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결국 은우의 갑작스런 난동(?)의 원인은 끝까지 알지 못한 채, 과외대상과 대면하는 토요일이 다가왔다.
「- 이 주소가, 맞나….」
폰에 메모되어 있는 집 주소를 쳐다보면서, 준은 문패 옆의 번지수를 확인했다. 유나에게서 건네어 받은 주소는
준이 다니고 있는 대학 근처에 소재하는 연립주택으로, 아무래도 하숙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패 옆에는 또렷한 글씨로 하숙에 대한 상담 및 문의를 받는다는 팻말과, 그 구절의 아래에 폰 번호 하나,
그리고 전화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누르자, 인터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것은 소년의 목소리다.
<- 네.>
「강준이라고 합니다. 수학 과외를 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는데요.」
<- 아… 선생님이시로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앳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
그 짧은 한 마디에도 연령은 어리지만 정신적으로 조숙해 보이는 목소리 주인공의 성격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서, 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유나로부터 <과외 대상이 될 아이들이 참 착하고 귀엽다>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귀로 직접 목소리를 듣게 되자 감회가 새롭다. 예의바르게 대답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온 후 삐-
하는 신호음과 함께 철컹, 하고 철로 된 대문이 열렸고, 준은 집 안으로 들어서서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특별히 큰 집은 아니지만, 지은 지 오래 된 후줄근한 연립주택도 아니다. 검은 철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작지만 손질이 잘 된 고급스러운 정원이 눈길을 끌었다. 정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2층 집으로 바로 통하는
계단과, 1층 집 대문으로 들어가는 작은 계단이 이어져 있다. 깔끔한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보기만 해도 아늑해 보였다.
「- 어… 어서 오세요.」
경치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바로 정면의 작은 계단 위쪽에 있던 1층의 대문이 열리면서 안쪽에서 걸어 나온
소년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인다. 무심코 그 쪽을 쳐다보았던 준은, 꽤 놀랐다.
파우더로 떡칠한 여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새하얀 얼굴에, 강아지처럼 까맣고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티없이 맑고 순수하다, 라는 수식어가 딱 들어맞는 아이였다. 아직 중학교에 다니는
예비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보들보들하게 보이는 스포츠머리가 귀엽다. 스스로의 외모나 멋 부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으로 그저 편의에 따라 짧게 깎은 머리였지만, 그 점이 오히려 보는 사람의 호감을 불러일으킬 타입이었다.
준은 영업용 스마일과 함께, 소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아, 혹시 안수민 학생?」
「예……. 선생님… 이시죠? 일단 들어오세요.」
지독하게 숫기도 없는 모양. 머뭇머뭇거리면서도, 열심히 말하는 모습이 <난 지금 필사적이에요>라고 항변하는 것
같아서 어쩐지 귀여운 느낌이 든다. 준은 속으로 번져 나오는 웃음을 지그시 눌러 참으며,
수민이 안내하는 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1층집 거실은 마치 커다란 식당처럼 꾸며져 있었다. 수민의 긴장도 풀어줄 겸, 준은 가볍게 말을 건넸다.
「하숙집인가 봐?」
「아, 예…. 어머니가 작년부터, 하숙… 받고 있어서. 저도 지금 2층에 하숙하는 방 중 하나, 쓰고 있구요.」
「어라, 네 방 없어?」
「집 안에 방이 있긴 한데, 수연이는 여자니까…. 제가 위에서 살아요.」
수연이라면 분명 또다른 쌍둥이.
준은 흐음-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다시 질문했다.
「- 그런데 네 방으로 안 가고 왜 여기에?」
「아, 그, 그건-….」
수민은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린다.
「- 저… 선생님 오셨으니까, 식당에서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 하고.」
「아하하하, 그거 고마운데. 그래도, 일단 차 끓인 다음에 방으로 올라가자. 일
단 성적표라든가 공부하고 있는 문제집이라든가 참고서,
여러 가지 알아봐야 하니까.」
「-아….」
수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난감한 기색이 스쳐간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한 후 달그락 달그락, 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준은 피식 웃으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은우를 만나기 전에 이런 녀석을 만났더라면, 확실히 수비 범위 안에 들어 왔을 텐데.
물이 끓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계속되는 침묵에 안절부절 못하던 수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 저, 바깥으로 나가셔서, 왼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가시면… 위에 올라가면 2층집이 있는데…
그 집에 들어가시면 제일 안 쪽에 있는 방이… 제 방이거든요.」
「아, 알았어. 먼저 가 있을까?」
「예, 예…….」
다시 뚫어져라 바닥을 노려보는 소년의 얼굴이 붉어진다. 반응 하나하나가 너무 귀여워서, 마치 낯가리는
강아지 같은 느낌. <왜, 같이 올라가지.>라는 말로 수민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배려 깊은 선생을 연기하며 준은 수민의 말에 따라 1층집을 나왔다. 즐거운 과외가 될 것 같다- 라는 예감에 콧노래를
부르면서, 2층집으로 올라가 문을 열자, 잠겨 있지 않은 문이 덜컹 열린다.
