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7/21)

#2.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사람이 미쳐버리는가보다.  

아까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캠퍼스 내의 벤치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독점 중이다.  

반듯한 등은 벤치에 기대고 팔짱을 낀 채, 진지한 얼굴은 누가 봐도 평균 이상의 그림이 나오는 

고가상품이었다. 핸섬하면서도 세련된 도회적 분위기가 풍기는 외모에, 앞으로 뻗은 채 꼬고 있는 

다리는 확연하게 상체보다 길다. 남녀를 불문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누구나 청년을 향해 탄식 혹은 경탄, 

그리고 드물게 질투 섞인 투덜거림을 내뱉었지만, 그 누구도, 청년이 <남자친구>의 생일선물 때문에 아까

부터 꼼짝도 하지 않고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 채지 못했다.    

강준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한달 남짓 남은 4월 4일-.  

식목일 전날은, 은우의 생일이다.  

생일 날짜가 꽤나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늘 새 학기의 분주함에 휩쓸리다보면 깜빡 잊고 지나치기 쉬운 날. 

MT다 뭐다 해서,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은우의 생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우와 준은, 둘 다 기본적으로 <뼛속까지 남자>였기 때문에 날짜개념에 있어서 둔한 편이었다. 

생일이라든가 발렌타인 데이, 크리스마스 등등 기념할만한 날은 얼마든지 있지만 준도 은우도 

날짜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어영부영 지나가버린다.  

하지만, 올해는.  

준은 여느 때보다 훨씬 기합을 넣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생일이나 기념일을 꼬박꼬박 잘 챙겨주는, 

누나처럼 상냥한 여자에게 은우를 빼앗겨도 할말이 없다. 옛날 같았으면 코웃음 쳤을 일에 준이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여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누나의 탓이었다.  

은우에게조차 알린 적 없지만(이런 면에서도 <보통>의 연인 사이는 아니다), 준의 가족은 준만 빼놓고 모두 

일본에 있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준과 준의 누나를 길러 오신 어머니의 재혼 상대가 일본인이었던 

이유이다. 그러니까 준의 아래에 있는 남동생과 여동생은 피가 섞이지 않은, 양부 쪽의 남매인 셈이다. 

준이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쯤, 어머니와 누나는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준은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것을 고집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좋아하고 있던 은우 때문이었다. 

한동안 준을 설득하던 어머니와 누나는 단호한 준의 고집에 이내 포기해 버렸고, <언제라도 좋으니 힘이 들면 건너와라>

라는 말과 함께 준을 남겨둔 채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동생은 쾌활한 성격에 애교가 많은 전형적 일본의 여학생이었고, 남동생 역시 기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아이로 

준과 남매가 된 것을 굉장히 기뻐했었다. 결국 준은 군에 들어갔다가 제대한 후, 집안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누나, 여동생, 남동생의 아우성에 복학하기 전 일본의 집으로 건너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자연스럽게 연인이 있냐, 는 식의 이야기가 나왔고, 있다고 대답하자 세 

명의 남매들은 눈을 번쩍이며 발렌타인 데이에 어떤 초콜렛을 받았냐는 식의 질문을 퍼부어댔다. 

기념일을 챙기는 사이가 아니라고 했을 때, 세 명의 남매들 - 특히 여동생과 누나 - 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발렌타인 데이에 남자친구의 초콜렛을 챙기지 않는 여자라니 최악이다, 그런 중요한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 무신경한 여자라니 기가 막힌다, 어째서 그런 여자랑 사귀느냐 등등의 수많은 질타를 받는 것도 모자라서 

결정적으로 말수가 적은 남동생이 <僕ならそんな子と付き合いたくないよ(나라면 그런 여자아이랑 사귀고 싶지 않아)>

라고 중얼거리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다른 남매들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의 충격이었다.  

은우도 그런 걸까?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확실히 남자라면, 기념일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는 무신경한 연인보다야 꼼꼼하고 

다정하게 챙겨주는 연인 쪽을 선호할 것이다.   

지금껏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에 눈을 뜨게 되어,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져 버린 것이었다.       

