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39)
“저기······.”
천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생명의 보주를 전부 수집한 내가 어째서 인간앞에서 기죽어야하는가? 요괴로서, 그리고 (진)십미호로서 납득할 수 없다.
“나 부탁이 있는데······”
“존댓말.”
“요.”
말도 안 돼! 압도당한거야? 구미호인 내가 눈빛만으로 눌린 거야?
“네 부탁을 듣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지. 내 동료들을 풀어줘야 하지 않겠어?”
되먹지도 않는 유혹술 덕분에 모두들 불편한 자세로 굳어져있다. 유혹에서 풀려나면 온몸이 삐걱거릴게 분명하다.
고즈넉하게 압도하는 바드의 목소리가 구미호의 간담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소복을 갈무리하며 수긍했다.
“아, 네.”
“말해두겠는데 쓸데없는 행동하면 그 목걸이가 반응해서 전기쇼크를 먹일 거야. 물리적인 힘이나 마력을 방출시켜도 소용없어. 특별히 단단한 광물로 제작한 보구거든.”
해왕석으로 만든 묵직한 목걸이는 넘실대는 녹색의 기운을 영롱하게 내뿜고 있었다. 목걸이는 불특정 뇌파를 감지한 순간 공기 중의 자유전하를 끌어당겨서 지속적인 스파크를 일으킬 것이다.
구미호는 바드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유혹에 걸려든 팀원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주었다. 뇌 속으로 직접 마력을 전달시켜서 유혹을 풀어내는 것이다.
“어라? 여긴 어디? 무척 긴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되찾은 카스티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면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엉덩이에 북슬북슬한 꼬리가 달린 귀여운 수인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그 뒤쪽에는 어느 때와 같이 얄밉게 웃고 있는 바드가 보인다.
“잠깐! 이거 무슨 상황이야?! 왜 여자 한명이 더 늘어난 거지? 게다가 그 꼬리는 수인족? 아니면 설마······ 구미호!?”
“다 끝났어······요.”
구미호가 바드에게 고개 숙여 보고했다. 이마까지 내려앉은 도도한 뾰족귀는 그녀의 자신감이 잔뜩 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생명의 보주를 받아먹은 이후부터 뭔가 잘못되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뭣 때문에 이 남자에게 굴복하고 맞지 않으면 안 돼는 거지? 나는 단지······ 살고 싶어서 그랬는데.
“수고했어.”
바드가 냉담하게 한마디 던지고 몸을 돌려버렸다. 이젠 관심조차 주지 않겠다는 것일까?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노예가 되버린 이상 무슨 기대를 하겠어?
“이, 이봐.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쿠샨은 바드에게 설명을 요했다. 고개를 돌린 바드는 자초지종 상황을 설명했고, 구미호가 자신의 펫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실하게 못을 박아두었다.
“그런고로 앞으로 적당하게 잘 지내도록. 이래보여도 너희보다 훨씬 강한 녀석이니까 전투할 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잘 부탁해······요.”
내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올 때마다 바드가 나를 째려본다. 그 눈빛이 정말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울고 싶다. 서럽고, 무섭고, 슬퍼서.
“아무튼 구미호 사건은 대충 넘어가고. 이번에야말로 엠페러의 본진으로 들어가 보자고. 내 목적은 처음부터 전설급 재료지 구미호가 아니었단 말이야.”
“이쪽 길을 따라가면 다잔까지는 금방이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구체적인 작전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게다가 우리에게 새로운 전력이 생겼으니······.”
쿠샨이 구미호를 힐끔 바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뭘 봐? 아저씨.”
구미호가 대뜸 경계심을 피워내자 바드의 눈초리가 날아갔다. 구미호는 금방 기세를 죽이며 몸을 움츠렸다.
“끄우우······.”
“작전을 세우기 전에 한 가지만 묻지.”
엠페러의 소굴은 엄청난 규모가 분명하다. 넓고 복잡하고 적도 널리고 널렸겠지. 엠페러 전력의 수십만 명 중에 60%는 이곳 다잔에 모여 있으리라. 그렇다면 아무리 쿠샨이라 할지라도 수적 열세에 몰리면 위험해진다. 특히 같은 공작급의 전력이 몰려든다면 더더욱 그렇다.
