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Master Smith-67화 (67/202)

Master Smith (67)

문틈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빛 한줌이 소녀의 얼굴반쪽을 비추었다. 그녀는 화려하게 꾸며진 주황색 한복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 차를 홀짝였다. 동글게 말아 올린 머리에는 금색 비녀가 아름답게 빛나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비취색 옥반지가 고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앵두보다 달콤하디 또렷하며 하얀 피부는 잡스런 상처하나 없이 백옥 같다. 호박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총명한 우주의 기운이 한 움큼 발을 담가 여유롭게 안정을 찾아갔다.

복숭아꽃 향기가 슬그머니 다가와 얼굴을 감싼다. 한 쌍의 새가 지저귀며 음악을 연주한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가되어 현재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극락이 아니한가.”

호록. 찻잔을 기울이는 동작마저도 차분하고 고귀하다. 그녀가 고갤 들어 푸른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을 올려다본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그 아이가 왔구나.”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차를 반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바닥으로 길게 늘어진 한복을 끌면서 성체 안쪽의 어둠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녀의 고결함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서 눈부시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도원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

우리는  마을에 이르렀다. 위험한 분위기는 아니다. 아마도 인간세상과 비슷해서 위화감이 없는 것이리라.

“그럭저럭 잘 넘어갈 것 같군.”

미호의 고향이라기에 미호같은 놈들이 널려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평범한 사람들 못지않게 약한 호족들이 대다수이다. 아마도 미호처럼 죽어라 수련하는 호족이 많지 않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이렇게 평화로운 땅을 놔두고 굳이 인간세계로 내려갈 이유도 없다.

바드는 호족이 본인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한들, 쉽사리 덤비지 못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미호는 여행안내원 마냥 짬을 내어 연꽃 마을을 소개했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호에 그치지 않아. 다들 둔갑술을 펼치기 위해서 100년은 기본으로 수행해두기 때문이지. 그 뒤의 수행은 자유야.”

“그래서 특출한 호족이 보이지 않았군.”

바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평화로운 마을이네. 이 세계는 호족을 위협하는 존재가 없는 거야?”

레이나의 질문에 미호가 그렇다며 끄덕였다.

“이 세계는 지금의 장로님과 선대 호족이었던 신령님이 유지하는 공간이야. 억지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타종족은 침입할 수 없어. 침입한다 한들 호족전사들과 장로님의 손안에 척결당하지.”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카스티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호족전사?”

“호족전사는 팔미호부터 내려지는 호칭이야. 연꽃 마을을 지키는 전사지.”

바드는 문득 궁금해졌다. 팔미호가 그렇게나 대단한 녀석들이라면 구미호인 미호는, 정확히 말해서 곧 십미호가 될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호족인지 말이다.

“그렇다면 구미호는 뭘 하는데?”

“인간세상에서 수련에 전념하지. 십미호로 각성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거야.”

“너는 왜 십미호가 되고 싶은 거지?”

그렇게나 고차원적인 존재라면 ‘힘’이라는 요소에 목매달 필요가 없다. 그녀는 충분히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뭐 때문에 십미호가 되어야만 하는가?

미호는 여기엔 나름의 사연이 있다는 얼굴로 질문을 피했다.

“다 왔어. 여기가 장로님이 계시는 탑이야.”

“닫혀있군.”

웅장하고 고풍스런 고층 탑이 나선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있다. 나는 굳게 닫혀있는 대문 앞에서 소리쳤다.

“장로! 듣고 있나!”

바드의 목소리가 몇 번이고 메아리쳐 돌아왔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반응은 깜짝 놀라 도망치는 새들의 날갯짓이 전부였다.

“주인장이 안 나오면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어서 오너라.”

문을 밀고 들어가려던 찰나, 옥구슬 굴러가는 청아한 목소리가 바드의 행동을 멈추었다.

“그쪽은 모습을 감추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예의인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초면에 반말이나 찍찍 내뱉는 놈이 예의를 거론하는 군. 밑을 봐라 애송아.”

“······?!”

바드가 불평하며 요정 같은 소녀를 발견했다. 주황색 계통의 화려한 한복을 입은 소녀가 시큰둥한 얼굴로 그를 째려보았다.

“이제야 발견했군. 네놈의 동체시력에 경의를 표한다.”

“상식적으로 쉽게 찾아낼 크기는 아니거든? 당신 너무 작다고.”

몸의 비율은 완벽하지만 그 크기는 손가락 세 마디정도에 불과하다. 실수로 밟고 지나가도 알아차리기 어려울 크기다.

“난 작지 않아! 너희들이 무식하게 큰 거지!”

“내 알 바 아니고. 가서 장로나 부르시지?”