어차피 군대도 다녀왔겠다, 이제 인생 설계하고 자기 앞길 신경 쓰는 일만 남았다. 이것저것 따져보니, 

다가올 <기념일>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운 좋게도 은우의 생일이었다. 여느 때보다 기합이 팍 들어간 

전투태세로 일단 아르바이트부터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은우에게 줄 생일선물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이 예상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준은 틈만 나면 은

우에게 줄 생일선물을 상상하고 있었다. 원래 준의 성격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우앗, 강준! 언제 왔어? 깜짝이야, 이번 학기부터 복학하는 거야?」  

발랄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준을 긴 상념에서 끌어낸다.  

여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학과 내에서 수학공식에 메말라버린 눈의 오아시스라고 소문난 여자 

동기 한 명이 캠퍼스 벤치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준을 발견하고 당장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과 내의 퀸, 장유나. 긴 생머리에 서글서글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활달한 아가씨다. 

준이 군대에 있을 때도 종종 편지를 보내주었던 동기로,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새내기 시절 준에게 조용하게 고백했다가 정중하게 거절당한 후,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마음 정리 

하고 <그렇다면 가까운 친구로 지내 줘>라고 말했고, 그 때부터 가족을 제외한 여자들 중에서 준과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여어-.」  

손을 들어 피식 웃어 보이는 준을 향해,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유나가 다가왔다. 

그리고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로 외친다.   

「왔음 왔다고 신고를 해야지-! 좀 일찍 나올 순 없었어? 난 벌써 4학년이다, 

4학년. 다른 사람보다 일찍 들어간 주제에, 왜 늦게 나와~.」  

「간만이네, 잘 지냈어?」  

인사하는 준의 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들여다보던 유나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뜬다.  

「우와- 얼굴은 왜 이래? 요즘 군대에선 피부 관리도 해 주나, 훈련장에서 뒹굴다 나온 애가 왜 갑자기 

회춘했대? 꽃미남 앞에서는 세월도 노화도 피해가는구나-. 부럽다! 난 요즘 눈가에 주름 때문에 미치겠는데.」  

준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혼자 쏘아대고 난 후 활짝 웃는데, 눈가에 주름은커녕 1학년 시절 그대로의 앳된 

모습이라, 준은 무의식중에 피식 웃어버렸다.  

「복학하기 전에 좀 쉬었어. 그래서 늦었다.」  

「군대, 많이 힘들진 않았어?」  

유나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해서, 준이 유나가 들고 있는 전공서적에 

힐끗 눈길을 주자 유나는 생긋 웃었다.  

「오늘 수업 끝났어. 넌?」  

「3시에 기하학입문.」  

「2학년 전공이구나. 교재 샀어?」  

없으면 내가 줄게, 하고 다시 한 번 웃어 보인 유나가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앉은 벤치 

앞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다들 한번씩 눈길을 주고 지나간다. 어딜 보나 미남 미녀의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은 

같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 시선을 끌었다. 준은 유나가 가지고 있는 미분기하학 전공서적 한 권을 꺼내들더니 

그것을 펼쳐든 채 천천히 넘겨보았고, 유나는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책에 집중하고 있는 준의 얼굴을 감상했다.   

준에겐 자각이 없는 듯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유나의 얼굴엔,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잘 생긴 

남자를 독점하고 있는 여자의 우월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 우월감 속엔, <이 남자 옆에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는 나 밖에 없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그녀에겐 준에게 있어 자신이 첫 번째 여자 <친구>이며, 준과 나란히 앉아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여자는 자신뿐이

라는 자긍심이 있었다.  

