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밤새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 학원을 가려는 나를 붙잡은 것은 밤새도록 내 마음을 풀어주기위해 답지않게 열변을 토하다 제풀에 떨어진 신우였다.
“.....어제는 얘기하지 못했는데.”
안색이 창백한 것이, 어제 너무 힘들었던 모양이다;
“여자는 안돼.”
현관문앞에서 신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미 모든 기력을 잃어버린 나는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여주고 집을 나섰다. 뒤에서 신우가 “저녁은?”라고 물어보길래 “접싯물.”라고 대답해주었다. 코박고 죽어버릴란다.......
.......이게 뭔말인지 신우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건 학원에 거의 도착하고 나서였다.
“말도 안돼, 이민형! 정말로 안하겠다고?”
“응.”
준형이의 오버스러운 경악에도 담담하게 대답해주자 준형이 어깨에 기대여왔다.
“어이 친구, 자네 혹시 삐모 아니지?”
“......뭐라고?”
“삐-모 말야. 호삐-라고도 하는!”
호모.
......최소한 신우는 그럴지도 모른다.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에 온 몸이 경직되었지만 여기서 들키면 안된다는 결의만으로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아냐.”
나는 아냐.
“......뭐, 그럼 신우는 어떻대?”
신우는 어떻다니?
지금, 준형이가 뭘 알고있는 건가?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무서워. 준형이는 왜 웃으면서 저렇게 묻고있지? 목 안쪽이 따끔거린다. 얼굴 한쪽이 당겨온다. 웃어야 하는데......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야, 너 표정이 왜 그래? 신우도 미팅이 싫대?”
......엥?
“신우도 싫으면 다른 놈을 구해야 하나.......?”
......잠깐, 이민형. 침착해, 침착해. 뭔가......뭔가가.......
“무슨말이야, 신우가 뭘 어떻다는건데?”
“미팅말야. 안 물어봤어?”
......그걸 왜 물어봐야 해?
“......안물어봤는데.”
"야, 네가 안되면 대타라도 구해놔야지. 아아.......어쩌냐.“
너무 놀란탓일까. 준형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괜히 신경질이 났다.
“아 몰라, 알아서 해!”
한번 선을 넘으면 그 뒤는 일사천리,라고 했다. 나는 자주 신우의 손에 방출하고는 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나는 조루는 아니지만 빠르다......는 거였다. 신우를 상대로 좀 연습이라도 해두어야하지 않을까. 잠깐 우스운 생각을 했다가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쯤에서 그만둬야 해.
마음속에서 경보가 울린다. 시야를 자극하는 새빨간 싸이렌 불빛이 보이는 듯 하다.
여기서 그만둬야 해.
“민형아, 오늘은 김치찌개야. 괜찮아?”
......저 김치찌개만 먹고 그만둬야지.;
그러나 그만둬지지는 않았다. 신우야, 하고 불러세우고 다시 고개를 흔드는 일이 두어번. 그 때마다 신우도 왜냐라던가 이야기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웃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났을 뿐이었다.
마음에 얹은 돌덩이는 가면갈수록 무거워져 가고, 죄책감은 더욱 나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쾌락과 편안함, 그리고 도덕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은 편안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최소한, 그렇게 보였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서서히 안심하시기 시작하셨고, 내 공부는 궤도에 올랐다. 원하면 G대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대로 계속된다면- 진로담당하는 선생이 말했다.
아슬아슬한 긴장선이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느껴질 무렵이었다.
우리의 거짓 설탕뭉치가 떨어져나가고 속까지 발랑 드러내게 된 것은.
-아마 미팅이라는 말에도 좋게 넘어갔던 것을 나는 자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것이다. 신우와 나는 잘해나갈 수 있다고, 이건 어린 열기일 뿐이고, 신우는 곧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나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신우라는 남자가 나에게 무조건 잘해주는 것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 남자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이 남자의 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어린나이에 받은 사랑은 강렬했고.......
그것은 골라잡은 사랑이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다. 한편으로는, 내게 그런 매력이 있어서, 이 남자가 어릴때부터 내게 계속 이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버린 것이다. 달콤함이, 어린시절의 차가운 상처도 그저 추억으로 남겨준 것이다.
머릿속의 경보장치는 설탕비로 인해 녹슬었고, 나는......죄책감과 이러면 안되다는 애매한 도덕심. 그 정도의 기분으로 신우를 대하고 있었다. 신우도 어딘가 내 마음을 느끼고 있었을테지만 그는 내게 여전히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안심했다.
이제는 안녕을 말해도 될 것이라고.
그가 아무리 미친 듯이 날뛰어도 나는 그를 통제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그 일요일은 악몽으로 기억된다.
