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45)

숙취로 잠이 깨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상원은 현재 온몸으로 겪는 중이었다. 

"....으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끙끙거려도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거인의 발소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싶어 상원은 침대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방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부엌에서 밥을 준비하고 계시던 어머니가 묘한 얼굴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물 마시려고요"

상원이 냉장고 문을 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통을 꺼내 컵에 따르는 와중에도 상원은 어머니의 기이한 시선을 느껴야만 했다. 

"..어 저.... 많이 화 나셨어요?"

외출금지를 당한 지 하루만에 친구들하고 술을 먹으러 나갔으니 당연히 혼이 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불안해 하고 묘하게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하룻밤 사이에 어머니의 뺨이 핼쑥해진 것 같아 보였다.

"너 아버지 서재에 계실테니 가봐라"

"네? 아 예"

생각해보니 어제 가게를 나온 뒤로 기억이 없었다. 상원은 혹시 자신이 술김에 부모님 앞에서 무슨 실수를 한 것인가 싶어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서재 문 앞에 서서 아버지 저예요 하고 부르자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렸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때 상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 앉아라"

아버지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상원이 기억하기로 아버지가 담배를 끊으신지가 10년도 넘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상원은 서재 문을 닫고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는 담배 한개비를 끝까지 다 피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너 말이다. 이 상원....."

"네 아버지"

손에 식은땀이 나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상원은 어제 자신이 무슨 술주정을 부린 것인가 기억해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어떤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짓을 저지른거지. 욕이라도 했나? ...막 토한 걸까? 뭐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아버지가 담배까지 피우시는걸까....설마 춤을 춘 것은 아니겠지./

"물어볼게 있는데...솔직하게 대답해라"

"예"

상원은 대답하면서도 계속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그...사람 누구냐"

"예? 누구요?"

"어제 집 앞에서... 그 사람 말이다"

상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 앞에서 그 사람이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누구 말씀하시는거에요? 혹시 동석이랑 승완이랑 대진이요?"

"아니 그 녀석들 말고"

상원은 뺨을 긁적거렸다. 그 세명을 제외하면 대문까지 같이 올 사람이 없는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저 어제 걔들하고 술 마셨어요 죄송해요. 허락 안 받고 나가서...." 

상원은 일단 사죄를 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어제 너랑 대문앞에서,,,,하아"

말을 잇기가 힘든지 아버지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아들인 다음, 그는 천천히 대화를 재개했다. 

"너하고 그 짓 하던 인간 말이다"

"그짓이라뇨?"

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들의 청명하고 순수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의 아버지는 말로 하기 힘든 착잡함을 느꼈다. 저렇게 착하고 올바른 아들을 앉혀놓고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그에겐 너무도 힘들었다. 

"....너한테 키스하던 사람 말하는거다"

"예? 키스요?"

상원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스라뇨? 제가요? 누구하고요?"

"....모르니까 내가 너한테 묻고 있는거 아니겠냐"

상원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 보앗지만 어제 조석희가 집으로 온다는 연락은 받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자신과 키스를 했단 말인가.

"말도 안돼"

상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듣고 그의 아버지도 침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도 안 되는 걸 내가 어제 목도했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럴 리가 없는데...."

조석희가 대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릴 인간도 아니고.

자신이 조석희가 아닌 다른 사람과 키스할 인간도 아니고- 물론 조석희인줄 알고 김이경과 했던 키스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럴리가 없어요 아버지가 잘못 보셨을 거예요"

상원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아"

그의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가 그걸 봤단 말이다. 내 이 두눈으로 똑똑히"

"아버지...."

"내 눈으로 본 것을 어떻게 잘못 본것이라고 넘겨버리겠냐. 아무리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도 그렇게 현실회피하고 싶지는 않다"

상원은 자신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의 아버지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런 성격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숱하게 겪었지만 그는 신념을 버리면서까지 손에 넣는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의 일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피우면서까지 저렇게 고민을 하셨다는 얘기에 상원은 미안해졌다. 

하지만 아닌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저 그런데 진짜 아닌데....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신거 아니에요?"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너를 내가 들쳐 업고 왔는데?"

"그럼 키스를 한게 아닌건?"

"그럼 어제 두 다리 쭉 펴고 잤겠지"

상원은 곤혹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술에 몇번 취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술에 취한다고 아무나 붙들고 키스를 한다는 술주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조석희가 아닌 누군가에게 키스를 하겠다는 마음이 들리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상원은 조심스레 가설을 냈다. 

"저기.혹시...변태를 보신거 아닐까요?"

