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상원은 부모님과 양가 조부모님들의 축하 인사를 배부르게 받을 수 있었다. 대학 입학 선물도 두둑하게 현금으로 받고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말만 하라는 얘기까지 들은 터였다.
1년간 재수생활을 청산하고 1지망 대학 원하던 과에 붙었고 더이상 바랄게 없을 정도로 행복한 저녁이었다.
하지만 상원은 아까부터 타르 찌꺼기처럼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는 근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한정식 집에 가서 근사한 저녁을 먹으면서도 상원은 한손으로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아들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상원은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석희에게 문자를 보내 미안하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답문이 오지 않았다. 조석희가 원체 문자를 잘 보내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아까
그렇게 뛰쳐나온 후라 상원은 신경을 쓰지않을 수가 없었다.
같이 살자.
사귀는 상대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말 중 하나일 것이다. 조석희를 짝사랑 하는 시기에 상원은 감히 그와 같이 산다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다.
처음 같이 살자는 얘기를 들었을때는 그저 좋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상원은 애인과의 동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렸다.
석희와의 즐거운 동거를 꿈꾸던 상원은 몇 개의 게시물을 읽은 후 파리하게 안색이 질려버렸다. 자세까지 고쳐 앉아 이런저런 게시물들을 5시간동안 정독한
상원이 내린 결론은 한줄.
[연애 초반에 같이 살면 금방 질려서 결국엔 헤어지게 된다]
결국 상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을 조석희에게 돌려줘야 했다. 처음에 조석희는 그럴 줄 아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그럼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급기야는 수능을 칠 때까지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의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조석희는 하루에 한번, 두번도 아니고 세번도 아니고 딱 한번씩, 물었다. 자기랑 같이 살지 않겠냐고.
상원은 그때마다 몸둘 바를 몰라 하며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전전긍긍하며 그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는 더이상 없을 좋은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재수를 하게 되었으니 밖에 나가 후배와 같이 살겠다는 말을 부모님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영 거짓은 아니었다. 학원을 다니는데 교통이 불편한 것도 있었고 공부를 하는데 방해를 받을 만큼 집이 시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상원이 밖에 나가서 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이유를 말했을때 조석희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렇다고 상원이 아예 외박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전에만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면 친구 집에서 자는 정도는 순순히 허락해주시곤 했다. 조석희도 여기에 만족했다.
두사람 사이에 별다른 문제없이 지금까지 관계를 지속해온 것은 상원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문제는 이 소중한 기적이 언제 사라질지몰라 슬슬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조석희가 기분 나빠 보이거나 지루해 하는 기색을 보이면 상원은 그날 하루 종일 소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같이 살기라도
해서 조석희가 자신에게 만약 질리기라도 하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후우..."
상원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도 용기가 나지 않아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이럴 때는 석희가 먼저 전화를 해주면 좋을텐데. 그는 용건이 없으면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문자를 먼저 보내는 것도 늘 자신이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하게 대응해주고 있지만, 조석희는 기본적으로 상냥한 성격이 못되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통한 자체로 좋았는데 자꾸 욕심이 생긴다. 이래서는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욕심을 억누르지 못한다. 주제 넘는 욕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엔 그가 자신에게 질려버리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요즘은 좋아한다는 말도 예전처럼 쉽게 건네지 못했다.
"전화 좀 해줘..."
상원이 핸드폰을 이마에 대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상원은 놀라서 폴더를 열고 여보세요 하고 소리쳤다.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조석희?"
[...]
"여보세요? 안들려?"
[잘 들려요 선배]
낯설음과 낯익음을 동시에 들려주는 목소리였다.
"...김이경?"
[와, 그래도 제 목소리 단번에 맞추시네요]
"...."
자신을 선배라고 부르며 전화할 인간은 지금으로서는 조석희를 제외한다면 김이경 하나뿐이었다. 얘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상원은 골치가 아파왔다.
"왜 전화했어?"
[선배 너무하시네요. 오랜만에 전화한 후배한테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시다니]
후배도 후배 나름이었다.
상원은 그때 김이경이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아직까지 소름이 돋았다. 사람 좋고 똑똑하다고 생각한 후배가 뒤로는 이런 저런 일들을 꾸민 것이
영 꺼림칙했다.
"무슨 일인데. 용건이 있어서 전화한거 아니야?"
상원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고 다짐했다. 조석희도 그랬다. 김이경은 성격이 뱀 같아서 절대로 믿으면 안 되는 놈이라고.
[축하드리려고 전화했어요]
"어? 무슨 축하?"
[선배, 합격하신거 축하드리려고요]
"헉.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합격 발표가 난지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가족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합격소식을 아는 것은 조석희뿐이었다.
동석이나 승완이 대진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전처럼 대학 운동장 강당 앞에 명단이 붙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으로 주민등록번호나
수험번호를 눌러서 확인이 가능할텐데, 어쩐지 오싹했다.
[그 정도 쯤은 뭐, 그런데 선배 왜 갑자기 서울대로 지망학교를 바꾸신 거예요?]
