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은 눈 앞의 상태창을 모두 읽은 후에 생각했다.
‘그래서 페티쉬가 뭔데?’
상태창은 딱 거기까지의 정보만 제공한 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저번과는 다르게 더 보여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현은 잠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페티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뭔지만 알아내면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걸 어떻게 찾아. 애초에 난 여자 꼬시는 방법도 모르고, 또 저 사람은 평범한 여자도 아니라서 어지간한 방법으론 공략이 불가능 할텐데.’
혜지와는 다르게 아직 남자다운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감도 보통’이라는 단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어지간한 창작물에서 TS 미소녀의 약점은 변화한 몸의 쾌감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인데, 감도 보통이라면 그런 일도 기대할 수 없어 보였다.
이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정서아의 몸을 살펴봤다. 고양이상으로 생겨서 약간 건방져보이는 얼굴. 깨끗한 피부와 잘 빠진 늘씬한 몸매. 혜지와는 다른 매력이 돋보이는 여자였다.
‘어려워도 노력할 가치는 있다….’
하긴 혜지가 지나치게 쉬웠을 뿐이다. 이현은 각오를 되새기며 다시 둘의 모습을 보았다.
어느새 둘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마트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도 그곳에 몰렸다. 하기야 예쁘게 생긴 여자 둘이 돌아다니는데 시선이 쏠리는 것도 당연했다.
혜지는 부끄러운지 평소의 당당한 모습 대신 약간 쭈뼛대는 모습을 보였고, 서아는 아무래도 신경 안쓴다는 듯한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근데 아침부터 된장찌개 하려고? 진짜 엄청나네. 난 대충 시리얼 만들어 먹기도 귀찮은데.”
“아니, 나만 먹을 건 아니고 남친 주려고….”
“…남친? 혜지 남친 있었어?”
“아, 아니. 아직 남친은 아냐. 그냥….”
“그냥?”
“그, 어제 같이 잤거든….”
그렇게 말하는 혜지는 정말로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리고 어쩔줄을 몰라했다. 서아는 그 말을 듣고 당황했지만 곧바로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며 계속 물었다.
“그러면 어제 자고 사귀기로 한거야?”
“아니. 그냥 자고… 아침 해주겠다고 나왔어.”
“그러면 사귀는건 아닌거네?”
“아직은 아니지. 그래도 곧 사귀게 되지 않을까?”
“어, 음. 혜지야.”
서아는 거의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다가 먹버 당하고 그러는거야. 음, 생각보다 남자들이 그게 있다? 자기 전에는 진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하다가, 정작 자고 나면 그런 마음이 사라져.”
“아, 아냐. 그럴 애 아닌데….”
“아니긴. 진짜 사귈 생각 있었으면 바로 어제 끝나자마자 고백했겠지. 아침 일어나서는 키스해주면서 오늘부터 1일이네 뭐네 했을거고.”
이현은 갑작스레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당황했다. 사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더욱 그랬다.
‘아니, 갑자기 뭐야….’
당황한 이현은 서아를 보며 능력을 사용했다. 혜지에게도 통하는 능력이니 서아에게도 통할 것이다.
과연 상태창이 뜬 상대라면 모두 능력이 통하는 모양이다. 서아의 생각이 이현에게로 전해져왔다.
‘진짜 존나 아깝네. 갑자기 여자로 변하지만 않았어도 진작 따먹는건데…. 기분도 좆같으니 남자랑은 헤어지게 해야겠다. 그 새끼도 이런 몸 따먹었으니 좋다고 있겠지….’
“이 씹년이.”
자연스레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현은 무조건 정서아를 따먹겠다고 다짐하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어떻게 해야 저 건방진 년을 따먹을 수 있을까?
그렇게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혜지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서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살짝 불안해진 이현은 다시 혜지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곧바로 그녀의 생각이 전해져왔다. 약간 반신반의하는 상태. 설득이 될 것 같으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이 아직까지는 우세했다. 돌아오면 다정하게 대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조심하라는 거지. 이상한 남자 많아.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말을 마친 서아는 혜지를 바라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긴데다 몸매도 아주 야한 수준. 진작에 따먹었어야 할 여자가 다른 남자한테 따먹혔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슴 만지고 싶다. 일본 만화에서는 막 만지고 그러던데 여기서는 동성끼리라도 만지면 이상하겠지. 아, 진짜 생각할수록 좆같네. 내가 아니라 다른 새끼가 저 몸을 맛봤다고? 진짜 좆같다….’
어째서 성별이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아는 속으로 연신 욕을 내뱉으며 겉으로는 사람 좋은 모습을 연기했다.
‘아니면 내가 그 새끼 꼬셔다가 바람피웠다고 하면서 엿맥일까? 아냐, 그러면 내가 꼬셔야 하잖아. 그것도 좆같아.’
