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그동안 함께 일하다가 그만두는 사람이 둘이나 있기 때문일까?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닐 터였다. 가장 중요한 건 하윤을 비롯한 몇몇 비주얼 담당의 힘으로 매출이 수직상승한 것이 점장에게 관대한 마음을 지니게 했을 것이다.
이번에 그만두는 둘 역시 비주얼 담당으로서 매출에 많은 공헌을 했더랬다. 어쨌든 송별회 비스무리한 분위기가 된 회식자리에서 하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열심히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 취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으, 오랜만에 고기 먹었네….”
약간 풀어진 분위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선배는 하윤에게 말했다.
“술 안좋아해?”
“아, 네….”
“처음 먹어봤다잖아요 오빠! 저나 한 잔 줘요….”
앞에 앉아있는 다른 여자가 술을 받아 마셨다. 이쯤되니 고기를 먹는 분위기가 아니라 술마시러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술게임도 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할 것 같은 분위기.
게다가 선배는 취한 탓인지 전보다는 노골적으로 하윤에게 접근했다. 그럼에도 선을 넘지 않는 모습은 경이로웠지만 지금 감탄할 시간은 없었다.
하윤은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갑작스레 시작된 술게임 역시 그랬다. 갑작스레 진실게임을 한다는데, 말하지 못하면 술을 마셔야 한다고.
얼떨결에 참여하게 된 진실게임에서 하윤은 걸리고 또 걸렸다. 선배도 그렇지만 여자 둘도 술 처음 마셔보는 애를 가만히 내버려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탓에 뭐라 하지도 못하고 연달아 술을 마셨다. 선배들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여자도 아닌데 어떻게 대답해 저런 거를….’
다행스럽게도 하윤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 알딸딸한 기분만 들뿐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평생 가지는 못할 터였다. 하윤은 화장실에 간다고 하며 혜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혜지야. 부탁이 있는데….”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혜지가 아니었다.
“혜지 지금 씻으러 갔는데. 무슨 일이야?”
전화를 받은 것은 이현이었다. 하윤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혜지는 예쁘게 생긴 여자이고 이현은 건장한 남자였다. 도움을 받으려면 이현이 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윤은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대충 요약해서 말하자 이현이 잠시 침음을 흘렸다.
“어, 음. 혜지한테 물어보고.”
그런 말이 들린 후에는 조그맣게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친구가 와달라는데 가야 되냐, 괜찮다, 아니 솔직히 가기 귀찮은데 걍 안된다고 해달라, 그래도 자기 친구인데 한 번만 가달라….
결국 혜지가 애교라도 부렸는지 이현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주소 문자로 보내.”
그리하여 일은 해결되는 듯 보였지만 하윤은 뭔가 찝찝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찮으니 걍 가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니….
평소 남자들이 자신에게 하는 것과 정반대라 뭔가 신경쓰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 하윤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술게임이 두어번 쯤 더 진행된 후에 이현이 도착했다.
“야. 가자.”
혜지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듯한 가벼운 말, 하윤은 속으로 이현을 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누구세요?”
“하윤이좀 데려가려구요. 얘가 술만 먹으면 좀 안좋은 일이 생겨서.”
“처음 먹는다던데요?”
“…아무튼 안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요.”
하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이현의 떡대를 보고도 감히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선배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남친인가? 아냐, 남친은 아닐텐데. 아무튼 방해 받았네….’
밖으로 나온 이현은 하윤을 보며 말했다.
“너 술 처음 먹어?”
“어, 응.”
“얼마나 마셨어?”
“아마 2병 정도 되는 것 같은데….”
“…?”
그런 것 치고는 하윤은 얼굴만 붉다 뿐이지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사실 그녀는 술에도 강한 편이었다.
“어쨌든 가자.”
그렇게 집에 도착해서는 씻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혜지의 교성을 들었다. 그 사이로 이현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는데, 과연 달달하다 못해 이가 썩을 것 같은 말투와 멘트였다.
‘졸라 오글거려….’
다음 날이 되어 출근한 카페는 대부분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하기야 그만큼 마셨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 하윤이 하이. 근데 어제 그 남자 누구야? 몸 대박이던데.”
“남친이야?”
그럼에도 몇몇은 하윤과 어제 봤던 남자를 놓고 떠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윤이 오자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그 중에는 선배도 끼여있었다.
“아하하, 그냥 뭐….”
