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198)
《아샨드 퇴치임무 클리어》
허무하다. 눈앞의 문장을 봐도 기쁨이고 뭐고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끝없는 정적. 의미 없는 생존. 주변을 둘러싼 결계가 풀리면서 나는 원래의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 주저앉은 나는 영혼 없는 눈으로 아샨드였던 것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은 형체다.
“······.”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전투의 소음을 가로막고 차가운 물방울이 달아오른 몸을 식히듯 적셨다. 남은시간은 라그나로크의 해방 상태는 이제 2분도 남지 않았다. 리미트 해제상태가 끝나면 나는 죽을 수도 있다. 아니, 아마 죽을 것이다. 현자의 돌을 사용한 덕분에 어쩌면 존재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떤가? 할 일은 끝났다. 이제 미련 따윈 없다.
“정말로 만족해?”
라두스의 질문이 내 심장에 꽂혔다. 한 순간 그녀의 질문에 움찔한 것은 본심으론 절대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신을 죽이기 위한 힘의 끝은 파멸이었군. 라그나로크의 이름 값하는 힘이다.”
나는 라그나로크의 힘을 전부 개방한 대가로 죽는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아. 사실은 미련이 많으니까.
“죽고 싶지 않다고.”
“아저씨······.”
라두스의 옆으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라그나로크가 미안한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가 죽는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풀죽어있어?”
“나 때문에······.”
그녀가 훌쩍이면서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똑똑 흘리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아랫입술이 일그러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려고 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나는 그녀의 이마위로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올리고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슬며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울지 마 아가씨.”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최선을 다해주었어. 네겐 정말 감사하고 있어.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저씨.”
애는 애인가. 그렇게 울고 있으면 미안하다. 괜히 짐만 짊어주는 느낌이다.
“이리와.”
나는 힘겹게 팔을 벌려 그녀의 몸을 품어주었다. 울지 말라고, 뚝 그치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달래주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감정은 고조되었고 오열이 깊어졌다.
“흐윽, 흐아아아아아앙~~!”
“기차화통을 삶아먹었나? 울음소리 한번 우렁차네.”
나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하면서 라그나로크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몇 번 문질러 준 뒤에 그녀의 코에 손을 대주었다.
“흥! 해봐.”
“······크흥!!”
시원하게 코를 풀고는 울음보 터트리기를 반복. 여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묠니르.”
이번엔 전설 등급의 묠니르가 찬란한 빛과 함께 여성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녀는 라두스와 몇 걸음 떨어진 채로 내게 다가왔다.
“말해.”
“나 이제 곧 죽는다.”
“알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그게 다야? 죽고 싶지 않다며?”
“널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알고 있어. 지난번과 같은 이유겠지. 마력담기를 하면 내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게다가 나와 마기의 상성이 맞지 않아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였고.”
“잘 아네. 그래도 미안하다. 네 주인이면서 더 이상 널 사용할 수 있는 몸이 아니게 되었으니. 그동안 고마웠다.”
인사는 이 정도면 되겠지. 묠니르도 그 이상의 감상도 필요 없었는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것만으로 끝냈다.
“전부터 궁금하던 게 있는데 혹시 알고 있어? 유물 아이템과 전설 아이템의 차이점.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혹시 그거······.”
“유물 아이템?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단 하나야.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아이템으로 알고 있어. 그건 왜 물어봐?”
“아니. 딱히 큰 이유는 아니야.”
나는 목에 걸린 구미호 모양의 목걸이를 내려다보고 조용히 웃었다.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 아이템. 묠니르도, 할아버지의 모루도, 미호가 내게 남겨준 마지막 선물도. 이건 시간을 관장하는 관조자가 결정한 운명의 수레바퀴였다. 나는 그동안 살면서 대면한 모든 위화감을 씻어냈다.
“묠니르.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네가 죽으면 더 이상 자아를 유지할 수 없어. 주인을 잃은 평범한 망치로 돌아가겠지.”
토르도, 나도 없다. 그녀의 자아를 유지하는 마력 공급원이 끊기게 되었으니 묠니르도 이젠 그저 강한 아이템이 될 뿐이다.
“라그나로크 네게 부탁이 있다.”
