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8)
  • “누나. 어떤 사람에게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면 어떻게 해야 되?”

    한참 결혼식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는 누나가 -둘째형이 죽을각오로 고했다. 웨딩드레스와 첫날밤을 위해서 조금만 다이어트 하라고.- 생식 쿠키를 아그작거리고 씹어먹다가 나를 본다.

    “언제한건데?”

    “작년 여름에.”

    “모르는 척하고 놀면 되지.”

    평생 괴로워하라고 하고 13층에서 떨어졌는데?

    “근데 그 일로 아직도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사과하고 같이 놀지.”

    누나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근데, 누나. 같이 놀면 또다시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으면?”

    “또 사과하고 같이 놀지.”

    “누나, 성의가 없잖아!”

    심각한 내게 해준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내 말에 누나가 피식 웃었다.

    “넌 너무 진지하고 많은 생각을 해서 탈이야. 사람은 누구나 고유한 면이 있는거야. 그리고 그 면면은 같은 척하면서 사실은 틀리고, 아예 정반대인경우도 있지. 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같이 살아가야 하잖아. 그때 그때 잘못은 화내고 사과하고 풀고 같이 노는거야. 그렇게 살아가는거지.”

    “그렇게 간단해?”

    “간단히 생각하자면 간단하지. 예를 들어서 말이야, 우리 회사 영업부에 김대리가 있는데 맨날 지가 일을 끌어안고 있다가 막판에 막판이 되서야 이사람 저사람에게 온갖 민폐를 끼쳐대며 그 일을 뿌리는 사람이 있거든. 근데 사실 그때쯤되면, 우리도 뭔가 하고 있을거아냐.”

    누나는 영업지원팀이다.

    “늘 그런식이니까 화나곤 하지만 그때 화내고 도와주면 되. 뭐, 우리같은 경우 월말에는 다른팀보다 빨리 일을 정리해놓지. 김대리가 뿌릴 일을 예상해서 말야. 사람과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그런거야.”

    “그건 뭔가 좀......그렇잖아. 좋아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면 싫어하는거지. 늘 당하고 늘 참는다는건.......”

    “화냈잖아. 밥도 사라고 하고. 그거면 됐지. 그 대책없는 습관빼면 좋은 사람이거든. 친절하고.”

    “하지만 늘 반복되면 진전이 없잖아.”

    “하지만 민형아.”

    누나가 생식쿠키를 하나 더 뜯으면서 생긋 웃었다.

    “사람은 일도 공부도 아닌걸. 그저 옆에 있어준다는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건데.”

    “그렇게 치면 나쁜 사람은 하나도 없겠다.”

    “어머, 아니지. 반성을 아는 부분이 중요한거야. 밥이라도 사잖아. 당연하게 여기는건 아니잖아. 그거면 된거지. 요는 장점과 단점을 보고, 장점이 더 많다고 느껴지는 상대와 맨날 화내고 사과하고 또 놀면 되는거지.”

    아, 그런가.

    신우도 반성은 잘했던 것 같기도......

    민정이와 헤어지고 나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데 신우와는 바로 이모양이다. 마음이 흔들려버린다. 이건 사랑일까. 아니,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 해야될까.

    “넌 너무 따져, 이민형. 그거 알아? 사람은 순도 100% 산소에선 죽어버려. 사람은 좀 오염되야 살 수 있는 동물이라고.”

    사람은 좀 오염되야 살 수 있는 생물이다. 

    그 말이 묘한 여운을 남겼다.

    평생 괴로워하라는 말에 정말 평생 괴로워할것처럼 힘들어하는 신우를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충격,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애정이었다. 내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생존조차 유지할 수 없어보이는 나약한 신우가 안타까우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실 예의상 표현으로 정말 무척이나 가슴이 떨렸다. 그 뼈밖에 남지 않아 가느다란 허리를 뒤에서 보면서,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여전히 너는 나를 사랑한다.

    어쩌면......너는......나를 영원히 좋아할지도 몰라.

    골라잡은것이든, 아니든간에 - 영원히 나 한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런 것이 의미가 있을까?

    “누나 사랑이 뭐야?”

    “너 오늘 고난이도 질문이 많다; 사랑은 역시.......”

    누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것. 그게 사랑이지.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내게 사랑은 그래.”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것.

