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시간을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성실하게 일했던 덕분에 하루정도의 휴가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생활도 넉넉해졌으니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하윤은 인터넷으로 이것 저것 검색하며 놀러 갈 준비를 했다.
‘놀이공원 갈 때 챙겨가야 하는 것….’
인터넷으로 몇 번이나 검색을 한 후에야 하윤은 잠에 들었다. 어릴 적에도 집이 가난해 놀이공원에 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알바를 한 적은 있었지만 놀러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게 뭐라고 떨리지. 미치겠네.’
물론 이현과 함께 간다는 사실도 떨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가, 일찍 일어나 예정된 시간보다 한시간 먼저 준비를 마쳤다.
“벌써 준비 끝났어?”
뒤늦게 일어난 이현은 그 모습을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많이 기대했나보네. 하긴 힘들게 살았던데다가 맨날 보는 순정 만화에서는 엄청 재밌게 놀곤 하니까.’
만화에서든 현실에서든 하루 종일 놀다보면 없던 사랑도 생겨나는 법이다. 물론 이현은 거기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이성으로 의식하고, 약간 애매모호한 감정만 생겨나준다면 성공이었다. 사실 거기까지만 가면 이미 끝난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현은 빠르게 씻고 나름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시간이 20분도 걸리지 않아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둘 모두의 준비가 끝났다.
“가자.”
혜지는 어제 잔뜩 했던 탓인지 아직도 쓰러져 자고 있었다. 이현은 일부러 하윤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는 집을 나와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
‘이거 쉽지 않네.’
이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잘 대해주는거면 편할지도 모르겠는데, 일부러 틱틱대고 싫어하는 척 연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서아를 꼬실 때가 나을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옆에 있는 하윤이 신경쓰이는데 무심한 척 해야하니 고개도 못 돌리고….
다만 언제나 편법은 존재했다. 버스가 자꾸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것이 편법을 만들어주었다.
아까부터 하윤은 코너를 돌 때마다 휙휙 휘둘리며 이현에게 부딪치고 있었다. 곧바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지만 계속 코너를 돌면 자꾸 부딪치는 것이 여간 아픈 게 아니었다.
‘머리로 계속 박아대는데 안아플 수가 없지….’
그 사실은 하윤 역시 알았다. 그래서 살짝 당황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다시 하윤이 날아와서 이현의 어깨를 가격했다.
“아….”
하윤은 바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이현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리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그냥 이러고 있어. 무릎 빌려줄게.”
“어, 어? 괜찮은데….”
“내가 아파. 계속 부딪치면 나도 사람이라 아파….”
하윤은 더 말하지 못하고 얌전히 누워있었다. 그러면서도 이현의 표정이 밝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긴 내가 좀 많이 부딪치긴 했지….’
그리하여 둘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목적지로 향했다.
*
버스에서 내릴 즈음 하윤의 얼굴은 완전히 붉어져 있었다. 새삼스럽게 지금의 모습을 자각한 탓도 있고 누군가와 이렇게 오랫동안 스킨쉽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별 거 아닌 스킨쉽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하윤의 얼굴이 붉어지기는 충분했다. 이현은 그 사실을 알아채고 조금 더 과감하게 나가기로 했다.
“일단 저 안에 들어가면, 연인으로 놀러온거니까 대충 비슷하게 할 건데. 괜찮지?”
“어? 응.”
하윤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그냥 대답했다. 그리하여 표를 끊고 안에 들어간 후, 이현은 곧바로 하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당황스러웠지만 방금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아버린 하윤은 맞출 수밖에 없었다.
소심하게 팔을 들어올려 이현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자 이현이 작게 말했다.
“안해도 돼. 나만 해도 괜찮아.”
그 중얼거리는 말에 하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짜 연애하는 거 아니고 그냥 연기하는 것뿐….’
그리하여 일방적으로 허리를 안긴 채 둘은 놀이공원 데이트를 시작했다. 사실 말이 데이트지 그냥 노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느새 허리를 감싸던 손도 풀리고 이것 저것 돌아다니며 놀기만 했으니까.
우선 롤러코스터를 타고, 바이킹도 타고, 뭐 이상한 스릴 넘칠 것 같은 기구도 타고….
중간 중간 군것질도 하며 돌아다니다보니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가끔 새삼스레 하윤이 현재 상황을 자각하고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다를 건 없었다.