품안에서 훌쩍이는 라그나로크를 겨우 떼어내며 바드가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곧 소멸 할 거야. 어쩌면 존재했던 흔적마저.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내 무덤 하나만 만들어줘.”
오래전 이데아트로가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나도 흔적을 남기고 싶다. 위대한 대장장이나 영광의 영웅 같은 대단한 호칭 따윈 필요 없다. 그저 이름 없는 자로서 이 세계에 남겨지고 싶다.
“묠니르. 괜찮아?”
함께 있어달라는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묠니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말이야······.”
소곤소곤. 바드는 라그나로크의 귓가에 긴 몇 마디를 남겼다. 그 말을 들은 라그나로크의 표정은 놀라움과 안쓰러움, 그리고 무표정으로 교차되었다. 바드는 천역덕스런 눈웃음을 지으며 곧, 손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소멸되었다.
“내가 없으면 라두스 너도 사라지는 거지?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줘서 고맙다.”
너희들에겐 진심으로 감사한다.
빗속에 남겨진 것은 바드를 뒤따라 사라져 가는 라두스와 묠니르의 형상, 그리고 라그나로크 뿐이었다.
“어라? 여긴 어디? 내가 왜······.”
제일먼저 기억을 잃은 것은 라그나로크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묠니르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라그나로크. 나와 라두스는 곧 사라져.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뭔지 기억나?”
라그나로크는 라두스의 앞에 놓여있는 망치와 모루. 그리고 구미호 조각이 새겨진 아름다운 목걸이를 넌지시 바라보면서 침묵했다. 잠시 후 그녀의 울대가 조금 울리더니,
“응. 알 것 같아.”
아무것도 기억안나지만, 가슴속에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사라진 것 같지만,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아.’
묠니르는 “그렇군.”하고, 안도함과 동시에 젖은 금발을 어깨 너머로 넘겼다.
“부탁한다. 그 남자와, 우리들의 마지막 자리를.”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금빛 찬란한 섬광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녀의 소멸을 의미하는 마지막 불빛이 라두스와 라그나로크에겐 황홀해 보였다.
덩그러니 남겨진 라두스와 라그나로크. 어린 그녀는 이상하게 아파오는 가슴을 움켜쥐며 괴로운 듯이 얼굴을 구겼다.
“언니. 가슴이 너무 아파요······.”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도 시간이 없어. 봐. 사라져가고 있잖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물건들을 볼 때마다 머릿속이 쿵쾅거리는 것 같아.
라그나로크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적당하게 부풀어 오른 돌무덤을 만들었다. 무덤의 가장자리엔 황금의 모루를 올려놓고 그 위에 화려한 빛을 뿜지 않는 전설의 망치를 놓았다. 그 손잡이엔 구미호 조각이 새겨진 목걸이를 크로스 모양으로 걸어놓았다.
마지막으로 라그나로크의 마력으로 결계 생성. 무덤은 이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공간을 왜곡시킨 터라 만지는 것조차 불가능 하다.
“······끝났네. 나도 이만 사라질게.”
“전 어떻게 해야 하죠?”
라그나로크의 암울한 질문. 애당초 인격만 남아있는 장비의 정신이다. 그녀가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함께 있어주고 싶지만 미안해. 긴말은 못해주겠지만 이것만 기억해. 나는 영원히, 잊혀진 누군가도 영원히 널 기억할거야.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 네가 행하는 모든 것에 정답이 있어.”
라그나로크는 굳게 믿기로 했다. 가슴속에 남겨진 묘한 위화감을 언젠가 반드시 알아낼 날이 올 것이라고. 그때에는 진실로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처음부터 시작하자. 차근차근, 인간들을 이해하면서 살아보자. 라그나로크의 눈가에 한동안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
《그랜드 미션 클리어. 마왕 아샨드 소멸》
《마계의 침공을 막아냈습니다. 실링과 경험치가 분배됩니다.》
인류의 최대 규모 도시 마그르스. 그곳에 남아있는 인류는 기껏해야 천만 명 남짓이었다. 전선에서 복귀한 군사들을 다 합쳐도 천만이 안 되는 처참한 숫자다. 그러나 끝으로 사람들은 엄청난 전율에 휩싸였다.
“뭐······야?”
“자네도 봤는가?”
“끝났어. 전쟁이 완전히, 완전히 끝난 거라고!”
