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뚝, 뚝.
젖은 머리에서 거실 바닥으로 일정하게 물방울이 떨어진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트렁크만 입고 목엔 수건을 걸친 모습으로, 은우는 살짝 눈썹을 찌푸린 채
액정에 뜨는 텍스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이 따로 안경을 쓸 필요도 없다.
그렇게까지 시력이 나쁜 것도 아니고, 빨리 보지 않는다고 해서 액정 속의 - 논란의 소지가 나분한 -
텍스트는, 지워지지 않는다.
<남자애가 얌전해서 하기 쉬울 거야!>
- 뭘.
<빨리 보고 싶지?>
- 왜.
<토요일 오후 4시, 집에 걔 혼자 있으니까 가 봐.>
- 가서 어쩌라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계적으로 폰의 폴더를 열었다가 거칠게 닫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폴더가 닫히면서 탁, 하는 소리가 났을 때, 은우는 흠칫한다. 여전히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방금
전 취한 스스로의 행동이 의미하는 비합리성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어서, 은우
의 뚜렷한 이목구비에 난감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리고 천천히 닫혀 있는 준의 방문 쪽을 응시했다.
정말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준은 옛날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 완벽한 외모와 남자다운 성격으로 남자들에게도, 여자들에게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분명히…….
- 연인도 많았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폰을 들고 있는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간다.
강준과 같이 모든 것을 갖춘 인간을, 주위에서 그냥 두었을 리 없다. -완벽한 인간. 지나치게 완벽한 인간.
분명,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은우조차 준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은우 이전의 연인이 없었을 리도 없고,
실제로 준의 연인을 본 적도 있다. 준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게이였을테니,
아마 연인도 죄다 남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준은, 안는 쪽이었겠지.
게이라지만 중학교 때부터 알아온 준의 그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과 높은 프라이드를 생각했을 때,
준의 옆에 서 있을 누군가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떠오르는 그림은, 사슴처럼 커다란 눈에 얌전하고 날씬하며
가녀린 체구를 가진,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미소년이다. 흠잡을
것 없는 미모에, 흠잡을 것 없이 발랄하면서도 다소곳한 성격을 가진.
- 절대로, 은우 같은 타입이 아닌.
아무리 봐도 준은 <안기는> 것이 아니라 <안는> 타입인 것이다. 분명히 준의 마음을 확인했던 날,
준을 강간하려했던 30대의 남자는 예외였던 경우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이리저리 튀고 있었다.
은우와의 관계.
- 어쩌면, 준은… <참고 있는> 걸까?
사실은 싫으면서도, 억지로 참고 있는 게 아닐까.
은우는, 알지 못했다.
정체불명의 문자를, 어떻게 보면 별로 수상할 것도 없지만 그 쪽 의미로 생각하다보면 상- 당히 수상한 내용의
문자를 보는 순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 동요하는 마음에는 관계없이, 마음속에서 꾸물거리며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의 정체를 뿌리부터 합리적인 성향의 뇌가 냉정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깨달았다.
「…….」
말없이 폰을 들고 있던 은우는, 그대로 폰과 전공서적을 든 후 준의 방문에 노크했다. 안에서 <어, 왜? 들어와.>라는
대답이 들려왔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준은 의자를 돌려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꽃샘추위가 설치는 봄이지만, 난방이 잘 되는 아파트 안이라 간단하게 얇은 반팔 티를 걸친 모습이었다.
대학로 근처 보세 전문점에서 팔 법한 단순한 면티가, 준이라는 옷걸이에 걸리는 순간 고가의 브랜드로 탈바꿈한다.
방으로 들어서는 은우를 쳐다보면서, 준은 싱긋 웃었다. 여자였다면 비명을 지르거나 환성을 질렀을
멋진 미소에, 은우는 생각한다.
- 예쁘게도 웃는다.
「어, 미안. 놓고 들어갔네. 갖다 줘서 땡큐.」
「- 강준.」
「- 어?」
책을 받기 위해 준이 앞으로 내민 손을 무시하고, 은우는 들고 온 것들을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내민 손이 무안해져서, 의아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야>라고 물으려는 준을 향해 서두르지도 않고 고개를 숙였다.
다가오는 은우의 냉정한 얼굴을 보면서, 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압박감에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회전의자의 등받이가 철컥,
하고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
메스를 잡는 것이 잘 어울릴 것 같은 긴 손가락이, 준이 내밀고 있던 손가락 끝에 살짝 닿는다.
