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실에 걸린 시계가 알리는 시각은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컴퓨터를 켠 채 웹서핑을 하던 준은 시간이 깊어갈 수록 이유모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6시쯤에 집으로 전화한 은우는 예상 외로 늦어질 것 같다는 말을 전달했고, 그렇다면 그렇게 알고 일찍
들어가서 누워 자면 된다.
- 그런데.
은우가 기다리라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다리면서 멋대로 짜증이나 내고 있다.
「-…한심하긴.」
중얼거리며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가서 맥주캔을 꺼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같은 과 선배가 사귀자고 말 걸어왔을 때 OK해버릴 걸.」
주위엔 아무도 없는데 들으라는 듯 투덜댄다.
「주말은 유일하게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니까- 난, 약속이고 뭐고 모조리 취소했는데.」
꿀꺽꿀꺽꿀꺽꿀꺽.
순식간에 캔을 비우고, 두 개째를 뜯는다.
스스로도, 공복 상태로 홧술을 들이키는 지금 상태는 위험하다는 자각이 있었지만 잔뜩 마신 후 은우가
돌아온다면 실컷 투덜거려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술의 힘을 빌리면, 지금껏 줄곧 마음에 걸려왔던 것
을 대놓고 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최악의 대답이 나올 경우에도 충격이 덜할 수도 있다.
따르르르릉.
갑자기 집전화가 울려서, 들고 있던 캔을 떨어뜨릴 뻔했다.
불에 덴 듯 급하게 뛰어가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난데.>
「왜 빨리 안 오냐?」
아무래도 더 늦을 것 같아, 같은 소리 하기만 해 봐라.
이대로 나가서 끌고 온 후 바로 덮칠 테다.
<미안한데, 사람 좀 데려가도 괜찮겠어?>
「…뭐?」
<동기 하나가 너무 취해서. 이 녀석 인천에 사는데 막차는 이미 끊겼을 테고. 우리 집이 제일 가깝거
든.>
전화 뒤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선을 타고 넘어온다.
준은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입을 다물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저 쪽에선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어찌된 거냐고 묻는다.
<-강준?>
-어른스럽게 굴자.
어른스럽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네. 데려 와. 네 방에서 자게 할 거지?」
<어, 미안.>
「정리해 둘 테니까.」
전화를 끊고, 원래 손님용 방이었던 은우의 방으로 들어가서 이부자리를 대충 정리한다. 그리고 다시
식탁 앞에 앉아 캔을 뜯어 마시기 시작했다.
빈 캔이 앞에 쌓인 만큼 어질어질하게 취기가 돌고, 적당히 기분이 들떴을 때 쯤.
엘리베이터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뚜벅뚜벅하는 구두소리와 비틀거리는 어지러운 발소리가
섞여서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리고 익숙한 타이밍으로 울리는 초인종. 시끄러운 네덜란
드 민요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울리던 벨을 바로 끄자, 은우가 들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 하하하, 신세 좀 지겠슴다아-!!」
은우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부축 받고 있는 남자는 밝은 갈색으로 화려하게 염색한 머리를 엉망으로
흐트러뜨린 채,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새내기라는 티가 나는, 앳된 얼굴이다. 그에 비해 훨씬
어른처럼 보이는 은우가 나지막하게 주의를 준다.
「조용히 해, 박준민.」
시끄럽게 울리던 인터폰을 끈 준은 그대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수북이 쌓인 캔을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던 은우는, 준민이라는 친구를 질질 끌고 현관 바로
옆쪽에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준이 준비해 둔 이부자리 위에 눕혔다. 그리고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꼼짝 말고 거기서 자라. 목마르면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고, 화장실은 이 방 오른쪽. 못 찾겠으면 불
러.」
「이- 아- 더 마실 수 있는데-」
「자.」
바로 불을 끄고 방을 나온 후, 조용히 방문을 닫는다.
침묵이 흐른다.
잠시 준을 쳐다보던 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그래.」
냉랭하게 대답했다.
마침 들고 있던 맥주캔을 다 비운 준은, 새로 캔을 꺼내기 위해 식탁 앞에서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걸어
갔다.
「-혼자서 무슨 술을 이렇게 마시냐.」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은우가 준의 손목을 잡았다.
잡힌 부분이 화끈거린다.
술을 마신 탓에 센티멘탈해진 것인지….
손목을 쥐고 있는 커다란 손의 감촉이, 눈물이 날 만큼 애달프다.
- 개새끼.
「-강준.」
은우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 난 니 놈한테, 손목 잡힌 것만으로 발정하는데.
「꽤 마셨구나, 약한 주제에. 양치하고 와. 그만 마시고 이제 자라.」
-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어 버린 거냐.
손목을 단단히 쥔 채, 욕실 앞까지 끌고 간 후 밀어 넣는다.
발걸음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꽤 마신 모양이다. 스스로 진단하며 양치를 하고 나오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은우가 다시 팔을 잡은 채 침실로 끌고 가서, 침대 위에 눕혔다.
눕힌 다음 이불까지 덮어주고, 외출복을 벗은 다음 욕실로 향한다.
은우가 들어간 지 10분 쯤 되었을 때,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안경과 함께 놓여 있던 은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명은 없이, 번호만 뜬다.
준은 폰을 받았다.
「-네.」
<은우야? 누난데-, 잘 들어갔니? 준민이 많이 취했지?>
다정하고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
<- 왜 말이 없어?>
누구야, 이 여자는.
<……오늘, 내가 한 말 때문에 신경 쓰는 거야?>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폰을 들고 있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미안, 나 곤란하게 할 생각은……,>
「지금 은우 샤워 중입니다.」
<-…네?>
「죄송합니다, 동거하는 친군데요. 대신 받았습니다.」
<아, 아- 네.>
크게 당황한 목소리로 여자가 대답한다.
<목소리가 비슷해서… 밤늦게 죄송해요.>
「아뇨.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미리 본인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아하하, 아뇨. 은우한텐, 다음에 다시 연락할 테니 지금 전화 내용은 비밀로 해 주시겠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는다.
거실의 불이 꺼진 후 침실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한 후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두른 은우가 들어와서,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안경은 끼고 옷
걸이에 걸린 파자마를 찾는다.
준은 비틀거리며 일어났고, 인기척을 느낀 은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안 잤……」
방문 옆에 가서, 스위치를 끈다.
침실이 순식간에 암흑에 휩싸였다.
어둠과 찾아온 침묵 속에서, 은우의 목소리가 울린다.
「-… 강준?」
「이럴 땐, 성 빼고 불러.」
조용히 속삭임과 동시에, 준은 은우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어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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