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의대 훈남 알아?"
수업이 끝나자마자 매점에서 사온 뺭을 먹고 있던 상원의 귀에 동기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의대 훈남?"
"의대 신입생 중에 엄청 잘생긴 애가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잖아. 키가 거의 190넘고 모델같이 생겨서 애들이 난리던데"
잘생긴 의대라면 몇 명 쯤 있을 법했다. 하지만 키가 190이 넘는다는 조건에 상원은 짐작이 가는 인물이 있어 뺭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게 편치 않았다.
"의대 훈남이 의대 수석으로 들어왔단는 걔 아닌가?"
....김이경 맞구나,
"난 의대 훈남보다 경대 왕자님 쪽이 훨씬 더 취향이던데"
"경대 왕자님? 그건 또 누구야?"
"얘도 키가 190 훌쩍 넘고 진짜 잘생겼대. 나도 지나가면서 저번에 중도 앞에서 한번 봤는데 정말 예술이더라. 왕자님이란 별명이 괜히 붙은게 아니야"
제발 아니길. 그 왕자님이 자신이 모시고 살고 있는 그 왕자님이 아니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는 분명 없었지? 그런 외모라면 분명 소문이 났을 텐데"
단과별로 오리엔테이션을 하더라도 특출 난 외모의 신입생이라면 타대학에도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라면..... 둘이 하루종일
반라로 침대 위에서 삼일간 뒹구는 것으로 대신했던 낯 뜨거운 기억이......
"게다가 경대 왕자님은 혼혈이라는 얘기도 있더라구. 영어 끝내주게 잘 한다고"
"아 맞다. 나도 그 얘기 들었다. 이름이 좀 특이하던데 약간 여자 같은 이름이고, 조성희던가?"
"...조석희"
힘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
"어 ! 맞는데. 그런데 상원오빠가 어떻게 알아?"
"그냥 좀....알아"
"친해요?"
상원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친하다고 하기에 조석희는 아직까지 그 속을 알기 어려운 인간이었고, 그렇다고 부정을 하기엔
오늘 새벽까지 했던 일을 떠올리면 양심상 그럴 수가 없었다.
"친하시면 소개 좀 시켜줘요. 소개팅 자리 마련해주시면 안되요?"
한명이 눈빛을 빛내며 상원을 졸라댔다. 상원은 손사래를 치며 딱 잘라 대답했다.
"안돼 걔 그런거 별로 안 좋아해"
"에이 혹시 알아요? 그런 거 안 좋아하는데 저를 보고 반할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여정이는 신입생 사이에서도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때문에 주가가 높은 아이였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자신감이 얄밉지 않은 성격이기도 했다.
"미안하다. 그런데 진짜 그 정도로 친한게....."
"상원선배"
"....!"
상원은 놀라 들고 있던 뺭을 놓치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상원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 쪽을 향해 움직였다. 조석희는 상원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길고 걸음이 빠른 그는 금세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쟤 맞지? 경대 왕자님!"
"왠일이야 직접보니까 진짜 잘생겼다. 키 190 넘을 것 같은데"
넘어. 넘지. 우리 석희 정확히 193이야. 학생 기록부에서 봤을 때 193이었으니 지금은 더 컸을지 모르겠지만.
"상원오빠 친한거 아니야?"
"아니 그냥 가, 같은 학교를 나와서 그래"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상원은 무릎 위에 떨어진 뺭을 주워 들고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래도 전화번호 정돈 알지 않나? 그냥 전번만 따주시면 안되요?"
"상원오빠 곤란하시면 핸드폰 번호 누구한테 받았는지 말 안할게요 네?"
보기 드문 초특급 연락처가 걸린 문제라 그런지 아이들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상원은 진땀이 흘렀다. 자신이 석희 번호를 알려주어 그가 화를 내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싫었다. 자신과 비교되지 않는 예쁘고 귀여운 여학생이 그의 연락처를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끔찍하게 싫었다.
"미안...그게...."
"어 상원선배"
이번에 그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던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원의 옆에 앉아있던 여학생들이 저마다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선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식사는?"
"...어. 이거"
상원이 먹고 있던 뺭을 들며 대답을 대신했다.