    이 감정은 신우가 아니면 안되는가?

    안된다.

    신우가 아닌 누구에게도 이런 감정은 들지 않아. 이런 감정이 들려면 십년전에 나와 친했고, 그때 배신도 좀 당했고, 십년뒤에 다시만나서, 평생 괴로워하라는 말을 하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야 가능한거다.

    그럼, 대충 사랑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누나, 그러면....... 이 감정은 사랑일까?”

    내가 내 마음을 죽 말하자 누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진다. 대충의 사건을 전부 추려내고 내 마음만 말했는데도 누나는 비상하게 내가 말하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다.

    “미쳤어, 이민형!”

    다섯시간을 누나에게 설교들었더니 눈앞이 핑 돈다. 알고보면 똑같은 소리인데, 누나는 단어를 바꿔가며 포장을 달리하여 같은 말을 하는데 대단한 재주가 있었다. 그러고도 모자른지, 둘째형에게 나를 맡기고 신혼집에 들일 냉장고를 사러 나가버렸다.

    “괜찮냐?”

    내가 불쌍해보인건지 형이 물어보며 담배를 물었다.

    “형, 나도 담배.”

    “담배폈냐?”

    “가끔.”

    형은 더 이상 말없이 담배믈 물려주고 불도 붙여주었다. 말보로 맨솔의 싸한 향이 입술끝에서 맴돈다. 연기를 뱉는걸 보더니 형이 비웃었다.

    “겉담배냐. 담배가 아깝다.”

    “어떻게 알았어?”

    신기해서 물어보자 형이 몸소 담배연기를 뱉어보이며 설명해주었다.

    “봐바. 이 형님의 담배연기를 곧장 뻗어나가잖냐. 마치, 스포츠카처럼. 근데 네 연기를 봐, 달구지처럼 흐느적흐느적 퍼지잖냐.”

    ......민주누나와 쌍둥이라는게 이런데서 가끔 보인다.

    저런 현란한 비유법이라니.

    “앗, 너 나랑 민주를 동급취급한거지?! 아아아, 나도 이런 내가 싫어어-”

    어떻게 안걸까? 내 얼굴을 보자마자 형이 코믹하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킥킥거리고 웃는데 형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 개새끼가 어디가 좋냐?”

    개새끼 = 이신우, 이 공식을 깨닫는데 무척 오래걸렸다.

    “......어디가?”

    “그래, 어디가 좋냐고. 너 신우 좋아한다고 해서 새신부 염장 지른거 아냐. 그러니 말해봐. 어디가 좋아?”

    형의 회전의자에 앉아서 빙글빙글 돌려봤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중에 신우를 떠올린다. 신우의 어디가 좋으냐고.

    "네 형이자, 그 빌어먹을 사건의 목격자로서 그 새끼의 장점을 좀 알고싶은 심정이다. 그러니 다 말해봐. 너가 생각하는 장점이 단점이 될 수 있다는걸 알려줄테니까.“

    형은 진지했다.

    아......장점, 생각났다.

    “밥을 잘해.”

    형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곤거리듯이 물었다.

    “잘해?”

    “응.”

    “얼마나?”

    “엄마보다 더.”

    “.....걔 세컨드는 필요 없대냐?”

    담배를 뻑뻑피는 형의 얼굴에는 ‘밥을 잘하다니 부럽다.’라고 쓰여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장점은 형이 생각해도 장점인가보다.

    갑자기 헛, 하고 제정신을 차린 형이 자신의 목적을 되새기듯 내게 소리쳤다.

    “또!”

    “돈도 잘 벌겠지. 후계자니깐.”

    “......그렇지.......”

    동조하던 형이 다시 헉, 하고 신음을 뱉더니 비장하게 말했다.

    “또!”

    “날 소중히 생각해. 아파트에서 내가 떨어지겠다고 했더니 자기 때문에 이러는거니까 자기가 대신 떨어지겠대.”  

    그 말을 들은 형이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미친 새끼아냐. ......잠깐, 방금 뭐라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형을 보면서 나는 무안해졌다. 우리집 식구들은 아무도 아파트 추락에 대해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신우가 밀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다시한번 말했다.

    “내가 떨어지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대신 지가 떨어지겠대.”