“우린 살았어! 누구야? 누가 마왕을 죽인 거냐!”
“무슨 상관인가! 우린 살았단 말일세!”
마을의 주민들도, 오늘 하루 종일 전투에 임한 인간군과 연합군도 모두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젠 꼼짝없이 죽었다고, 인류가 망했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뜬금없이 마왕이 소멸했다니? 이만한 희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군과 연합군은 마왕의 죽음에 사기를 더해 남은 마족소탕에 온 힘을 기울였다. 잔당 소탕에 성공한 연합군들은 본래 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냥 승리에 심취해 있을 수 없었다. 수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전 대륙 곳곳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가족, 애인, 이웃주민 가리지 않고 마족의 손에 살해당했기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아, 으아아아!”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대륙은 황폐해졌고 인류는 거의 궤멸했다. 마족을 전부 물리쳤다고 하지만 몬스터의 침공에 취약한 상황에다 당장 먹을 식량도 걱정해야 한다. 인간들로선 앞날이 막막할 뿐이다. 하지만 이때 대중들 앞으로 나선 사람은,
“모두. 주목하시오!”
우렁찬 목소리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은 휘황찬란한 갑옷을 장착한 사자형 얼굴의 인상 험악한 중년 기사였다.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방금 막 마그르스로 복귀한 참인 듯하다.
“우리 인간군은 최선을 다해 싸웠소. 그 결과 마왕이 죽고 마족을 완전 소탕했지. 하지만 세상은 크게 황폐해졌고 치료하기 어려운 아픔만이 남았소. 앞날이 막막하고 암울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거요. 하지만!”
하지만 이곳에서 주저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 같은 종족이요, 인간이고, 살아남았소. 전쟁에 희생된 수많은 전사들과 무고한 시민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 상황을 이겨내고 일어서야 할 것이오!”
인간은 더 강해져야한다. 오늘날의 사건을 발판삼아 더 큰 미래로 도약해야 한다. 그것이 후세를 위한 일이요. 지금 우리들의 역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얼마 뒤 친위대와 모험가, 용병들의 지원으로 마그르스 주변의 영토는 완전히 안정화되었고 가장 먼저 식량난에 대한 문제를 모색하는 쪽으로 목적이 기울어졌고 국왕은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민주국가 체제를 형성했다.
인류는 대륙재건에 온힘을 기울였다. 황폐해진 마그르스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까지 3년. 마기의 영향으로 변화된 동식물들 생태계를 중화시키는데 1년. 가장 큰 문제였던 식량관련 문제는 제건 시작 2년하고도 반년이 지난 이후에야 해결되기 시작했다.
인류는 친위대와 모험가, 용병의 전력을 한데 뭉쳐서 연합길드를 만들었고 덕분에 인류의 전력은 크게 강화되었으며 내부로부터 단단한 기골을 형성할 수 있었다.
마을 주민들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고 마그르스는 총 5년 만에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되찾았다. 쿠샨은 국왕자리에서 내려온 (구)국왕과 함께 제정을 안정화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플로스티아 길드원과 만날 일은 한 달에 한번이 전부였다.
“국왕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고려를 해봐야겠습니다.”
“국왕이라는 호칭은 그만두시게. 나는 단지 임시 대표자일 뿐이라네.”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 부분에선 국민들의 결정에 맡기도록 하죠. 그리고 여기 이 부분은······.”
***
마그르스의 마을광장에 위치한 조그만 건물. 플로스티아 길드의 길드하우스로 사용되는 곳이다. 메인 홀에 모인 사람들은 게르덱, 카스티바, 레이나, 안토니오, 노엘, 그란다, 리나, 모나스, 마르코였다. 추가로 반가운 손님이 있다. 바로 코지부락의 주민이라면 다 알법한 소녀. 카밀라였다.
전쟁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 악착같이 버텼으나 결국 노쇠한 모친을 떠나보낸 그녀가 최근에 플로스티아 길드를 찾은 것이다.
각설하고, 마족과 전쟁이 끝난 이후로 꽤 긴 시간이 흘러 길드의 상황이 많이 안정된 상황. 겨우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으나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마음이 편한 사람이 없었다.
