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주하윤은 생활만 안정된다면 남 부러울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몸은 힘들지언정 다른 부분에서는 모두 평균 이상이라고 믿었으니까.
실제로도 외모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능력 역시 훌륭했다. 체력도 좋고 힘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긴 그랬으니 무식하리만큼 알바를 하면서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요즘에 이르러서는 그 생각이 깨지고 있었다. 실제로 생활이 안정되니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눈에 밟히는 것이다.
가장 부족한 점으로는 연애를 하고 싶었다. 눈 앞에서 커플이 매일 애정행각을 해대는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아침부터 또….”
밤에 교성이 들리지 않는 날에는 아침에 둘의 애정행각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렇다고 아침에 이런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밤에 교성과 신음이 들려오곤 했다.
어찌되었건 짜증나는 일이었다. 충분히 이현과 혜지가 친구 노릇은 잘 해주고 있다지만 오히려 그 점이 연인을 만들고 싶어 하게 되는 이유였다.
‘다만 내가 누구랑 사귀어야 할지 아직도 감이 안잡힌단 말이지. 여자를 만나자니 뭔가 애매하고, 남자를 만나자니 거부감이 들고.’
그리하여 다시 알바하러 나간 주하윤은 오늘도 고백을 받았다. 의미 없는 고백과 거절의 연속.
기분이 좋지 않아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자니 선배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또 고백 받았어?”
주하윤이 한숨 쉬며 불평하자 선배는 그저 웃었다. 그러면서도 말을 잘 받아주는 것이 이런 일을 많이 해봤다는 사실을 짐작케 해주었다. 문득 너무 자기 얘기만 하지 않았나 싶어 선배를 올려보았다.
여전히 밝은 얼굴, 선배는 계속해서 하윤의 말을 들어주었다.
“아, 고마워요. 덕분에 기분 좀 나아진 것 같아요….”
“아냐. 그냥 듣기만 했는데 뭐.”
그러면서도 하윤은 문득 선배의 여자친구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 사귀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을 것이다. 대충 그런 식으로 중얼거렸더니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 헤어졌는데?”
“네? 어쩌다가….”
“그냥 성격 차이지 뭐.”
*
그날 이후로 선배는 하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원래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티내지 않던 것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옳으리라.
정말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전혀 모를 정도였음에도 하윤은 눈치챌 수 있었는데, 힘들게 살다보면 눈치라는 것이 늘어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배는 대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선은 잘 지키면서도 자꾸만 다가오려는 게 눈에 보였으므로.
‘그렇다고 그냥 내칠 수도 없고.’
내치기엔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정이 있었다. 말도 잘 통하는 편이었는데 어떻게 내치겠는가.
그리 생각하다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은 후에야 수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았다. 혜지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보기 딱 좋을 정도의 크기를 지닌 가슴, 훌륭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벌어진 골반. 외모야 말할 것도 없었다.
요즘 혜지에게 이런 저런 관리를 받고 있는 덕분에 예전보다 예뻐지기도 했다.
‘예쁘긴 하네.’
한숨을 내쉰 하윤이 수건을 가지러 밖으로 나왔다. 수건이 있는 장소는 바로 옆의 방이었던만큼 굳이 옷을 챙겨입기도 귀찮았던 것이다.
실제로 이 시간이면 이현은 잘 보이지도 않았고. 혜지에게는 보여도 딱히 상관은 없을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수건을 가지러 들어온 방에는 이현이 있었다. 이현은 고개를 돌려 잠시 하윤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으므로.
“어….”
“집에서 옷 입고 다녀요….”
하윤은 부끄럽다기 보다는 얼떨떨함을 느꼈다.
뭐랄까, 약간 눈에 흑심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여동생을 보는 오빠같은 눈빛?
뭔가 신선한 경험이면서도 그 눈빛이 자꾸만 생각나서 얼떨떨하기만 했다.
‘뭐지? 저런 반응은 처음이네.’
한편 이현은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알몸으로 막 돌아다니다가 내가 보면 어쩌려고? 우연찮게 온다는 사실 알고 표정 관리해서 다행이지, 큰일 나는 줄 알았네.’
지금 욕정을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하윤이 경계할 것이다. 최근 알아낸 바로는 그런 시선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으므로.
그러니 지금은 친구 포지션에 있어야 했다. 계속 이렇게 자극을 주면서 어느 순간 야한 것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야 하는데….
‘혜지한테 넌지시 흘려볼까. 그치만 그러기엔 약간….’
아무튼 잘 넘긴 것 같았다. 하윤의 생각을 읽은 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그 선배? 딱 봐도 엄청 질 안좋은 부류 아닌가. 착한 척 하면서 뒤에서 다 따먹는.’