잠시 생각하던 서아는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딱히 뭘 할 것도 없이 혜지에게 바람만 넣어주면 충분히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괜한 곳에 힘 빼지 말고 공부나 하는 게 나아보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나름 명색이 재수생이었다. 부모님은 지잡이라도 좋으니 졸업증만 따오라고 하셨지만, 서아 자존심에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할 거면 무조건 이름 있는 명문대로 가야 했다.
‘그냥 돈 주고 졸업증 사면 안되나…. 공부 하기도 귀찮은데….’
그리 생각하며 걷다보니 자연스레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사실을 눈치챈 혜지가 물었다.
“왜 그래? 몸 안좋아?”
“응? 아니, 그냥 공부 하려니까 막막해서. 재수 힘든건 알았는데 생각보다 좀 많이 힘들더라고.”
“공부가 힘들긴 하지….”
“맞다. 혜지 어디였지? 꽤 좋은 곳 아니었나?”
“뭐 나름… 괜찮지?”
“그럼 나 과외 해줄래? 수업료는 괜찮게 줄 수 있는데.”
혜지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 방학 끝나면 다시 학교 다녀야 해서 왔다 갔다 하기 힘들걸? 나는 안될 것 같아. 미안….”
서아도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장을 보던 두 사람은 마트에서 빠져나왔다. 혜지도 처음에는 레깅스 차림에 부끄러웠지만 서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약간 자신감을 얻었다.
하긴 요즘에는 레깅스 입고 돌아다니는 게 유행 아니던가. 자신의 몸이 야하긴 하지만 이정도면 정상적인 수준일 것이다….
“근데 혜지야.”
“응?”
“레깅스 자주 입어?”
“아, 아니. 오늘 처음 입고 나와봤는데… 왜?”
서아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가, 혜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진짜 친구로서 말해주는건데… 레깅스는 좀 자제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쁜 뜻은 아니고 네 몸매가 너무 좋아서 레깅스만 입고 다니면 되게….”
결국 혜지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였다. 아무리 서아가 보더라도 혜지의 레깅스는 너무 과한 면이 있었다….
한편 이현은 혜지가 돌아오자마자 현관에서 꼬옥 안아주며 다정한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아까 서아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은 탓에 헷갈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곧바로 능력 사용과 함께 칭찬과 좋은 말. 너무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그렇게 잠깐 시간을 보내니 혜지는 곧바로 의심을 거두었다.
‘역시 이현이는 괜찮은 애지. 서아가 잘못 알았던거야….’
그 생각을 읽은 이현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게 나아 보였다. 아니면 혜지 쪽에서 먼저 하도록 만들던가.
‘정서아 그 년은 무조건 따먹고 조교해서 하드하게 굴린다.’
그 사이 혜지는 부엌으로 가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원룸이라 부엌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혜지는 나름 진지했다. 이현은 그 뒷모습을 보며 벗으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알몸 에이프런까진 아니더라도 알몸으로 요리하는 모습은 좀 꼴릴 것 같은데.’
이현은 그 뒤로 가서 혜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쌌다.
“뭐야? 된장찌개?”
“응. 아침이니까….”
이현은 요리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쉽지 않은 요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찌개라는 것 자체가 쉽게 할 수 없는 요리다.
“개쩌네….”
무심코 새어나온 본심은 혜지를 기쁘게 하기 충분했다.
“기다리고 있어. 곧 되니까… 아니면 뭐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 말에 이현의 눈빛이 흔들렸는데, 혜지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너무 티가 잘 나는 반응이라 오히려 귀여웠다.
‘이렇게 티가 나는 애가 그럴리는 없지. 진짜 서아가 잘못 알았어.’
만약 그런 마음을 먹었으면 애초에 티가 날 것이다. 이현은 성욕이 넘칠지언정 그럴 사람까진 아니었다. 그리고 뭐, 스물 셋이면 한창 성욕이 들끓을 시기 아닌가. 본인도 마찬가지였고.
혜지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은 뒤에 에이프런 하나만 걸쳤다. 알몸 에이프런. 아무리 생각해도 요리하는 여자를 보고 할 수 있는 야한 생각은 이거밖에 없었다.
“이거 맞지?”
“어, 응.”
“조금만 기다려. 할 거면 먹고 하자. 열심히 만들고 있으니까….”
이현은 그 모습을 보며 또 흥분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아침이 차려진 후, 밥을 먹으면서도 이현은 발기가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앞에 알몸의 혜지가 앉아있는 탓이다.
그렇게 밥을 먹은 후에는 이만 닦은 후 곧바로 혜지를 덮쳤다. 혜지 역시 예상하고 있었는지 요염하게 웃으며 침대로 향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둘은 몸을 섞었고, 약간 시간이 흘러 저녁까지 먹은 후에 혜지는 편의점으로 출근했다. 이현은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다가 아침이 되면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런 나날을 보내다가 가끔 꼴리면 혜지의 자취방으로 찾아가 성욕을 해소하면 되었다. 혜지 역시 대부분의 경우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집에서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이현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정서아? 과외 구하고 있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