"뭐라고?"

"저는...술에 취했다고 아무하고나 키스하지는 않거든요"

조석희가 아니라면 누구하고도 키스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집 앞에서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것도 아버지 앞에서 키스를 당했다는 사실이 영 

찝찝했지만 일단 오해는 풀고 싶었다.

"만약 했더라도 그건 제 의지가 아니었을 거예요. 변태가 막무가내로 한게 분명해요. 맹세해요"

상원이 선서를 하듯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꾸며낸 거짓이 한올도 보이지 않는 그 맑은 눈망울에 그의 아버지는 근심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구나 그 변태놈이 너를... 이럴 줄 알았으면 쫓아가서 경찰에 신고를 하는건데!"

"예? 변태 놈이라고요?"

생각지 못한 단어가 상원의 혼란을 이끌었다. 

"그래. 키는 엄청 크고 어두워서 얼굴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허우대 멀쩡한 사내놈이 왜 남의 귀한 집 아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서 변태짓을 해!

빌어먹을 나쁜 자식!!!"

그의 아버지가 그제야 분노를 토해냈다. 

"아, 저...저 올라가볼게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원이 의자에서 일어서려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넘어졌다. 그 바람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상원아 괜찮니?"

서재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어머니가 큰 소리가 나자 안으로 달려와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요 어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상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것인지도 몰랐다. 방금 전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들은 정보가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설마 얘한테 손대신거 아니죠?"

"어머니 절대 그런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넘어졌어요"

상원이 놀라서 어머니의 손을 붙들었다. 

"얘가 뭐래요? 어제 그거"

밤새 자신의 아들일을 걱정하던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술에 취한 상원을 남편이 데리고들어왔을때만해도 그녀는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늘 순종적이고 조용하던 자신의 아들이 요즘 들어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소한 반항을 하는것을 그녀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아들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했을 때 이정도의 문제는 일으켜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다운 면모라 생각해서였다. 상원을 2층 방에 늬여놓고 남편이 서리 맞은 것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때까지도 그녀는 이 사태에 

대해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남편의 입을 통해 들은 얘기는 들으면서도 머리로 정리하기까지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남들과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절대 나쁜것이

아니라고 아들에게 늘 가르쳐왔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길 바랬다. 가뜩이나 이상한 불운에 휩싸여 이런저런 사고를 당하는 아들이 성적인 취향까지 

소수에 속한다면 평범한 행복과는 저만큼 떨어질 것 같아 안타가웠다. 

"술에 취해서 기억이 없지만 어떤 미친 변태 놈이 지나가다가 그런 것 같다는데 나쁜 녀석, 남의 귀한 집 아들한테 그딴 짓을 하다니"

"여보, 그러면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지 않아요?"

"어제 그놈을 잡아다가 경찰서에 넘겨버렸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경황이 없어서...."

"요즘 세상에 흉흉하니 이런일도 있네요. 아들이라 걱정 안했더니"

어머니가 상원을 애처로운 눈을 하고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먼저 올라가볼게요"

하얗게 질린 상원이 입을 열었다. 

"그래 가서 좀 쉬렴"

"...어제 허락 안 받고 외출한거 진짜 죄송해요. 나중에 벌 받을게요"

비틀거리며 일어서면서 상원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천사처럼 착한 아들을 두고 그가 타락의 길을 걸었으리라 잠시나마

의심했던 그의 부모님은 죄책감마저 느꼈다. 

"그래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상원은 다시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자신의 방과 연결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원의 머릿속을 뛰놀던 거인이 이제는 커다란 대못을 망치로 박아댔다. 

방으로 돌아온 상원은 울상이 되어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처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때에는 그는 자신에게 키스를 한 것은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다. 

술에 취한 남자를 덮치는 여자 얘기는 들어본 적 없었지만 그래도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남자라니 게다가 키크고 덩치가 좋은? 한술 더 떠 허우대가 멀쩡해?!

자신의 아들을 덮친 변태에게 허우대가 멀쩡하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도저히 무심코 넘길 사실이 아니었다. 정확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셨지만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아버지께 저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 매우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임에 분명했다. 

상원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하면서 자신에게 키스를 할 남자는 단 두명 뿐이었다. 

조석희와 김이경.

거기에 아무런 기별 없이 자신을 대문 앞에서 기다릴 인간을 추려내면 한 명만 남는다.

