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167)
“네놈이냐? 소문의 악마 사냥꾼이.”
“스스로 확신하고 있으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본론부터 말하지 그라노프.”
그라노프는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산양의 생김새를 가진 악마였다. 똬리를 틀며 날카롭게 벼려진 뿔은 짙은 고동색을 띠고 있었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간이 어려운 미의 외모가 내 눈을 직선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마기는 과연 라두스가 말한 대로였다. 살벌하고 첨예했다. 허나 내 상대가 되지 못함은 온몸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에 비해서 그라노프는 터무니없이 농밀한 바드의 기운에 사시나무 떨 듯 상체를 떨었다.
허나 물러섬이 없었다. 악마로서 겁을 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네 이름을 어떻게 아냐는 눈치로군.”
“네놈의 마기. 분명 오래전에 행방불명된 라두스의 마기와 비슷하다. 설마?”
라두스는 내 안에 남아있다. 그라노프가 라두스의 기운을 느꼈다면 그건 착각이 아니다.
바드의 등 뒤로 어둠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일렁이더니 검은 안개 속에서 라두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라노프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너는?! 네가······ 어떻게?”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여자 같네~ 그런 취미야?”
라두스가 상대방 속을 박박 긁어내는 어투로 도발했다. 그라노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스멀스멀 마기를 끌어올렸다. 주변의 공기가 뜨거운 열기에 일렁이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 아니꼬운 말투. 분명 파멸의 라두스가 분명하군. 이제 보니 모든 악마들이 소멸한 것도 네놈 짓이렷다! 아샨드님을 배반한 대가는 클 것이다!”
라두스는 기가 차다는 듯이 실소를 내뱉었다.
“당신도 많이 죽었네? 언제부터 우리 마족들이 남을 따라왔지? 아샨드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악마들은 단 한 번도 그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인 적이 없었을 텐데. 아니면 혹시······. 내가 없는 동안에 악마의 남은 자존심마저 팔아넘겼나봐?”
얕잡아보는 듯한 깔보는 눈빛이 그라노프의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라노프는 혀를 차며 끌어올린 마기를 십분 방출하기 시작했다.
“악마서열1위였다고 아직까지 최강이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너무 까불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라두스!”
“그래봤자 하나도 안 무섭거든? 삼류 나부랭이 악마가 설쳐대는 꼴이 지나가던 하급마족이 웃을 일이지!”
라두스는 혀를 내두르며 아니꼽게 웃어보였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녀자신은 잘 알고 있다. 현재의 자신이 그라노프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그래서 어느 때와 같이 바드 뒤로 몸을 숨기며 명령조로 말했다.
“바드. 그라노프의 데모닉 스킬은 얼음속성이야. 흑(黑)으로 놈의 빙벽을 뚫는 건 어려우니까 흑염(黑炎)을 이용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바드가 내면의 기운을 끌어올리자 그라노프가 격동적인 움직임으로 자세를 고쳤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자신의 목을 겨누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이놈이 라두스의 기술까지 사용하는 거냐?”
“내 손에 죽어줘야겠다. 그라노프.”
《마기를 감지합니다. 상대방의 마기가 월등히 높습니다.》
“이 무슨······!”
그라노프는 눈앞에 떠오른 경고문에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래도 한때 마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강자였는데 어디서 굴러온 마족이 본인보다 강력한 마기를 분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나프는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네가 어떻게!”
“네가 아무리 강하다한들 악마를 궤멸시키고 마계의 정수를 흡수한 나를 대적할 수 있을까?”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부터 기본 피지컬이 다르다. 그라노프는 바드의 살기에 눌려 두어 걸음 물러섰다.
“원하는 게 뭐냐.”
“마왕의 죽음이다.
화르륵!
바드의 손에서 뻗어 나온 흑염은 그라노프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그의 발등을 태우기 시작했다.
“크아악!”
“버러지가 어디서 비명을 질러?”
빠각!
신속히 다리를 잘라버렸다면 흑염이 번지는 상황은 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드의 주먹은 일말의 틈을 주지 않고 그라노프의 명치로 빨려 들어갔다.
그라노프가 서둘러 전신의 마기를 펼쳐 몸을 감쌌지만 어둠의 기운은 바드의 주먹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라노프의 오른발은 흑염에 먹혀가고 있었다.
“크윽! 이자식이!”
바드는 괴로움에 울부짖는 그라노프와의 거리를 단시간만에 좁혔다. 그라노프가 헛바람을 삼키며 급히 마기를 일으켰으나 손이 빠른 사람은 바드였다. 그라노프의 목뼈를 바스러져라 움켜쥔 것이다.
