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외출금지인데"
"니 나이가 몇 개인데 외출금지냐. 게다가 우리가 다른 일도 아니고 네 대학 합격 축하하러 간다는 건데 설마 부모님이 뭐라고 그러시겠어"
"그건 그렇지만...."
"에이 괜찮아. 괜찮아 바로 집 앞이잖아. 설사 뭐라고 하시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면 되지"
외출 금지라서 못 나간다는 상원을 끌고 세 사람은 그의 집 근처 호프집을 찾았다. 대학 합격 축하주를 마시자는 친구들의 청을 상원은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 합격한것은 어떻게 알았어?"
"인마 그거 서운하다. 왜 제일 먼저 나한테 말 안했어?"
승완이 투덜거렸다.
".....혹시나 해서"
상원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합격이 믿기지 않아. 하루에 서너번은 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치고 합격을 확인했다.
대학등록금을 내고 나서 더 확실해지면 친구들에게 말해줄 생각이었다. 괜히 설레발 쳤다가 일이 어그러지면 친구들까지 속상해질까봐 두려워서였다.
"으이구 소심한놈 내 그럴 줄 알고 너희 어머니한테 합격하면 말씀 좀 해달라고 연락 넣어 놨다"
동석이 상원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미안해, 진작 얘기했어야 하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
상원은 자신이 말해주지 않았는데 알아내어 축하를 위해 찾아온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오늘 술값 네가 쏴"
"오케이 그래 알았어. 대신 나 오늘...."
"일찍 들여보내 줄게. 걱정을 하덜 말어"
호프집으로 들어가자 대진이 큰 소리로 안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외출금지야? 너희 부모님 좀 프리한 편 아니던가?"
동석이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 밖에 내었다.
"그러신 편인데..... 내가 혼날 짓을 좀 해서"
"무슨 짓을 했는데 엄마 지갑에서 돈이라도 뽀렸냐?"
권투를 하면서도 체급조절에는 영 관심이 없는 대진이 서비스 안주를 한 웅큼씩 입안에 넣으며 물었다.
"얘가 너냐? 상원이가 너야?"
"혼날짓을 했다잖아. 그게 아니면 뭔데? 거실에서 몰래 딸치다 걸렸어?"
"...대진아"
상원이 애절하게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윤대진 저건 머리에 그 생각밖에 없지"
"외출 금지 당할 정도로 혼날 짓이 당장 뭔지 안 떠오르니까 그렇지. 그냥 니가 니 입으로 불어"
상원이 뻥튀기를 입에 물고 오믈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조부모님들 오셨는데 ...내가 나가서"
"엥? 외출 할 수도 있지 뭘 그런걸 가지고 그러셔"
"...나가서 안 들어갔어"
"...."
"...."
"어딜 나갔다가 안들어가? 집에 안 들어갔다고? 밤새 뭐했는데? 어딜 갔는데?"
눈치도 없는 대진이 침묵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한 채 쉴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점원이 주문한 안주를 가져다주자 동식이 대진에게 그거나 처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승완이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상원아"
그가 연기를 상원의 반대 방향으로 내뱉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상원을 불렀다. 그것은 흡사 사랑에 눈이 멀어 집나갔다가 배가 불러 들어온 딸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아버지의 부성애가 담긴 음성이었다.
"나는. 반대다"
"...."
"남자, 여자 이전의 문제야 그건 그놈은 개새끼야. 생긴 것만 번지르르 하지 완전 개새끼라고"
승완이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한승완이 조석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상원도 직접 목도한 바가 있었다. 같이 입원해있던 병원복도에서 승완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잠시 그 자리에 멈칫하던
그는 망설임 없이 조석희를 향해 링거 병을 집어 던졌다. 들짐승 같은 반사신경을 가진 조석희가 팔을 들어 링거병을 쳐낸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파편에 휠체어를
타고 있떤 상원의 손등에 꽂힌 것은 정말 불운한 사고였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조석희와 한승완은 감히 네 놈이 라고 외치며 서로를 향해 잡아 죽일 것
기세로 달려 들었다.
상원이 간신히 뜯어말려 두 사람을 떼어놓긴 했지만 승완은 그날 이후로 말버릇 처럼 조석희의 배에 한방을 더 넣어줘야 했다는 말을 곱씹었다.
졸업 후 삼촌이 운영한다는 고급 일식집에서 본격적으로 회를뜨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 승완을 생각하면 도저히 농담으로 웃어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대야. 누워서 생각해보고 서서 생각해보고 앉아서 생각해봐도 반대야"
"...."
"나도 반대"
동석이 차가운 컵에 맥주를 따르며 산뜻하게 대답했다. 대진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가 싶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여태 그놈하고 만나는 것도 참 싫지만, 앞으로도 만난다면 더 싫을 거 같아"
"아, 조석희!"
그제서야 대화의 주제를 파악한 대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근데 아직도 걔랑 사귀어? 우와 대단하다 그놈 여자는 존나 자주 갈아탄다고 유명하던 놈이잖아. 고딩 주제에 학교에 여자들 존나 찾아오고 교문앞으로
금발도 오고 가슴 존나 큰 라틴계 누나도 오고 그치? 맞지?"
"...응 맞아"
상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고 해도 조석희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대해 듣는 것은 매우 불편했다.
가끔 그런 생각조차 들었다. 과연 자기 하나로 조석희가 만족할 수 있을까.
"그 새끼랑 아직도 만나? 걔는 딴 년도 만나면서 너 만나는거 아니야?"
대진이 악의없이 던진 한마디가 상원의 심장을 관통했다.
"만날 걸. 그놈이라면 만난다."
동석이 맥주를 가득 채운 잔을 각자 앞으로 하나씩 돌리며 대진의 말을 거들었다. 상원의 얼굴이 파르르 질러갔다.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해 보여 승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상원을 두고 왜 바람을 펴! 우리 상원이가 어디가 어...."
거기까지 말하고 승완은 지그시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상원의 편을 들어주는 동시에 그 빌어먹을 조석희 편까지 들어주는 발언이었다.
"아무튼 싫어 난 걔가 싫어 무조건 싫다"
"...미안하다"
아무리 좋은 친구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조석희와 헤어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조석희가 한승완을 위시한 선배들과 연락을 끊으라는 말을
내뱉을 때도 미안하단 말밖에 하지 못했다.
둘다 소중한 관계였다. 어느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심때문에 양쪽 모두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상원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야, 그만하자 오늘 상원이 합격 축하하자고 모인 자린데"
대진이 술잔을 들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동석도 그만하자고 테이블 밑으로 승완의 발을 슬쩍 걷어찼다. 오늘 축하자리의 주인공인 상원의 표정이 안됐다
싶을 정도로 창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그 얼굴을 보니 승완도 미안해졌는지 자신의 앞에 있던 맥주잔을 들고 건배제의를 했다.
"건배하자 건배"
"그래 상원이의 합격을 축하하며 위하여!"
"위하여!"
"지화자!"
네 사람의 맥주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첫잔은 무조건 원샷이야. 상원아"
대진이 웃으며 말했다. 상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맥주를 들이켰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마시는 맥주는 더없이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