“오늘이 딱 그날이네. 마족과 전쟁이 일어난 시기로부터 정확하게 5년이 지난 날.”
모여 있는 누구 하나라도 그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기에, 그들은 잠자코 레이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두 사람······.”
미호와 이사벨라. 누구라도 그 두 사람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굳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는 그 두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지? 정확하게 5년 전 그날. 마왕을 누가 소탕했는지.”
그날 인간군과 연합군은 쿠샨의 지휘아래 마족과 난전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담화연과 하네스 할아버지의 지원에 힘입어 사탄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마왕을 헤치웠단 말인가?
쿠샨은 이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의 위화감을 없애야한다는 이유로 인간군이 마왕을 소탕하는데 성공했다고 거짓선포 했으며 그로부터 5년간 마왕의 흔적을 찾기 위해 비밀리에 수색부대를 파견해 극소수로 움직였다. 물론 그동안 발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마왕의 완전한 소멸이 틀림없다고 결론내린 상황이다.
“어떻게 생각해? 그날 마왕을 소멸시킨 제3자의 인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게르덱은 안경을 고쳐 잡으며 부정했다.
“솔직히 의문입니다. 그 당시 인간 중에서 가장 큰 전력을 뽐내던 사람은 쿠샨님 이외에도 극히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마족들과 싸우고 있던 상황이었고요. 대마법사 아게도브님조차 마왕을 상대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가 마왕을······.”
“미스터리지. 완전.”
카스티바가 게르덱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아?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은 위화감이 있다고!”
레이나가 답답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카스티바는 그녀를 진정시키면서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달래었다.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 설명해봐 레이나. 도대체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야? 마왕을 누가 죽이든 상관없잖아?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라구.”
“답답하니까 그래! 잊어선 안 되는 무언가를 잊은 것처럼······.”
레이나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비슷한 심정이었다. 최근 들어,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한편이 자꾸만 공허했기 때문이다. 이때 레이나는 자신의 옷을 가리켜며 말했다.
“봐. 이 장비가 어디서 났는지 기억나지? 마족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던전에서 얻은 거야.”
카스티바가 자신의 장비를 한번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이상하지도 않아?! 갑자기 던전에서 전설등급 세트장비가 나오다니? 누군가 고의적으로 갖다 둔 게 분명해. 백번양보해서 우연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 장비들이 개개인 마다 클래스며, 사이즈까지 딱 맞아! 이게 우연이야? 게다가 다들 기억에 모순이 있잖아!”
장비를 획득한 시기는 분명 7년 전. 내가 이사벨라와 코지부락에서 살았을 때시기와 겹쳐진다. 그 당시엔 플로스티아 길드를 만나지도 않았고 때문에 던전을 탐험할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난데없이 사라진 몬스터 공포증.’
“플로스티아 길드는 쿠샨이 만들었다고 했지? 하지만 불과 5년전 까지만 해도 쿠샨은 엠페러 길드의 상위랭커였어. 그곳에서 나올 이유가 없었다고. 다들 떠올려봐!”
정말로 7년 전에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던전을 갔었는지.
카스티바는 심각성을 깨달은 얼굴로 수긍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핀트가 안 맞는 부분이 있긴 하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코지부락을 떠나기 전에 나는 근처 고블린 부락에서 고블린들과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허갤. 한 마디로 레드네임의 인간에게 죽을 뻔한 기억이 있었다.
‘그땐 쿠샨을 만나지 못했어. 왜냐하면 그 당시만 해도 쿠샨님은 엠페러 길드의 랭커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으니까. 그때 나를 구해준 사람은 누구?’
더불어 최근 마족전쟁에서 다시 만난 꼬마 고블린에게 그 정도 수준의 장비를 만들어 입힌 사람은?
레이나는 모든 상황을 집약해서 하나로 이어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모든 기억과 모든 시간의 흐름이 매끄럽게 기억이 흘러가기 위해선 전혀 다른 제3자가 존재해야한다는 사실을.
“레이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제3가의 가상인물이 존재한다는 소리인가요?”
“그래. 모종의 이유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아니 인류의 모든 역사 속에서 존재조차 사라진 것이라면······?”
“역사의 모순점이 바로 잡힌다?”
말도 안 되는 부분까지 나아간 것 같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해낸 이상 나는 조금 확신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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