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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 Smith-151화 (151/202)

Master Smith (151)

“일어났네.”

허허벌판에 내린 하얀 눈 같은 생머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보슬보슬 서리가 내려앉은 하얀 눈썹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난생 처음 보는 여성이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백옥 같은 미끈한 피부는 달빛에 젖은 듯 반들거렸고 겉에 걸친 거라곤 반투명하게 나풀거리는 얇은 천오라기 하나였다.

위엄이라고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목소리지만 그녀가 풍기는 마기만큼은 숨 막힐 정도로 빽빽하고 농밀했다.

“설마 추억의 길에서 빠져나올 줄이야. 현실세계가 어지간히도 걱정되나봐?”

“누구냐?”

“이제 와서? 몇 번이나 만난사이인데 너무하잖아!”

그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기분 나쁜 손길이 턱에 닿았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뺐다.

“떠오른 기억은 어디 까지려나?”

“내 이름.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기억. 그게 전부다. 나는······.”

아마도 대장장이였겠지. 그렇게 밤낮으로 수련하고 기술을 갈고 닦았으니까. 분명 그럴 것이다.

“그게 네 행복한 기억이구나?”

“말 돌리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너는 누구냐?”

“그거야 곧 알게 될 거고. 내 정체보단 기억을 되찾는 게 더 급급하지 않아?”

맞는 말이다. 위화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더 중요한, 더 소중한 기억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괴롭니?”

“너라면 날 도와줄 수 있겠지. 날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라.”

“돌아가면 괴로운 기억들과 아픈 현실뿐이야. 그래도 돌아가고 싶어?”

눈 깜짝할 사이에 등 뒤로 접근한 그녀가 가느다란 팔로 내 목을 끌어안았다. 따듯하고 포근하다. 당장이라도 잠들 것만 같다.

‘괴로운 현실뿐이라 해도······.’

돌아갈 거야. 이곳은 네놈이 만든 허상일 테니까.

“왜 굳이 고생을 사서 하려 그래? 이곳에 있으면 죽을 때까지 너의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데.”

“결국 가짜니까.”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잖아? 거짓된 행복을 진짜라고 생각하면 그게 진짜 행복이 되는 거야.”

검은 연기로 변한 그녀가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와 근거리까지 얼굴을 밀착시켰다.

“그런 도박은 하지 마. 이곳에서 나와함께 살자. 현실보다 더 달콤한 꿈을 평생토록 꾸게 해줄게.”

그녀가 형체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빛과 어둠이 갈린 세계가 나선으로 회전하면서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무인도도, 그녀가 존재하는 그런 공간도 아니었다. 초목으로 둘러싸인 빈 공터다. 그 가운데 작은 오두막이 세워져 있다. 볕이 잘 드는 공터다 보니까 공기도 따듯하고 기분이 나른해졌다.

“갑자기 왜 이런 곳으로?”

“바드야! 어서 도와주지 않고 뭐하느냐!”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곳엔 백발의 노인이 나무토막들을 잔뜩 짊어진 채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하, 할아버지?!”

“뭘 그리 놀라느냐? 요즘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삭신이 쑤시는구나. 어서 장작들 정리해 놓거라. 휴우~”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보이는 건가? 그보다 여긴 어딘데? 무인도가 아닌 곳에서 할아버지와 살았던 기억은 없다.

“왔어?”

“너는······.”

아까까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던 그녀다.

“무슨 꿍꿍이냐.”

“평화롭지 않아? 네가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나처럼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살 수 있는 세계. 모든 것이 현실과 다를 게 없어. 촉감, 향기, 기억. 그 밖에 어떤 모든 것이라도 네가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야.”

“이곳이 진짜 현실보다 더 현실답다는 소리냐?”

웃기지마라. 나는 그런걸 바라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진실이다. 내 기억과 내 현실. 그게 중요하다.

“환상이라고 거부감이 느껴지나 본데, 결코 나쁜 건 아니라고 봐. 이곳은 네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는 세상이야. 현실세계의 기억을 잃었다면 이곳에서 행복한 기억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건······.”

모순이다. 가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허구란 개념은 버려. 이곳은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진실이 되기도, 거짓이 되기도 하니까. 네가 이곳을 환상이 아닌 진짜 세계라고 받아들이면 이곳은 진짜야.”

“틀렸다. 분명히 말하겠는데 너는 지금 엄청난 실수를 두 가지나 저질렀다. 첫째. 너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기억을 건드렸다는 것. 둘째. 나를 이따위 세계에 끌어들인 것.”

우리 할아버지는 말이야······. 남에게 도와달란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아.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당당했어. 내 앞에서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지금처럼 풀밭 위를 뒹굴지도 않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우리 할아버지는 말이야.

“이미 죽었어. 이게 진실이다.”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이 모든 게 허구다. 하지만 이 사실을 부정해선 안 된다.

“할아버지가 없는 세계를 진실로 받아들이려는 이유가 뭐야? 그렇게 괴로워할 거면서”

“알 필요 없어. 내가 네게 말해줄건 지금부터 네 말은 단 한마디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다.”