"사사받고 싶어했던 교수님께서 퇴임하셔서.... 그냥 어쩌다 보니"
이유를 말하면서 상원은 뺨을 긁적거렸다. 어쩌다보니가 아니었다. 조석희는 상원에게 같은 학교 가길 요구했다. 미국에 있는 대학을 포기하고 이곳에 남기로
했으니 그정도는 당연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 게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상원이 사사받고 싶어 했던 교수님도 건강상의 문제로 퇴임하셨기 때문에 그로서는
연대를 고집할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상원은 망설임 없이 조석희가 가고자 하는 학교로 지망학교를 변경했다.
[아무튼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다. 그런데 너는..."
상대가 아무리 날고 기는 김이경이라 할지라도 직접 대학 합격 여부를 묻기가 조금 그랬다. 게다가 김이경은 한 문제라도 실수하면 떨어질 수 있는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과를 선택했을 테니 말이다.
[학교에서 뵙겠네요]
"...."
얄미울 정도로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들으니 잠시라도 그런 걱정을 했던 자신이 바보같아지는 순간이었다.
"그, 그래 축하해 잘 됐다"
그래도 축하는 해줘야겠다 싶어 상원은 김이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선배 뉴스 안보셨어요?]
"응? 뉴스는 왜?"
상원은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뉴스를 보기는 했지만 챙겨보는게 아니라 시사 상식은 대체로 신문을 통해 얻는 편이었다.
[저 이과 만점자로 인터뷰해서 뉴스에 나왔는데 못 보셨구나]
"헉 전국에 한명 있다는 만점자가 너였어?"
문과에 비해 유독 이과 과목이 어려워 등급 기준이 십여 점이나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이과에 만점자가 딱 한 명 나왔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름아닌 김이경이라니.
[선배 서운해요. 저는 선배가 보실 줄 알고 전날 미용실 가서 머리도 다듬었는데]
"그래? 미안, 나 뉴스는 잘 안봐서"
습관적으로 사과는 했지만 상원은 방금 자신이 사과할 타이밍이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사과를 철회해야 하나? 아니 그래도 뉴스에 까지 나온 건데
몰랐던 건 너무 했나?
[제 합격 소식이야 그렇다 쳐도, 선배 합격소식은 정말로 기쁘네요]
"으 응, 그래"
자기 합격보다 내 합격 소식이 더 기쁘다고 말해주니 이건 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데 마냥 기뻐하기에는 어감이 참 묘했다.
[그런데 이제 그럼 선배가 아닌가?]
"...."
상원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럼 뭐라고 부르죠? 형? 보통 재수생은 말 놓으니까 이름 불러야 하나?]
"...그냥 선배라고 해"
[역시 그게 좋겠네요 그럼 나중에 뵈요]
통화를 마친 상원이 폴더를 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이경과 또 학교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머리가 아파왔다.
합격 여부까지 알아내 전화를 한 정성이면 아무래도 아직까지 좋아한다는 고백이 유효한 것 같았다.
석희가 알면 난리가 날텐데.
상원은 통화목록에서 얼른 김이경의 번호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조석희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잠자? 뭐하고 있어?]
문자를 보내고 한참을 기다리니 답문이 왔다.
[술 마셔요]
어디서? 누구랑? 무슨 술 마셔! ..... 라고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만 상원은 떨리는 손으로 간결한 문장을 만들어 보냈다.
[너무 많이 마시지마. 집에 일찍 들어가고 ^^]
다음 번 답문은 바로 도착했다.
[집에서 술 마셔요]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상원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아는 한 조석희는 혼자 청승맞게 술을 마실 인간이 전혀 아니었다. 본인 입으로도 혼자 술 마시는 짓은
안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대체 누구랑 술을 마신다는 것이지? 차라리 밖이었다면 바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가볍게 한잔 하는거라 치지.
집에서 누굴 불러서 술을 마셔? 조석희가 친구를 집으로 데려올리는 없잖아!
상원은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입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거실에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들끼리 사이좋게 술잔을 나누며 여담을 즐기고 있었다.
"저 잠깐만 요 앞에 갔다 올게요"
"이 밤중에 어딜 간다고?"
안주를 준비하고 계시던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상원은 대충 얼버무리며 금방 오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너도 한잔 같이 하자. 이제 상원이도 어른이니까 한잔해도 되겠지"
상원의 할아버지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저 나가봐야 하는데...."
"그럼 어른이 주시는 거니까 한잔만 받고 가렴"
어머니가 상원의 등을 떠밀며 웃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어른들의 기분을 맞춰드리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께서 주시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였다.
고개를 돌리고 술잔을 쭈욱 들이켜자, 옆에 계시던 외할아버지도 술병을 내밀었다.
"외할아버지 술도 한잔 받아야지"
"네"
상원은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외할아버지께서 주시는 술도 받아마셨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도 자신의 술도 받으라고 하시며 웃었다. 상원은 약간 알딸딸한 기분으로
아버지께서 내미시는 술잔을 공손하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