“거 봐.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
선배는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주 잠깐 스쳐간 표정이었지만 하윤은 남의 표정을 읽는 일에 능숙했다. 곧바로 알아챘다.
“아니, 사귀는 사이 맞아요.”
그 탓일까? 하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뒤늦게 후회했다. 이렇게 되면 선배가 자꾸 들이대지는 않겠지만 멀쩡히 여친 있는 남자를 자기 남친이라고 속인 꼴 아닌가.
“어, 진짜? 언제부터?”
“그, 엊그제부터….”
그러자 선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저녁, 커플과 식사를 하던 하윤이 둘의 눈치를 보았다.
“그, 있잖아….”
이현은 이미 하윤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있었음을 짐작하던 차였다. 그리하여 생각을 읽어보고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찰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좋은 일이긴 한데 약간 어이가 없다고 할까….
아무튼 뒤이어 나온 말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
이야기를 모두 들은 혜지가 입을 벌렸다. 이현도 놀란 척 연기하며 대충 동조했다.
“진짜 미안해. 그치만 조금만 도와주라….”
그러니까 개강할 때 까지만 남친인 척 연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선배도 대학생인즉 개강을 하게 되면 알바를 그만둘 것이라면서.
이현은 혜지를 보았다. 그리고 생각을 읽어보았다.
‘조금 괘씸한데….’
과연 혜지도 이런 일은 좋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현에게는 둘도 없을 기회였다. 마음의 빚을 지게 할 수 있는 기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혜지가 말했다.
“알았어. 그러면 뭐….”
그렇게 말하자 이현은 귀찮다는 티를 팍팍 냈다. 그 모습을 보며 혜지는 속으로 좋아했다.
‘하긴 하윤이보다는 내가 훨 나으니까, 뭐.’
*
의외로 선배는 끈질겼다. 전처럼 아슬아슬하게 들이대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옛날처럼 편한 상태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약간씩 불편한 느낌, 그럼에도 카페 알바는 시급이 좋아 그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남친 있다는 소리를 해도 계속 이래.’
과연 믿지 않는 것일까? 하기야 어제 말했던 걸 생각해보면 약간 부자연스러운 부분도 있긴 했다.
어찌되었건 사귀는 사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처지는 되었으므로 하윤은 확실하게 말했다.
“네, 맞아요.”
“어쩌다가 만났어? 몸 장난 아니던데.”
“친구의 친구라서 어쩌다보니 그만….”
“여자?”
“네.”
“어, 그러면 뺏은 거 아냐?”
“하긴 이정도 얼굴이면 그냥 홀리긴 하겠지.”
“누구 얘긴데?”
하윤에게 남친이 생겼다는 소식은 나름 중대한 문제였다. 점원들도 하윤이 철벽치는 모습만 보다가 남친이 생겼다니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 중 회식 당시 자리에 없었던 몇몇은 사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떻게 생겼는데? 사진 없어?”
있을 리가 만무했으므로 하윤은 적당히 둘러대었다.
‘이거 찍어야 하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하윤은 이현에게 요구했다.
“사진 하나만 찍자.”
“무슨 사진?”
“연인인 척 하는 사진….”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하윤의 귀가 붉어졌다. 이현은 입으로는 피식거리면서도 나름 성실하게 사진을 찍어주었다.
물론 하윤은 셀카따위 찍어본 적 없었으므로 이현이 다 해주어야 했다.
“아니, 여자애가 뭔 셀카를 이렇게 못찍어.”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랬다. 왜.”
“어…. 죄송.”
찍힌 사진은 나름 연인 같았다. 하윤이야 알바를 하며 웃는 얼굴은 익숙했으므로 환하게 웃었고, 이현 역시 적당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현은 늘 그랬듯이 혜지와 사랑을 나누었다. 하윤은 이젠 익숙해진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었다.
“어, 이게 그 사진?”
“응. 괜찮지?”
“감쪽같긴 하네….”
다음 날 아침, 혜지가 사진을 보며 그렇게 평가했다. 약간 심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현이 그 자리에서 키스했다. 하윤은 그 상황에 당황했다.
‘무슨 눈 앞에서 키스를 갈겨.’
어찌되었건 화는 풀린 모양이다. 심지어 야시시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슬쩍 몸을 부비는 것이 나가는 순간 바로 일을 치를 모양새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므로 둘은 물고 빨며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이현은 하윤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어려울 줄 알았는데 저 선배 덕분에 쉬울 것도 같네.’
이현에게는 고마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