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않은 수면을 취하고 난 이후에 눈을 뜨면 사람이 처음으로 갖게 되는 감정은 의아함이다. 상원은 눈을 두어번 껌뻑이고 나서야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왜 더 자지 않고"
"....몇 시야"
"일곱시 조금 안 되었어요"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 조석희는 샤워는 물론이고 옷까지 멀끔히 갖춰 입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의 손에는 영어로 된 경제학 원서까지 들려있었다.
아직도 벌거벗은 채 시트를 몸에 감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진 상원은 다시 잠든 척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잠 깨신거죠? 식사하세요. 차려놨어요"
"어 그래....."
잠든척은 물건너 갔구나.
상원은 몸을 반대편으로 뒤척거리며 대답했다. 시트 아래를 살짝 들추어 보니 이미 석희가 수건으로 깨끗이 몸을 닦아준 모양이었다. 한층 더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물 적셔서 닦아드리긴 했지만 샤워하시고 싶으심 하세요"
조석희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상원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상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한 모양인지 안쪽에서 흘러내리는 느낌조차 없었다.
상원은 후다닥 욕실로 달려가 샤워 콕을 열고 몸을 닦았다. 아무리 상대가 수건에 물을 적셔 닦아준다고 해도 섹스를 하고 난후에는 반드시 샤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조석희는 아까 말한 대로 저녁식사를 준비해놓고 식탁앞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먹지"
"저 외로움 많이 타잖아요. 선배 없이 혼자 밥 먹고 싶지 않아요"
저 능청스런 거짓말에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상원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국이 따끈한 것을 보니 조석희가 다시 데워서 식탁 위에
올려놓은 모양이다.
"괜히 나때문에 배고픈데 기다린거 아니야/"
미안한 마음에 빙 돌려 표현했다. 조석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슬쩍 웃어보이며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이집에 들어온 이후
상원의 체중이 이킬로그램이나 분 이유들이 식탁위에 가지런히 놓혀있었다.
"음식이 너무 많아"
"많으면 버리면 되죠"
"...음식은 버리면 안되는데"
"그렇다고 남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잖아요"
뺭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마리앙투아네트조차 저 조석희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앞으로는 조금만 차리자. 음식 남으면 아까우니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조석희는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응?"
갓지은 윤기나는 쌀밥위에 최고급 명란젓을 얹으며 상원이 대답했다. 젓갈류는 입에 대지도 않는 조석희였지만 상원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받아낸 후론 식탁위에 반드시 젓갈류 찬을 한가지씩은 올리게 했다.
"선배 따돌림 당하는거요"
"컥..."
상원이 밥알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조석희가 의외의 다정함을 발휘해 상원을 감싸 안아 준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끝이 좋았다고 해도 오해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만 했다.
"서, 석희야 그거....."
"잘 됐어요"
"어? 뭐라고?"
상원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됐다고요,. 선배 그렇게 된거"
"...무슨 소리야 그게..."
상원은 이녀석이 혹시 따돌림이나 왕따 라는 단어의 사용을 잘못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외국생활을 오래한 것치고 조석희는 한국어 구사 능력이
매우 휼륭했지만 아주 가끔 생각지도 못하게 잘못 알고 있거나 뜻을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상원은 조심스럽게 잘못된 그의 단어 사용을 고쳐주곤 했다.
"앞으로는 저하고만 식사하고 저하고만 다니시면 되겠네요 흐음 아예 저랑 수업을 들으시는 것은 어때요?"
"...수업 정정 기간 지났다니까. "
"과를 옮기시면 어때요?"
".....석희야"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정말 아무렇지 않게 줄줄이 내뱉는 저 배짱은 세계 최강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저게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미국으로 같이 가요"
"....."
...진심이구나.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는 괜찮아. 따돌림 당하는 것도 아니고"
"뭘 부끄러워 해요 선배처럼 재수가 없는 사람이면 따돌림 당할수도 있죠"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됐어요 아무튼 내일부터 선배 점심시간에 맞춰서 제가 학교 갈게요. 어떻게든 맞춰줄 테니까 선배도 최대한 맞춰봐요"
이건 감동을 해야 할지 절말을 해야 할지 미묘한 순간이었다. 이기주의의 결정체이고 자기중심의 최절정에 서 있는 조석희가 상대방을 위해 저렇게까지
맞춰준다는 이야기는 황송하기 그지없었지만 애인이 다른 사람과 술김에 키스를 했다는 것보다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버리는 데에는 확실히 기분이
착잡했다.
