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45)

[뭐라고요? 외출금지?]

"응, 미안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상원은 아버지에게 불려가 무릎을 꿇고 한 시간 동안 꾸중을 들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상원은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의 꾸지람을 

달게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 이후에 내려진 징계였다. 

"엄청 혼났어. 할아버지하고 할머님 오셨는게 그게 무슨 버릇이냐고, 후....혼날 짓 하긴 했다"

[선배 혼나거야 내 알바 아니고, 그런데 집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외출금지라고요?]

"어...."

대답을 해놓고도 상원은 뭔가 찜찜함을 느꼈다.

"저기 석희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건데"

[뭘요]

"...설마 나 집에서 쫓겨나라고 일부러 물어보라고 어제 시킨 건 아니지?"

머릿속에 떠돌고 있던 의혹을 입박으로 내니 어쩐지 더 확실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리가요]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

"하하하하....."

상원은 전화기를 붙들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조석희의 얼굴이 떠올라 매가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좋을까. 거짓말을 하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이런 인간에게 반해버렸으니.

[그래서 며칠간 못 나오는데요?]

"일주일..."

전화기 너머에서 알아듣기 힘든 욕설이 들려왔다. 그래도 수화기를 떼고 욕을 해주는 예의에 상원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농담이죠? 그 정도로 무슨 일주일 씩이나 외출금지를 당해]

"아하하 그게... 조부모님들 네 분이 다 나 때문에 오셨는데 내가 허락도 없이 나가서 외박한 거잖아. 혼날짓 한거 맞아"

[아무리 그래도 선배 성인아니야?]

"그러게 아무튼 오늘 그래서 못 갈것 같아. 미안해"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상원은 조마조마했다. 그나마 통화중이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무거운 침묵이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알겠어요 어쩔 수 없지]

이죽거리는 어조가 아닌 깔끔하게 떨어지는 말투에 상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리리 화를 내는게 나으려나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럼 너 잠은 어떻게해?"

특별한 사정이 없는이상, 그간 상원이 이틀에 한번은 조석희의 집으로가서 그가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와주곤했다. 외출금지긴 해도 조석희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준다면

잠을 자는 것은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면제 먹으면 돼요]

"수면제? 그거 몸에 안 좋잖아"

수면제를 무슨 사탕 씹어 먹듯이 한 움큼씩 삼키는 그의 습관을 아는 상원은 질겁을 하며 되물었다. 

"먹지마 석희야 수면제 자꾸 그렇게 먹다가 큰일 나"

[그럼 어떻게 해요. 딱히 방법이 있는것도 아닌데]

울상이 된 상원이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집으로 네가 오면 안돼?"

[싫은데요]

안되는 것도 아닌 싫은데요 였다. 

"내방...잠자는 정도면 괜찮은데"

[선배 안고 잠만 자는 취미는 없어. 그렇다고 머리에 트로피 떨어지는것도 사양하고 싶고, 그만 끊을게요]

"응...그래"

통화를 마치고도 상원은 떨떠름했다. 

예전에 한번 조석희가 상원의 방에 온 적이 있었다.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조석희를 놀란 상원이 있는 힘껏 밀쳐낸 

것은 정말 본의가 아니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상원의 성격을 아는 조석희도 그 정도는 이해해줄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바람에 그의 머리 위로 수학경시대회 트로피가 떨어진 것 

만큼은 아무래도 용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조석희는 상원의 불운이 자신의 행운을 넘어서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그 일이 벌어진 다음날 책상 선반에 있는 트로피를 

모두 치워놓았다는 얘기는 끝내 하지 못했다. 

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동안 조석희를 보지 못한 것은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미국에 갔다 올때도 고작 닷새였는데.......

그때도 상원은 조석희를 위해 공항에서 기다렸다가 리무진 안에서 그가 잠이 들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 어쩌지"

 상원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언젠가 조석희에게 수면제가 효과가 있냐고 물었을때 그는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그럼 자기가 그 제약회사를 사들였을 것이라는 농담아닌 농담을 했다. 

아버지께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볼까.... 아니 그랬다가 외출금지기간이 일주일이 아니라 열흘로 늘어날게 뻔하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자애로운 편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일절 단호했다. 

그럼 밤에 탈출을 해야 하나. 

상원은 방과 연결되어 있는 발코니로 다가가 아래로 뛰어내릴 수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한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상원아 엄마랑 아빠랑....

방문이 갑자기 열리자 놀란 상원은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어머니가 달려와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발코니 너머로 머리부터 떨어질 뻔했다. 

"....늘 조심해야지"

"죄송해요"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아직까지 아들의 불운이 안타까운 것이 어머니의 심정이었다 

"추운데 발코니 문은 왜 열어두고 있니"

"그냥...조금 답답해서요"

"아빠랑 모임갔다 올테니까 집에 꼼짝 말고 있어라. 괜히 나갔다가 더 혼나지 말고, 안 그러던 애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화가 나서 저러는 거야. 아마 

삼일만 지나도 화 풀리실 거야"

"예 알겠어요"

"밥은 반찬 내어서 먹으면되겠지만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사다줄게"

"아니요 알아서 잘 챙겨먹을 게요. 걱정마세요"

"그래 혹시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문자 보내고 알았지?"

"네 잘 다녀오세요"

상원은 나가면서까지 아들의 식사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배웅했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잠시나마 탈출을 꿈꿨던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들어왔다. 

