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Master Smith-176화 (176/202)

Master Smith (176)

쿠샨은 대다수 몰려온 엄청난 인파에 긍정의 미소를 뗬다. 그들은 왕국 지하실에 숨어있던 생존자였기 때문이다.

“결국 양떼같이 몰려올 거면서 튕기기는.”

“저희도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노인 분들과 여자들이 많으니까요.”

대표로 나선 사람은 마을 촌장처럼 생긴 늙은 엘프였다.

“흥! 아무튼 뒤에 몰려온 사람들은 전부 싸울 생각이란 말이렷다? 통성명이나 하지. 팔라딘 쿠샨이다.”

“저는 흔한 엘프 영감일 뿐입니다. 카슈빌이라 불러주십쇼.”

쿠샨은 서둘러 본론으로 넘어갔다.

“좋다. 재앙의 산 지리를 잘 알고 있다고 했지?”

“그곳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약초를 채집하러 자주 갔었습니다. 몬스터가 밀집한 구역과 마그마 지대, 원하신다면 약초가 많이 나는 자리까지 알려드립죠.”

약초엔 관심 없다. 오로지 매복을 위한 최적의 장소가 절실할 뿐.

“길안내는 당신에게 부탁하지. 지금부터가 본제인데······.”

수십만 대군의 마족과 싸우기 위해선 인간측도 그만한 전력이 필요하다.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을 전부 합해봐야 1만이 조금 안 되는 숫자. 거기서 젊은 여자들과 노인들을 빼고 나면 싸울 수 있는 전력은 기껏해야 7천이다.

“병력차이가 심하군.”

카슈빌은 걱정 할 필요 없다며 말했다.

“아뇨. 저희도 만만찮은 대군이 있습니다. 바로 하벨스 대륙의 아버지이자 최고 통치자이신 발헬름 국왕님의 친위대가 있으니까요.”

“국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군. 어디로 갔지?” 카슈빌은 옆에있는 또 다른 늙은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발의 영감이 쭉 째진 눈을 살짝 뜨면서 지팡이를 통통 두드렸다. 그러자 지팡이를 중심으로 원형의 마법진이 생겨나고 그 안에 수많은 인파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건?”

마법을 시전한 노인이 지팡이를 거두며 대답했다.

“일종의 봉인 마법입니다. 국왕님과 막대한 규모의 군사들, 그리고 꽤 많은 마을 주민들이 제 마법 안으로 피신한 상태이죠. 수용할 수 있는 허용량을 초과해서 일부 사람들이 현대에 남았지만 지하 감옥에 피신한 덕분에 아직 안전합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봉인되어있었다. 그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 편안한 자세로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 공간 안에서는 시간도 멈춰버리는 건가.”

“그렇습니다. 세상이 잠잠해질 때쯤에 봉인을 풀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이번에 격전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더군요.”

“이만한 군사라면 어떻게든 대적할 수 있겠군. 당신 정체가 뭐지? 저 많은 사람들을 봉인할 수 있는 마법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단순한 마법사 노인네로 보기 힘들어.”

영구봉인이 아닌, 시간제 봉인이다. 그런데 저 많은 사람들을 영구봉인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마법사라고? 전설의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설의?’

쿠샨은 의혹은 눈으로 눈앞의 노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노인은 그저 눈웃음을 지으며 지팡이를 쥐고 있을 뿐이다.

“딱히 숨길 이유도 없지요. 저는 국왕님의 곁을 보좌하는 대마법사 아게도브.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인물입니다.”

쿠샨은 어리바리한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아게도브? 처음 듣는군.”

“커헉! 저를 전설의 대마법사라고 보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맞다. 그렇게 생각했지.”

“그 마법사가 바로 저란 말입니다! 반응이 싱거워서 실망입니다. 헐헐헐!”

모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전설의 대마법사란 것은 몇 백 년 전에 전해지던 단순한 전설로 알아왔고 그 이름 또한 전해지지 않았으니까.

“궁금한 것이 많으신가보군요.”

“나는 의심쩍은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크큭. 믿건 말건 본인의 자유지요. 따라오시지요. 재앙의 산의 지리를 파악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카슈빌. 안내해주게.”

쿠샨은 게르덱에게 한 가지 부탁을 남겼다.

“주변에 시체가 많다. 부패하는 속도도 상당하지. 뒤처리를 서둘러다오. 지하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이 많으니까 힘을 합치면 날이 새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게르덱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살아남은 생존자 중에선 슬퍼하는 사람도 있었고 절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동쪽 성문 입구에는 시체의 산이 쌓였다.

“핏물이 강을 이루는 군요.”

게르덱의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잔인하게 토막 난 시체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남일 같지 않았다.

‘할아버지······.’

얼마나 괴로웠을까. 살아남은 우리들은 고통을 공감해주는 것이 전부다. 그들이 좋은 곳으로 떠났기를 간절히 바라며 손을 놓아주는 것이 생존자들의 마지막 역할이 되리라.

“불을 지피겠습니다.”

게르덱은 한손에 들고 있는 횃불을 시체더미로 던졌다. 미리 뿌려둔 기름에 불길이 옮겨 붙었고 시체의 산은 금세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아마 대부분이 유가족일 것이다.

“레이나님. 부탁이 있습니다.”

“어, 그래”

“부디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짧게 나마라도······.”