"석희야"
조석희가 내미는 제안이 아무리 달콤하다 할지라도 상원은 진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석희야 나 정말 그런거 아니야. 나 친구들도 많고 동기들하고도 친해"
물잔을 들어올리며 조석희는 그런 상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재수가 없긴해도 ...그런걸로 사람 차별할 만큼 동기들이 나쁜애들도 아니고"
조석희가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 사소한 동작하나에도 타고난 기품이 묻어났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원은 아차 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나 따돌림 당하는거 아니야. 믿어줘"
선배로서 연장자로서 상원은 석희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랬다. 조석희의 눈동자가 상원의 시선을 차갑게 훑어내려갔다. 그리고는 빙긋 웃었다.
"선배, 그래서 내일 점심시간이 몇 시라고?"
조석희는 결국 상원의 시간표를 프린트한다음 매 점심시간마다 중도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수락을 하긴 했지만 상원은 그게 과연
며칠이나 갈까 싶었다. 조석희를 처음봐온 순간부터 그에 관해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생각은.
그놈 참 이기적이다.
이 한줄이었다.
그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법도 없었고 모든것을 일단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조석희란 인간을 너무나 좋아하긴 했지만 가끔그가 보여주는
이기주의의 절정은 섬뜩하기조차 했다. 과연 그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까. 언제까지 옆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수그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그가 너무나도 좋았다. 가끔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귀족적인 외모도 독특한 발음과 목소리도, 짓궃은 장난도, 잠이 모잘랄때
보여주는 잠투정도 온몸으로 끌어안으면 느낄수 있는 단단한 근육도 어떻게 이런 사람을 싫어할 수 잇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
같이 지내는 하루가 쌓이는 만큼 마음은 커져만 갔다.
그런 상원이었지만 조석희가 자신을 위해 희생적으로 뭔가를 해준다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상원은 저 말도 안되는 점심 약속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랬건만.....
"늦었어요"
중도관 앞 벤치에 앉아있던 조석희가 시계를 보며 한마디 했다. 오늘로 일주일재 같이하는 점심식사였다.
"수업이...하아.....늦게 끝나서"
숨이 턱까지 차서 헉헉거리며 상원은 간신히 대답했다. 조석희가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가 일어서자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가요"
"너 지금 밥 먹으러 가면 수업 늦는거 아니야?"
상원역시 조석희의 시간표를 프린트 한 종이를 받아 외우고 있었다. 수요일은 두 사람이 함께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20분이 채 되지 않는데, 교수님께서 10분이나
오버하는 바람에 오늘의 점심은 물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괜찮아요 하루 정도는"
"수업을 안 들어가겠다고 ? 됐어 빨리 들어가"
"수업 한번 안 들어간다고 큰일나는거 아니잖아요. 땡땡이 한두번 쳐봐요?"
"...."
상원이 수업을 빼먹은 것은 거의 아니 전부 조석희와 관련된 일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종종 도서관에서 조석희의 아로마테라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수업을 빼먹곤 했다.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요 배고파"
"응 그래"
어차피 말려봤자 들을 인간도 아니었다. 상원은 그냥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치고 다음 수업이라도 들여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석희의 뒤를 따라 나섰다.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여학생이 조석희를 쳐다보는지 상원은 그수를 이십명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다리도 길고. 어깨도 넓고 얼굴도 잘생기고..... 저기에 성격까지
좋았으면 진짜 큰일났겠지. 성격이 더러워서 정말 다행이야.
"뭐해요 멍하니 서서"
"아, 아니야 가고있어"
길에 멈춰서서 조석희의 뒤태를 감상하던 상원이 허둥지둥 다시 움직였다. 지나가던 사람하고 부딪히자 상원은 자리에 멈춰서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부딪히고 말았다. 조석희가 한숨을 쉬며 상원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목을 움켜줬다.
"거기서 얼마나 사람들한테 고개 숙이고 있을거예요 빨리 가요. 나 배고프다니까"
"아 그래 가자"
상원은 석희가 자신의 손을 놓아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손목을 움켜쥔 채로 그대로 식당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손....."
상원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한마디 했다.
"손이 왜요"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안그래도 눈에 띄는 주제에 남자의 손까지 잡고 걸으니 시선집중의 효과가 두배였다. 상원은 누군가의 시선을 끄는 재주도 취미도 없기에 지금 이 상황이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상관없어요"
"안 돼 상관있어"
상원이 단호하게 말하며 잡혀 있던 손을 잡아 뺐다. 조석희가 잠시 눈을 크게 부릅뜨고 상원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마음대로 해 라는 제스처였다.