의외의 감촉에 흠칫하는 준의 손가락을, 고양이를 애무하는 듯한 은근함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며 깍지를 꼈다.
아차, 하는 순간 단단하게 속박 당했다.
준이 상황파악을 못하고 매력적인 눈을 크게 뜬 순간, 반대로 눈을 아래로 내리깐 은우의 입술이 준의
볼과 귀를 스쳐, 준의 목덜미로 가서 닿는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준은 예민한 곳을 자극 당하자,
반사적으로 낮은 신음을 흘리며 흠칫, 하고 깍지 낀 은우의 손을 꽉 잡았다.
키스조차 먼저 해 오는 일이 드물 정도로 담백한 은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한층 더 당황스러우면서도,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은우의 젖은 머리에서 풍겨오는 샴푸의 레몬향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 은우…!」
할짝, 할짝. 음란한 소리와 함께 목덜미를 애무하는 뜨거운 입술. 강한 압력으로 빨아올릴 때마다 마찰되는
피부 사이로 새어나가는 공기가 츱, 츱하는 소리를 내며 가끔씩 스쳐가는 기분 좋은 오한에 속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원래 주인을 닮아 움직임이 날렵한, 물컹하고 뜨거운 혀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한 지점을 꾸준히 공략하고,
단단한 이가 가끔씩 깨문다. 그리고 천천히, 강하게 빨아올렸다. 은우의 입술이 닿는 곳을 기점으로, 위로는 얼굴,
아래로는 가슴, 배, 다리까지 오싹오싹한 전류가 흘러, 잠깐 사이에 준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은우…… 왜?」
「 - 모르겠어.」
「- 하아… 흣… 모르겠…? 너 임마…….」
- 기분 좋다.
반쯤 몽롱해서 흐릿해진 시야 앞으로, 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은우가 붉게 물든 입술을 든다.
그리고 손을 뻗더니, 회전의자의 손잡이를 덜컥 붙잡고 뒤로 돌렸다. 놀란 준이 저도 모르게 <어?>하는 소릴 내며
의자와 함께 돌아가서 은우에게 뒷모습을 보인 자세가 되자, 뒤에서 준을 끌어안은 은우는 회전의자의 다리를 발로
차면서 거칠게 준을 끌어내렸다.
「으앗,」
갑자기 의자가 기울어지는 느낌에 준이 놀란 소릴 낸다. 다리를 걷어차인 회전의자는 요란하게 넘어지면서 한
쪽으로 쓰러졌고, 준은 몸의 통제력을 잃고 뒤에 있는 은우의 품 안으로 끌려갔다. 평소의 은우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거친 행동이다. 당황해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준을 뒤에서 끌어안고, 은우가 준의 뒷목덜미를 깨물었다.
쓰러진 회전의자가 힘없이 돌아가다가, 멈춘다.
「- 흐흣-…!」
목덜미에서 나는 준의 체취를 맡으며, 은우는 생각했다.
- 이 녀석이, 뒤에서 안기는 걸 좋아하는 것을,
「잠, 잠깐… 내일, 오전수업…,」
「 - 끝까지 하지 않을 테니까.」
- 귀 뒤쪽의 연한 살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목덜미 부분이 민감하다는 것을,
「- 아… 정말…….」
- 씨익, 웃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에,
「-갑자기 왜 이래, 평소랑 너무 다르잖아. 난 섬세하니까, 갑자기 변해버리면 무섭다고.」
- 저 수려한 눈매가 촉촉하게 젖는 모습의 갭이, 얼마나 요염해 보이는지,
혼이 나가 버릴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준의 손이 은근하게 뒤로 돌아와 은우의 귀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반쯤 말랐지만, 아직 촉촉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준은 어떤 시선으로, 어떤 눈빛으로, 어떤 표정으로
쳐다보면 상대를 사로잡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표정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은우의 서늘한 눈을 쳐다보면서
갈색의 수려한 눈동자가, 준수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은우를 재촉하고 있었다.
안아 봐.
여기 있잖아.
높은 프라이드와 도도함으로 똘똘 뭉친 눈동자가, 뇌에 마법을 건다. 내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일견 조용한 듯 보이는 은우는 남자로서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정복욕과 승부욕이 강한 편이다.