"이런걸로 끼니 떼우지 마세요. 위 버려요"
"다음 수업이 바로 있어서 어쩔 수 없어"
"다음 수업 1시에 시작하죠? 잠깐 시간좀 내주실래요?"
말끝이 내주실래요? 하는 의문형으로 끝났지만 상원은 그 속에 담겨진 명령형을 읽어냈다. 지은 죄가 있는 그로서는 조용히 먹고있던 뺭을 들고 김이경을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인적이 드문 건물 뒤로 가자 김이경이 활짝 웃으며 상원의 손을 맞잡았다.
"선배 인연이긴 한가봐요 이런데서 이렇게 뵙고"
"...그래"
같은 단대가 아님에도 드넓은 학교 안에서 이렇게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그러나 상원에게는 그 인연이 반갑지 않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선배 저한테 빚지신 거 기억하죠?"
"...."
단도직입적인 주제 선정에 상원은 할 말을 잊었다. 착한 후배노릇은 애당초 그만둔 김이경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그래 지킬거야"
"그럼 내일 점심 같이 먹어요"
"뭐? 무슨 점심을 너랑 같이...."
"같은 학교 후배 점심 사주는게 어디가 어때서요"
지극히 평범한 식사약속이었다. 약속을 한 당사자 둘이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가진 것이 걸리돌로 작용했지만 상원은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것이 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다.
"내일 그럼 중도 앞에서 1시에 뵙죠. 저도 이만 수업 가봐야 해서요"
김이경이 사라지고 나자 상원은 힘없이 건물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그의주변에 동기 여학생이 몰려들었다.
"상원오빠 방금그 사람 의대 학생아니야?"
"응 맞아"
"수석으로 들어온 의대 훈남 맞죠?"
"...수석은 맞아"
얼굴이 잘 생긴것에는 동의할 수는 있어도 정신이 훈훈하지 않기에 훈남이란 표현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쟤하고는 어떻게알아요?"
"같은 학교 나왔어"
"상원 오빠네 학교 대체 어딘데 그렇게 물이 좋아요, 장난아니다. 저 사람 연락처는 아세요?"
"이경이?,,,,,응"
"그럼 핸드폰 번호 알려주시 안되나?"
"...그게 좀 그렇다"
이번에는다른의미로 껄끄러웠다. 안 그래도 약점을 잡혀 있는 마당에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김이경은 껄끄러운 인간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중에서 가장 껄끄럽다고 할 수 있었다.
"오빠 미팅한번만 시켜주세요. 상원오빠 후배들로만 미팅자리 만들면 진짜 애들 줄 서겠다."
"오빠도 같이 미팅 나가자"
사실 상원도 과내에서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키도 크고 단정하고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데다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입학 초에 상원은 제법 많은 대시를
받았다. 물론 그때마다 자신은 사귀는 사람있다고 예의바른 태도로 거절했다.
그런 성실성까지 후한 점수를 쳐서 아직까지 상원을 눈여겨 보는 여학우들이 있을 정도였다.
"난 사귀는 사람 있어"
"에이 사귀는 사람 있어도 미팅은 그냥 미팅인데 뭐"
"맞아요 가벼운 미팅인데 한번은 괜찮잖아요"
상원은 의아한듯 눈을 치떴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히든 발언이었다. 상원에게는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적으로 상대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현대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가벼운 관계라는 말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튼 난 그런거 안해. 어 나 수업들어가야 한다. 나중에 다시보자"
상원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그의 등 뒤로 동기 여학생들이 원성어린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수업이 있는 건물로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는 아까 전의 일들이 뒤죽박죽 덩어리져 굴러다녔다.
경영대 왕자님이라니!
조석희의 외모와 성격등을 떠올리면 왕자님이라는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알면 그는 분명 얼굴을 찡그리며 싫어할테지.
.....그에게 비밀이긴 하지만, 상원도 몇 번 석희가 왕자님 같다는 생각을 하곤했다. 그렇지만 그 왕자님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의 곁을 스쳐지나간 수많은 여자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애태웠는데 그걸 다시 하라고 하면 죽었다깨어나도 못할 것 같다.
