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희가 잠든 것을 확인한 상원은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 맡에서 그의 숨결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지만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거실로 걸어 나오긴 했는데 혹시라도 조석희가 잠에서 깰까봐 불은 켜지 못했다. 상원은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초저녁부터 격렬한 섹스를 했던 터라 도중에 잠이 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이 반이나 남아있었다. 성격상 일을 하다 끝마치지 못하면
신경이 쓰여 다른일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이사 첫날이라 평소보다 더 신경이 곧두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맘 같아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짐정리를 싹 마치고 싶었지만 이 새벽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신병자로 낙인찍일게 분명하다 아니, 이전에 조석희를 잠에서
깨우는 짓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조석희는 하루에 5시간 이상 잠을 자는 법이 없었다. 그는 하루에 다섯시간을 자는 것도 자신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 기적을 방해하는
인간은 남녀노소 지위를 막론하고 엄청난 분노가 쏟아졌다. 잠을 자게 만들어 주는 상원에게는 대놓고 화를 내지 않았지만 몇 번 실수로 침대에서 움직이다 그의 팔이나
다리를 밟아 잠을 깨웠을때 보였던 눈빛은 ----
"에비-!!"
머릿속에 떠오른 조석희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몰아내며 손을 내저었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석희를 볼때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성격이 저렇게까지
모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함 없이 자랐을 텐데 아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겠지.
뛰어난 두뇌와 운, 외모와 재력을 가졌으니 그래서인지 하나를 좋아하면 여간해선 질리지 않는 자신과는 다르게 그는 뭐든 쉽게 질려했다.
상원은 길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조석희가 끈질기게 동거를 하자고 권유를 해서 같이 살기 시작했지만 과연 이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이런데서 뭐하세요"
"헉!"
갑작스럽게 자신의 목을 끌어안는 손 때문에 놀란 상원이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에서 덜깬 눈을 한 조석희가 그곳에서 불퉁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서, 석희야"
"뭘 그렇게 놀라 이 집에 선배 아니면 나밖에 더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자는 줄 알았어"
조석희는 상원의 뺨을 쓰다듬는 손을 더두지 않았다. 상원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으며 들어가서 자, 하고 말을 이었다.
"선배 근처에 없으면 깊게 잠 못자는거 알면서 그런 소리하네"
그 말은 상원에게 양날의 검 같았다. 조석희가 자신을 필요로 해준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서글펐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의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는데
가끔은 혹시 그것 때문에 사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왜 여기서 혼자 청승을 떨고 있어요?"
"아, 그냥 잠이 안와서"
말을 하는 와중에 조석희가 상원의 눈꺼풀 위에 부드럽게 두어번 입을 맞추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스킨쉽을 해왔다.
상원은 그럴때마다 당혹감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몰라했다.
"불면증?"
"아니 그런건 아니고 그냥 이사 첫날이라 좀 긴장되나봐"
얼굴에 닿아있던 입술이 슬며시 웃는게 느껴졌다. 조석희가 상원의 어깨 밑으로 손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재워드릴께요"
"응?"
어떻게 재워줄 것인지 묻기도 전에 조석희는 상원을 소파에서 번쩍 들어올렸다. 공중에 들어올려지며 상원은 소긍로 혀를 찼다. 체격차가 있다고 해도 자신의 키가 180에
가까운 남자인데 그런 몸을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안아 올린 상대에게 감탄했다.
조석희는 상원을 안고 침실로 들어와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시트를 끌어 상원의 몸에 덮어주고는 자신도 그 옆에 모로 누워 그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자 이제 자요"
"...."
참으로 무성의한 남자였다.
흔한 자장가도 없고 손으로 토닥여주는 정성을 보이지도 않았다. 상원은 시트 안에서 눈만 뎅글뎅글 뜨고 자신의 옆에 누운 남자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유려한 선이
시선을 끌었다.
"잠 안와요?"
"...응"
"...나는 졸린데"
그가 상원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상원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조석희의 숨결에 가슴이 떨렸다.
좋겠다. 나는 니 냄새만 맡으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정신이 번쩍 드는데....
혹시 자신의 체향이 자신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하고 손등에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조석희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자요?"
"...."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상원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자는 척을 했다.
"자는 척 하는 거예요?"
"...아니야"
"내 불면증이 옮기라도 했나"
조석희가 상원의 몸을 바싹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목덜미를 만지는 손의 움직임이 다정했다.
"그러면 좋겠다. 그래서 네 불면증이 나으면 좋을텐데"
상원은 저도모르게 불쑥 진심을 입 밖으로 냈다. 조석희가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뭐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너 힘드니까"
"그렇다고 ......됐어요, 불면증 같은게 뭐 좋다고 그걸 옮겨. 선배 같은 사람은 정신병원 신세 지게 될걸"
그렇게 말하는 조석희의 말투가 차가웠다. 상원은 괜한 말을 꺼낸건가 하고 후회되었다. 묘한 침묵이 어둠 속에 머물렀다.
상원은 눈을 감고 어서 잠에 빠지길 기다렸다.
"선배"
"응"
"재미있는 얘기해봐요"
"....."
잠을 재워주겠다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조석희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애초에 재단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떠올리고 상원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무슨 얘기?"
"글쎄 선배가 나 몰래 짝사랑 할때 스토커 하던거?"
"...스토킹 안했는데...."
소심하게 항의해봐도 소용없었다. 조석희는 상원의 어깨에 코를 문지르며 다시한번 나른한 목소리로 졸랐다.
"스토킹하던 얘기나 해봐요"
"별 거 없어"
조석희가 상원을 안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닥치고 애기하라는 의사표현이었다.
상원은 머릿속으로 이제는 먼 옛날같은 지난날의 일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