사랑의 범주를 넘어서서, 유혹하고 있는 준의 도발하는 듯한 그 시선에, 절대로 정복당하지 않을 것 같은 카리스마를
손에 넣고, 굴복시키고 싶어진다.
준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언제나 건조하고 냉정한 은우의 머리에, 그 몸에, 강준은 너무나 쉽게
불을 붙이고,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은우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여러 가지를 알아내어 준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 은우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주고 받아주고, 이루어준다.
어떤 남자든 이런 식으로 유혹받게 된다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뛰어들게 될 것이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의 끝에 그 사실을 도출해 내면서도,
언제나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은우 쪽이다.
준의 이런 모습을,
…… 대체 나 이외의 몇 명이나 알고 있는 걸까.
- 처음으로 화가 났다.
「- 이은우…?」
뭔가 이상한 기색을 느낀 준이 움직임을 멈춘 채, 은우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며 속삭인다.
준의 단단한 가슴과 배에 긴 팔을 두른 채 그 몸을 품에 꽉 안으며 은우는 중얼거렸다.
「- 질투하고 있는 거야.」
흠칫, 준이 반응했다.
준은 약간 뒤로 물러나 은우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당황한 듯한, 난감한 듯한 표정이 반반씩 섞인 준의 얼굴을
은우가 말없이 마주본다.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 세상에 무관심한 듯한, 담백한 얼굴.
가끔 저런 얼굴로, 은우는 남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는다.
준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은우는, 언제나 진지하다. 이런 소재로 농담 따윌 하는 성격이 아니다.
준의 목에서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 지, 질투?」
「응.」
「- 누구한테….」
준을 쳐다보는 은우의 눈빛이 부드러워진다. 아까까지 은우를 유혹하고 있던 요염한 눈이, 어린아이와 같은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준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이렇게나 쉽다.
「누, 누구냐니까…….」
재촉하는 입술을, 입술로 막아버렸다.
「음, 으읍- 음, 음…….」
요령 좋게 피해가는 은우의 태도에 화가 난 모양인지, 몇 번 투닥 거리면서 저항했지만 입 안의 예민한
부분을 은밀하게 건드리자 곧 힘이 꺾인다. 준은 한숨을 쉬는 것처럼 어깨를 한 번 늘어뜨린 후에,
은우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며 방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은우의 손이 준의 머리가 방바닥에 부
딪히지 않도록 뒤통수를 감싼다. 이불도 깔지 않은 방바닥 위에서, 정신없이 서로의 혀를 탐했다.
격렬하게, 몇 십분이 지나도록 입술을 맞댄 채 혀를 굴렸다. 끈적하고 맑은 타액이 누운 준의 입가로 흘러내리면서,
목줄기를 타고 내려간다.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든 은우와 준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은사가 이어진다.
반쯤 눈이 풀린 준의 상의 아래로 손을 넣으면서, 은우가 속삭였다.
「안고 싶어.」
「-…응….」
싫다고 해도 듣지 않을 거면서.
「도대체 누구한테 질투하는 거야. 알려주면 안 되냐….」
「…….」
대답 대신, 은우의 손이 준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은우의 움직임에 따라 열락에 들뜬 준의 목덜미를 깨물면서, 결국 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미 죽어버린 과거에 질투한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다.
행위 내내 준이 느끼는 곳을 집어내어 핥고, 빨고, 깨물어대는 은우 때문에 준은 몇 번씩이나 신음을
흘리며 은우의 이름을 부르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중얼거렸다. 함께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잠자리에서의 은우의 체력에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언제나 마지
막엔, 아랫도리도 머릿속도 완전히 텅 빈 상태가 되어 잠이 들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샤워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 준은 완전히 경악해 버렸다. 목덜미에서 시작해 발등까지, 전신에 붉고 진한
키스마크들이 찍혀 있었다. 어쩐지 키스마크가 찍혀 있는 곳이, 준이 느끼는 곳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준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은우가 특별히 흔적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다.
그런데, 뭔가 시위하는 듯한 자국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준은 샤워하는 것도 잊고 욕실 거울 앞에 선 채 한동안 고민했다.
오해의 진상을 캐기 전에 상대의 마음부터 확인한다.
밤새도록 준이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울게 만들었던, 이은우라는 남자가 질투하는 방법이었다.
은우가 남긴 흔적들은 과외가 시작되는 토요일까지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가 이제부터 시작되리라고는, 둘 중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