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Smith (17)
“어이~ 거기 로브 뒤집어쓴 누님. 아까부터 혼자 있던데 같이 마시지? 시원한 흑맥주도 있다고.”
“미안. 사양할게. 일행이 있거든.”
“일행?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민둥머리의 애꾸눈 남자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자리로 돌아갔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그녀는 입가에 마요네즈를 묻힌 채 오징어 다리를 뜯고 있다. 구석진 자리는 어둡고 사람이 거의 없는 자리. 그녀의 정체는 레이나였다.
‘낮에 큰 일이 났었구나······.’
나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낮에 바드가 없어진 이유를 수긍했다. 그러나 이사벨라까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일이 있었으면서 해가중천에 뜰 때까지 나를 안 깨우고 뭐하고 있었던 걸까? 또, 그렇게 큰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내가 잠에서 깨지 못한 것도 이상하다.
‘내가 이사벨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잠귀는 엄청 밝은데······.’
레이나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이사벨라와 바드의 대화가 들려오자 그녀는 무심코 숨을 멈추고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레이나는 그대로가 좋아. 생긴 게 예쁘니까.”
으, 으와아아······ 말도 안 되는 걸 들어버렸다······.
‘뭐지뭐지뭐지?! 잘못 들었나? 내가 취했나? 진짜 무슨 소릴 한 거야?’
레이나의 얼굴이 한순간에 달아올랐다. 그녀의 입이 오징어를 빠르게 씹어대기 시작했다.
“우물우물.”
곧바로 이사벨라의 질문이 이어진다.
“와아~ 돌직구 쩔어. 저는요? 저는 어떤 데요?”
“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
“왜 대답이 없어요? 저는 별로인가요?”
“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우물.”
왠지 모르겠지만 신경 쓰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뭐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이 기분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드는 대충 얼버무리며 질문의 답을 피해갔다.
‘휴우~ 뭔지 모르겠지만 다행이다.’
그 뒤로 10분정도 더 지났을까? 처음 보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던 그가 또다시 혼술을 시작했다.
몇 시간째 오징어다리를 뜯고 있는 나 자신도 대단하지만 혼자서 술통을 휩쓸어버리는 바드도 대단한 것 같다. 나야 술에 약한 체질이라서 그렇다 치지만 저건······ 너무 마시잖아?!
여기서 합석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되도록 조용히 빠져나가, 여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그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도 한순간이었다. 바드의 곁으로 키 작은 소녀가 다가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드 오빠. 너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오빠?”
“오, 오빠 맞잖아요? 아니면 아저씨라고 부를까요?”
그녀의 이름은 카밀라. 목장아르바이트로 얼마 안 되는 실링을 벌어들이면서 병약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소녀다. 그녀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는 마을사람들은 연민의 정을 나누며 일을 도와줬는데, 대게 집안일이나 간병하는 일이었다.
가끔씩 코지부락으로 내려오는 나와는 아주조금 안면이 있는 정도로 통한다. 열댓 살 정도 되는 소녀지만 바드 곁에 자연스럽게 붙어서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네가 여기 왜 있어? 주점이라고.”
“그란다 아저씨 주점은 주스도 팔거든요? 게다가 술을 아예 못 마시는 것도 아니고요.”
카밀라가 손에 들린 컵을 내밀며 따졌다. 확실히 진저에일은 술이 아니지. 애들 마시기에도 조금 그런 음료긴 하지만.
“멀쩡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그야 오빠가 절 구해줬으니까요.”
수줍게 대답하는 소녀. 카밀라는 조막만한 손으로 진저에일을 홀짝였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새삼스럽게 뭘.”
바드는 다른 맥주통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이번엔 암갈색의 흑맥주다. 버터맥주의 부드러움과 다르게 목구멍 안쪽에서 잔잔하게 느껴지는 달콤함과 시원함은, 알코올에 취한다기 보다는 그 단맛에 중독되는 것에 가까웠다.
“오빠.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나는 구운 오징어다리를 케요네즈에 찍었다. 술자리에 앉은 지 세 시간째지만 시동은 지금부터 걸린 것 같다.
“또 도와줄 수 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
“힘든 일 있을 때 또 도와줄 수 있냐고요.”
잘 웃던 카밀라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힘들지만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알기 때문에 그녀는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방금까지 나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즐거웠고 고마웠다. 지금껏 바라지도 않았던 도움을 받았고 그것은 나의 불행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이라 생각해왔는데······.
“오빠가 도와줬을 땐 조금 달랐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불쌍한 눈으로 봐주지도 않았고, 뭐랄까······ 되게 든든했어요!”
저저! 저 꼬맹이 보게! 지금 시방 무슨 짓거리지?! 지금 누구한테 작업 거는 거야?
레이나 동요하지 말아야 할 것에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상대는 20대 성욕 충만한 남성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를 상대로 흔들리지는······.
“의지하고 싶을 땐 맘껏 해. 언제든 도와줄 테니까.”
오징어다리를 씹던 레이나가 속으로 소리쳤다.
‘그렇게 틈을 주면 안 되죠. 이 바보야!’
