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조석희가 손으로 미간을 누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제 기억이 맞다면 선배 잡아준 놈 김이경 아닌가요?"
"응"
"....지금 이딴걸 좋은 추억이라고 말하는 거고?"
"응"
"어디, 어느 부분이?"
"그날 처음으로 네가 내 이름 불러준 거잖아. 이상원 이라고"
상원의 눈이 한치의 거짓도 가식도 없는 순수한 기쁨으로 반짝였다. 그는 조석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어조로
자신을 불렀지만 일단 짝사랑 상대에게 이름이 불려졌다는게 중요했다.
"선배....정말 저 좋아하셨나 봐요"
"당연하지 얼마나 좋아했는데 학교에서 한번이라도 마주치면 하루가 기분 좋았다고 먼발치에서만 봐도 좋았어"
옛일을 회상하는 상원의 목소리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는건 어때요?"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조석희가 묻자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된 상원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좋아"
"그냥 좋기만 해요?"
"꿈같아.....안 믿겨져"
"이게 사실 선배가 다 상상한거고 꿈이라면 어쩔거예요?"
"절대 안깰거야, 이거 꿈이라면 죽을 때까지 잠만 잘래"
농담 섞인 한마디에도 상원은 금세 울상이 되고 말았다. 조석희는 상원의 뺨에 이를 세워 슬쩍 깨물었다. 저렇게 온몸으로 애정을 표출하면서 정작 이제야
이집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꽤씸하기 짝이 없었다.
"아파"
뺨을 물린 상원이 몸을 뒤로 뺐지만 조석희는 다시 몸을 바싹 붙이며 짖궂게 이곳저곳을 깨물었다.
"아파 석희야"
"참아 봐요"
이곳저곳을 깨물던 움직임은 어느새 달콤한 입맞춤으로 변해 상원의 몸을 들뜨게 만들었다. 촉촉하게 이어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더 좋은건 없어?"
"...응? 뭐가?"
"더 좋은 일들이요 그런거 말고"
상원이 자신때문에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워도 이건 아니었다. 자신이 몰랐던 시절에도 상원은 좋은 추억 하나 정도는 갖길 원했다.
"음, 글쎄 그냥 가끔 복도에서 만나면 니가 묵례하고 지나가는 것도 너무 좋았고, 너희랑 같이 체육관 쓰는날도 너무 좋았고 음, 멀리서 봐도 좋았어"
"그런거 말고 더 없어요?"
"응, 없는데"
"....."
어떻게 그 짝사랑을 2년 가까이 진행시켜 온 것인지 묻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인걸까. 한번 좋아하면 여간해서 질리지 않는 상원의 취향이.
"상원선배"
"응"
"그럼 앞으로 좋은 거 많이 만들어요 나랑"
답지 않은 달콤한 말에 온몸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석희의 가슴께로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상원쪽이 먼저 안기는 것도 요즘에서야
가능해진 일이다. 조석희가 상원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얹고 부드럽게 쓸어내려주었다.
그 다정함에 상원은 겁쟁이가 되어갔다. 그로부터 애정을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지만 그럴수록 그것이 언젠가는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많이 만들어줘 석희야, 사랑해 세상에서 내가 너를 제일 사랑해.... 그러니까 나한테 질리지 말아줘, 제발
입에 담지 못한 말들이 쌓여갈 수록 마음에 무게가 더해졌다.
이 마음을 들키는 날에는 분명 상대가 부담스러워 자신을 외면할 것이라 생각하며 상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고요의 사이로 두 사람의 숨소리가 맞물리는 듯 잦아들었다.
조석희와의 동거는 생각보다 무난했다.
평소 말이 별로 없는 그는 적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기분 좋을 정도의 다정함을 내보였다. 물론 과한 스킨쉽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는 기대 이상의 배려를 발휘해 상원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해주었다.
범인이 이해하기 힘든 조석희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 때문에 꽤나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나날이 달콤한 신혼생활로 변모하자 상원은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이 커질수록 언젠가 덮쳐올 불행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조석희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면 자신에게 질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나름의 궁여지책을 마련했다. 그것은.....
"수업 가시는거예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상원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잠에서 덜 깬 눈을 한 조석희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아침이라 거뭇하게 자란 수염에 상원은 눈을 떼지 못했다.
"선배 수업 가시는 거냐고요"
"어, 응 수업가지"
조석희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되도록이면 아침 수업을 시간표에 넣지 않았다. 반면 상원은 수업이 모두 1교시부터 시작되도록 시간표를 잤다.
"선배 수업 끝나면 몇 시에요?"
"글쎄 한 3시쯤 되려나"
"흐음"
조석희가 마뜩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자신의 일과와 매번 어긋나는 상원의 수업표가 거슬린 것이다.
"그럼 집으로 바로 오실건가요?"
"응 그러려고"
조석희가 상원에게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운동화를 두 쪽 모두 신은 상원은 살짝 까치발을 들어 몸을 최대한 앞으로 숙였다.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저는 일이 있어서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조석희는 양키새끼라 위아래도 모르고 싸가지가 없다는 승완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서양식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의견에는 조심스럽게 찬성표를 던질 수 있었다.
증거로는 조석희는 모닝키스 같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척척 해내는 것이다.
"선배 얼굴"
반대로 모닝키스하나에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자신은 타고난 한국인일거라 생각하며 상원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 그.... 나 가볼게"
"그래요"
조석희가 여전히 졸린 얼굴을 하고 상원을 배웅했다. 상원은 콩딱콩딱 뛰는 심장을 움켜쥐고 현관을 나섰다. 버스에 올라타서도 계속 입술을 손가락으로 마지작거렸다.
상원은 최대한 조석희와 학교에서 마주치지 않도록 시간표를 짜두었다.
특히 공강과 점심시간이 겹치지 않게 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덕분에 2학년 전공수업까지 듣게 되어 수업에 뒤쳐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공부해야 했다.
오늘 아침에 있는 수업도 굳이 듣지 않아도 좋을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는 전공 선택 과목중 하나였다.
쉬는 시간도 없이 연속 3시간을 수업하고도 번번이 시간을 넘길 정도로 빡빡한 수업이었다 그러고 나면 다음 수업까지 남는 시간이 채 30분도 되지 않아 빵과 우유로
점심을 떼우기 일쑤였다. 하지만 상원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조석희가 자신에게 질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유보시킬 수만 있다면
몇년이건 빵으로만 점심을 떼워도 상관없으니까.
상원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쳐지나가는 창밖 풍경으로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