    “......신우가 민게 아니고?”

    “아냐.”

    “신우랑 몸싸움하다가 떨어진것도 아니고?”

    “아냐.”

    형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어가는 것을 나는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미쳤구나, 이민형.”

    형이 바로 내게서 등을 돌렸다. 내가 보기가 싫은 모양인가보다, 고 생각하고 나가려는데 형이 “기다려.”라고 저지했다.

    “지금 널 보면 주체가 안될 것 같다. 담배 한대 피고, 다시 얘기하자. 난 지금 정리가 필요해.”

    나는 다시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고 형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마음이 답답한지 얼굴도 파리해진 형이 세 개피를 연속으로 피고야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왜 떨어졌냐?”

    “신우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뭘?”

    “자기 뜻대로를 위해 타인을 무시하면 안된다는걸.”

    “다른방법도 있었잖아.”

    “......강간당하기 직전이었는걸.”

    다시 형이 손을 올렸다. ‘주체안됨. 담배필요. 정리요망. 기다리주세요.’다.  고개를 돌린 형이 다시 담배를 뻑뻑 펴대기 시작했고, 창문으로도 다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 때문에 방안의 대기는 회색이 되었다.

    “......강간?”

    "어.“

    “씨발,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뭔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이민형, 우선 물어보자.”

    형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가 죽으면 남겨진 식구들이 슬퍼할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거냐?”

    없었다.

    그 당시에는 너무 화가나고 머리끝까지 열받고, 걔다가 마지막에 대신 떨어지겠다고 말하는 신우가 가엾고 사랑스러워서, 식구도 친구도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너무 열받아 있어서.......”

    스스로도 변명하는 투라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형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어졌다. 막내로서 나는 형제들의 비정상적일 정도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건 배신인 것이다.

    신우가 내게 한 것 같은, 그런 배신.

    “꺼져!!!!!!!!”

    형이 내 멱살을 잡고 끌어냈다. 나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안맞어서 다행이라는, 안일한 생각만 들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는 형을 말려줄 사람이 없다. 형은 나를 현관에 내동댕이치더니 문을 쾅, 하고 잠가버렸다. 철커덕, 하는 걸쇠소리가 들리자 나는 깨달았다.

    이 추운 날, 십원짜리 한개 없이 쫓겨났다는 것을.

    스웨터 한 장이 전부인 차림인지라, 너무너무 추웠다. 아직 삼월이지만, 그래도 춥기는 마찬가지다. 골목길을 벗어나는데도 너무 추워서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공중전화를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핸드폰이 워낙 일반화되다보니 옛날에는 눈만 돌리면 보였던 공중전화가 이제는 아무곳에도 없다. 결국 이십분을 걸어서 지하철역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긴급통화를 누르고 콜렉트콜로 전화를 했다. 하면서도 망설였다. 이래도 되는걸까. 

    -여보세요.

    차가운 목소리. 결코 내게는 단 한번도 들려주지 않은 너의...... 감정없는 목소리.  이렇게 너에게 전화해도 되는걸까. 나는 지금 집에서 쫓겨났을 뿐이야. 이 감정은 사랑과 가깝지만 사실은 사랑이 아닐지도 몰라. 그래도 너에게 전화해도 되는걸까. 말라비틀어져서 메마른 너에게.

    “나야.”

    그렇게 말하고 재빨리 덧붙였다.

    “......나, 민형이야.”

    수화기 저편에서 숨을 헉 들이쉬는게 들린다. 긴 침묵, 추위와 강박감에 못 이겨 먼저 입을 연건 나였다.

    “나 쫓겨났어. ......너희집에서 좀 재워주면 안될까.”

    -......왜 쫓겨났는데?

    진심으로 의아한 투다. 우리집의 과잉보호를 철저하게 몸으로 경험한 신우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럴만한 짓을 해서. -왜, 너한테 피해갈까봐 겁나?”

    난 왜 이렇게 못되먹은 걸까.

    이 와중에서도 신우에게 이런거나 물어보고 있고. 하지만 궁금하다. 이젠 너무 힘들어서 나하고는 눈도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는 신우가 아닌가. 다시 힘들어질까봐 겁이 나지 않을까.

    -아니, 전혀. 피해 따위는 얼마든지 괜찮아.......그저......

