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조석희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선배였어요?"
"...응"
"몰랐네 그냥 앞에 있길래 한대 친 건데 미안하게 됐어요"
진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였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과거의 일까지는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제가 학교까지 옮겨 드렸으니 피장파장이죠"
".....학생회 후배들이 나중에 데리러 왔다고 하던데?"
너무나도 당당한 조석희의 어조에 상원은 잠시 자신의 기억을 의심해야 했다. 그런가요, 하고 조석희가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물에 빠진 왕자를 해안가에서 발견해놓고 자신이
구한 척 하던 이웃나라 공주는 조석희에 비하면 그나마 양심이 있는 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상대를 후려쳐서 기절시켜 놓고 그대로 사라진 주제에 조석희는 지금 피장파장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지금 선배가 가진 좋은 추억인가요?"
"아니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너랑 마주친거라서 잊혀지지는 않아"
대책없을 정도로 긍정적이고 욕심없는 사람이었다. 이상원은.
조석희는 그런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희고 고운 피부는 빛의 입자를 머금은 듯 해사하게 빛났다. 손등으로 상원의 얼굴 언저리를 쓸어내려주며 조석희가 물었다.
"다른건 없어? 좀 좋은거"
"있어. 있다."
상원이 기억이 났는지 약간 홍조 띤 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은 일진이 좋지 않았다. 며칠 전에 넘어져서 인대를 다쳐깁스를 하게 된 것에서부터 시작해 미술 수업을 하던 도중 이젤이 부러져 거의 완성된 그림위로 물통을 쏟았고
열심히 정리해 놓은 필기노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목발에 의지해 계단을 내려가던 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쉴 수록 복이 달아난다는 옛어른들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이쯤 되니 과연 애초에 달아날 복이 있긴 한건가 싶기도 했다.
게다가 이상하게 오늘따라 머리도 무겁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감기기운이 있는건가.
상원은 계단 중간에 멈추어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이 조심해!"
뭘 조심해야 할지 뒤를 돌아 확인하려 했을때는 이미 늦은 상황.
상원은 갑작스레 자신에게 밀려오는 남학생에게 떠밀려 그대로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려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원에게 부딪혀온 남학생은 계단 난간을 잡아 굴러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다리에 이어 몸까지 박살나겠구나 하며 상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요?"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선배 괜찮아요?"
"....어"
상원은 자신을 잡아 준 손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금의 상황을 파악했다.
"조심하셔야죠"
"고마워"
후배가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인 후, 바닥에 떨어진 상원의 목발을 주워 그에게 돌려주었다. 상원은 목발을 받아들고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안 다쳐서 다행이예요"
마지막으로 던지는 목소리마저 다정했다. 상원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예의바른 후배의 옆에 서 있던 남학생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6반의 상원선배"
"아 6반 이상원"
남자의 시선이 짧게 상원의 얼굴을 스쳤다. 상원의 얼굴은 더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