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oraTio-119화 (119/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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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운명을 바꾸는 방법

    「... 전혀 모르겠네요.」

    린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다는 듯이 털썩 소파에 주저 앉았다. 레일은 그런 린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뭐 그렇겠지, 솔직히 말하면 생각만으로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가요?」

    「적어도 너로서는 말이야.」

    린나는 레일의 말에 발끈한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항의하듯 말했다.

    「지금 그 말, 소녀를 무시하는 것인가요?」

    「그래.」

    「하, 정말 짜증나는 사람이네요.」

    린나의 말에 레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린나는 분한 마음에 슬쩍 고개를 기울여서 레일이 작업하고 있는 모니터의 화면을 바라 보았다. 혹시 무슨 단서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레일은 딱히 가리거나 하는 반응은 보이지 않았고, 린나는 덕분에 실컷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역시 무리..」

    「그렇게나 실컷 들여다 봤는데도?」

    「저런 컴퓨터 용어같은 건 무리에요..」

    린나는 지금까지의 생활로 레인의 능력으로 딱히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몇년 동안 레인의 제안으로 지크와 제이슨이나 마리같은 여러 선생들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 결과 린나는 어느정도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나름 터득하게 되었다. 주위 환경을 생각하면 납득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레일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린나는 무료함을 느끼면서 레일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귀찮다면 알아서 대답을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에요?」

    「...」

    레일이 침묵하자, 린나는 역시 대답해주지 않는 구나 싶어서 무언가 다른 따분함을 해소시킬 수 있는 건 없는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소파에서 언뜻 보이는 부엌에 무언가가 있길래 가볼까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 나려고 하는 린나를 레일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해결책을 찾고 있다.」

    「해결책?」

    「지금 상황을 최선으로 해결 할 수 있는 해결책.」

    린나는 살짝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린나는 레일에게 물었다.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것은 무엇이죠?」

    「더 이상 희생을 일으키지 않는 해결책이라고나 할까.」

    레일은 그렇게 말하다가, 갑작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을 멈췄다. 레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린나는 그런 레일을 훔쳐 보면서, 레일의 눈빛이 갑자기 슬퍼진 것만 같아서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일이 입을 열었다. 린나는 대답없이 듣고만 있었다.

    「해결책을 찾는다기 보다는, 갈등 중이라고나 할까.」

    「갈등이요?」

    린나는 레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일은 고개를 돌려서 린나를 바라 보았다. 린나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시선에, 움찔하고 몸을 떨면서 경계스러운 눈빛을 레일에게 보냈다.

    레일은 무언가 린나를 바라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레일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다시 올려 놓았다. 살짝 틈으로 보이는 레일의 손은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갈등.. 중이다.」

    레일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

    지크는 입에 있는 달콤한 사탕을 오물 거리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거대한 대저택을 감상하고 있었다. 뉴욕에는 어울리지 않는 외관의 저택이었다. 그리고 전혀 연구소라고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관광객들이 이 부근을 지나다니다가 훌륭한 외형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떠날, 그런 모양이었다.

    지크는 대저택 뒷쪽의 나무 위에서 그저 살펴 보고 있었다. 감시카메라로 쫓기 힘든 위치였다. 저택은 꽤나 규모가 큰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안으로 진입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창문도 닫혀 있고, 커튼도 꼼꼼히 닫아져 있었다.

    지크는 그저 윌리엄 어드마이스는 마이렌이 말한 유력한 흑막같은 존재. 그런 사람이 이 곳에 사는 구나 하는 생각으로 끝냈다. 지크는 사탕을 와작, 하고 깨물었다. 사탕은 입안에서 조각조각 흩어져서는 곧 사라졌다.

    「흠.」

    충분한 단 맛에 만족한 지크는 살짝 저택을 둘러 보았다. 어딘가 창문이라도 열려 있었으면 여한이 없겠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지크의 바램이 하늘에라도 전달된 것인지 3층의 제일 오른쪽의 창문이 덜컥하고 열렸다. 지크는 움찔하면서 신경을 곤두 세웠다. 혹시나 윌리엄이 바람이라도 쐬러 나온 것일지도 모르니, 지크는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숨겼다.

    바람이 부는 순간,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크는 숨을 크게 들이 마쉬었다. 하마터면 이름을 무심코 불러 버릴 뻔 했기 때문이었다. 지크의 눈동자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 왔고, 검은 긴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흩날렸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보이는, 동양적인 색깔이지만 흰 피부가 언뜻언뜻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 지크는 브라이엇의 말을 생각하며 좀 더 보기 위해서 몸을 살짝 앞으로 향했다.

    뒷 모습은 너무나도 닮았다. 지크가 무심코 불러버릴 뻔 했으니까.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제서야 지크는 자신이 꽤나 앞으로 나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린나였다, 너무나도 확실하게 린나였다.

    순진함을 가득 담은 크고 둥근 진회색빛 눈동자가 지크를 향해 있었다. 지크는 몸을 다시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넋을 놓고 린나를 바라 보았다. 순간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크는 그 순간 브라이엇과 한 약속이 생각이 났다. 그제서야 지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지크는 몸을 움직였다. 지금은 린나의 상태를 볼 수 있었던 것 만으로 만족하기로 지크는 마음 먹었다. 린나가 무슨 생각을 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에 잡힌 듯 지크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지크는 재빠르게 자신의 몸을 살펴 보았다. 이상했다, 분명 무언가가 강하게 지크의 허리를 잡고 힘을 주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 순간, 지크는 크게 눈을 뜨고는 고개를 돌려서 린나를 바라 보았다.

