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87)
침대위에 몸을 누이고 천장을 바라보는 바드의 눈가에 메마른 감정이 자욱하다. 과연 대장장이의 끝은 어디인가? 헬리오스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 하네스가 제작한 무기는 무기로서의 가치를 잃었지만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 성능은 엄청날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비······.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수많은 수납공간에 잡다한 아이템이 가득하다. 그중에서 유독 영롱하게 빛나는 아이템이 눈에 띄었다. 나는 분홍빛으로 발광하는 크리스털을 오브젝트했다. 엠페러 길드의 마스터가 목숨 값을 대신하여 지불한 아이템. 케르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왕을 완전 부활시킬 수도 있는 아이템이다.
“정보 확인.”
이름: 태초의 돌(전설)
태초의 기운으로 가득 찬 돌입니다.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재앙을 불러일으키거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충전상태-100%
너무나도 간단한 설명.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소리는 케르드의 주장대로 마왕을 완전히 부활시킨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인간과 마족의 싸움은 결국······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괜한 상상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마왕의 부활이라니?’
바드는 앞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 그 순간 이질적인 음성이 가슴을 파고들 듯 울려 퍼졌다.
─해버려············.
낯설다. 하지만 달콤하고 편안한 목소리다. 넋을 쏙 빼어놓는 부드러움 몸도 마음도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나를 잊은 거야?
들을수록 익숙하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머리 한 구석에서 나를 유혹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기억 날 것 같다. 그녀는, 그녀는!
─○○○.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날을 기대할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람을 잡아 뜯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신이 없다. 시끄럽다. 짜증날 정도로 가슴이 휘몰아쳤다. 깊고, 어둡고 무거운 감정이 자꾸만 소용돌이친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잠시 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확실하게 아는 목소리다. 간드러지고 애교가 묻어나는 이 목소리는 분명,
“주인님? 주인님! 일어나봐! 괜찮아? 왜 울어?”
흔들지 마라. 토 나올 것 같으니까. 방금 막 일어났는데 자꾸 짜증나게 할래?
“멱살 잡고 뭐하는 짓이냐 너.”
“일어났구나! 걱정했잖아!”
새들이 지저귀고 창가로 따듯한 햇살이 내려왔다. 나긋나른한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뒷통수를 벅벅 긁적이고 길게 하품을 했다. 어째선지 미호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왜 우냐?”
“그러는 주인님이야 말로 왜 울고 있는 거야? 악몽이라도 꿨어? 한참을 불러도 인상이나 쓰고 있고 말이야! 나 진짜 걱정했단 말이야······.”
내가 울고 있었다고? 그럴 리 없잖아.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빼고는 절대로 울어본 적 없는,
그 순간 거짓말같이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이거 뭐야?”
“왜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어? 불러도 일어나질 않고. 괴로운 얼굴로 자꾸만······.”
“야, 얌마. 그렇다고 네가 울어버리면 어떡해? 내가 잘못했냐? 게다가 너 사람 아니거든?”
“몰라! 주인님 바보!!!”
미호가 이상한 앙탈을 부리며 자꾸만 들러붙는다. 오늘따라 유독 심하게 안겨 붙는다. 그녀를 밀쳐냈지만 내 장비를 착용한 미호의 힘을 비무장 상태로 당해낼 수 없었다.
“저리 안 비켜?”
“흥! 절대로 안 비킬 거다!”
미호가 막무가내로 뻐겼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미호가 슬그머니 내 몸을 끌어당겼다. 머리에서 그윽한 향이 풍겨온다. 따듯한 체온, 쿵덕이는 심장박동.
나는 냉큼 미호의 손등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러는 거 아니다.”
“주인님은 분위기 깨는데 뭐 있단 말이야.”
미호는 튕기는 듯하면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어리광 부려도 돼?”
“위로가 아니라 어리광이냐?”
나는 무언의 허락을 내렸다.
“진정됐어?”
5분이나 지나서야 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할 말 아니냐? 너는 왜 울고 있던 거야?”
“그거야 주인님이 평소답지 않게 울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녀가 몸을 떼고 팔짱으로 자세를 옮겼다. 그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겠다. 조금 기분 나쁜 꿈을 꿨던 것 같다.
“별 일 아니야. 가끔 이런 날이 있을 수도 있지. 고맙다. 그래도 내 걱정 한다고 아침부터 이 난리를 치다니.”
무릎을 꿇고 앉았던 미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연이어 얼굴 아래서부터 위로 천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얼싸안고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르릉······.”
“뭐냐 그 소리는?”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낸다는 소리와 비슷했다.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다. 슬쩍. 미호가 손가락 사이로 나를 훔쳐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우연이 아니라 완전히 나만 보고 있다.
“주, 주인님. 나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지난번처럼 여우장로를 만나러 가자는 귀찮은 부탁이라면 절대 안 돼.”