눈부신 햇살로 눈을 뜬 아침은, 아직 초여름이라 그런지 선선했다. 눈을 떴을 때 신우는 어딘가 바빠보였고, 전화기를 붙들고 얼굴을 찡그린채로 차갑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다시 어디론가로 걸었다.
“Hello. Can I speak to Michale Ranchen? Yah......This is Jacky in Korea. OK, I'll wait, ......Ah, Really? All right.......Can I leave massage? OK....... This is Jacky Lee. I want his call ASAP. No, That's enough. Thank you."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를 유창히 말하며 손짓까지 해대는 신우를 보고 있자니 저 아이가 정말로 나와 또래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 모습이 내게 신우에게도 신우의 생활이 있음을, 신우도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그 역사속에는 내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토록 잘 자라서 내 앞에 당도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차피 그동안 살 수 있었다면 그 이후도 가능한 것 아닌가.
음식과 쾌락에 빠져서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이러는건 예의가 아니야.
“Morning."
"굳 모닝.“
같이 인사하면서 신우의 미소를 맞았다. 마지막, 이라고 생각하자 서글퍼졌다. 신우는 다시 누군가를 골라잡을까. 그 상대에게 이렇게 대할까. 그렇다면......그걸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뭐 먹을래?”
간만의 휴일인지라 신우가 마트를 가자는 뜻으로, 웃으면서 기지개를 펴는걸 보았다. 큰 키의 신우가 기지개를 피는데도, 의외로 유연했다. 웃음이 나왔다. 즐겁게, 정말로 기분좋게, 안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신우.”
내 말에 그가 기지개를 펴면서 나를 본다. 찡그려진 한쪽눈이 귀엽다.
“좋아해.”
멍해진 얼굴이 의외였다. 귀엽다고 다시한번 생각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잘생긴얼굴에서 눈이 천천히 깜빡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아. 난 그만 집에 갈래.”
그 얼굴이 차갑게 굳어져내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한번 말했다.
“널 사랑하지 않아. 네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던 난 호모가 아니야. 집에 갈래.”
“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신우가 웃는다. 미친 사람처럼 크게 웃는다. 얼굴을 가리고 웃는 신우 때문에 그 흔들리는 몸을 보면서 우는거도 저것과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네가 그런말을 할 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도 빠르네. 그런데 민형아, 어쩌지.”
천천히 그 얼굴위에서 팔이 치워지고, 신우가 웃으면서 다가온다. 진심으로 웃고 있어서, 내 말이 먹히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분명히 설득하면 괜찮아지리라. 날 아끼니까, 신우는 정말로 나를 좋아하니까. - 벽에 부딪치면서 그 이중잣대를 깨달았다. 신우가 골라잡은 사람이라서 싫다고 하고선, 신우가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내 말을 들어줄것이라니. 이 얼마나 지 편리한 대로의 생각인가.
잘못되고 있다.
신우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녹슬었던 경계경보가 소리지른다. 잘못된거다. 나는 잘못생각한거야. 신우는 미쳤어, 미쳤다고. 그래도 경계심과 함께 드는 어떤 안타까움은, 내가 그동안 신우와 꽤 잘 지냈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하게 해주었다.
“절대로 안돼.”
“이러지 말아봐.”
그를 밀어내려는 팔이 잡혔다. 앗 하는 사이 다른 손으로 다른팔을 잡은 신우가 내 손목을 겹처서 한손으로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아파.......!”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는데도 신우는 힘을 늦추지 않았다. 잘못 생각한거다. 나는......나는!
“소중히 해봐야 별거 없잖아. 그래봐야 너는 날 떠날뿐이잖아.”
“이신우!”
“나쁜 사람이 되어보겠어.”
“신우야!”
“닥쳐.”
신우가 낮게 웅얼거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올려다 본 그 얼굴은 내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상처입은것도, 힘들어하는 것도 아닌...... 그렇다, 마치 - 기다리는 것이 드디어 왔다는 표정이었다. 미친자식. 그는 내게 미끼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었나?
맙소사.
키스는 난폭했다. 물어뜯을 것 처럼, 내 온몸을 짓이길 것처럼 난폭했다. 달콤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폭력에 한없이 가까운 키스였다. 입술이 빠르게 목덜미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면서 아찔해졌다. 생각이 분명해지지 않지만, 신우또한 그 비정상적인 동거생활에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굳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조금 몸을 비틀자 목덜미를 물렸다.
“아팟!”
신우가 입을 떼는데 밀착된 살이 신우의 이를 따라 조금 가다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축하해, 이민형. 날 드디어 미친놈으로 만들었구나.”
“얘기 좀 해.”
“난.......돌아버릴 것 같아. 아니, 이미 돌아버렸지. 후후후.......”
