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사건 이후로 과내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경영대의 성격 더러운 킹카와 함께 식사를 하는 이상원.
상원은 요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여학생들이 부쩍 들었음을 느끼는 중이었다. 쉬는 시간에 음료수를 뽑아주며 갑작스럽게 연락처를 묻는 경우나
과제를 위해 같은 조를 하자는 제안이 유독 늘었다. 개중에는 대놓고 조석희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게 대동해 달라는 부탁을 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물론 상원은 알아서 자기 선에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상원오빠. 오늘 점심 어디서 드세요?"
여자들은 뭔가 부탁을 할때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을 상원은 요즘들어 알게 되었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얼굴만 간신히 아는 여학생 무리들이
상원을 둘러쌌다.
"글쎄 뭐 아무데서나 먹을 것 같아"
"저희랑 같이 먹으러 갈래요?"
"미얀 선약이 있어서"
상원은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둘러싼 무리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빠, 오빠랑 매일 점심 드시는 분이 그 경영대 다니시는 분 맞죠?"
"...응"
알면서 뭣하러 물을까.
"같은 고등학교 나오신 거예요?"
"...어"
"오빠하고 많이 친하세요?"
"글쎄, 친하다기 보다...."
사귀는 사이긴 하지만, 친하다고 볼 수는 없다. 상원은 늘 그렇게 믿었다. 만약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조석희란 사람하고는 관계를 유지시킬 자신이 없었다.
"야아, 매일 같이 점심 먹는데 당연히 친하겠지, 그렇죠? 오빠?"
이쪽도 갑자기 오빠타령이었다.
"어, 그, 그냥 뭐"
그런데 분명 이쪽은 재수를 해서 나와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저희랑 같이 가시면 안돼요? 그냥 옆에서 밥만 먹을게요"
"아님 옆에서 있다가 그냥 우연히 동석하는건 어때요?"
"...글쎄"
상원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느쪽이라 할지라도 석희가 반가워 할리는 만무했다. 반가워하기는 커녕 싸늘하게 무시할게 분명했다.
그랬다간 이번에야 말로 진정한 왕따는 맡아놓은 당상이었다.
그때 강의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자욱하게 퍼졌다.
"어, 석희....."
"뭐해요 안 나오고"
평소보다 날이 선 목소리였다. 상원은 서둘러 가방을 매고 자리를 나섰다. 여자 동기들의 원망섞인 시선을 뒤로하는게 쉽지 않았지만 상원에게 최우선은 늘
조석희였다.
복도를 걸어가는 조석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상원은 불안했다. 그는 걸음이 빨랐기 때문에 뒤처지면 어느새 놓쳐버릴 것 같았다.
"배고프다 뭐 먹을까"
상원이 앞서 걷는 조석희의 등에 대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오늘 수업없어요"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후 수업은?"
"휴강 됐어요"
"아, 그렇구나 좋겠다"
"뭐가 좋아요. 휴강됐는데 학교까지 와서 밥 먹고 돌아가잖아. 귀찮게"
".....미안해"
그제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상원은 눈치 채고 얼른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조석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미안 그럼 그냥 오지 말지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혼자 병신처럼 밥 먹는 선배를 두고 나 혼자.... 됐다. 말을 말자"
"...."
미안했다.
밥 먹을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강의실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원은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조석희가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느낌,
돌봐준다는 이 느낌에 중독 되어갔다. 도저히 사실을 밝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뭐 먹고 싶어요"
"응?"
"뭐 먹고 싶냐고 선배"
"그냥 아무거... 헉 아니 김치찌게 먹으러 가자. 김치찌게 오랜만에 그런거 먹고 싶네"
조석희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질색했다. 상원이 파닥거리며 간신히 생각해내는 모습을 보던 조석희가 힐깃 시계를 확인했다.
"선배 공강이 얼마나 있다고 했어요?"
"나? 한시간 정도"
"그럼 집에가서 밥 차려 달라고 하고 한번만 하실래요? 택시로 바래다 줄게"
"안돼! 나, 다음 시간에 퀴즈 있어, 안돼"
공강 시간에 섹스를 했다간 체력저하로 제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을 뿐더러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차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학점과 관련된 퀴즈인데 그걸 백지로 냈다간 전공 교수님께 찍혀 4년 내내 고생할 것이 뻔했다.
"절대 안돼"
이 문제에선 여간해선 양보가 없는 석희였기에 상원은 또 한번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알았어요 그럼 식당으로 가죠"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상원은 상대가 화가 난 것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식당으로 들어서서 음식을 받아 올때까지 조석희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을 보고 상원은 그가 조금 화가 났음을 알아차렸다.
"저기 앉아요"
"응"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상원은 소심하게 그가 가리키는 테이블로 갔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석희는 말이 없었다.
상원은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화났어? 나 때문에 화난거야? 그럼 내가 섹스하자고 하면 화풀거야?....구질구질하다.
밥이나 먹자.
그는 부지런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조석희가 식사하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싶었지만 눈이 마주치면 할 얘기가 없었기에
열심히 밥과 반찬만 퍼먹었다. 옆 테이블이 시끄럽다 했더니 어느새 네 명의 여학생이 앉아있었다.