“그, 그게 아니라. 한번만 더 꽉 끌어안아주면 안 될까?”
그녀가 봄기운 충만한 수줍은 소녀처럼 몸을 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과감하게 덮쳐올 그녀였지만 오늘따라 고분고분한 것이 수상했다.
“싫은데?”
“여, 역시 안 되지? 나, 나, 나! 이만 레이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볼게. 있다가 보자 주인님.”
미호가 침대에서 깡총! 내려가 허둥지둥 손 인사했다. 그러고는 방문을 쾅! 닫아버린다.
‘뭐야. 뜬금없이.’
바드는 헝클어진 봉두난발을 정리하고 책상위에 올려두었던 주황색 고글을 이마에 걸쳤다. 한편 그의 방문 앞에서 기척을 숨긴 미호가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 쥐고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달아오른 얼굴과 식은땀이 그녀의 감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뭐, 뭐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야?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했을 행동인데. 나 이상해진 거 아니야?’
모르겠다. 갑자기 긴장한 이유를, 터질 듯이 요동치는 내 심장을, 주인님이 안아주지 않았을 때 뜬금없이 찾아온 따끔함의 이유를 정말로 모르겠다.
‘평소처럼 행동하자. 예전엔 멀쩡했잖아?’
알아. 아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하잖아.
***
“안토니오? 안토니오!”
아침 댓바람부터 게르덱이 안토니오를 찾기 시작했다. 귀족다운 자태로 바게트 빵을 뜯고 있던 안토니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게르덱 형?”
“이리 와서 봐봐! 빅뉴스야!”
게르덱은 하나의 공고문을 펼쳐들었다. 뒤따라 들어온 카스티바가 가쁘게 숨을 몰아 내쉬며 소리쳤다.
“당신! 그 소식은 내가 전해주려고 했던 거잖아!”
“누가 소식을 전해주든지 상관없잖습니까? 애도 아니고 이런 걸로 승부열 올리는 겁니까?”
“뭐라? 도전이면 얼마든지 받아주마!”
안토니오는 두 사람을 말리며 화제를 이어갔다.
“누가 알려주든 상관없잖아요. 빅뉴스라뇨?”
카스티바가 열의에 타오르는 눈으로 안토니오를 노려본다.
“이번에 마그르스 광장에서 의상페스티벌이열린데!”
옆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바드는 스프를 뿜으며 태클을 걸었다.
“그런 걸 왜 안토니오에게 말하는 거야!”
“참여조건이 19세 미만입니다. 노엘이나 안토니오에게 부탁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게르덱은 단안경을 고쳐 쓰면서 뒷말을 이어 붙였다.
“이건 무조건 참여해야 합니다. 이사벨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자코 있던 이사벨라가 토끼 귀를 쫑긋 세웠다.
“의상페스티벌? 나름 구미가 당기는 대회인데 내가 참여하면 안 될까?”
────라며, 이사벨라가 윙크를 날렸다. 쿠샨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기를 잡아 뜯으며 중얼거렸다.
“15세 미만이라 해도 믿을 수 있는 발육이긴 하지만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지.”
“뭐시라? 너 인마! 양심에 털난 아저씨야. 넌 무슨 낯짝으로 정직이란 소리를 그렇게 쉽게 내뱉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무심코 입 밖으로······ 커헉!”
쿠샨은 이사벨라의 거침없는 플라잉 니킥에 처절한 응징을 맛보았다. 코너에 몰린그는 이사벨라의 파운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흠흠, 저 두 사람은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두고. 그래서 득이 되는 게 뭔데?”
바드가 말했다.
“바드님. 놀라지 마십쇼! 바로 상금입니다!”
이번엔 카스티바가 게르덱의 얼굴을 밀쳐내며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그마치 1억 실링이나 걸려있어!”
“1억? 블루하와이 목장의 특제 치즈가 도대체 몇 개나······.”
바드가 계산하기를 그만두고 눈에 불을 붙였다.
“당장 나가 안토니오! 너 밖에 없다!”
“예에? 하, 하지만 노엘도 있잖아요!”
안토니오는 자기 옆자리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노엘을 가리키며 절규했다. 노엘은 양팔을 교차시켜 X자 모양을 만들었다.
“나······ 어제 재앙의 산에 갔다 와서 피곤해······.”
“저거 봐라! 노엘 공주님께서 피곤하시 단다.”
바드의 적극적인 밀어붙이기에 안토니오는 불안한 미래를 예견했다. 그의 눈가에 슬픔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너, 너무해. 우승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요?!”
“이 이상 반론은 안 받는다.”
바드가 단칼에 잘라 말했다. 이를 지켜본 카스티바와 게르덱은 환호 했다. 그동안 놀고먹는 거에 대해서 드디어 밥값 좀 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일만 잘 되면 회식하는 겁니다?”
게르덱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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