조석희가 앞서 걸어가고 상원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잡혔던 손목이 화끈거렸다. 이런 사소한 접촉에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이 고마운 한편, 자신들의 관계가 들통나 상대방에게 피해가 갈까 두렵기도
했다.
2층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테이블에 앉아있자 두 사람의 주변으로 여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조석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비스듬히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집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얼굴을 마주보고 식사를 하니 상원으로서는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경우일 뿐, 석희가 자신에게 질려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상원은 식사시간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애당초 김이경의 심술로 시작된 점심 약속은 이렇게 계속 지속될 수만은 없었다.
"석희야 저기...."
상원이 어렵게 입을 연 순간 주머니에 있던 조석희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가 귀찮다는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요 전화 좀"
"그래 음식 나오면 내가 받아둘게. 통화하고 와"
조석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대며 걸어나갔다. 빠르게 들려오는 영어에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일제히 쏠렸다.
작작 멋있을 것이지.
"에휴...."
절로 나오는 한숨에 시름이 깊어졌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상원의 어깨를 누군가 반갑다는 듯이 툭 치며 아는 척을 해왔다.
"상원이형 여기서 뭐해요?"
"진철이구나"
동기 중에 상원을 형이라 부르는 몇 안되는 녀석이었다. 상원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
"형 왜 이렇게 얼굴보기가 힘들어요 수업만 끝나면 바로 나가버린다면서요 혹시 우리 몰래 CC되신거 아니에요?"
"아니, 그런거 아니야"
"식사 혼자하세요? 저희랑 같이 하실래요? 민환이랑 종근이도 좀 있다 올건데"
"나는....."
일행이 있다는 말로 거절을 하려고 했는데 저 멀리서 민환이 상원과 진철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우 형. 얼굴보기 힘들어요"
"야, 나도 안그래도 그 얘기하고 있었다."
"같이 밥 먹어요. 김교수님 수업 중간 프레젠테이션 하는 거 조 짜셨어요? 저희랑 같이 하실래요?"
상원은 같이 밥 먹자는 것을 우선 거절하고 조는 같이 짜자고 얘기해야 하나 아니면 조를 같이 짜는 것을 수락하고 밥 먹는 것을 거절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일단 중요한 식사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은 순간 상원은 이십년간 숱하게 겪어온 불길한 전조의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
상원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불행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의 머리 위에 은색의 번쩍이는 식판과 정체불명의 시뻘건 국물이 날아들고 있었다.
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상원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것이 그간 그가 몸으로 체득한 필살의 방어수단이었다.
으악, 하는 비명소리보다 뜨근한 국물이 먼저 상원의 상수리 부근을 적셨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테인리스 식판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끄러운 식당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상원이 형 괜찮으세요?"
상원의 근처에 서 있었지만 엎어진 식판의 피해를 한방울도 입지 않은 민환이 놀라서 물었다. 상원은 치켜 들었던 팔을 치우고 감았던 눈을 떴다.
"형 괜찮아요? 옷 다 버렸네"
"어, 나 괜찮은데....."
식판의 주인인 여학생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상원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아, 어떡해"
상원의 점퍼와 니트가 온통 김칫국물과 반찬국물로 얼룩져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굴 한번 찡그리는 법 없이 오히려 울먹이는 여학생을 달래주었다.
"괜찮아요 늘 있는 일인데요 뭘 안다치셨어요?"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세요. 이게 뭐냐 정말"
"형 옷 다버렸잖아요"
화를 낸 건 상원의 곁에 서 있던 같은 과 동기들이었다. 물기가 촉촉하게 맺혀있던 여학생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상원이 황급히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진짜 괜찮아요. 사람이 실수도할 수 있죠. 신경쓰지 말아요"
"형 옷은 어떡해요. 일단 체육관이나 기숙사 같은 데라도 가서 샤워부터 해요"
뒤늦게 달려온 종근이 온갖 반찬을 뒤집어 쓴 상원을 보고 기겁을 했다.
"으악 이게 뭐야 잠깐만 내가 가서 휴지 가져올게"
"여기도 치워야 하는데"
상원이 바닥에 널브러진 반찬들과 스테인리스 식판을 보고 걱정스럽게 한소리했다. 그러자 민환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걸 왜 형이 치워요 . 엎은 사람이 치우든가 해야지"
"어차피 옷도 버렸는데 내가 치우지 뭐"
상원이 바닥에 떨어진 식판을 주워들었다.