그라노프가 왼팔에 어둠의 기운을 응집시켰으나 바드의 눈동자는 그의 왼팔로 또르르 돌아가고 있었다.
바드가 희끗한 조소를 남기며 팔을 휘둘렀다. 순간, 핏방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그라노프의 팔이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절망으로 차오른 악마의 눈동자에서 희망의 빛이 사그라졌다. 이에 바드가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냉랭한 목소리를 꺼내들었다.
“크큭! 날벌레마냥 요리조리 잘도 도망치는 군.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끄······어억!”
그라노프가 새된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며 인상을 구겼다. 바드는 그가 죽지 않도록 팔에 힘을 빼고 질문했다.
“남은 한 놈은 어디 갔지?”
“한······놈?”
“마계의 악마는 네놈이 마지막이다. 너까지 총 665마리였다는 거지. 라두스의 말로는 사탄이라는 악마가 없다더군. 놈은 어디갔지?”
“크큭! 사탄이라. 그놈이 남아있었군! 크하하하하!!!! 두고 봐라. 그놈이라면 너 따위는······. 너 같은 녀석은······!”
“쯧. 쓸모없는 녀석.”
뿌드드득───
더 이상 추궁해 봐야 얻을게 없다는 것을 확신한 바드가 손목에 힘을 넣었다. 사탄이 어디에 있든 당장 찾아죽일 녀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놈이 아샨드를 죽이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를 알려줄까?”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그라노프가 쇳소리를 내며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유언이라 생각하고 들어주지.”
그라노프가 생기를 잃어가는 눈동자를 부라리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아샨드는 신을 능가한 신이다. 그를 죽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크큭! 잔망스럽군. 신을 능가한 신이라니.”
“토르가 여태껏 버틴 것도 용하다. 아무튼 네놈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그가 내 얼굴을 향해서 침을 뱉었다. 유감스럽게도 몸이 자동으로 반응해버려서 피했다.
“네놈은 마왕을 죽일 수 없어. 그게 진리고 앞으로 정해질 운명이다.”
“잘 들었다.”
우드득!
깊고 강렬한 소리가 마계의 어둠속에 울려 퍼졌다. 기이하게 꺾여 돌아간 그라노프의 목이 상반신과 격리되어 차디찬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줌의 핏물이 되어 혼과 백이 분리되는 순간이었다.
그라노프의 죽음을 확인한 라두스가 바드의 어깨에 얼굴을 올리며 말했다.
“사탄은 반드시 죽여야 돼. 그놈은 모든 악마 중 최고 정점에 선 악마야. 신의 권위에 도전하기까지 한 무지막지 한 녀석이라고.”
“너보다 강한가?”
“예전의 나라도 쉽게 이길 상대가 아니었어. 무엇보다 그 녀석은 다른 악마와 다르게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이곳 마계에 없다면 인간계에 있을 확률이 높아.”
바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계를?”
“그놈이라면 아샨드의 뒤를 따를 추종자가 되기에 충분하니까. 아샨드의 충견으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몰라.”
바드는 심연의 눈으로 주검이 되어버린 그라노프의 머리와 눈을 마주쳤다.
“몰라 그런 거.”
내 앞길을 가로막으면 다만 쳐부술 뿐이다.
바드는 그라노프에게 흘러나온 마계의 정수를 흡수했다. 눈앞으로 마기가 증가했다는 익숙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무의미 하다. 라두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다.
“라두스.”
“왜 불러?”
“이제 뭘 어떻게 하면 좋겠나?”
아직 부족하다. 더 강해져야만 하는데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계의 정수를 이만큼이나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샨드의 힘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아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라두스는 달콤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주듯 속삭였다.
“지금은 잠깐만 쉬자. 응? 벌써 몇 달째 잠도 안 잤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 많은 악마들을 일일이 찾아서 사냥하느라 그동안 아무런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조금만 쉬도록 하지.”
“잘 생각했어. 어께에 기댈래? 아니면 무릎 배게 해줄까?”
“그냥 가만히 있어주면 좋겠군.”
나는 그녀를 그림자 속으로 우겨넣고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마계에서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장소. 마계에서 유일하게 안심할 수 있는 곳이다.
‘좋군. 편해서 좋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간 묵었던 체증을 씻어내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라두스도 바드의 멀어진 의식과 함께 스르륵 잠들었다.
마계의 깊은 밤이 소리 없이 지나갔다.
고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처럼. 허무하다. 죽음조차 아무 의미를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마계의 밤은 그런 곳이었다. 바드는 지난 1년간 마계에서 지내면서 그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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