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20/21)

#5.  

6년 만에 만난 옛 연인은, 아니, 연인이라기보다 섹스프렌드였던 소년은 놀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카리스마에 어린 소년의 치기가 합쳐져서 멋지지만 시건방지다, 라는 평을 들었던 강준은 여전히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얼굴의 청년이었으나 6년 전의 그 때와는 근본적으로 어딘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재엽은 감으로 느꼈다. 분명 뭔가 달라졌다. 그렇지만 한눈에 본 것만으로는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고, 그보다 대체 무엇이 준을 변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주체성과 자기 의지가 강한 강준이 얼마나 

난공불락형의 인간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기에.  

흥미가 생기면 마음에 따라 바로바로 행동하는 스스로의 성격에 따라, <합의 하에 놀던> 여자도 내버려둔 

채 준의 집을 찾아왔다. 6년 동안 줄곧 준만을 생각한 것도 아니지만, 준을 잊은 적이 없다는 말도 거짓은 아니다. 

수없이 파트너를 갈아 치운 재엽에게 있어서도 준은 특별하다. 

그 도도한 얼굴을 울리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지만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떠난 만큼, 재엽의 기억 속에서 강준이

라는 존재는 한층 더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기도 하고, 동정에 빌어보기도 하고, 그런 거 별거 아니지 않냐, 라는 식으로 핑계도 대 보고. 

준을 안기 위해 오만가지 방법을 다 썼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최후의 선은 절대 양보하지 않고 자기 의지를 끝까지 관찰하던 강준이 변했다. 결국, 실제 만나서 

이야기한 이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여전히 변한 것이 없는 강한 의지와 카리스마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지만, 본인도 자각 없이 가끔 흘리는 

유혹적인 눈매와 어딘지 나긋해 보이는 행동거지, 칼날 같던 얼굴에 어렴풋이 스며든 부드러움. 

그것이 준의 결정적인 변화였다.   

- <받아들이는 자>의 특징.        

아무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던 과거의 강준 역시 손에 넣고 싶어 어쩔 수가 없었지만, 바뀐 모습을 보자 

그것은 그것대로 재엽의 헌터 본능에 불을 지폈다. 

이런 저런 것을 떠나 준이 변한 이유가 <남자>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이상,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저 준

을 저런 식으로 변화시켰을까, 라는 흥미에 알 수 없는 승부욕까지 고개를 들기 시작해서 저도 모르게 행동이 

거칠게 나갔고, 바로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준의 <남자>로 보이는 녀석이 등장한 것이다.  

재미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이 쪽을 향해 다가오는 준의 <남자>는 준처럼 화려하게 잘생겼다거나 눈에 확 띄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어딜 보나 완벽한 준의 옆에 있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느낌에, 마치 조용하고 온화한 

바다 같은 인상을 주는 청년이었다. 언뜻 보이는 표면은 조용하지만, 그 내면은 깊고 깊어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재엽과는 극과 극이라 볼 수 있는 타입의 남자.     

재엽은 약간 삐딱하게 선 채, 순수하게 흥미로 가득 찬 눈빛으로 준을 힐끗 보았다. 저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기 전에 준이 간발의 차로 재엽을 뿌리쳤다고는 해도, 꽤나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그 전의 실랑이를 

눈치챘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의 상황 상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간만에 만난 친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분위기였다. 분명 재엽의 존재에 대해서 해명을 해야 할 텐데,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인가.  

이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한 재엽에게 힐끗 눈길을 던진 준은, 재엽의 예상을 깨는 말을 내뱉었다.   

   

「이야기 좀 하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 가.」  

해명 한 마디도 없다.  

기대하고 있던 재엽은 순간 어이없는 얼굴로 덤덤한 표정의 준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별다른 흥밋거리를 

발견 못 했으므로 이번엔 상대 남자를 쳐다보았다. 간단하게 말하는 준을 잠자코 쳐다보던 그는, 

준 못지않게 살짝 눈을 내리깐 채 간단히 대답했다.  

「- 알았어.」  

재엽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연인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쿨한 태도들에 혼란스럽다.  

