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73)
핏기가 묻어나는 절규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무한한 칼부림 속에 찢어발겨진 살점과 정체불명의 유해들은 전쟁의 끝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쌓여만 갔다.
물러서지 마. 다리가 뜯겨나가도, 팔이 잘려나가도 돌진해. 적의 시체를 넘어서 계속 싸워. 그러면 내가······.
‘반드시 라두스를 죽인다.’
기사들의 창이 마족의 눈알을 꿰뚫었다. 번뜩이는 금속 조각이 그들의 복부를 가차 없이 베어냈다. 그 틈으로 시커멓고 걸쭉한 액체가 뿜어져 나오고 질척거리는 유해가 토하듯 빠져나왔다. 그 마족은 맹금의 발톱을 가차 없이 휘둘렀다. 범위 안에 있던 3명의 기사들은 가느다란 나뭇가지 꺾어지듯 허리가 잘려나갔다. 시뻘건 핏물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기사들의 눈에 두려움이란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승리를 위한 각오가 넘칠 대로 넘치니, 필요이하의 감정을 담는 것이 이상했다. 그들의 눈은 목숨을 각오하는 전사의 눈이다. 기사들은 무기를 놓치면 주먹으로, 팔을 잃으면 이빨로 물어뜯었다.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었다.
“죽어죽어죽어! 죽어버려 악마새끼들아!”
기사의 팔과 다리는 잘려나간 상태였다. 전신을 두르고 있던 풀 플레이트아머 마저 내구도가 다 했는지 한줌의 빛의 가루가 되어 소멸했다. 그러나 병사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마족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인간의 턱 힘으로 마족의 단단한 피부를 꿰뚫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예상대로 그의 이빨이 깨어지고 부서졌다. 하지만 기사는 마족의 다리에서 한 방울의 피가 베어 나왔음을 느꼈다.
“크흐읍······! 우읍, 후으읍!”
어차피 죽는다. 죽음을 예견했기에 그는 울었다. 굵직한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만족했다. 자신은 충분히 싸웠다고, 목숨을 걸만큼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확신했다.
“크하하······ 하하하하하!”
퍽!
호박에 말뚝 박는 둔박한 소리가 내달리자 그의 머리통이 가차 없이 밟혀 부서졌다. 뼛조각이 흩날리고 질펀한 소리와 함께 살이 뭉개졌다. 최후에 최후까지 승리자의 미소를 지은 무명의 기사의 혼백은 땅과 하늘로 스며들었다.
***
“방패 앞으로! 바다까지 길을 열어라!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워라!”
“저 놈은 내가 맡겠어. 너는 왼쪽. 알겠냐?”
“젠장! 이젠 이판사판이군. 여기 까지 와서 안 죽을 수는 없지!”
두 명의 기사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나누며 각오를 다지며 돌진했다. 선두로 달리는 두 사람을 바다로 보내기 위해서 벌써 몇 만 명의 희생을 거쳤는가? 죽인 마족보다야 몇 배는 많을 것이다. 그들도 그 범위 안에 들어갈 것을 각오했다.
“으아아아아!”
터엉!
“크윽! 무슨 충격이 이렇게······.”
가드한 팔이 저릿저릿한 게, 뼈가 완전히 바스러진 모양이다. 그래도 결과는 만족한다.
“막아냈어.”
기사의 페리(Parry)가 성공하자, 마족은 한순간 경직상태에 빠졌다. 기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창을 마족의 심장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이야아앗!!”
예리한 날붙이가 그들의 기상을 보여주듯 창끝은 마족의 HP를 단숨에 깎아내렸다. 마족은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곧장 반격에 나섰다.
“쿠오오오오오!”
마족이 페리에 성공한 방패기사를 집어 물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살을 비집고 관통했다.
“커헉······!”
“어이!”
“나는 괜찮아······ 괴물을 죽여······. 부탁······한다······.”
그의 몸에서 온기가 빠져나갔다. 죽음이 드리운 얼굴에 원통함도 함께였다. 힘없이 떨어진 손이 그의 마지막을 알렸다.
“지금이 기회야. 녀석이 다음 공격에 대비할 여유는 없어.”
기사가 손잡이 부러져라 창을 움켜쥐며 이빨을 갈아마셨다. 그는 바닥을 박차며 몸을 던져 창을 멀찍이 뻗었다. 마족은 차마 반격하기 전에 두 번째 급소를 허용했다.
“쿠워어어어어!!”
우리는 이겼다. 놈에게서 승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싸움은 전쟁이라는 규모에서 아주조금······.
‘승리에 기여했다.’
***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200미터 남짓. 텐션을 올려서 한순간에 돌파하면 된다. 나는 곁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플로를 흘긋 쳐다보았다.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크하하핫! 바라던 바. 속도를 올리지.”
플로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하여간 변함없는 녀석.”
뒤따라오는 병사들의 수가 상당히 줄었다. 이제부터 그들의 희생은 무의미하다.