그리하여 놀던 와중, 문득 이현이 한 곳을 가리켰다.
“귀신의 집?”
“…….”
“쫄았어?”
“아, 아니거든. 가자.”
그리 말하며 하윤은 이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스킨쉽, 문득 깨달았지만 여기서 갑자기 빼면 더 이상할 것이다.
하윤은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 귀신의 집으로 입장했다.
“오….”
내부는 나름 잘 꾸며둔 모습. 이현마저도 으스스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하여 진행하던 와중 누가 뭐라고 말할 것도 없이 둘은 손을 맞잡았다.
심지어 하윤마저도 두근거릴 새가 없었다. 많이 무서웠으므로.
“으억….”
그리고 생각보다 이현은 겁이 많았다.
정확히는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것에 약했다. 오히려 하윤이 이현을 진정시켜주는 가운데, 다시금 하늘에서 인형이 떨어지고 이현이 몸을 떨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하윤에게 매달릴 정도로. 이건 연기나 뭔가가 아닌 정말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하윤에게 매달린 채 이현은 겨우 걸음을 옮겼다.
“…….”
그리하여 끝이 보일 무렵, 그제서야 민망함을 깨달은 이현이 슬쩍 떨어졌다. 하윤은 그 사실에 킥킥대며 웃었다.
“무서웠어?”
“…시끄러.”
“우리 이현이, 많이 무서웠어? 누나가 안아줄까?”
“…….”
그리하여 이현이 부끄러워하고 하윤이 놀리는 가운데, 둘 사이에 약간 남아있던 어색한 공기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는 서로가 서로를 놀리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모습은 연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친한 친구 사이까지는 되어보였다.
‘약간 혜지 초창기같은 느낌….’
몇몇개의 기구를 더 탄 뒤에, 마지막으로 하는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간식을 사서 벤치에 앉아있던 와중이었다.
“아, 힘들다.”
“그래도 재밌었지?”
“재밌네. 너 엄청 놀라는 모습도 보고.”
“아 좀…!”
“푸흡….”
그리하여 낄낄거리다가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하윤으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 그동안 알바를 한 후에는 뒤에서 일을 하거나 그 전에 퇴근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보는 모습은 제법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었다.
“오….”
그렇게 마지막까지 관람한 후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과연 언제부터 연기가 풀린건지는 알 수 없겠으나, 나름 이번 일을 계기로 이현과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놀이공원에서 나와 버스에 탄 후에도 이현의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상냥하진 않았지만 조금은 나아진 모습, 하윤은 이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친구랑 더 친해지면 좋은 일이지.’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찍은 사진들을 감상했다. 어차피 언니들이 사진 보여달라고 할 것이 분명하니 미리 찍어둔 것들.
나름 둘 모두 외형은 그럴듯해서 괜찮은 모습으로 찍혀 있었다. 둘은 사진을 보며 낄낄댔다. 그 중에는 귀신의 집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하윤은 계속 웃었고, 이현도 어이 없어서 웃었다.
“아 진짜 저 덩치로 나한테 매달려가지고….”
“그만해라.”
“그믄흐르….”
“따라하지 말고.”
“뜨르흐즈 믈그….”
그런 분위기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어!”
쾌활하게 인사하니 혜지가 맞아주었다. 혜지는 웃으며 손을 흔든 뒤, 자연스레 이현에게 안긴 채로 대화를 시작했다.
“재밌었어?”
“좋았지.”
그리 말하고는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귀신의 집에서의 이현의 모습이었다. 그리 말하며 웃었지만 하윤은 마음 어딘가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어째서? 아마도 혜지와 이현이 보여주는 저 모습 때문에.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한 이현이지만 혜지와 있을때는 전혀 보여주지 않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예전부터 본 모습이긴 했으나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윤은 그렇게 얘기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난 피곤해서 먼저 잘게.”
“어. 들어가.”
그리하여 방으로 들어가 씻고 침대에 누으니 저쪽 방에서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늘 듣던 소리, 그러니까 혜지의 교성 소리.
익숙한 소리였으나 오늘만큼은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에.
그리하여 이어폰을 낀 채 휴대폰으로 이것 저것을 찾아보던 하윤은 문득 자신의 몸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자위 한 번 했었지.
다시금 자신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가버리지는 못했다.
자신은 가버렸다고 착각했지만 겨우 애액 조금 흐른 정도는 가버린 것이 아니었다. 하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몸을 안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