"....김이경"

상원은 손가락 끝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한번의 실수는 눈감고 넘어간다 해도 같은 실수가 두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은 본인에게 크나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게 벌써 김이경과 나눈 두번째 키스였다.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자신이 왜 그랬을까 후회해 봐도 어제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초조하게 자책하던 상원은 어제 입었던 코트를 뒤졌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조석희로부터 여러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걸 보니 죄책감이 깊어져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상원은 그대로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고객님의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 문자보면 연락해줘.

상원은 문자를 꾹꾹 눌러 찍어 보냈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생각해보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김이경 

역시 핸드폰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 

"으아! 진짜!"

상원은 핸드폰 폴더를 접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하필이면 이럴때 김이경도 핸드폰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어제 벌어진 일을 조석희가 눈치 채고 둘이 이미 크게 싸우고 사고가 생긴 것이라면 

"안돼 그럴리 없어"

상원은 다시 단축번호 0번을 눌러 조석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전화가 꺼져있다는 안내 목소리만 들려왔다. 조금 지나자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저녁을 먹으라고 방문을 두드렸다. 머리는 복잡하기만 한데 배는 염치도 없이 

꼬르륵 거리며 허기를 알렷다. 자신은 밥 먹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음식을 거부할 주제도 되지 못했다.

상원은 방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조용히 저녁식사를 했다 어머니를 대신해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올라와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조석희의 핸드폰은 

꺼져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2층에서 뛰어내려서 석희네 집으로 잠시만 다녀올까. 상원은 발코니 창을 열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제 그렇게 사고를 쳐 놓고 오늘 또 나가버린 다면 자신은 진짜 인간의 자식이 아니라 개의 자식이다. 

자신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던 아버지나 하룻밤 사이에 헬쑥해진 어머니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석희야-"

발코니에 서서 상원은 한숨을 쉬듯 그의 목소리를 불러보았다.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지기 전에 침대 위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상원은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쥐고 번호를 확인했다. 

070으로 시작하는 눈에익은 숫자가 화면에 떴다. 상원은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여보세요?"

[선배]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좋은 목소리.

상원은 자신이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만큼 행복했다. 

"응 석희야. 지금 어디야?"

[미국이요]

예상했던 대로였다. 조석희가 미국에서 전화를 걸면 항상 뭔가 복잡한 조합의 숫자가 핸드폰 화면에 뜨곤했다. 그가 미국에 갔다는 말을 듣자 상원은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무슨 사고가 생겨 핸드폰이 꺼진 것은 아닐테니.

[거기 지금 저녁인가? 아, 잠시만]

핸드폰 너머에서 유창한 영어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조석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원은 사모하는 가수의 노래를 감상하는 여고생이 된 기분으로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 됐어요]

"너 가방이 없어?"

어는정도 간단한 회화는 알아듣는 상원이 전화기 너머의 대화를 듣고 물었다. 

[first class는 짐이 다른 곳에서 나온 다고 하네요 이 항공사는 처음이라 몰랐어요. 찾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first class는 비싸지 않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던 상원에게 전용 제트기를 타고 움직이는 것보다 덜 비싸다는 대답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조석희였다. 

그의 경제관념은 감히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미국에 갔어?"

[일이 좀 생겨서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상원은 입을 다물었다. 조석희는 서너달에 한번쯤 미국에 갔다 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미국을 다녀온지가 이주가 안되었다. 즉, 이번 것은 

일상적인 방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괜히 이것저것 물었다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면 안된다고 자신을 추슬렀다. 

궁금함에 입술이 실룩실룩 움직이는 이 꼴을 전화기 너머 상대가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상원은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 안 궁금해요?]

"...궁금해"

상원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조석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공기가 약간 흔들리는듯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별일 아니에요 누가 좀 죽어서요]

상원은 잠시 자신이 들은 말을 사전적 의미 그대로 해석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조석희는 가끔 단어를 잘못 사용할 때가 있었다.

상원은 그때마다 저 이상한 쓰임을 고쳐줘야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석희가 단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사용했다는것보다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다는 가설이 더 현실성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친척 어른 중에 한분이 돌아가셨다고요]

초여름에 밭에서 막 뽑아 차가운 개울물로 닦은 야채처럼 산뜻한 어조로 조석희가 대꾸했다. 

....얘야 넌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는거니.

"그..큰일 아니야?"

[큰일은요 어차피 나이 차면 죽는거지]

"그, 그래도 고인되신 분이 좋은 곳 가셨길 빈다"

상원이 자세를 바로 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석희야"

[아니, 아니요, 그말 할때 선배 표정이 눈앞에 선하다 싶어서요.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요. 정말 오래 살다 가신 거니까. 본인도 ok하셨을 거야]

"......"

