면 서퀴, 바퀴랑 비슷하잖아. 크크크"
"하하하하"
"푸하하하하!"
"사람 이름 갖고 그러지마"
괜스레 얼굴이 빨개진 상원이 친구들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소용이없었다. 특히 한승완은 숨이 멎을 정도로 격렬하게 웃으며 온몸을 떨었다.
"크하하하 서퀴바퀴 으하하하하 서퀴, 바퀴..... 크하하하하 존나 잘 어울려"
"한승완 너도 참..."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는 친구들을 보며 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려봤자 이제 그들 사이에서 조석희는 서퀴바퀴로 불리게 될게 자명했다.
"아 서퀴바퀴 존나 싫어. 보기만 하면 밟아 죽이고 싶어"
"...."
"에이 아무리 그래도 밟아 죽인다가 뭐냐. 알터진다. 그냥 태워 죽여라"
동석까지 거들고 나서자 상원은 옆에 치워주었던 술잔을 들어 조용히 들이켰다. 친구들에게 이 집에서 조석희와 함게 동거중이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가슴이 막막해져왔다. 술이 자신의 시름을 덜어주고 용기를 더해주길 바라며 상원은 언거푸 술잔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