둘의 대화는 거기까지. 카밀라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드디어 진짜 혼자가 된 바드. 이제까지 눈치만 보던 레이나가 드디어 행동을 개시할 때였다.
벌떡 일어난 사람은 레이나요, 꿀꺽꿀꺽 맥주를 마시는 사람은 바드다.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사람은 절대미인 여사제요, 혼자서 안주를 집어먹는 사람은 절대강자 대장장이다.
하지만 레이나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술에 만취한 남자가 의자를 끌면서 일어선 탓에 다리가 걸린 것이다.
콰당!
“레이나?”
“으야야야~ 아파라.”
레이나는 허리를 쥐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주변의 소란이 한순간에 정적으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깨우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왜들 그래요 갑자기?”
“레이나 로브가 벗겨졌······”
바드가 그녀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레이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항상 로브를 뒤집어쓰던 그녀는 결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나 같은 경우에도 그녀의 얼굴을 본 횟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헌데, 이번엔 수십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얼굴을 드러났으니 적응하기 힘든 상황이 분명했으리라.
‘으아아아! 큰일 났다 큰일!’
“바, 방금 그 얼굴은······?”
“허허······. 할 말이 없구먼.”
아저씨들의 짧은 감상평.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국보급 외모를 가졌으니 남심은 곧바로 녹아 흘렀다. 레이나는 주점을 나가며 어디론가 달아나듯 사라졌다. 아마, 메리데이로 향했으리라.
“이거 곤란한 상황이었던 건가?”
얼굴 밝혀지는 게 그렇게 큰일이야? 그만한 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군.
남자들은 저마다 한탄했다.
“아쉽게 되었군. 세상에 그런 여자가 있었다면 악착같이 결혼하지 않고 버텼을 텐데.”
“이보게. 자네 방금 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꿈도 크군!”
“다들 저 여자 넘보지 마슈. 그녀는 내꺼니께!”
“헛소리 말고 앉아! 자네도 아내 있잖아!”
레이나를 두고 남자들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바드의 눈에는 그들의 싸움이 그저 재밌는 구경거리다. 물론 그 싸움 속에서 배불뚝이 그란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나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허허······.”
바드는 진땀을 흘리며 뺨을 긁적였다.
‘자아, 슬슬 엠페러의 졸개들을 심문하러 가 볼까?’
***
밤새도록 이어진 축제는 아침 닭이 울고 난 뒤에야 끝을 맺었다. 술에 취해서 해롱거리는 남자들이 곳곳에 쓰러져있었고 걔들 중에는 아직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곳곳에 오바이트를 쏟아 내거나 주정을 부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내들은 남편들을 챙기느라 바빴으며, 뒷정리들도 그녀들의 몫이었다.
물론 내 상황도 그녀들과 다르지 않았다. 취기에 완전히 찌들어버린 이사벨라는 누가 업어간다 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상태다. 그녀를 메리데이까지 업어갈 사람은 나였으며 뒷정리 또한 내 몫이다.
“이럴 거면 아예 마시지를 말던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등에 업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의 토끼 귀가 내 이마를 간질였지만 지금당장 거슬리는 것은 기창화통을 삶아먹은 듯 어마어마하게 시끄러운 코골이다. 1분1초라도 그 소리에서 해방하고 싶다.
“크어어어어~”
“장난 아니게 시끄럽네. 토끼가 코를 골았던가?”
꾹꾹. 이사벨라의 볼을 눌러보다가도 자신의 눈앞으로 쫑긋 튀어나온 토끼 귀를 당겨보기도 한다. 그때마다 이사벨라는 “우음~”하고 간드러지는 옹알이 내뱉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애교를 받아줄 정도로 인물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
“적당히 하고 일어나란 말이야 이 토끼야.”
“으아으······. 누가 자꾸 내 귀를 잡아당기느뇨?”
그것 역시 옹알이였다. 아무래도 오늘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는 잠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어 보인다.
‘간밤에 무리했으니 별수 없나? 몇 시간동안 바니걸 차림이었으니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힘들었겠지.’
“야, 니들.”
밧줄에 꽁꽁 묶여서는 내 뒤를 쫄랑쫄랑 따라오는 두 사람. 지난 사건의 원흉인 남자 마법사와 스켈레톤을 소환한 꼬마 네크로맨서다. 여담으로 꼬마 네크로맨서는 끈질기게 남자 마법사를 심문한 끝에 그 위치를 알아내서 붙잡은 거다.
그들은 바드의 지목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답했다.
“예, 옙!”
“있다가 못 다한 이야기 들을 테니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디 가면 다 알아차리니까 괜히 도망갈 생각마라. 알았냐?”
“넵!”
메리데이로 돌아온 나는 제일먼저 이부자리를 펴고 이사벨라를 누였다. 바니걸 차림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적당히 편한 자세만 잡아주었다. 그런 와중에 인상을 찡그리는 이사벨라.
“끄으응······ 옷 단추 좀 풀어줘어~ 답답해······.”
“······뭐?”
머릿속에 거대한 기류가 생성되어 거칠게 몰아쳤다. 위험한 선택. 하지만 망설여진다. 기회인가 아니면 함정인가? 바드의 손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