    린나는 지크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린나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지크는 강한 힘에 붙잡혀서 저택쪽으로 내던져 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지크는 바닥에 내던져 지자마자 고통을 참으면서 재빠르게 일어났다. 그리고 지크는 당황한 눈빛으로 위쪽을 바라 보았다. 린나의 모습이 바로 위 쪽에 있었다. 지크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순간, 지크는 저택에 달려 있는 감시카메라의 자신의 모습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험해, 들켰다..! 제일 빠르게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는 지크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린나의 목소리에, 지크는 마법이라도 걸린 것 처럼 얼어버리고 말았다. 린나는 테라스의 난간에 발을 딛더니, 순식간에 뛰어 내렸다. 바닥에 닿기 직전 린나는 자신의 아랫쪽에 염력을 사용해서 둥실하고 부드럽게 발을 딛을 수 있었다.

    린나가 입고 있는 하얀 원피스가 펄럭였다.

    지크가 얼어붙은 채 린나를 바라 보고 있자, 린나는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면서 말했다.

    「똑같은데... 그런데, 달라.」

    린나의 눈이 반짝이는 듯 했다.

    「커! 음, 다른 사람!」

    그렇게 크게 외치더니 린나는 순수한 미소를 가득 지었다. 지크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린나를 바라 보았다. 그러다가 지크는 깨달았다. 앞에 있는 것은 확실한 린나였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작았다. 마치 4년전쯤의 린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작은' 린나는 살짝 고개를 움직여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초봄에 춥지라도 않은 걸까, 린나의 하얀 원피스가 살랑살랑 아름답게 움직였다. 린나는 지크에게 들릴 정도로 중얼 거렸다.

    「밤인데.. 자지 않는 거야?」

    「에?」

    지크는 당황해서는 린나를 바라 보았다. 린나는 지크와 눈이 마주치자 방긋하고 웃었다. 린나가 알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응! 알았어!」

    지크로서는 린나가 뭘 알았는지 몰랐다. 지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멍하게 있었다. 지크는 살짝 충격을 먹은 상태였다.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을 정도였다.

    그 순간, 지크의 몸을 보이지 않는 힘이 꽉 붙잡았다.

    너무나도 강한 그 힘에 지크는 순간적으로 압사할것만 같은 느낌을 받으며 본능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서, 그 힘을 반사시켰다. 지크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린나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린나는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린나에게 집중할 새도 없이, 이번에는 알수 없는 힘은 지크의 바로 옆 바닥을 가격했다. 아슬아슬하게 조준을 실패한 것 같았다. 옆 바닥은 어느새 움푹 파여 있었다.

    지크는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믿어날 수가 없었다. 굉장한 파워의 힘. 이것도 린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크는 지금 린나가 자신을 습격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지크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자신의 몸에 방어막처럼 능력을 흘러 놓았다. 린나의 능력이 몇번이고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이 느껴졌지만, 바로 튕겨 나갔다. 린나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라? 어라라..?」

    린나는 곤란한 듯한 소리를 내면서 몇번이고 지크에게 능력을 가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으니 린나는 꽤나 당황한 듯 했다.

    「린나, 지금 무슨...!」

    지크가 더는 안되겠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린나는 눈을 두 세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순수한 미소였다. 린나는 말했다.

    「아, 그렇지!」

    그리고 갑작스럽게 린나가 지크에게로 돌진했다. 능력을 이용한 것이 아니였다, 린나는 지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린나와 지크와의 거리는 꽤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새 린나는 지크의 앞까지 오고 있었다.

    위험해.

    지크는 생각했다.

    자신의 몸에 흘려놓은 능력은 지금 외부에서 가해지는 일정량 이상의 힘을 반사해내고 있었다. 분명 이대로 린나가 자신의 몸에 닿는다면, 린나의 몸은.

    적어도 그냥 다치는 것을 끝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다시 계산해서 능력의 세기를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린나가 코앞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크는 무의식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지크는 능력을 풀어 버렸다. 지크의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가라 앉았다.

    그리고 바로 린나의 작은 몸이 지크의 몸에 겹쳐졌다. 린나의 힘에 떠밀려서 지크는 쉽게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크의 몸 위에서 린나는 고개를 들었다. 사랑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린나는 얼굴 가득 웃음을 품고 있었다.

    「잊고 있었어!」

    린나의 순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 왔다. 그리고 지크의 몸이 움찔하고 떨려 왔다. 곧 지크의 입가에서 새빨간 피가 울컥하고 터져 나왔다. 지크는 곧 깨달았다. 자신의 가슴에 나이프가 꽂혀져 있었다. 린나가 즐거운 표정으로 나이프를 잡고 비틀더니, 곧 더 강하게 찔러 넣었다. 지크의 몸이 다시 한번 움찔 떨려 왔다.

    어째서인지, 지크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실험.」그리고 마지막으로 린나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완전히 끊겼다.

    모든것이 끊겼다.

    린나는 그런 지크의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굿나잇! '아빠'한테 칭찬 받을까나?」

    린나는 순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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