그리고, 동시에 준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앙, 응, 아아-… 앙, 아아앙~!」
「…….」
준은 귀를 의심했다.
「흐응- 싫어, 앙, 하아, 아, 아, 아-」
가장 안 쪽의 방-, 즉 수민이 자신의 방이라고 말한 곳의 방문은 꾹 닫혀 있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은 그 옆방이었다.
힐끗 발밑을 보자, 신발 크기만 봐도 신장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한 커다란 남성용 구두와 여자가 신는 작은 끈
샌들이 뒹굴고 있었다.
별로 당황하진 않았지만, 준으로선 퍽이나 난감한 상황이다. 하지만 수민이 올라오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신발을 벗고 굳은 표정으로 열린 방문 앞에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침대 삐꺽거리는 소리까지 아주 리얼하게 들려온다.
젠장, 한창이로구만.
천천히 방문 앞으로 다가간다. 여자의 신음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와, 가늘게 헐떡이는 소리까지 청력 좋은
준의 귀가 잡아냈다. 남녀의 적나라한 모습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준에게 있어선 꽤나 자극적인 상황이다.
될 수 있는 대로 방 안의 풍경은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방문을 잡고, 닫으려는 순간.
「- 어?」
놀란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그 쪽을 바라봐 버렸다. 동시에 아차,
하는 기분과 함께 <젠장>하는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눈앞을 바라본 순간, 준 역시 놀라서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방안의 침대 위에서, 여자의 안에 들어가 있는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 남자는 준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짧으면서도 일본식 스타일로 이리저리 뻗치게 만든 머리카락은 화려한 은색에, 귀에도 링 귀걸이를 비롯한
피어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척 보기에도 잘 놀게 생긴 수려한 얼굴에 여자를 깔고 있는 몸매 역시 미끈하다.
눈매가 치켜 올라가서 사납고 와일드해 보이는 두 눈이 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고,
준 역시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단순히 그 남자가, 여러 가지로 튀는 외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뭐야아- 재엽 씨.」
밑에서 신음하던 여자는 갑자기 멈춘 남자의 움직임에 의아하면서도 불만 섞인 투덜거림을 내뱉었고,
남자의 시선을 보더니 자신도 방문 쪽을 쳐다본 후 준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해하지도 않고,
인상을 찡그리며 준을 향해 소리친다.
「뭐야 당신-! 매너도 없어? 봤으면 빨리 문 닫고 꺼져 줘야지-!」
퍼뜩 정신이 든 준이, 방문을 닫으려 했다.
동시에, 방 안에 있던 남자가 소리친다.
「- 강준! 강준이지?!」
「사람 잘 못 보셨습니다.」
딱딱하게 대답한 후 방문을 쾅 닫는다.
닫힌 방문 앞에 멍하니 서 있으려니, 방 안에서 여자의 불만 섞인 목소리와 몇 번 투닥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조용해졌다.
「- 아…….」
한참을 그 상태로 서 있다가 현관 쪽에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그 쪽을 쳐다보자,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든 수민이 하얀 얼굴로 준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못 박힌 듯 서 있는 수민의 얼굴에,
준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빨리, 방으로 가자.」
「…….」
준이 먼저 방문을 연다. 수민의 방은 간소한 책상과 침대, 옷장만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공부방이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책상 위에 커피 쟁반을 내려놓고 의자 위에 앉은 수민을 향해서, 준이 진지하게 물었다.
「옆방 하숙생이지? …- 저러는 거, 알고 있었니?」
「…….」
수민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알고 있었군, 이라고 결론을 내린 준은 한숨을 쉬며
결 좋은 머리카락을 벅벅 헝클어트린다.
「- 저런 게 공부환경에 좋지 않다는 것쯤은 너도…. 어머님께 말씀드려서 내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그래도……. 일단… 친척이고…….」
「- 친척?」
「둘째 이모가… 재혼하셨을 때, 갑자기 생긴 이종사촌이라서…….」
「- 아무리 그래도.」
「하지만, 집에 누군가가 있을 때는 여자를 데려오지도 않고…….
토요일엔 6시까지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네가 있잖아.」
「…….」
수민은 빨갛게 물든 얼굴로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수민을 향해 충고했다.