상원은 이 인간에게 보통 사람의 감성을 갖게 하는 것은 영불가능하겠구나 싶었다.

[선배랑 같이 왔으면 좋았겠지만, 선배 아직 외출 금지?]

"응 그렇지 뭐"

[별다른 일은 없어요?]

"응. 별다른 일......없어"

상원은 대답해놓고도 속이 뜨금해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제 돌아오는거야?"

[글쎄요 한 이삼일쯤 걸리지 않을까. 그렇게 복잡한 일은 아닌데 이런 일은 변호사만으로도 처리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응 그래"

그 부분이 뭔지 몰라도 상원은 자신과는 평생 관련이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보고싶어]

"....!"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상원의 얼굴이 단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빨리 갈게 선배]

"....응"

[그동안 외출금지 풀어놓건, 뭐든 해놓으라고]

"알았어 응 그럴게"

뭐든할게 석희야. 정말 뭐든 할게.

[선물은 또 초콜릿 사다줘요?]

상원은 조석희가 초콜릿 -정확히는 촤콸릿- 이라고 발음하는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응 그거면 돼"

두 사람이 사귀고 난 후 조석희가 처음 미국에 가게 되었을때 무슨 선물 받고 싶냐고 묻자 상원은 별다른 생각없이 미국이니까 미국 초콜릿? 이라고 대답했다. 

조석희는 그때 한참을 웃었던 것 같다. 상원은 자신의 대답이 그렇게 웃긴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직도 그 이유는 찾아내지 못했다. 

[알겠어요 사다줄게요 기다려요]

"응 그럼 언제 인천 도착하는지 나중에 알려줘"

[문자로 보낼게 선배]

상원은 너무나도 달콤한 통화를 마치고 한참을 침대에서 말없이 버둥거렸다. 

"헉 이럴때가 아니지"

상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김이경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좋을 때일수록 불행한 일들을 말끔하게 정리해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그 불행이 흙발로 찾아와 행운까지 짓밟아버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상대방 핸드폰에 신호가 갔다.

[어? 선배?]

전화기 너머에서 예상치 못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이경! 너!"

[무슨 일, 아 , 잠시만요]

상원은 이번에도 아까와 비슷한 대화가 흘러나오는것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조석희만큼 자연스러운 네이티브 발음은 아니었지만 제법 유창한 영어였다.

[선배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너도 혹시 짐을 못 찾아서 물어본거야?"

[아 예. 여기는 fist class짐이 나오는 곳이 따로 있다고 하네요 원래 타고 다니는 항공사가 있는데 시간이 안맞아서요]

"거기 미국?"

[와 어떻게 아셨어요? 선배 저한테 관심 많으신가봐요]

상원은 조석희가 본인도 ok하시며 돌아가셨을것이라고 했던 친척어른이 김이경과도 무슨 연관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언제 오는데"

[한 삼사일 걸리나]

"...."

그나마 다행이었다. 올 때는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겠구나. 

[저기 조석희 보인다. 저 자식 비행기 안에서 내내 눈도 안 마주치던데 선배한테 전화왔다고 말하면 쳐다보려나, 조,,,!"

"안돼!!"

상원은 큰소리로 소릴 질렸다. 

"안돼 하지마 석희 부르지마 절대 부르지마"

상원이 단호하게 김이경을 뜯어 말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미묘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알았어요 안 부를게요 그런데 선배가 어쩐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하셨어요?]

"너 그날 있었던 일 말하지마, 그러면 나도.....용서해줄테니까"

[무슨 일이요?]

"시치미 떼지마. 너는 대체...하아 ..됐어. 너 귀국하면 얘기하자"

상원은 얼굴을 맞대고 단호하게 다시 거절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렇게 기계를 사이에 두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선배 지금 저한테 만나자고 하신거에요?]

"할 얘기가 있다는거지, 다른 뜻은 절대로 아니다. 오해하지마"

[하하하, 선배 상관없어요. 아무튼 그럼 한국에서 뵙죠. 선배 전화세 많이 나와요]

상원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 국제전화를 사용하고 있다는사실을 떠올렸다. 핸드폰을 로밍해 가서 아무렇지 않게 한국에서처럼 사용하는 누군가와는 사정이 

다른 상원은 그럼 나중에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후우"

핸드폰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상원은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일단은 며칠간은 차분하게 집에서 근신하면서 머리를 식히는게 우선이었다. 

할수 없는 일에 관해서 고민해봐야 자신만 손해일테니. 

상원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별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하지 말아달라고.

열어놓은 발코니 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넘실거리며 들어와 그의 발끝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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