    그저?

    -어디야?

    신우는 그저 뭐가 어떻다는 건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너무 춥고 정신적으로 지쳐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신우를 기다리면서 형을 생각했다. 누나도 엄마도.

    모두 다 기가 막혀 하겠지, 내가 스스로 아파트에서 떨어진걸 알면. 형의 그 충격받은 얼굴은 아마도 신우가 상관없다고 했을 때의 내 얼굴과 같을 것이다.

    마음이 무거웠다.

    자꾸.....마른침만 삼키게 된다. 

    신우에게 뭐라고 해야할까.

    널 사랑하지 않아.

    아니, 이게 사랑인지 어떤지 모르겠어.

    분명히 내 마음을 표현할 말이 있을텐데......그 말은 도데체 내 머릿속 어디서 잠자고 있는걸까. 이건 좋아한다는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나 누나나 친구를 좋아하는 것 같은 좋아함이 아니니까. 하지만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걸리는 구석이 있다. 신우와 똑같은 감정이 아니니까.

    그럼, 이 마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랑은 사랑인데, 신우와 같은 사랑은 아닌, 이 마음을.

    “민형아.”

    어느새 온 신우가 쪼그려 앉아있던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나는 웃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저 알고있는 것은......

    주위사람들이 쳐다보던 말던 나는 신우를 끌어안았다. 뻣뻣하게 굳어 마주 안아주지도 못하는 신우는 느끼며 나는 더욱 그를 꽉 끌어안았다. 숨조차 쉬지 못하는 그를 올려다보고 웃었다.

    “......잘 지냈어?”

    내 말에 그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데쟈뷰. 언젠가 이런일이 있었던 것 같다.

    “너는?.”

    “.....대충.”

    이 다음에 내가 할 말이 뭔지 알고있다.

    “나는 별로였어.”

    그를 다시만났던 그 날,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가 나를 끌어안았었다. 그때 우리는 지금과 반대로 묻고 답했다. 나는 그때 뭐라고 말했던가.

    “......보고싶었어.”

    신우가 나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정도로 강하게. 그래도 무섭지 않은 것은,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일것이다. 과거의 그 기가막힐정도로 으스스한 사건도, 그의 멋대로인 사랑도, 지금이라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을것만 같을정도로.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은......기분에 눈을 감았다.

    저녁에 신우의 집을 방문한 것은 누나였다.

    “민형이.”

    한동안 밥을 먹지 않아서 냉장고가 엉망이라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모든게 썩고 있었다. 팔을 걷어부치는 나를 말리며 신우가 웃었다. 튀어나온 광대뼈가 도드라져 순간, 얼마나 밥을 안먹은거냐고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했다. 신우가 마트에 전화해서 대충 주문하고, 냉장고를 치우는 사이 나는 씻고있었다.

    마트에서 사람이 온것이라는 생각에 신우가 문을 열었을 때, 마침 나느 다 씻고 신우의 큰 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 거실로 나오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서 있는 신우가 이상해서 돌아본 현관에는, 신우의 어깨너머로 분노한 누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민형, 이리 와. 그리고 이신우, 분명히 필요불가결한 일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노한 목소리가 나직하지만 강렬하게 귀를 치고 있었다. 적의를 넘어선 살기가, 그 목소리에 진하게 퍼져있어서 나는 멀리서조차 움찔했다.

    “이 추운날, 돈 한푼 없이 코트도 안 입은 애를 쫓아내서 구조하러 간게 필요불가결한 일이 아니면 뭡니까?”

    신우도 어느정도는 동요하리라고 생각한 내 예상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도 화가 나 있었다. 그래도 그 뒷모습 바라보고 있자니 학교에서의 비참해보이던 모습에서  꽤나 당당해져 있는지라 다행스러웠다.

    “......그건 이쪽이 잘못했어. 구조해준건 고마워. 이제 민형이하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누나는 하나도 안 고맙다는 말투로 느릿하게 말했다. 이 이상 지체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서 나도 주섬주섬 현관쪽으로 나갔다. 아까 신우가 옷을 세탁기에 넣어버려서 신우의 옷 그대로 입고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우를 스치려는 순간 신우가 팔을 들어 제지했다.