이런 문제는,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네가 부모님께 이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저런 식으로 구는 거
아니냐고. 묵묵히 듣고 있던 수민은 얌전하게 <네>라고 대답했고,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가볍게
한숨을 쉰 준은 곧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 수민의 성적을 확인한 후 준비해야 할 교재와 간단한 수업 방향을 알려주었다.
해가 떨어져서 어두워졌을 때 쯤 대충 면담이 끝났고, 의무적으로 알려주어야 할 것을 끝낸 다음엔 수민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주력했다. 낯을 많이 가리긴 하지만 곧잘 웃고 솔직한 반응을 보여주는 수민은 확실히 호감이
가는 아이였다. 덕분에 오늘 처음 만난 준으로 하여금 벌써 보호자가 된 기분이 들게 해서 너무 순해서 세상 살기엔
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주제 넘는 걱정까지 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이윽고 모든 것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솔직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과외하는 학생의 집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스스로의 성벽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일부러 게이바 같은 곳도 찾지 않았는데, 정말이지 세상은 좁다, 라는 생각만
들면서 축축 어깨가 늘어진다.
최재엽. 와일드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낙천적인 남자.
2살 연상의, 바이섹슈얼- 즉, 양성애자.
준이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시절에, 애인이 될 뻔, 했던 남자.
그와는 삽입을 뺀 나머지의 행위는 다 해온 사이다. 최후의 선을 넘지 않았던 것은, 두 사람 다 탑의 위치를
양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으로, 어떻게 보면 장난 같은 관계이기도 했다. 재엽의 남자 취향은 그야말로 <남자다운 남자>.
어떤 탑이라도 재엽에게 걸리면 한 번쯤은 바텀이 되고야 만다는 것이 그 쪽 세계에 공공연하게 떠도는 소문이었다.
그런 재엽에게 있어서, 아직 중 3인 주제에 남자로서의 카리스마를 뿌리고 다니는 준은 최고의 먹잇감이었고 게임으로
친다면 파이널 스테이지에 나오는 보스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은우를 좋아하는 것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방황하던 준에게 있어서 재엽은 좋은 파트너였다.
그러나 재엽에게 어느 정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준은 남자로서의 프라이드를 버릴 수 없어서 그에게 몸을
대주지 않았고, 재엽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즉시 떠나갔다.
아파트 앞에 도착해서 베란다를 올려다보자, 집의 불이 꺼져 있다. 은우도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또 한 번 푹- 한숨을 내쉰 후 <제길, 될 대로 되라지>하고 중얼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탄 후 익숙한 층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아, 역시 이사 가지 않았구나.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
농담이 아니라, 준은 방금 전 <될대로 되라>고 중얼거린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현관문에 기대어 선 채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던 은발 머리의 남자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훤칠한 키도, 잘 빠진 몸매도, 능청스러운 너구리같은 눈웃음도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준은, 딱딱한 얼굴로 입을 다문 채 뚜벅뚜벅 집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남자를 완전히 무시한 채 열쇠를 꺼내들고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문을 열수가 없어서요. 비켜 주시겠습니까?」
「엑, 간만인데 섭섭하게 이러기냐?」
「사람 잘 못 보셨습니다아.」
「너처럼 완벽한 미모를 잘 못 볼 리 없잖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잘 못 보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빨리 안 비키시면 경비실에 연락하겠습니다.」
「야야, 그렇게 교과서 읽는 말투로 딱딱하게 굴 것까진 없잖아? 설마 벌써 날 진짜로 잊어버린 거냐?」
「…아 씨발, 비키라니까!」
얌전하게 대응하던 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재엽이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아, 역시 맞잖아, 아하하하하하!!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집 앞까지 찾아와서 어쩌자는 거야, 당신. 완전 민폐라고, 이거!」
「당연하잖아, 옛사랑을 못 잊어서 온 거지. 손에 넣지 못한 장미를 완전히 따고 싶어서.」
「미친 년 널뛰는 소리 하네. 그 빌어먹을 옛사랑을 못 잊어서 몇 시간
전까지 딱 봐도 몸 함부로 굴리게 생긴 여자랑 침대 위에서 짝짜
꿍하고 있었나 봅니다아? 최재엽씨.」
「그건 그냥 놀이.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놀이인 걸. 화낼 거 없잖아?」
「술도 안 드신 것 같은데 헛소리 그만하고 돌아가 주시길.」
그리고 손을 뻗어, 현관문에 기대어 서 있는 재엽을 단호하게 밀쳐낸다. 그를 밀치는 순간, 준의 손에 밀려나던
재엽이 준의 손목을 잡았다.
「-…….」
잠시 침묵이 흐른다.