재엽은 어쩐지 심드렁해진 기분으로 둘을 쳐다보며 팔짱을 꼈다. 저 안경 쓴 녀석은 만만치 않을 녀석,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온순한 대형견처럼 말 잘 듣는 머슴일 뿐이었던 건가. 준의 성격을 봤을 때, 준은 어쩌면 말 잘 

듣고 휘어잡을 수 있는 남자가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가설이 맞는다면 저 순하게 생긴 놈은 준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실, 준이 원래 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 상황은 일목요연하게 <과거의 남자>가 찾아온 상황인데,

설마 그것도 눈치 채지 못한 걸까. 재엽의 경혐상 보통 남자라면 이런 상황을 목격했을 때 연인, 혹은 연인의 상대 - 

둘 중 하나한테 화를 내거나 아니면 마음에 묻어둔 채 삽질하는 경우가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 쳇, 좀 더 즐거울 줄 알았는데.  

준의 남자에게도, 저런 남자를 택한 강준에게도 적지 않은 실망을 느끼며, 재엽은 약간은 조소가 담긴 눈길로 

현관에 열쇠를 꽂아 넣고 돌리는 준의 연인을 쳐다보았다.  

찰칵, 하고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열쇠를 빼서 주머니에 집어넣은 청년은 문을 열며 눈인사를 

하려는 듯 준 쪽을 쳐다보다가, 뭔가 발견한 것처럼 잡았던 문고리를 다시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 뭘 묻히고 다니는 거야.」  

「어?」  

의아한 표정으로 준이 그를 향해 돌아서자, 그는 들고 있던 의학서적을 준에게 건넨 후 준을 안듯이 그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준이 입고 있는 와이셔츠의 뒷목덜미 쪽 칼라에 묻은 무언가를 지웠다. 

그의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준은 살짝 고개를 숙였고, 준의 

머리 너머로 그 목덜미를 응시하며 남자는 칼라에 묻은 뭔가를 털어내는 것처럼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진짜 머슴이 따로 없군.  

재엽은 냉소적인 눈길로 두 남자를 쳐다보았다. 준은 현재 재엽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재엽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고, 준의 연인은 준의 뒷목덜미 쪽의 칼라를 만지느라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 아직 덜 됐어? 뭐가 묻은 거야?」  

「페인트 같은 거….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냐. 곧 지워질 것 같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어디서 묻은 거지.」  

순식간에 신혼부부같은 분위기로 돌변하는 대화.  

노골적으로 준의 연인을 비웃어 줄 심산으로 고개를 든 재엽은….  

순간, 심장이 싸늘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준의 목 뒤의 칼라를 만지면서,  

준의 어깨 너머로-  

준의 남자는, 재엽을 보고 있었다.  

재엽이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날카롭고 차가우면서, 위협적인 눈이 투명한 렌즈의 뒤에서 재엽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저 지긋하게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선을 받는 사람은 확연히 

알 수 있는- 싸늘한 위협이 담긴 무감각한 그 눈동자가 의미하는 것.  

그것은 분명 <경고>다.  

재엽은 눈을 치켜떴다.  

- 이 것 봐라.  

혹시 난,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건가.  

저 남자에 대해서.  

재엽은 굳은 채 눈을 피하지 못하고 그 눈동자를 계속 마주보았으며, 렌즈 뒤의 서늘하고 새까만 눈동자가 

가늘어짐과 동시에 살짝 움직인다. 마치 가벼운 눈짓처럼 보였다. 의도가 확실한 그 시선에, 그리고 그 시선의 

강렬함에 재엽은 조종되듯 그 시선을 따라갔고 그 눈짓이 의미하는 대로 남자가 뭔가 지우듯 문지르고 있는 준의 

목덜미 쪽을 보게 되었다.  

재엽의 시선이 그 곳을 향한 것을 확인하자, 옷깃을 문지르던 긴 손가락이 준의 칼라를 아주 살짝 끌어내린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한 방 먹은 듯한 재엽의 시선과, 서늘하면서도 확고한 렌즈 너머의 시선이 한순간 격렬하게 얽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준을 내려다보면서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 다 됐어.」  

준의 연인은 준의 옷에서 손을 거두었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준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고 싱긋 웃는다.  

간단하게 눈인사를 건네고, 남자는 미련 없이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묵묵히 그 현관문을 쳐다보던 준은 단호한 태도로 재엽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곧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최재엽?」  

「…….」  

재엽은 가만히 서 있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주제에, 재엽의 입술이 웃고 있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마주보는 준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재엽이 속삭이듯 혼잣말한다.  

「- 제법이잖아….」  

「뭐?」  

   

재엽의 눈동자가 준을 향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의 준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고 재엽은 피식 웃었다.  

「 - 네 옷에는 아무 이상 없었단 말이지.」  

「…뭐어?」  

준의 표정이 한층 더 멍해진다.  