“그 사람이 장로님이야.”

미호가 키득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바보 같은 표정으로 난쟁이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뭘 봐?’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장로의 머리를 들어 올려 반 바퀴 돌렸다. 엉덩이에 꼬리로 추정되는 실타래가 붙어있다.

“무, 무례하도다!”

“꼬리도 있잖아? 진짜 장로야?”

상상만큼 카리스마 넘치지도 않고, 강해보이지도 않는다. 손가락 만해서는 쥐뿔도 없는 꼬맹이다.

“무례하다고······.”

그녀가 사납게 이를 갈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말 했다!”

그 작은 몸이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여 바드의 안면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바드의 몸이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나무 몇 그루를 작살냈다.

“크허억!”

일반인이었다면 단순한 외상으로는 끝나지 않았을 정권이었다. 나는 좌측 상단에 5분의1가량 줄어든 HP를 보고 기겁했다. 이만한 데미지는 크라켄도 발휘 못한다.

“이 무슨······.”

지금껏 만난 그 어떤 놈보다 강하다. 방금 전 일격을 얻어맞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몸을 질질 끌면서 다시 대문 앞까지 향했다.

“이제 정신 차렸느냐?”

“일단 사과하지. 장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인간 놈. 하여간 그 영감이 버릇을 잘못 들여놨군.”

“영감? 누굴 말하는 거지?”

장로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뒤돌아섰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설화. 네게도 할 말이 있다. 손님들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오너라.”

그렇게 말하고는 까만 연기와 함께 눈 녹듯이 사라진다. 카스티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설화라니?”

“내 이름이야. 그래도 주인님이 지어준 이름이 좋은데~”

“이제 와서 설화라고 부를 생각 없어.”

그녀가 ‘그래?’하고, 답했다.

탑은 겉보기와 다르게 1층하나 뿐이었다. 덕분에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았다. 카스티바와 레이나는 나름 웅장하고 넓은 공간에 감탄하면서 마룻바닥에 조용히 앉았다. 미호는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안 걸릴 거야.”

카스티바와 레이나는 앞에 놓인 찻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장로님은 이렇게 큰 찻잔에 차를 담은 걸까? 혼자서 하면 무거울 것 같은데.”

카스티바가 말했다.

“의외로 한손으로 번쩍 들어 올릴지도 몰라.”

레이나가 맞받아쳤다.

레이나의 발언에 바드는 얻어맞은 얼굴을 무의식적으로 매만졌다. 이미 된통 당해본 경험자로서 레이나의 말에 신빙성이 더 크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한편 방안에서는 미호와 요정 같은 장로가 마주앉았다. 장로는 자기 사이즈에 맞게 엄청나게 작은 찻잔을 기울여 한 방울쯤 되어 보이는 녹차를 홀짝였고 미호도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런 장로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지켜보느냐?”

“여전하네요. 장로님은.”

“그러는 네놈은 많이 변했더구나. 설마 인간과 동행 할 줄이야. 몇 안 되는 호족들이 알면 놀라 자빠질 거다. 더군다나 설화 너는 유독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느냐?”

장로가 추궁하듯 눈썹 한쪽을 치켜들었다. 미호는 과거를 회상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그런데 그 남자가 저를 살려줬어요. 마지막 생명의 보주를 제게 줬죠.”

“생명의 보주를? 그 귀한걸 요괴 살리는데 사용하다니. 웃기는 녀석이군.”

미호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네. 맞아요. 그 남자가 이유 없이 선의를 베풀만한 사람은 아니죠. 그래서 대가를 치렀어요.”

미호가 자신의 목에 매달린 목줄을 슬쩍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 남자의 충실한 펫이 되어버렸죠.”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죽어도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는 죽고 싶지 않았다. 보기에 엄청 치사스럽고 수치스러워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무슨 이유에든 그 남자에게 복종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조금은 믿기로 했어요. 인간을요. 그 남자는 제가 생각한 만큼 나쁜 인간이 아니었거든요. 정상은 아니지만.”

장로는 놀란 얼굴로 미호를 주시했다. 앵두 같은 그녀의 입술이 힘겹게 떨어졌다.

“설화 너는······ 아무래도 모든 준비가 끝난 것 같구나.”

“십미호 각성. 이제 할 수 있는 거죠? 생명의 보주도 10개 전부 흡수했으니까요.”

장로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호가 화색에 찬 얼굴로 탄성을 내지르려던 순간 장로가 검지를 뻗어 운을 뗐다.

“좋아하긴 이르다. 이 다음이 가장 어려운 단계이니.”

장로의 눈매가 변했다. 슬픔과 분노,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떠오르고 있었다. 장로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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