재엽에게 손목을 잡힌 채, 굳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준이 냉랭하게 말했다.
「놔.」
「사랑해.」
「 - 놓으라고 했어.」
「다시 시작하자, 준아.」
「-…….」
준의 얼굴이 차가워진다.
다음 순간, 오싹할 정도로 시니컬한 미소가 준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럼 당신이 나한테 안겨.」
「…….」
「정말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프라이드 버리는 것쯤이야 쉽잖아.」
「널 안고 싶다고 말하는 거다.」
준이 피식 웃는다.
「원하는 건 단순히 여자 대용이지. 내가 아니잖아, 어이.
프라이드 높아 보이는 남자가 자기 밑에 깔려서 헐떡거리는 것을 보는 게 즐거
울 뿐이지? 여자에게서는 볼 수 없는 반응이니까.」
「6년이다, 강준.」
「…….」
화를 내며 재엽에게 소리치려던 준은 당황했다.
사나워 보이는 두 눈이, 차분하고 애절한 빛을 가득 담은 채 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들 사이에서도,
여자들 사이에서도 화려한 소문을 뿌리고 다니는 최재엽이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6년 동안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널 손에 넣고 싶다.」
「- 사귀는 사람 있습니다.」
이게 무슨 장난이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을 보고 그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준은, 그의 진지함에
보답하여 정중하게 대답했다. 재엽이 물고 있던 담배가 아래로 툭, 떨어진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물고 있었던 모양으로, 필터의 끝이 자근자근 씹힌 모양으로 젖어 있었다.
「- 그런가.」
「…….」
「흐응, 그래서 이.렇.게. 된 건가?」
「……?」
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치떴을 때, 순식간에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힌 현관문 쪽으로 밀어붙여 졌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준을 향해, 꽉 잡은 준의 손목으로 체중을 실어 오면서 재엽의 얼굴이 다가온다.
자세의 불리함으로 인해 준은 재엽을 뿌리칠 수 없었고, 거의 이마가 맞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온 재엽이 씨익 웃었다.
「너 요즘, 안기고 있지?」
「-……대답할 의무는 없는데.」
「아니, 딱 보니까 알겠는 걸.」
재엽의 사나운 눈매가, 위험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준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경험상, 이 남자가 이럴
때엔 고릴라가 달려들어도 이기지 못한다. 탑을 먹는 탑, 의 명성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현관문에 기댄 준의 머리를 비껴가, 그 귓가로 입을 가져간 재엽이 속삭인다.
「 - 지금의 너에게선,」
「무슨…….」
「암컷의 냄새가 나, 강준.」
「…….」
준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런 게 참을 수 없이 나를 유혹해. 지금의 넌, 수컷을 유혹하는 암컷의 페로몬을 흘리고 있다고.
남자의 카리스마를 뿌리고 있는 주제에. 그런 갭이 위태위태하게 보이는 거야. 내가 아니라도 그 쪽 성향의
인간들이라면 다 알아차렸을 거다. 천하의 강준이 여자처럼 안기고 있다는 걸. 6년 동안 잊은 적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로 보는 순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졌다. 널 이렇게 바
꾸어 놓은 놈이 누구인지 흥미도 생기고 말이야.」
「…… 당장 그 입 닥쳐라, 최재엽.」
토요일에, 이 층의 사람들이 거의 집안에 없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준이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여전히 예쁜 입술이야.」
재엽을 뿌리치기 위해 힘을 주는 준의 손목이 부들부들 떨린다. 날카롭게 자신을 노려보는 준의 눈동자를 보며,
재엽은 싱긋 웃어보였다. 준이 힘으로 자신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천천히
준의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땡.
순식간의 준의 뇌가 차갑게 식었다.
분명 이 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소리.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준의 반응을
보던 재엽은 멈칫, 하고 준을 밀어붙인 모습 그대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며, 훤칠한 그림자 하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준은 아슬아슬하게 순간 방심한 재엽의 손을 뿌리쳤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다가 움직임을 멈춘 청년은, 서늘한 표정으로 어정쩡한 모습의 재엽과 준을 응시한다.
옆구리엔 두꺼운 의학서적 몇 권을 낀 채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남들보다 짙은 색의 검은 생머리.
늘어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지적이고 깔끔한 인상의 얼굴에, 여유 있는 행동거지.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곧 긴 다리를 움직여 준과 재엽의 앞으로 다가왔다. 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면서 인사했다.
「이제 오냐?」
「- 다녀왔어.」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은우의 날카로운 눈이 힐끗 재엽을 향한다. 투명한 렌즈 너머의 까만
눈동자를 보면서 재엽은 <이 녀석인가>라는 의미를 담은 시선으로 마주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