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은 핸드폰의 시계와 전광판에 떠있는 도착시간을 번갈아 확인하며 목을 길게 뺐다. 조석희가 문자로 알려준 대로라면 비행기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여간해서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 둘다 썩 마땅치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나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일주일을 채운것은 아니지만 며칠 간 집안일을
도우며 근신을 한 덕분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대학에 무사합격을 한 것일테지만,
상원은 다시한번 전광판을 바라보며 비행기 도착여부를 확인했다. 조석희가 타고 온다고 했던 편명 옆에 도착, 이라는 반가운 두 글자가 보였다.
그 글자만으로도 상원은 가슴이 설렜다. 삼사십분만 기다리면 그를 볼 수 있었다.
역시 바로 문자가 도착했다. 비행기가 계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기를 켜서 보낸 모양이다.
[어디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어요]
조석희답지 않은 문자였다
어디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으라니? 금방 갈테니까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가 아니고?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깝다고 공황에서 집으로 가는 리무진까지 대기시켜놓는 인간이?
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철이 든 것은 아닐테고, 에라 모르겠다. 커피가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니 상원은 그냥 그자리에 서서 조석희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한 시간 넘도록 기다려 허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끝내주게 멋진 조석희가 출국장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원은 콧노래를 부르며 출국장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한두 사람씩 캐리어를 밀고 문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바륵바륵 웃고 있던 상원의 눈에 양복차림을 하고 검은색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김이경의 모습이 들어온 순간 그의 미소는 그대로 이지러지고 말았다.
"어? 상원선배?"
김이경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물론 상원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너, 너가 왠일이야?"
"선배야말로 여긴 웬일이에요, 저 마중 나오셨어요?"
"아니 절대 아니"
상원이 민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오해의 싹은 밑동부터 잘라 버리는것이 지금 상황에선 옳았다.
"흐음 그럼 누구 마중 나왔으려나"
"....."
"내 옆에서 나하고 눈도 안 마주치던 그 녀석인가?"
"...넌 왜 이거 타고 온거야, 다른 비행기도 많은데"
"이게 한국으로 오는 가장 빠른 항공편이었거든요. 서비스는 별로지만, 아 그래서 조석희가 이걸 탔구나"
김이경이 살랑거리며 눈웃음을 쳤다. 예전 같았으면 아 이녀석인상 정말 좋구나 했겠지만 상원은 더 이상 그의 가식에 속지 않았다.
"너 이리 좀 와봐"
"왜요? 석희기다리는거 아니었어요?"
"잠깐 할 얘기가...."
상원은 잠시 열려진 문틈 사이로 조석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멀리서 그가 세관을 통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빨리 와 빨리"
상원이 김이경의 팔을 붙들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는 김이경은 즐거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일인데요 선배"
상원은 주변을 둘러보고 재빨리 말문을 열었다.
"너 그날 있었던 일, 절대 석희한테 말하지마"
"네? 무슨일이요"
"그날 했던거"
"뭘 해요?"
김이경이 반지레하게 웃으며 물었다. 안경 유리에 빛이 반사되어 도저히 그의 눈빛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우리 집앞에서 ......키스한거"
".....?"
웃고 있던 입가가 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눈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너가 억지로 했잖아. 분명...난 절대 너하고 키스 같은거 안해. 맨정신으로 절대. 죽어도"
"우와, 선배 그거 진짜 상대한테 엄청 상처되는 말인거 알아요?"
"알아. 하지만 학실한게 서로를 위해 낫잖아. 나도 잊을게 피차 좋은 일도 아니니까"
상원이 단호하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김이경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요? 왜 피차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표정이었다.
"...나 너 안 좋아해"
"알아요 왜 그걸 굳이 와서 또 말해주는지 모르겠지만"
"....."
상원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김이경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원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국제전화로 전화까지 걸어서 일부러 가장 빠른 항공편을 택해
한국으로 돌아왔건만 오자마자 듣는 소리가 이거라니. 게다가 하지도 않은 키스로 나쁜 놈 취급을 받는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이 손해였다.
"좋아요 말 안할게요"
"진짜지?"
"네. 대신 선배도 제 소원하나 들어주세요"
상원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진다. 그러나 김이경은 심술을 거둘 생각이없었다. 어차피 나쁜 놈으로 찍힌 이 마당에 관용의 미덕 따윈 개나 줘버리라지.
"이상한 소원은 안돼"
"그런거 아니에요"
"뭔데"
"학교에서 절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예전처럼이라니?"
"후배처럼 대해달라고요. 미술실에서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하고"
미술실에서의 일, 은 상원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남에게 그런 식으로 독한 말을 퍼붓고 손을 휘두른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상원은 자신이 똑같이 행동할 것임을 알고 있기에 뒤에도 그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물론 때린 것은 미안하다는 사과는 했지만,
"선배가 저 후배로 안 보신다고 했잖아요. 그거 취소해요"
"...후배로 보면 되는거지?"
"네. 후배"
상원은 김이경이 말하는 저 후배라는 호칭이 대체 어떤 저의를 품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일단 지금은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알겠어 그렇게 하자"
"좋아요 그럼 나중에 뵙죠 선배"
김이경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상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 문제는 이렇게 일단락 되는....
"...!!"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아 저기, 이 이경이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
"백 년 만에 만나도 그놈하곤 인사하지마"
"응 미안해"
그 재수없는 김이경과 같은 비행기를 타서 상원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커피나 마시면서 기다리라고 한건데 자신이 짐을 찾는 사이에 두사람은 이미 마주친 모양이었다.
"내 전화는 왜 안받고"
"미안해 전화온지 몰랐어"
상원이 울상이 되었다.
조석희는 쳇 하고 쓰게 혀를 찼다 오랜만에 만난 상원의 이런 표정을 보고 싶었던게 아니었다.
"선배 나 보고 싶었어?"
미국에서 통화를 하면서도 무던히 듣던 말이었다.
"응...너무 보고 싶었어"
상투적인 물음 한마디에도 상원은 날것 그대로의 진심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온몸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애정을 드러냈다. 몇 번을 확인해도 질리지 않는 애정이었다.
조석희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 상원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잡아당겨 상원에게 입을 맞추었다. 공황에 있던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두사람에게 쏠렸다. 자신이야 상관없었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상원을 위해 머플러로 그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머플러 사이로 보이는 뺨이 향긋하게 무르익어 있었다. 키스를 멈추고 다시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어 주자 상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라니 떨렸다. 조석희가 거기에도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
"가려줬잖아요"
조석희가 들고 있던 머플러를 살짝 흔들며 대꾸했다. 하지만 상원의 새빨개진 얼굴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선배"
"...응"
조석희가 상원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조석희의 품에 푹 안겨져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주변의 술렁이는 소리만 들어도 상원은 등 뒤의 따가운 시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되었다.
"석희야...차타면...."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조석희가 상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한 피로가 그대로 몰려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상원은 조심조심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조석희는 한참을 그대로 상원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