-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재엽은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준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긴 손가락이 아주 살짝 끌어내린 목덜미에,  

몇 개나 찍혀 있던 짙고 붉은 키스마크.  

- 누군가의 소유라는 그 낙인.  

말로 하지 않았던 만큼, 강렬했던 시선.  

준의 연인은 그 시선과 동작으로, 재엽에게 확실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키스마크라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남긴 낙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흔적 하나에, 얼마나 오랜 시간 그 입술이 피부 위에 닿아 있었는지, 또 그 흔적을 새긴 사람은 

어떤 표정으로, 어떤 자세로 그 행위를 허용했는지,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을지 등등, 단순한 흔적 이상의 

것들을 의미하고 있는 키스마크.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애정관계의 두 사람이 당사자들 말고도 

제 3자에게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애정표현이며, 상상력이 뛰어날수록 그 흔적이 의미하는 <수위>가 높아질 수 

있는 무한대의 낙인-….         

-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재엽은 준의 연인에 대해,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 둔하긴 커녕…….   

<이 녀석은,>  

한 눈에 둘의 관계를 알아챈 것도 모자라서 경고까지 잊지 않는다.  

<내 거야.>   

빈틈없는 태세. 엄청난 소유욕.  

평생 남 앞에서 압박을 느껴본 적이 없는 최재엽을 주춤하게 만들 정도의 박력.   저것이, 강준이 사랑하는 남자.  

난공불락의 강준을 변화시킨 장본인.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번져 나온다. 모르긴 몰라도, 속고 있는 것은 강준이다.  

혼자서 피식거리기 시작한 재엽을 보며 준은 인상을 썼다.  

「- 무슨 생각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불쾌한데. 어서 이야기 끝내고 돌아가 줬으면 좋겠어.」  

「아… 아아. 네가 저 녀석한테 질릴 정도로 안기고 있다는 건 잘 알겠군. 발정 난 암캐처럼, 음란한 암컷이 되어서.」  

일부러 도발적인 어휘를 골라 쓴다.  

예전의 강준이었다면 듣는 즉시 상대방을 죽을 정도로 패 버렸을, 그 이전에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표현. 

의도적으로 적나라한 표현을 쓴 것은 무엇보다 강준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재엽의 말이 끝났을 때, 

묵묵하게 서 있던 준이 갑자기 손을 뻗어와 콱, 하고 재엽의 멱살을 잡았다. 

한 대 맞을 각오를 하고 가만히 눈을 감은 재엽에게, - 타격 대신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정해.」  

귀를 의심한다.  

눈을 뜬 재엽의 시야로, 어디까지나 단호하고 침착한 표정의 준수한 얼굴이 흔들림없는 시선으로 재엽을 

노려보고 있다. 재엽이 눈을 뜸과 동시에 멱살을 쥔 손에 힙이 들어가며 확 끌어당겼고, 그 기세에 이끌려 준의 

앞으로 허리를 숙인 재엽의 얼굴 바로 앞. 동요 없는 강한 눈빛이 4센티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직접 

재엽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재엽이 넋을 잃을 만큼, 준은 

도전적이면서도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당신처럼 모두의 수컷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준의 얼굴이 빛나고 있다.  

이런 표정을 짓는 강준을, 알지 못한다.  

「저 녀석만의 암컷이야.」  

「…너…….」  

「저 녀석의 앞에서만, 암컷이 되는 거야. 이런 나를 암컷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저 녀석뿐이지.」  

「…….」  

「저 녀석의 앞에서라면 발정난 암캐든, 음란한 암컷이든 상관없어. 

그렇지만 저 녀석이 아니라면 난 수컷일 수밖에 없는 거야. 당신처럼.」  

너무나 단호한 어조에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포기해.」  

준이 멱살을 놓았다.  

할말을 잃고 서 있는 재엽을 남겨둔 채, 준은 현관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대면서 말했다.  

「당신과 껄끄러운 관계가 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다음에 만났을 땐 다시 시작 하자느니 하는 헛소리는 듣기 싫어. 한번만 더 그런 소

리 지껄이면 혀를 뽑아 버릴 거야.」  

「 - 그런 소릴 들으면, 하고 싶어지는데.」  

중얼거린 재엽을 향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준이 피식, 하는 웃음과 함께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재엽이 했던 불쾌한 말 따윈 다 잊어버린 듯한 시원한 미소. 미련 없이 눈앞에서 쾅, 닫히는 철문을 보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재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린다. 

화나게 할 의도로 내뱉은 말들이 전혀 데미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준은 변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진짜 반하겠군.>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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