고교 시절부터 준을 지켜봐 왔지만, 의외로 준에겐 여자친구가 없다. 물론 남녀를 불문한 아이들에게서 인기가 

있었지만 여자에게 인기가 있다, 라는 말이 여자친구가 많다, 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 사이에서의 준은, 발군의 결단력, 추진력, 리더쉽을 갖추고 있는 남자다운 성격으로 소위 <정점>에 서 

있는 존재였다. 그것은 일종의 카리스마로 언제나 준의 주위에는 우등생에서 날라리까지,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는 남자들이 모인다. 거기에 조각을 깎아둔 듯한 준의 반듯한 외모는,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분위기가 감돌아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성별이 다른 여자아이들은, 여자로서 준을 동경하고 좋아하지만 친구로서 

접근하길 꺼려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현실 속의 연예인 같은 존재다. 고백을 한 여자아이들도, 

정중하게 거절당하고 나면 두 번 다시 준의 근처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유나가 당당하게 준으로 하여금 친한 친구가 되어줘, 라고 한 것은, 스스로의 외모가 준에 비해 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 나 따윈 그와 어울리지 않아, 라는 생각이 나올 여지가 없는 - 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러나, 준과 친한 친구로서의 교제가 시작되면서, 만약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지독한 추녀였다 하더라도

준의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입장에선 지레 겁먹고 준의 주위로 다가오지 

않는 여자아이들이 고마울 뿐이다. 친구로서 사귀는 것도 좋겠다, 고 생각했지만 알면 알수록 강준의 외모가 

아닌 인간성에 이끌리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제 2차 도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소소한 이야기 끝에, 준이 언뜻 내비친 아르바이트 이야기에 유나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혹시 과외해 볼 생각 없어?!」  

「- 과외?」  

「응, 응! 사실 내가 과외를 하기로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못하게 되었거든. 

너라면 안심하고 소개할 수 있겠다. 과외해라, 응?」  

「-글세… 2년 쉬면서 꽤나 머리가 굳었는데.」  

「괜찮아 괜찮아~! 공백있다고 그 좋은 머리가 어디 가니? 과외대상은 중 3 

짜리 여자아이랑 남자아인데, 걔네가 쌍둥이거든? 엄청 귀여워. 

고교 수학 준비 과정으로 일주일에 세 번 가르치는 식, 보수는 한달에 70만원. 짭짤하지 않아?」  

「- 흐음….」  

준에게 있어선, 확실히 솔깃한 제안이다.  

잠시 생각하던 준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그 자리에서 폰을 꺼내 바로 쌍둥이의 어머니와 

준을 연결해 주었고, 준에 대한 유나의 화려한 추천사(시간약속엔 칼인데다 성적도 우수하고 

성격도 좋아서 인기도 많고… 등등의 실제보다 한 세 배는 부풀려진)로 인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바로 다음주 월요일부터 과외를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온 준이 당분간 바빠질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은우는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늘 그렇듯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들뜬 기색으로, 준은 바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달려 들어간다.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은 준은 즐거운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고등학교 때 보던 참고서와 문제집들을 

꺼내 교과과정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 과외를 두 집 정도 더 하게 되면, 꽤 피곤하긴 하겠지만 꽤 짭짤한 수입이 들어올 것이다.  

과외 계획표를 짜는 준의 머릿속으로, 지금껏 생각해 두었던 선물의 목록들이 춤을 추며 떠오르다가 사라져갔다.  

한편, 평소와는 다른 준의 모습에 한참이나 그 뒤를 바라보던 은우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때 준이 식탁 위에 놓고 들어간 전공서적 두 권을 발견했다. 손에 들고 온 모양인지, 

흐트러져 놓인 두 권의 책 위에 준의 폰까지 올라가 있다. 문자가 온 듯 폰에 깜빡깜빡 불이 들어와 있었다. 

책을 집어 들고 폰을 손에 쥔 은우의 눈에, 폰의 액정 위로 떠오르는 글자가 보인다. 

무심코 글자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은우의 움직임이 잠깐 멈추었다.   

-남자애가얌전해서하기쉬울거야!빨리보고싶지?토요일오후4시,집에걔혼자있으니까가봐.  

「…….」  

젖은 앞머리 사이로, 살짝 내리깐 짙은 검은색의 건조한 눈동자가 문자 위에 고정된다.  

폴더를 열지도 않고, 액정 위에 번갈아 떠오르는 발신인의 이름과 문자의 내용을 쳐다보며, 은우는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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