이곳을 완전히 부정하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화목한 광경은 어둠속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초목 공터도, 오두막도, 할아버지도 전부. 남은 것은 그녀와 나뿐이다.

“끝끝내 이런 결정을 내리다니.”

“시간 끌지 말고 나를 원래세계로 돌려보내.”

“싫다면?”

그녀는 여전히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마치 어린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얼굴이다. 그녀의 표정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다.

“하는 수 없네. 이렇게 된 이상 강제적으로 무릎 꿇게 만들 수밖에. 기억을 돌려주는 건 꺼림칙하지만 말이야······.”

그녀가 내린 결정은 내 기억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 손을 움켜쥐고 펼치는 시늉을 했다. 손아귀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눈꽃 결정체가 떠올랐다.

“그건 뭐지?”

“기억의 정수. 네 평생의 기억이 담겨있지. 돌려줄게.”

“그걸 내게서 빼앗아서 기억이······.”

아무런 목적 없이 내 기억을 빼앗아갈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기억을 돌려주는 거라면 뭔가 꿍꿍이가 더 있을 것이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니까 알려줘도 되려나? 잘 들어. 악마와 인간의 계약을 위해서는 마계의 정수를 흡수해야해. 너는 현실에서 마계의 정수를 흡수함으로서 나와 직접계약을 맺었어. 즉, 영혼을 내건 계약이 성립되었다는 거지.”

“내가 그따위 계약을 했을 리 없어. 거짓말을 하려면 조금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지 그래?”

“기억의 정수를 받아들이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거야. 혹시 의심할까봐 말하는데 기억의 정수는 어떠한 변경도 불가능해. 바꿔치기 또한 불가능하지. 이 기억은 거짓 없는 네 기억이야.”

“그 말이 거짓말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할 말은 없지. 하지만 너도 모든 걸 잊고 지낼 생각은 아닐 텐데? 네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나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왠지 그런 느낌이다.

“쓸데없는 기억이 들어있으면 죽여 버린다.”

나는 살벌하게 한 마디 하고 기억의 정수에 손을 가져갔다. 이윽고 눈부신 광채가 내 몸을 뒤덮었고, 머릿속으로 대량의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 크아악!”

“텅텅 비어있던 머릿속에 평생의 기억이 들어갈 테니 한동안 괴로울 거야. 조금만 참아봐. 내 아들~”

‘아, 아들?’

어쩐지 들어본 것 같은 기분 나쁜 말투다. 제기랄. 현실의 나는 이놈을 알고 있었나?

한동안 두통이 지속되었고, 빛은 멎어들었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억은?”

“············돌아왔다. 이 망할 새끼야!”

기억을 되찾자마자 주먹을 휘둘렀으나 라두스는 내 공격을 피하며 한마디 했다.

“꿇어.”

쿠웅───!!

“!!”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머릿속이 뜨겁게 달궈졌다. 마치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다.

“내 몸에 무슨 짓을······.”

“네가 마계의 정수를 받아들인 시점에서 넌 나의 하수인이야. 우린 직접계약을 맺은 사이니까.”

머릿속에서 단편의 기억 떠올랐다. 토르와 아샨드의 충돌로 나는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근처엔 미호와 게르덱, 이사벨라가 있었고, 나는 묠니르가 파괴되지 않도록 온몸으로 몰아치는 폭풍을 받아냈다.

죽음 속에서 나를 부른 것은 라두스였고, 나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와 계약을 맺었다.

“그때인가······!”

“마계의 정수를 삼킨 뒤로 너는 내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부하가 된 거야. 하지만 나는 자비로운 악마거든. 네가 강제적으로 명령을 따르는 꼴을 보기 싫어서 기억을 거두고 스스로 허구의 세계를 받아들이게끔 유도했지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기억이 남아있으면 명령불복종의 가능성이 있어서 그런가?”

“그건 아니지만 네가 싫어하는 건 분명하잖아? 난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화내는 거 싫어하거든.”

처음부터 완전히 놀아났다는 소리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내 기억을 무사히 돌려받은 것.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지?”

“흐응~ 어떻게 할까?”

그녀가 내 고개를 손으로 들어올렸다. 유혹의 기운이 온몸을 엄습했지만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 장난감이잖아? 내가 뭘 하든 알아서 뭐하려고?”

그녀가 윗입술을 혀로 쓸어내며 그윽한 시선을 보내왔다. 무슨 엿 같은 상황인지 모르겠으나 탐탁지 않은 상황인 게 분명하다.

“후훗~ 겁먹긴. 우선 현실로 돌아갈까?”

라두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를 기준으로 세상이 변화했다. 어두침침한 하늘과 황폐된 땅. 뿌옇게 융기하는 농밀한 흙먼지까지. 현실로 돌아왔다고 생각하기엔 처참한 광경이었다.

“마왕이 한바탕했구먼!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면 바드가 싫어할 텐데. 자, 일단 이동하자.”

“어디로?”

“응? 악마가 할게 뭐있어. 인간 괴롭히는 것 밖에 더 있나?”

그녀의 단호한 한 마디가 바드의 심장에 거대한 대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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