약간 이현과 비슷한 과였다.
지금 그 선배라는 사람은 반년간 알바를 하며 하윤에게 충분히 호감작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헤어지고 나니까 하윤을 꼬시려 마음을 먹은 거겠지.
정말이지 위험한 부류였다. 그리 생각하는 사이 하윤은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진짜 예상으로는 일주일쯤 매일 하다보면 자연스레 소리때문에라도 야한 거에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사람인 이상 생활도 안정되었으니 언젠가는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현이 해야 하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
*
주하윤은 알바중에 카페 알바를 제일 좋아한다. 그 이유는 그나마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카페 알바가 만만하다는 건 아니지만 다른 알바와 비교해보면 이만큼 여유로운 알바가 없다. 점장이 얼굴을 보고 뽑았기에 어지간한 요구는 다 들어줄 수 있었으므로.
그 덕분에 하윤은 오전과 한가한 시간대에 걸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즈음, 사람 많을 때 일하고 거의 쉬다가 다른 알바로 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후 한두시간 정도는 거의 동료들과 수다를 떨곤 했다. 그때만큼은 잠시 쉬는 시간이라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그것마저 힘들었다.
선배가 자꾸 들이대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과하지는 않았다. 과했다면 하윤이 바로 밀어냈을테니.
하지만 선배는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선을 지키며 티도 안나게 다가오는 모습은 하윤에게 약간 스트레스를 주었다.
아무리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지만 아직은 조금….
게다가 어쩐지 자신을 꼬시려는 듯 보이는 선배의 모습은 거부감이 느껴졌다. 하윤이 편하게 느끼던 선배는 그냥 동생으로 대하던 선배였으므로.
그리하여 약간 불편함을 느끼는 가운데, 오늘도 일이 끝났다. 최근 알바의 수를 줄였으므로 잠시 쉬는 시간이 났다. 오늘은 선배도 일찍 끝난 모양인지 함께 퇴근하게 되었다.
“이제 다음 알바 가?”
“아뇨. 요즘 몇 개 줄여서 잠깐 쉬는 시간 있어요.”
“그래? 그러면 와플 먹을래?”
선배가 가리킨 곳에는 와플 노점상이 있었다. 솔직히 끌리긴 했지만 여지를 주어서는 안된다. 하윤은 조심스레 거절하고 걸음을 옮겼다.
‘엄청 튕기네….’
선배는 돌아가는 하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분명 쉽게 넘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드가 아주 단단하다. 하긴 얼굴 값을 한다는 거겠지.
그리 생각하며 선배도 걸음을 옮겼다.
*
며칠 뒤였다. 하윤은 같이 일하는 언니에게서 소식을 들었다.
“회식이요? 갑자기 무슨?”
“그동안 수고했다고 점장님이 고기 사준다던데. 특히 너는 꼭 데려오래. 네가 일한 동안 매출이 엄청 늘었다나 뭐라나….”
하윤은 어색하게 웃고 가겠노라 말했다. 일단 공짜로 고기를 사준다는데 마다하기에는 아직 어색했던 탓이다.
게다가 직원 모두가 가는 회식이면 문제가 생길 일도 없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알바를 마치고 저녁 늦은 시간, 하윤과 카페 직원들은 한 고깃집에 도착했다.
알바생들은 대부분이 성인이었으므로 술도 함께 도착했다.
“지환이랑 이연이 복학하면 알바 그만둔댔지? 그동안 수고했다…. 뭐하냐, 안 먹고.”
그리하여 고기를 먹다보니 자연스레 친한 사람들끼리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같은 파트에 일하는 언니 둘과 선배가 하윤과 같이 앉았다.
그리하여 먹으며 술도 마시다보니 여자 둘이 먼저 얼굴이 붉어졌다.
“얼굴 빨개지셨는데….”
“괜찮아. 원래 이래. 그나저나 하윤이 넌 술 안먹어?”
“아, 먹어본 적이 없어서요.”
“괜찮아. 어른이면 마셔야지. 마셔!”
그리하여 처음 술을 입에 대었지만 하윤은 취하지 않았다. 그동안 힘들게 산 보상일까? 하윤은 술에도 잘 취하지 않았다.
아무튼 소주는 맛이 없었으므로 하윤은 먹는둥 마는둥 하며 고기를 집어먹었다. 그리고 옆에서 선배가 고기를 구워주었다.
“아, 제가 할게요.”
“아냐. 내가 구워줄테니까 그냥 먹어.”
하윤은 이마저 제지할 수 없었는데, 자신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언니들에게도 잘 대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찝쩍대기 말라고 하면 과의식으로 보일 것이요 분위기도 망가질 것이다.
하윤은 얌전히 고기만 주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