즉, 정리하자면 이렇다. 나와 구미호를 제외한 당신들은 전투에 직접적인 관여를 할 필요 없다는 것. 내가 엠페러의 소굴을 완전히 붕괴시킬 때까지 당신들은 뒤에서 서포트만 하면 된다.
“바드님과 구미호 둘이서만 내부로 잠입하겠단 소리인가요?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게르덱이 극구 부인하며 소리쳤지만 바드는 역으로 꼬집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많은 놈들을 상대로 너희들을 보살필 여유는 없어. 내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말이야. 좀 더 까놓고 말하면 방해만 된다는 거야. 전투는 내가 담당할 테니 당신들은 다른 것 좀 해주지 그래?”
그들에게 딱 어울리는 미션이 있다. 쿠샨은 본인 길드의 얼굴을 알고 있을 테니 망을 보는 카스티바와 게르덱, 안토니오에게 엠페러 집단이 다가가지 않도록 유도하는 거다. 으슥한 골목으로 데려가 깔끔하게 처리하면 망도 보고 잔당도 처리하고 1석2조 아닌가?
바드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침입팀은 나와 구미호, 감시팀은 게르덱, 카스티바. 유도팀은 안토니오, 쿠샨이다. 서로 서포트 잘 해주고. 무엇보다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작전 초반에는 유도팀도 함께 소굴 안으로 들어갈 거야. 침입팀은 그 다음이다.”
입구에서 쿠샨이 깔끔하게 정리해주지 않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침입할 때 들킬 것이 뻔하다.
“입 그만 털고 이만 이동하지. 다잔까지 거의 다 왔다.”
쿠샨이 앞장섰다.
***
멀리서 내다본 다잔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범죄자의 마을이라고도 불린다기에 얼마나 시궁창 같은 느낌일까 생각했는데, 내 착각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도시의 크기는 직경 50킬로미터가 넘는 규모라고 한다. 도시 중심부에는 대리석으로 지어낸 고급스런 성이 우뚝 세워져있었다. 마을의 분위기는 어두웠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부유하는 배경이다. 드라큘라 백작이 존재한다면 이런 곳에서 살았으리라.
도시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거대한 표지판이 세워져있었다. 상당히 개성 넘치는 문장이 적혀있다. 본래라면 《어서 오세요! 다잔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던가, 《꿈과 희망이 넘치는 다잔!》 같이 방문객을 환영하는 말들이 적혀있어야 했는데 이곳은······.
“훔쳐라. 그것이 법이고 힘이다. 뺏기지 마라. 그것은 곧 죽음이다.”
······히야! 이 무슨 멋진 말이란 말인가! 훔치는 것이 법이라 이 말이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도둑질을 합법화 하다니, 이러니까 다잔이 범죄의 마을이라는 거였군. 나도 싹 다 털어버려야······.
“흥분하지마라. 저 문구는 도둑질을 합법화하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들키지 않고 훔쳐낼 자신이 있다면 해보라는 소리지.”
이곳의 법과 규칙을 낱낱이 꿰차고 있는 쿠샨이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살짝 아쉬워진 바드는 “그런 거였어?” 하고 이맛살을 찌푸렸고 그 옆에서 지켜보던 구미호는 ‘얼마나 뼛속까지 썩어빠진 근성이야!’하고 혐오의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나저나 정말로 하는 거야? 들어보니까 세력이 어마어마하다며?”
구미호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질문하자 바드가 주먹을 보이며 경고했다.
“너 은근히 말을 놓는다?”
“미안······합니다.”
그녀는 온몸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우고 두 주먹이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구속된 몸으로서 그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이정도로 자유조차 억압당하는 것은 참기 힘든 수난과 고통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무식하게 정면을 돌파하는 것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둘 테니까. 내부 안에서 차츰 망가뜨려줄 거니까. 놈들도 몸 좀 사려야 할걸?”
“망가트리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게르덱이 눈을 빛내며 질문하자 바드는 팔짱을 낀 채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비밀이지.”