“정지! 이제부터 나와 플로만 간다! 각 단장들은 대열을 유지하면서 방어태세로 전환해라!”
체력은 충분히 아꼈다. 기사들의 희생덕분에 이 자리에 서있을 수 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승리하십쇼! 파에톤님!”
그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수밖에 없다. 저들을 위해서라도, 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이 세상을 포함해 전 대륙을 위해서라도!
“언제나 당신을 존경해왔습니다. 실력이 아니라 마음가짐 또한 강했던 당신을······ 우리 단장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파에톤님.”
“많은 세월이 흘렀다. 괜한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마라.”
파에톤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만,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본래의 단장들은 말머리를 돌려 다시 전장 한복판으로 돌아갔다. 나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 앞에 도착했다. 플로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내 생각을 읽으려고 안달 난 눈치이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 하벨스 대륙의 최고 통치자를 보좌하던 파에톤은 이미 죽었다. 마족의 침공이후 나는 나 자신을 버리기로 했으니까.”
“그건 내가 자네에게 구해졌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겠다던 느낌과 비슷하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아니야. 그저······.”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 내가 극한으로 몸을 단련하고 강함을 갈구한 것은 바로 오늘날을 위해서였을 것이리라. 회색현자가 말한 대로 오늘 최후의 결전을 치른다. 태어났을 때부터 결정된 운명은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모든 것은 신이 정한 각본대로 흘러갈 뿐이다.
“이끌리는 대로 왔을 뿐이야.”
나는 바다 위로 한걸음 다가갔다. 해왕의 증표덕분에 몸이 가라앉지 않았다. 5분여 정도 흘렀을까. 우리는 바다 한 가운데 도착했다. 불길한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주변은 밤처럼 어둡고 시야는 좁았다. 한껏 긴장하고 있는 동안에 플로가 내 어께 툭툭 치면서 한 마디 한다.
“자네가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 운명이라면 내가 자네를 따라 나선 것도 운명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다면 알아두게. 플로스티아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것을 말이야.”
그는 미련 없는 얼굴로 쌍수도끼를 들어 올렸다. 무기를 향한 곳은 바로 전방. 무서울 정도로 농밀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방향이다. 이윽고 시야가 밝아졌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 사방이 새하얀 공간이다. 차원이동? 공간전이? 아무렴 상관없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악마와 싸운다.’
바다의 짭조름한 냄새가 사라졌다. 피부로 전해지는 더운 습기나 바람도 없었다. 이곳은 그저 하얀색으로 뒤덮인 무(無)의 공간일 뿐이다.
“라두스······.”
녀석과 두 번째 만남이다. 엉덩이까지 내려온 희고 눈부신 장발, 눈송이가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눈썹, 백옥 같은 피부는 겨울 그 자체였다. 그녀는 몸 어디에도 화려한 장신구를 두르지 않았다. 그저 순백색의 하얀 옷 조각을 걸쳤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존재감을 발하는──────
『진정한 악마다.』
“또 만났구나.”
그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눈부신 외모에 한층 더 고차원적인 아름다움이 더해졌다. 파에톤은 경계심을 높이며 무겁게 소리쳤다.
“널 없애기 위해 지옥으로부터 기어 올라왔다. 라두스.”
“어리석은 자. 그때의 악몽을 번복하기 위해서 제 발로 돌아오다니······.”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목소리가 유유히 흘러왔다. 잔잔하고 차분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진득한 살의가 묻어나 있었다. 그녀의 힘은 파에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하벨스 대륙의 절반을 통째로 날려버린 그 힘. 고향땅, 가족, 사랑하는 사람까지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그 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내 힘을 알면서도 대적하려 들다니.”
“알기 때문에 싸우러 온 거야. 네 놈은 재앙의 씨앗이다. 그날의 악몽을 번복하지 않기 위해 내 손으로 끝내주마.”
승산은 얼마쯤 될까? 1퍼센트? 소수점까지 내려갈까?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그게 현실이라 한들, 가만히 앉아있다고 달라질 건 없다. 싸워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네 앞날은 죽음 뿐. 그 이상의 결과는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녀가 루비 같은 빨간 눈으로 나를 매도했다. 나는 그녀의 예언을 뒤로 미루고 말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너는 왜 이 세계로 넘어온 거지? 어째서 인간을 죽이고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하는 거냐.”
라두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파괴에 이유를 부여해야하는가? 어차피 없어질 것. 네놈들은 알 필요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군.”
나는 대화를 멈추고 거대한 대검을 들어 올려 그녀를 겨누었다. 플로 또한 쌍수도끼를 X자로 가로지른 채 전투에 대비했다.
“마족의 침입으로 인류는 삶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오늘이 세상 파괴될 운명이라면······.”
그딴 베드엔딩. 내가 바꿔주겠다.
파에톤의 입가에서 죽음 가득한 숨결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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