내 말따윈 듣지도 않는다. 과거의 공포가 온몸을 채운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다. 그 먼 위쪽의 신우에게 아무리 소리쳐도 신우가 지 할말을 멋대로 하면서 내 말은 듣지도 않던......그래, 이런 느낌이었다. 씨발. 나는 그 때와 변했는가. 그 때와 똑같이 달콤함에 놀아나고 우월감에 이리저리 계산하면서 결국 이런 늪에 빠지지 않았나. 그도 나도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조금 커서, 조금, 그래 아주 조금, 타협의 능력을 기르게 된 것일 뿐.
“제발, 신우야. 신우야.......얘기 좀 해.”
“사랑해.”
내 말은 들은 척 하지도 않던 신우가 그렇게나 침묵했던 말을....... 나를 몰아붙이고 마음대로 결박하고 먹어버리면서, 작게 말해왔다.
그것이 폭탄의 키워드임을, 그제야 나는 알았던 것이다.
“이거 놔, 미친 새끼야, 이거 놓으라니깐!!!”
내 고함에도 그저 빙긋 웃기만 하는 신우가 나를 방으로 끌고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끌려가면서 반항했지만 힘의 격차는 셌다. 내 발걸음은 속절없이 신우에게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말도 안돼, 미친 듯한 마음과 달리 나의 육체적인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놔, 놓으라 말야! 야,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깐!”
강간이라니,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들만 해댔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침대로 밀어뜨려져서도 신우가 옷을 벗으며 웃는 걸 보아도. 아니 그 때를 틈타야 했는데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신우를 올려다보고 말았다.
곧 몸을 겹친 신우가 감미롭게 내 입술을 빨아당기는 것을 느끼면서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 방실방실 웃고 있는 그 천진한 눈웃음이, 신우가 진심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신우는 지금 나를 힘으로 누르려 하고 있다. 나를, 신우가. 신우가. 신우가. 나에게 밥을 해주고 나를 위해 기다려주고 웃어주고 자신의 시간을 맞춰주고 입술을 맞대고 그저 울기만 한 그가. 그제서야 마음한구석, 내가 이 남자의 마음을 꽤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골라잡기-라고 생각한 것은 그저 머릿속 경보일 뿐, 심장으로 닿지 않았던거다.
옷이 벗겨진다.
“이러지 마!!!!!!!”
온몸을 비틀어도, 신우의 힘은 강했다. 신우의 손이 공중으로 높이 치켜올라간다. 맞는다! 눈을 감은 그 순간, 부드럽게 신우가 내눈을 뜨게 했다.
“안 때려. 내가 너를 어떻게 때리겠어.”
공중으로 치켜올라간 손은 어느새 없다. 다시 옥신각신, 실갱이가 벌어졌다. 끝까지 옷자락을 놓지 않는 나와 잡아당기는 신우의 힘으로 인해서 내 옷은 찢어져버렸다.
“......전에 내가 하자고 했을 때, 나 사실은 이러고 싶었어. 그런데......네가 너무 당황해보여서, 할 수 없었지. 이제 선도 넘었겠다. 잘됐네.”
신우의 목소리가 조금 슬프게 들리는 것은 내 착각?
그 미소는 너무나 완전무결해서, 마치.......눈앞의 내가 그를 끌어안고 있기라도 한다는 식이다.
-그 놈은 미친놈이야.
누나의 경고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난 싫어.”
내 말을 처음으로 들었는지, 신우가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하다......그렇게 소리치던 수 많은 말을 흘려들은 신우는, 왜 울먹이느라 작아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상관없어.”
강간당하기 직전이라는 것보다.
골라잡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때 보다.
어린 마음,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죽을 것 같기도 했던 그를 올려다보며 울부짖었을 때 보다, 그 한마디가 더 쇼크였다. 입을 벌리고 그를 쳐다보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데 그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떤지.......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울고있는데.
그의 시신경은 내 모습을 어떻게 전달했을까, 그의 머리와 가슴에 어떤 모습으로 남겨주었을까.
상관이 없다고.
내 마음 따위는 상관이 없다고?
널 믿었어.
같이 살면서 다정하던 너에게 내 마음을 주었는데.
옛날의 네가 아니라고, 너를 믿었는데.
어린시절의 배신은, 정말로 배신이었다. 신우가 힘들어서 가여워서 내게 집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우는 그런 놈이었을 뿐이고.......
그 배신은 이어지고 있다.
배신자가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에.
웃기지 말아.
절대로 그렇게는 안돼.
이제, 절대로 내 마음은 네것이 아니야, 절대로! 마치 미끼를 드리우고 포획했다는 너의 눈, 거기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아, 절대로!