주변에 늘 무심한 조석희는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식사만 했다. 상원은 무심코 옆을 바라보다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왜"
"아,...아니"
상원의 벌어진 커다란 눈이 어느 방향을 향했는지 조석희는 정확히 짚어냈다. 자신이 앉아있는 방향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여자 무리들이
상원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수업 몇 시에 끝나요?"
"...4시"
"데리러 올게요"
그 한마디에 옆 자리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이 다시 수근대기 시작했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갈게 나 잘가. 집"
말해놓고도 그 유치함에 상원은 머리를 쥐어 뜯고 싶었다. 나 잘가. 집. 이라니 유치원생도 아니고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게다가 옆 과 동기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를 듣고 있는 이 와중에!
"선배 집 잘 오시는거 몰라서 데리러 간다는 거 아닙니다. "
상원은 대답없이 맨밥을 입에 구겨 넣었다. 동기 여자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십중팔구 아는 척을 해올게 분명했다. 아까부터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말을 걸지 못해 안달이 났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데리러 올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그래,., 어"
건성으로 대답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조석희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소리나게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원이 깜짝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밥도 제대로 못먹어, 병신처럼. 그냥 당당하게 먹어요"
"아니 나는 무서운게...."
"애들 때문에 그런거야?"
조석희가 엄지손가락을 옆으로 눕혀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영문을 모르는 과 동기들은 찬스인가 싶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상원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당신들...."
조석희가 긴 다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 순간 상원은 왁, 하고 비명을 질렀다. 상원이 갑자기 기괴한 소리를 내자 조석희가 그쪽으로
언짢은 시선을 돌렸다. 주의를 일단 돌렸는데 어떤 식으로 그를 이자리에서 빼돌려야 할지, 계략에는 재능이 없는 상원으로서는 까막득하기만 했다.
계략을 못 꾸미면 순발력이라도 좋던가. 그렇지 못하거든 거짓말이라도 잘 하든가!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
그러던 상원의 눈이 급작스레 그게 벌어졌다.
"왜 그래요"
마뜩찮은 말투로 조석희가 물었다. 상원은 대답없이 손으로 목을 감싸고 얼굴을 찌푸렸다. 조석희가 한번 더 왜그래, 하고 이유를 다그쳐 물었다.
하얗게 질린 상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편식이 없는 상원이었지만 그가 못먹는 음식이 딱 하나 있었다.
깻잎이 들어간 반찬들이었다. 깻잎 알레르기가 유난히 심해 한입만 먹어도 호흡곤란이 올 정도였따. 옆에 앉은 여학생들이 신경 쓰여 음식에 들어간
깻잎을 보지 못한 것이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왜그래? 선배!!"
부축해주기 위해 조석희가 손을 뻗은 동시에 상원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냉정해 보이던 조석희의 표정에서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켁켁거리며
기침을 하던 상원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조석희가 응급차를 부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희 핸드폰을 옆에 서 있던 학생에게 던졌다.
"선배, 정신차려, 응급차 곧 올거니까! 선배! 정신 좀 차려봐요"
이런저런 사고는 많았어도 튼튼한 체력을 자랑하던 상원이 자신의 앞에서 쓰러지자 조석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구름처럼 몰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누군가 뛰어 들었다.
"나 차 가져왔으니까 내 차 태워"
"됐어 꺼져"
조석희가 김이경의 손을 차갑게 내쳤다.
"선배 병원에 데려다 준 후에 꺼질 테니까 빨리 업기나 해!"
김이경이 소리를 지르자 조석희는 입술을 깨물고 상원을 등에 업었다. 세 사람이 사라지고 난후 남겨진 여학생들은 다음번 발표조는 반드시 이상원과
짜야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했다.
쓸데없는 오해는 갈대밭의 불처럼 번져갔다.
상원의 몸상태와 증상을 살펴본 응급실 의사는 주사를 놓도록 하고 간단한 약을 처방해주었다.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게 나타난 것은 평소보다
면역체계가 약해져서 나타난 증상이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집에서 쉬라는 말을 덧붙였다.
상원은 제 발로 응급실을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자신이 태워다주겠다는 김이경앞에서 조석희는 모범택시를 부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원은 기절한 자신을 태워다 준 고마운 후배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응급실을 나서기 전에 구석에서 조석희와 김이경이 험악한 분위기로 얘기를 나누다가 거의 멱살잡이직전까지 간 것이다.
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냐고 물었다가 조석희가 귀신같은 얼굴로 상원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자신 때문에 석희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아 상원은 마음이 무거웠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조석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상원은 자신이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알레르기로 쓰러진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석희는 입을 꾹 다물고 창 밖만 바라보았다.
상원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라 석희의 눈치만 살폈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면서 상원은 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살기를 띠는 조석희의 눈을 마주하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현관에서 상원은 조석희의 등 뒤에 대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는 싸늘하게 돌아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한층 더 미안해진 상원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입안에 들러붙어 있는 말을 쥐어짜듯 내뱉었다.
미안해, 내 실수였어. 괜히 너까지 사람들 이목 끌게 하고 귀찮게 해서 미안해, 자꾸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것도 미안하다.
신발을 벗던 조석희가 물끄러미 고개 숙인 상원을 내려다보았다. 들어오기나 해요. 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차갑게 들려 상원은 운동화 끈을 한참동안 풀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