자신의 독점욕이 이렇게 심한 사람인지, 상원은 요즘들어 처음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남자가 남자를 상대로 독점욕이라니 꼴사납다. 절대로 이런 모습을 조석희가 알게 해선
안된다. 상원은 어깨 위 가방을 다시 고쳐맸다.
"선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나른한 목소리에 상원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눌한 발음으로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음성이 너무나 좋아 슬그머니 웃은 것도 같다.
축축한 입술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선배 침대에 누워서 자"
"...응"
시야가 가물가물했다. 상원은 간신히 눈을떠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책상 위에서 엎드려 자요. 잘 거면 침대에서 자"
"아니야. 페이퍼 쓸게 있어서 조금 더 해야해"
상원이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대답했다. 침착하고 차분한 상원이 가끔 이렇게 어린애같은 행동을 보이면 조석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어 상원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왜?"
"아니요 그냥"
눈이 마주치자 상원은 붉어진 얼굴이 부끄러운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밝은 어조로 말을 건넸다.
"오늘 수업은 잘 들었어?"
"늘 그렇죠 뭐"
멍하게 앉아있는 것 같아도 그가 수업의 모든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원은 고등학교 시절 아는 후배를 통해 들었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그와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너무나 멋진 석희의 모습을 훔쳐보다 수업은 커녕 자신이 그에게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게 분명했다.
"아까 우리과 애들이 너보고 잘생겼대"
상원은 무심코 말하고 아차 싶었다. 가뜩이나ㅏ 자기 잘생긴걸 아는 놈에게 그런 말을 해줄 필요는 없는데
"선배는요?"
"응?"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책상 위에 책을 챙기고 있던 상원의 손이 잠시 멈칫한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난에 휩싸인 상원의 모습이 조석희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어떻게요?"
짓궂었다. 그는 상대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진심으로 즐겼다. 상원은 알면서도 매번 그의 손바닥에서 춤을 출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네가 잘 생겼다고 생각해. 정말 잘 생겼으니까.키고 크고....멋져"
그렇게 말하는 상원의 눈가가 촉촉하게 붉어져 있었다. 연모하는 가수를 바라보는 소녀 팬 같은 눈망울이었다.
"그런데 왜 인사만 하고 말아요? 난 선배가 와서 말 걸 줄 알았는데"
슬쩍 눈인사만 하고 지나간 장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상원은 눈을 깜빡이다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나는 그냥 말걸 새도 없었는데"
"전 선배가 말 걸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상처받았어요"
그런 일로 상처는 커녕 머리카락하나 다치지 않을 인간이었다. 저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체가 글러먹었다는 증거였다.
"선배는 저하고 아는 척 하는게 싫으신가 봐요. 제가 부끄러우세요?"
"아니 절대 그럴리가"
부끄럽기는 커녕 , 이 남자가 내 남자라고 할수만 있다면 전국방송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라들이 조석희에게 눈독을 들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내일 같이 점심 식사나 할까요?"
그나마 두 사람이 시간표 공강이 겹쳐 같이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 내일이었다. 그러나 상원에게는 내일 피할 수 없는 상대와의 점심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내일은.....약속있는데"
누구와의 약속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상원은 자신이 없었다. 한두번은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매번 이렇게 상대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래 좋아 조석희가 묻는다면 솔직하게 대답해버리자.
상원은 단호하게 결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조석희는 너무나도 쉽게 관심을 거두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같이 먹죠"
"응 그래"
조석희가 상원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옷 갈아입으러 가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그는 항상 이런식이었다. 고집을 부리는 법은 있어도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그게 조석희의 방식이었다. 쿨하고 멋있었다. 그런 석희가 너무나도 좋았지만 가끔은 그가 자신을 위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바로 안 잘거면 같이 샤워하면서 섹스하실래요?"
마치 친구에게 맥주 한잔을 권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다. 셔츠 단추를 툭툭 끄르는 그의 우아한 손동작이 상원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문가에 기대 서 있던 조석희가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해보이고 사라졌다. 상원은 홀린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왕자님이 자신을 위해 망가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거라고 상원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