“응······.”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게르덱은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

“바드. 어디까지 갈 셈이야? 벌써 땅 끝까지 왔단 말이야.”

“오늘이 보름이다.”

칠흑 같이 어두운 하늘위로 환하게 떠오른 황혼의 달빛. 고고하고 순결한 기운이 바드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자 그의 몸은 조금씩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라두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달빛엔 성속성이 담겨있어. 그것도 데미지가 들어간단 말이야! 빨리 그늘 뒤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그녀에게 생각보다 많은 신세를 지는군. 그날 이후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나는 라두스에게 잠자코 지켜보라며 주의를 준 뒤에 아무도 없는 높은 언덕위로 올라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영롱한 마력의 기운이 안개처럼 주위로 퍼져나가고 안개의 틈에서 공간이 열렸다.

“저, 저건?”

“여우마을로 향하는 통로지.”

나는 소용돌이치는 공간속으로 몸을 던졌다. 잠시 어지럼증이 일어났지만 아주 짧은 순간뿐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끝없는 계단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라두스는 감탄하며 구름 끝까지 이어진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끝이 없네?”

“다 올라가려면 1년 정도 걸린다고 했던가?”

“뭐어? 잠깐만! 그럴 시간 없잖아!”

“당연하지.”

그래서 지난번과 같은 방법으로 통과할 생각이다. 묠니르가 없는 상황이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으니까 내 힘만으로 충분히 가능 할 것이다.

나는 허리를 낮추고 주먹을 쥔 오른손을 옆구리 쪽으로 당겼다. 빈틈없는 완벽한 자세. 마기와 마력의 성질이 충돌하며 파형으로 기운이 감돌았다.

“뒤로 물러서.”

라두스가 내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기 무섭게 나는 힘을 축적한 정권을 강하게 내질렀다.

“흡!!!!”

검푸른 힘이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갔다. 거목의 뿌리처럼 얽히고설키며 수십, 수백 갈래로 갈라졌다. 폭발적인 기운은 허공 곳곳에 수많은 균열을 만들었고 뒤따라 거대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펑! 퍼엉! 펑!!!

바드의 그림자에서 몸을 드러낸 라두스가 뒷목을 잡고 신음하며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으으~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꾸물거리지 말고 움직여.”

나는 라두스를 붙잡고 갈라진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넘어가듯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때까지 꽤 익숙한 풍경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막상 둘러보니 예전과 딴판인 세계가 되었다. 라두스는 기분 좋은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흐응~ 기분 좋은 곳이네. 낮잠 자고 싶어지는 곳이야.”

“어떻게 된 거지? 곳곳이 마기로 가득 차있다. 게다가······."

연꽃마을을 둘러싼 기운이 소멸해있다. 무슨 사건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라두스가 눈꽃 같은 흰 눈썹을 꿈틀거리며 리드미컬하게 숨을 내쉬었다.

“따라와. 느낌이 안 좋다.”

“야아~ 같이 가자! 나 버리지 마!”

나는 장로가 거처하던 탑으로 들어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웬일이지? 건물 밖으로 나올 줄도 알았었나?”

바드가 대뜸 허공에 대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자 라두스가 어리바리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그녀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의외인데 네 꼴을 보아하니 놀랍다 못해서 어이가 없구나. 마족의 하수인이라도 된 게냐?”

라두스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 누구 목소리?”

“라두스. 이 빌어먹을 악마 녀석!”

장로가 라두스의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몸을 키웠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한복과 색동저고리를 매고 있는 눈부신 외모가 눈에 띈다.

“오랜만이군.”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이 필요하겠는데?”

장로는 곰방대를 입에서 떼고는 잡아먹을 듯이 사나운 눈으로 바드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에는 마족의 뿔이, 어께에는 악마의 날개가 자라나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파에톤이 이 상황을 보면 얼마나 기가찰지 궁금하군.”

“사정이 있어서 그렇다.”

“그 주둥아리 잘려서 장식용 박제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묻는 말에 답하는 것이 좋을 거란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 게냐? 라두스가 어떻게 부활한 거지? 바드는 어째서 이 꼴로 변했고? 파에톤. 당신은 여기까지 예상했었어?

바드는 그동안 현대와 마계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장로에게 알려주었다. 자신이 마족이 되어버린 이유. 그리고 얼마 전에 인간계로 돌아와서 일어난 불상사까지 전부.

“······그 말이 사실이더냐?”

“미호는 어떻게든 구해보려 했지만······.”

아니, 말할 것도 없다. 단순한 변명에 불과하니까.

“전부 내 탓이다. 내가 마계의 문을 열지 않았다면 일이 이지경이 되진 않았을 거다.”

“어금니 꽉 깨물어라.”

장로가 부서져라 움켜쥔 주먹을 바드의 광대로 휘둘렀다. 예전의 바드라면 뼈도 못 추릴 십미호 전력을 담은 공격이었지만 지금의 바드에겐 눈곱만큼의 데미지도 들어가지 않았다. 한순간 퍼억. 하는 소리가 공간에 울렸지만 그게 다였다.

“설화는 마지막에 어땠지?”

장로가 등을 돌린 채 질문했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쯤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미호는······.”

“후회했나?”

“아니.”

미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확신한 이유는 단 하나.

“미호니까. 미호는 자기가 후회할 짓 하지 않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