어머니 말씀대로 삼일만 참으면 아버지 화가 풀릴 수도 있는데 괜히 나갔다가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동안 조석희가 수면제를 많이 먹어 잘못되기라도하면,

"....안돼"

상원은 꺼림직한 생각을 떨쳐내려는듯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의 집에 일을 하러 오시는 분이 하루에한번은 오시니까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괜찮을...아니 , 조석희에게 그런 일이 생길리가 없다. 그는 대단하니까.

절대로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행운이 나 때문에 가려져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쩌지.

상원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물어 뜯었다. 상원은 자기 방으로 가서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잠 안온다고 수면제 많이 먹지마. 우유 뜨겁게 해서 마시면 좋대 ^^]

웃는 이모티콘을 붙일까 말까 몇 분을 고민을 하다가 붙이는 쪽을 택했다. 상원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답문자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F.H.M]

상원은 한참을 문자를 바라본 후에야 알파벳 세 개가 뜻하는 의미를 알아 차렸다. 

fucking hot milk.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뜨거운 우유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쯤 되시겠다. 

아아... 석희야. 대체 나는 너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가질 거 다 가지고 잘 생기고 머리까지 좋은 네가 성격은 어째서 이 모양이니. 사람이 걱정을 해주면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왜 퍼킹이 붙는 거냐. 그런데 왜 난 그런 네가 이렇게 좋은 걸까.

"미처 진짜"

정말 이 콩깍지는 평생이 가도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상원은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다 다음 번 문자를 보냈다. 

[우리집 와서 잠만 자고 가면 안돼?"

이번엔 웃는 이모티콘은 붙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답문이 왔다. 

[No.]

단호하고 깔끔한 문자였다. 

상원은 그가 두 문장 이상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을 받아 본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더 이상 얘기 해봤자 기분만 상하겠다 싶어 그는 문자를 보내느것을 

멈추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조석희와 처음 사귀게 되었을때, 상원은 그가 자신을 받아준 사실 자체만으로도 황송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연애라는것이 늘상

즐거운 일만 있는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렇게 본의 아닌 일로 조석희의 심기가 어그러지게 되면 상원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 이런 문제를 누구에게 상담할 수 없다는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동석과 승완 대진에게 이 얘기를 꺼내기라도 하면 당장 승완이

칼을 들고 조용히 조석희를 찾아갈게 분명했다. 동석이랑 대진 역시 같이 가서 싸웠으면 싸웠지, 말릴 인간들이 절대 아니었다. 

침대 맡에 앉아 끝나지 않을 고민을 하던 상원에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이 시간에 집을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인터폰을 들어 대문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모자를 쓰고 있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구세요?"

[우리다! 문 열어라!!]

우렁찬 목소리에 상원은 놀라서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승완을 위시한 동석과 대진이 손에 폭죽을 들고 마당을 가로 질러 들어오고 있었다. 

"너희들 웬일로...."

"야 인마, 합격해 놓고 왜 말을 안해 !"

"축하한다! 이상원"

"대박 축하해!"

대진이 들고 있던 폭죽을 터트렸다. 펑 소리와 함께 상원이 입고 있떤 셔츠 앞자락에 불이 붙었다. 

"으악!!"

폭죽을 터트린 대진이 놀라서 펄쩍 뛰어 올랐다. 행동이 민첩한 동석이 가장 먼저 달려가 자신의 옷을 벗어 불이 붙은 상원의 셔츠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불은 순식간에 진화되었다. 승완이 상원 앞으로 걸어와 셔츠를 열어 젖혔다. 

"다친 데는 없...."

상원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안도하려던 승완의 눈이 상원의 하얀 속살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의미심장한 흔적을 발견했다.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셔츠 자락을 여며주고 승완은 외쳤다. 

"안 다쳤네! 멀쩡해 다친 사람 없다! 무사하다!"

"안다치긴. 셔츠자락에 불붙었으니까 화상 입었을 거야. 좀 보자"

눈치 없는 대진이 상원의 셔츠 깃을 잡고 벌려 확인하려 했다 그러자 승완이 화를 버럭 내며 대진의 목덜미를 잡고 집어 던져 버렸다. 

"만지지마! 감히, 누구 옷을 벗기려 들어!"

막내딸 옷 벗기려던 외간 남자를 떼려 죽이려는 기세였다. 한 손으로 덩치가 곰만 한 대진을 날려버린 승완의 힘도 놀라웠지만 상원은 자신의 옷을 죽기 살기로 

붙들고 있는 친구의 심증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남자끼리 어때 괜찮아"

"안돼! 가서 당장 옷갈아 입고 나와 당장!"

승완이 등을 떠밀자 상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눈치 없는 대진은 무슨 일이냐고 끈질기게 묻고 동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그러네"

"...씨발"

"뭐가 아직도야? 뭐가? 아, 뭔데. 나 좀 가르쳐줘봐"

"닥쳐!씨발놈아"

"뭐야 미친 새끼 , 괜히 승질 내고 지랄이야"

"누가 그러게 상원이 옷에 대고 폭죽을 쏘고 지랄하래, 시발 보기 싫은거 봤더니 눈이 썩은 것 같잖아"

"상원이 맨몸이 뭐가 눈이 썩어  체육 시간에 옷 갈아입을 때 봤는데 매끈매끈 이쁘기만 하던데"

동석이 대진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 갈겼다. 대진이 으르릉 거리며 친구들을 노려보고 있을때 집안에서 으앗 하는 상원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승완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동석이 손을 내밀었다. 운동을 하는 동석은 어지간히 속이 상하지 않으면 담배를 피우는 법이 없었다. 

승완은 말없이 담배를 꺼내 친구에게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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