***
작전은 최소 10일 동안 지속될 것이다. 나는 원정대에게 각자 팀을 꾸리게 했고, 각 팀에 대한 작전은 내려주었다. 팀의 조합은 지난번에 언급했던 것과 동일하다.
1팀: 카스티바&게르덱
2팀: 바드&구미호
3팀: 쿠샨&안토니오
“1번 팀은 앞으로 10일 동안 내가 지정한 시간과 장소에 대기하면서 망보고 있어. 누가 땅굴 안으로 들어가는지, 누가 어떤 행동을 하는 빠짐없이 감시해. 내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도망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하지만 바드님에게 어떻게 상황을 알리죠? 땅굴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나는 잘 질문했다며 게르덱의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
“이 장치다.”
이 물건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일정 주파수를 연결시켜 공통된 채널 안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교환할 수 있는 송수신기로, 특별 제작한 바드님의 특별 무전기란 말씀이시다. 버튼을 누르면 송/수신 상태를 변환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 위치도 추적하는 장치가 달려있지.
“그리고 이거.”
쿠샨은 바드가 건넨 플라스틱 재질의 얇은 판을 들어올렸다.
“이건 뭐냐?”
“무전기 전원을 켜면 그 디스플레이 안에 우리들의 위치가 입력된다. 초당 1미터 정도의 오차가 있으니 알아서 확인하도록 해. 그리고 무전기 자체에 반사초음파가 있어서 지도상 내 근처 지형이 세부적으로 묘사될 거다. 그걸 보면서 네가 길 안내를 해주면 좋겠군.”
“이를 테면 박쥐와 비슷한 원리라는 거군.”
“똑똑한데? 아무튼 준비 끝났으니까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훔쳐라. 그것이 법이고 힘이다. 뺏기지 마라. 그것은 곧 죽음이다. 내가 엠페러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다.
각자 맡은 위치로 이동. 선발대는 쿠샨과 안토니오. 그러니까, 일종의 스파이다. 내가 그에게 지시한 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문지기들만 깔쌈하게 처리하고 곧장 나와.》
그거면 충분하다.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은 나와 구미호니까.
“이제부터 네 코드네임은 미호다.”
“······미호?”
그녀가 ‘그건 또 무슨 취향이야?’식의 혐오의 시선과 함께 작은 송곳니를 으르렁 거렸다. 나는 그 넓은 이마빡에 손가락을 튕기며,
“이게 어디서 주인한테 이빨을 들이대?”
딱!
“우씨······.”
얼얼하게 달아오른 이마를 부여잡고 잔뜩 불평하는 미녀요괴. 아무래도 채찍질만 하니까 반항심이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이럴 땐 당근도 줘야하는 법.
“일 제대로 끝나면 원하는 거 들어줄게. 너 지난번에 부탁이 있었다고 했지? 계약을 파기시켜달라거나 그런 건 빼라?”
“정말? 진짜, 진짜, 지이이인짜?”
따콩!
“기어오르지 마. 소리치지 마. 반말하지 마.”
“네네~ 알겠습니다! 주. 인. 님!”
그녀가 맞는 것은 이제 문제도 안 된다는 듯 “톄헷!” 하고 곰살궂게 웃어넘겼다.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주제넘은 부탁을 하면 가차 없이 징벌할 것이다.
‘난리 좀 피워볼까? 일동 여러분.’
세계 최악의 악인이 되라하면 될 수 있다.
세계 최악의 영웅이 되라하면 될 수 있다.
뭐든 좋지 않은가? 한번뿐인 인생. 세상에 내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다면야······.
나라면 가능하다. 부당함을 정당함으로 바꾸어버리는 압도적인 힘을 나는 가지고 있으니까!
“처리는 끝났다.”
쿠샨은 손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공작급 장군이군. 입구지기를 이렇게 금방 끝냈단 말이지?
“가자 미호.”
“네에 주인님~♪”
쿠샨을 데리고 온 것은 역시 정답이었다. 남은 것은 엠페러 길드가 스스로 붕괴하는 꼴을 지켜보는 것 뿐.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재미있는 볼거리다.
왜냐하면 타오르는 것 자체가 고져스한 일이니까!
완전무장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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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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