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Master Smith-171화 (171/202)

Master Smith (171)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놈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라두스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이미 이성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기다려 바드. 여기서 생각 없이 덤비다간 개죽음이이야.’

‘알고 있다. 하지만 미호가, 미호가······.’

놈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토르가 실패했다면 녀석을 막을 사람은 나뿐이다.

아샨드를 이길 수 있을까?

내 자신에게 질문해보았다. 정말로 자신 있냐고. 정말 확신할 수 있냐고. 대답은 단순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어차피 해야 하는 거. 고민해봤자 소용없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아샨드를 죽이기엔 준비가 덜 되었다.

“반인반마. 방금까지 죽일 기세는 어디로 갔지? 나와 싸우려고 했던 거 아닌가?”

놈을 죽이고 싶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끔 핏덩이로 분쇄시켜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수록 라두스가 소리쳤다. 절대로 싸우지 말라고, 싸워선 안 된다고 말이다.

“시시하군. 큰소리치더니 결국 이정도 기량밖에 안 되는 쓰레기냐?”

조롱이 섞인 아샨드의 목소리는 흥미가 떨어진 것처럼 힘이 없었다.

“별 볼일 없는 녀석에게는 관심 없다. 죽어라.”

“!!”

나는 아샨드의 공격이 날아올 것이라고 직감하고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라두스가 미리 신호를 주지 않았다면 나는 육체를 떠난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을 것이다.

“내 공격을 피해?”

“그딴 허접한 공격. 몇 번이고 피할 수 있다.”

물론 허세였다. 한번 피하는 것만으로 진이 다 빠지는데 저런걸 몇 번이나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보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의 손에 뻗어나간 흑색 낫이 뒤편의 산봉우리를 통째로 날려버리기 까지는 말이다. 날려버렸다는 표현이 적합할지, 아니면 소멸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는 감이 안 잡힌다.

“라두스. 네놈이구나. 전부 알려주고 있는 거였어.”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넌 라두스와 무슨 관계지? 어떻게 내 안에 라두스가 있다는 것을 그리 쉽게 알아챈 거냐?”

아샨드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크큭! 내 딸의 힘을 모를까보냐? 네가 사용한 흑은 본래 나의 기술이다. 몽환의 악마 라두스가 흑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 다른 악마에 비해 비약적으로 뛰어난 힘을 가진 이유. 그 이유가 바로 그녀가 내 핏줄이기 때문이다!”

“라두스가?”

‘나도 몰랐어. 난 단지 다른 악마들처럼 인간의 상념에서 태어난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은 즉. 내 안에 아샨드의 피도 같이 흐른다는 뜻 아닌가?’

불쾌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안도했다. 신을 초월한 자의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단 소리 아닌가? 잘만 하면 아샨드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가능하리라.

“토르는 어떻게 되었냐. 분명 네놈과 싸웠을 텐데?”

아샨드는 날카로운 눈매를 부라리며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놈은 내 손에 죽었다. 꽤 아슬아슬한 싸움이기는 했지만 녀석이 나를 소멸시키는 것은 무리였지. 왜냐하면······.”

마왕은 어께에 두르고 있던 적색망토를 풀어헤쳤다. 잿빛 상공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타고 망토가 날아갔다.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 몸이니까. 네게 기회를 주지. 38일의 말미를 주도록 하겠다. 알았나? 그 안으로 네가 준비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을 준비해라.”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뿐. 답은 간단했다.

“나와 싸우고 싶은 거냐?”

“완전한 나에게 대항할 수 있는 녀석이 얼마나 되겠느냐? 네놈의 전력을 보고 싶다.”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나 미친 악귀의 눈동자다. 피에 굶주려있는 흡혈귀의 눈매를 쏙 빼닮아있었다.

이건 나에게 있어서 좋은 기회다. 38일이라면 개인적인 정비시간으로 충분하고 그 안에 다른 동료들도 안전한곳으로 대피시킬 수······

‘이 모습으로 동료들을 만나겠다고?’

잿빛으로 탈색된 머리칼, 마족임을 인증하는 빨간 눈동자와 창백한 피부색. 머리위로 우뚝 솟아난 날카로운 암적색 뿔. 내가생각해도 흉악했다. 그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

“한 가지 약속해라.”

“약속?”

그가 히죽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본다.

“약속이라. 그렇게 까지 절박한 상황이냐? 그 표정이 어디까지 절망스러워질지 기대가 크군. 네놈이 자포자기해서 주저앉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분 좋단 말이지 크하하하! 그래. 어디 들어볼까? 네놈이 말하는 약속이라는 것을 말이다.”

“네 목적은 나와 싸우는 것. 그렇다면 네가 말한 38일 동안 인간들을 건드리지 마라.”