모든힘을 다해서 신우의 배를 무릎으로 가격했지만 신우는 침대에서 떨어지자마자 바로 자세를 잡았다. 도망가봐야 늦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베란다 문을 열고 악을 썼다.
“다가오지마, 죽어버릴거야!!”
신우의 입이 멍하니 벌어져있다. 충격받은 얼굴이다. 왜, 네 마음대로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 내가 멋대로 반항해서 놀랍냐!
“이민형.”
진지한 얼굴의 신우가 천천히 두손을 들고 항복한다는 포즈로 뒷걸음질 쳤다.
“......알았어, 안해. 안한다고. 그러니까 들어와.”
그러나 나는 다른 것이 걱정되었다. 여기서 신우가 비호같이 날라 나를 잡아 끌고 들어간다면, 나는 여기서 떨어지는 시도도 못해볼런지도 모른다. 천천히 신우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신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우리 둘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민형아, 제발 이쪽으로 와.”
“싫어.”
너도 네 말이 통하지 않는 괴로움을 좀 느껴봐.
상황의 주도권을 잡은 자의 독선을 한번 맛봐.
천천히 뒤로 간 나는 뒤에 철난간이 닿자 빙고라는 기분이었다. 이 거리면 신우가 오기전에 난간을 넘어 떨어질 수 있다. 13층. 떨어지면 난 죽지만, 화가 날대로 난 나는 죽으면 뭐 어떠냐는 기분이었다.
“민형아, 제발......내 쪽으로 와. 아무것도 안해. 정말이야, 아무것도 안해. 네가 짐을 싸는동안 차에 시동을 걸께. 집으로 바래다줄께. 제발, 그것도 싫다면 내가 이 집에서 나갈께.”
“싫어, 네 말 따위 안 믿어.”
너따위, 세상에서 제일 싫어.
넌 정말 인간쓰레기야, 최악이야.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뭐, 상관이 없어? 상관이 없다고? 너 좋을대로 하면, 내 마음도 내 상황도 다 무시해도 된다는 거냐.
배신감이 내 머릿속 경보도 내 마음도 완전히 잠식해버렸다.
“민형아......그럼, 이렇게 하자.”
신우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끊임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떨어질께.”
......뭐......?
“내가 떨어질께. 여긴 13층이야, 민형아. 하지만 난 죽지 않을거야. 난 죽어야 당연한 일들에서 살아남았으니까. 하지만 넌 안되. 넌 정말 죽어. 즉사라고. 민형아.......내가 떨어질께. 내가 떨어지면, 넌 무서워하지 않고 집으로 가면 되. 누군가 날 발견하면 그냥 몰랐다고 하면 되.”
미쳤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만에 하나 내가 정말 죽어도, 넌 괜찮잖아. 난 안돼,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난 안돼......그러니까 민형아. 제발, 민형아.“
아무말도 하지 않는 내가 허락한거라고 생각하는지 신우가 거실로 달려나간다. 거실과 안방의 베란다는 이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란다 저 쪽 끝에 신우가 나타났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베란다로 들어와 난간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한뒤 정말 올라서려는 듯 했다.
“이신우!”
내 말에 신우가 나를 바라본다.
“왜, 왜?”
“......평생 괴로워해라.”
미친자식.
죽어버리겠다고?
그냥 쩔쩔매는 꼴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엄마나 아빠나 형이나 누나를 불러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절박하다 못해 숨이 넘어가는 신우는 자기가 떨어지겠다고 하는 것이다.
배신자.
그런데.......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아릿하면서도 뛰었다. 가여워.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날 기다리는 모습도, 날 느끼게 하려고 애쓰는 애무도, 너무너무......가엽고 또 사랑스러워서.
내 마음 따위 듣지 않겠다는 그 얼굴로, 한번 내밀어주는 손에 눈물흘리는 네가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서.
신우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고있어.
둘이 있어봐야 우리의 세계는 더욱더 폐쇄적이 되고, 신우는 신우대로 미쳐가고, 나는 나대로 말도 통하지 않는 신우에게 배신감을 느낄 뿐이다.
발전이 없는 관계라면 이쯤에서 끊는게 나을지도 몰라.
어떻게......? 어떻게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그 때 미쳤던 것이 틀림없다.
평생 괴로워하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안돼!!!!!!라고 외치며 달려오는 신우에게 웃어주고, 나는 바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칼날같은 바람과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공기, 그리고 신우의 비명소리.
......괴로워해줘.
그리고 다음에 골라잡은 사람의 말을, 마음을 들어줘. 그것이 아무리 너에게 절망적인 것이어도, 너를 외롭게 하더라도. 그것들을 감수하고 기다리는, 아니면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는 용기를,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