    “기억나세요? 미국가기전에 제가 했던 말. ......이젠 십년도 넘어서, 기억이 안나시나요?”

    천천히 누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분명히 말씀드렸죠. 다음에 만날때는 내것이라고. 기억나세요?”

    ......저게 언제 이야기인지 나는 모른다. 소름이 끼쳤다. 신우는 진심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다. 숨이 막히지만, 그래도 신우가 나를 해하려고 드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신우의 사랑은 분명 일그러져있지만, 그건 신우라는 사람 자체가 일그러져있기 때문일것이다. 

    “이 개자식이-!”

    누나가 주먹을 뻗는 순간 신우는 어렵지 않게 그 주먹을 잡았다.

    “......여자라고 봐드리지 않아요. 민형이는 제 목숨보다 소중하고, 저는 어떤일에도 전력을 다할거에요. 이런 입아픈 경고도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누나를 밀어넘어뜨리고 신우는 내앞에서 현관문을 탕하고 닫았다. 순간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누나와 멍한 나는 순식간에 철문을 사이에 두게 되었다.

    “가고 싶어?”

    신우가 나를 쳐다보지 않고 묻는다. ......그러고보면, 신우는 대답이 두려울 때는 꼭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한다. 여러모로 애같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갔으면 좋겠어?”

    “아니라는거 알잖아.”

    “......가고 싶다면 보내줄거야?”

    내 말에 신우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응.”

    “왜?”

    “네가 또 떨어지게 둘 순 없으니까.”

    나는 그 악몽의 일요일, 스스로 떨어지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탈출로라고. 너의 집착을 떨어뜨리기 위한, 너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건 정말 탈출로였나? 나는 아직도 떨어지던 그 때의 현기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재회한 너는 지나치게 달콤하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 달콤함에 떨어진다. 이제 곧 너의 손에 정착하는것도 멀지 않을일같아.

    사랑이다. 정말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떨어지게 둘 수 없어서 가고 싶다면 보내준다는 그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얼마든지 포악해질 수 있는 사람이고, 또 그렇지만 - 이제는 내가 원하면 놓아주겠다는 말이렸다. 다른 사람도 정하지 않고, 다른 사랑도 하지 않고, 매일같이 말라가면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내가 원한다면, 내가 알지 못할 고통속에 있겠다는 말일테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다. 그 사람의 모습 한가지 한가지에 가슴 뛰어본적도 없고, 그 사람이라면 무조건 아름다워 보이는 콩깎지도 경험해 본 일이 없다. 하지만.......

    깊이가 다르다 할지라도 분명, 이 감정은 사랑일 것이다.

    색이 틀리다 할지라도, 이런 마음을 사랑이라고 사람들은 말하는 것일테다.

    “이신우.”

    새햐얗게 질리 얼굴로, 이름을 불리자 돌아보는 신우에게 손을 뻗어 그 코를 쥐고 비틀었다.

    “안 가.”

    내 말에 그가 안도한 듯이 환하게 웃었다.

    “응.”

    “......이러고 가면 어쩌려고 그렇게 웃어?”

    바로 안도하는 그를 놀려주려고 한 말이었지만, 그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가 믿으랬어.”

    물론 사람이 말하는건 믿어야 한다. ......근데 언제 그런말을 했더라?

    “언제?”

    “작년에 커피숍에서. 밀크티를 마시러 간 곳에서.”

    그런적이 있었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얼굴에 의아함을 깨달은건지, 신우가 열심히 설명했다.

    “너 학원가서 내가 지하철 앞에서 기다리는데, 숯검댕이 눈썹자식과 같이 와서....... 그래서 나랑 같이 커피숍갔잖아.”

    숯검댕이 눈썹자식이 누구냐?

    ......한참만에 학원이라는 힌트까지 얻어서 겨우 준형이가 떠올랐다. 서로 입시를 치르고나서는 별로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되버려서 더욱 기억이 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 그때. 응.”

    하지만 내가 무슨말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당연하게 기억하고 있는 신우가 신기할정도로. 다시 초인종이 울리자 신우가 밖을 한번 내다보고는 문을 열었다. 마트에서 배달온 것이다. 어느새 누나가 없어진걸로 보아서는, 누나는 나한테도 진절머리가 난 건지도 모른다.

    역시 신우의 김치찌개는 맛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