하벨스 대륙은 마족들이 활개를 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마족 투성이다. 인간들은 마족 100마리에도 위태한 상황. 아샨드가 마족에게 명령해서 38일간 말미를 준다면 전력은 마련할 수 있으리라.

마왕은 코웃음을 치며 바드의 마음을 꿰뚫어보듯이 말했다.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인간들을 걱정하고 있는 거냐?”

“······.”

“뭐, 그렇게 하도록 하마. 앞으로 38일간 모든 마족에게 명령하지. 남쪽 땅에서 북쪽으로 올라오지 말라고 말이야. 이러면 되겠지?”

일단 놈과의 싸움은 보류된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38일 뒤에는 인간과 마족의 모든 것을 건 전면전이 시작된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 그때를 고대하마. 과연 네놈이 어디까지 발버둥 칠 수 있을까? 큭큭큭······!”

아샨드는 어둠속으로 녹아내리듯 모습을 감추며 광기의 냉소를 남겼다.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미호를 잃은 아픔뿐이었다.

“바드.”

“······제기랄제기랄제기랄!!!!!!!!!!!!!!!!!!!”

바드는 눈을 감고 포효했다. 동료를 잃은 아픔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이 아픔을,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이 감각을 참지 않았다.

“어쩌라는 거냐! 이런 건 바라지 않았다. 단지 모두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 것인가! 그동안 충분히 힘들었다. 할아버지도 잃고 혼자서 열심히 살아왔다. 결국 동료가 생겼고, 모든 걸 보상받았다고 생각했다. 그걸로 행복하다고 믿었는데.

‘왜 이렇게 된 것인가?’

“내가 약했냐?”

“너는 약하지 않아.”

“내 존재자체가 글러먹은 거냐?”

“그렇지 않아.”

라두스의 계속되는 부정에 나는 꾹 참았던 울분을 쏟아내듯 소리쳤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불행한 건데. 이 세계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억울하잖아. 나만 불행해지는 거. 누군 좋아서 태어났어? 누군 좋아서 외톨이야? 누군 좋아서 마족이 됐어? 누군 좋아서······.

“누군 좋아서······ 그랬겠냐고······.”

강하게 움켜쥔 주먹에 따끔한 고통과 함께 피 한줌이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과 꽉 다문 입술. 나는 그저 침묵해야만 했다.

“바드. 나 하고 싶은 말 있는데 괜찮아?”

“······.”

바드는 침묵했다. 라두스는 그 반응을 허락했다고 받아들이고 입을 열었다.

“네 운명이 기구하다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어. 그런 운명을 내린 것도 다름 아닌 나였고. 네가 날 증오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너는 인간들에게 앞으로 계획을 전해줘야 하고 아샨드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해. 그게 남은 38일 동안 네가 완수해야 할 역할이야. 지금처럼 지나간 일에 연연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야.”

여기까지 말한 라두스가 각오를 다졌다. 불같은 성격을 가진 바드라면 필히 자신에게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바드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네 말이 맞아.”

“괜찮아?”

“이럴수록 냉정하게 생각해야지. 네 덕분에 정신 좀 차렸다. 지금은 마그르스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야. 인간들이 대륙 곳곳으로 흩어졌다면 그들이 다시 모일 곳은 마그르스 밖에 없으니까. 동료들도 그쪽에 있겠지.”

나는 눈을 감고 세상을 느꼈다. 온 세상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내 예상이 빗나갔음을 눈치 챘다. 플로스티아 길드원의 위치가 마르스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져있던 것이다.

“이 인간들이 왜 저곳에 있는지 감이 잡히냐?”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하고 있다. 우선 동료들이 마그르스로 아직까지 복귀하지 못했다는 것. 혹은······.

라두스가 위화감에 뒤덮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그르스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던가?”

같은 생각이다. 내가 마계에 있는 동안에 그들이 마그르스에 복귀하지 못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마그르스에서 떨어져있는 이유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동료들에게 가볼 거야?”

“일단 마그르스로 간다. 그곳엔 국왕이 있을 테니까. 그들에게 일러둬야해. 38일 뒤에 일어날 최후의 전쟁에 대해서.”

또 다른 목적이 있다면 마그르스에 있는 대장간이다. 그곳의 좋은 시설을 빌리면 쓸 만한 장비를 제작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지간한 재료는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실험도 해야 하고.’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서 산산 조각난 붉은색 금속파편들을 넌지시 쳐다보았다. 신들의 종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비의 유해라고 볼 수 있는 처참한 말로. 나는 이 녀석을 어떻게든 부활시킬 생각이다.

나는 머릿속에서 온갖 잡념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미호의 천역덕스런 미소였다. 이젠 기억 속에서 천천히 지워낼 참이다.

땅으로 내려온 바드의 눈가엔 투명한 물방울이 휘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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