"사람이 진짜. 어휴 주세요. 내가 치울 테니까"
민환이 상원의 손에 들려있던 식판을 빼앗듯 건네받았다. 대학에 와서 길에서 넘어지거나 지우개를 잃어버리는 정도의 자잘한 불운은 있었지만 이런 큰 사고는
처음이었기에 상원은 입맛이 썼다. 혹시 자신의 특이 체질이 조석희의 옆에 머물면서 조금쯤은 희석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조석희의 눈에 그 상황이 완벽한 오해의 한 장면으로 비춰진 것으로 상원의 불행은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테이블을 가로 달려오는 기세에 모두들 굳어버리고 말았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조석희는 민환의 손에 들려있던 식판을
빼앗아 그대로 쳐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챈 상원은 필사적으로 그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조석희가 살벌하게 소리쳤다.
"석희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젠장"
조석희가 본인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상원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옷의 안쪽에 적혀있는 브랜드 태그를 보고 주변에 서 있던 몇 명이 기겁을 하며 조석희와 상원을 번갈아 보았다.
"옷버리잖아.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빌어먹을 fuck"
겉옷으로는 수습이 되지 않자 이번에는 입고 있던 셔츠까지 벗어 상원의 얼굴과 옷을 닦아주었다. 옷을 벗을수록 드러나는 그의 근육에 근방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의
얼굴이 조금씩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가 그랬어?"
조석희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어 상원의 옆에 서 있던 민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니야 걔 아니야!"
상원이 기겁을 하며 뜯어 말렸다.
"그럼 너냐!"
"아니야! 걔도 아니야"
"그럼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선배한테 그런겁니까"
잇새로 짓씹듯 내뱉은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본능적으로 어깨를 흠칫 떨었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한대 후려칠 험악한 기세였다.
상원은 이 오해를 빨리 풀어야 겠단 생각에 석희의 팔에 힘껏 매달렸다.
"그런거 아니라니까. 너도 알잖아. 나 원래 재수 없는거"
원래 재수없다는 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뱉은 상원의 기백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원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고였어. 사고 100퍼센트 사고"
통화를 마치고 식당입구에 들어섰을때 조석희 눈에 들어선 것은 반찬 찌꺼기를 뒤집어쓴 상원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조석희는 피가 꺼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 식판을 뒤집어 엎어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모습은 종조오 그의 학교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아무리 돈 많은 자제들이 다니는 상류층 학교라 할지라도 동양인에 대한 멸시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영국으로 학교를 옮겼을때,
그에게 어떤 무리가 시비를 걸면서 식당에서 일부러 음식을 엎어버린 적이 있었다. 물론 조석희는 자신에게 음식을 엎은 녀석의 머리통을 잡고
테이블에 수십차례나 갖다 박는 것으로 존재감을 증명해 이후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런 일들을 겪은 그에게 방금 전의 상황은
완벽하게 따돌림의 현장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멀쩡히 걷던 사람도 내 앞에서는 막 넘어지고 그러잖아. 괜찮아. 가서 씻고 옷 갈아입으면 돼"
자신의 불행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원의 모습에 조석희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못했다.
"누가 그런거예요"
"...고의 아니라니까"
"누가 선배 앞으로 넘어진 거냐고"
조석희가 서늘한 눈을 주변으로 돌렸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한 여학생이 눈에 띄게 얼굴이 하얗게 떠서 몸을 떨었다. 조석희가 들고 있던 식판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저기 ... 죄송"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사과의 말 비슷한 것을 내뱉었다.
"주우세요"
"네?"
"바닥에 흘린거 주워담으라고"
이해하기 힘든 그의 요구에 식판을 들고 있던 여학생의 얼굴이 이번에는 파릇하게 변했다. 상원이 그의 팔을 잡고 그만하라고 나가자고 햇지만 소용없었다.
"빨리 주워 담으시죠"
"아, 예"
여학생이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을 주워 식판위에 담았다. 상원은 그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대체 이 성격더러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상원으로서는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학생이 어느 정도의 음식 잔해를 정리하자 조석희는 식판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 그의 무표정하고 차가운 눈빛에 상원은 본능적으로 사악한 기운을 느끼고
여학생 앞을 막았다.
얼굴위로 뿌려지는 따끈한 느낌에 상원은 방금 전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더불어 승완의 판단도 옳았다.
조석희는 진정, 개새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