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점심시간에, 은우의 앞에 앉은 여자아이의 양해를 구한 후, 그 자리에 앉은 준이 말했다.
"수학 숙제 좀 보여 줘."
말없이 수학 노트를 건넸다.
월요일, 학교에 나온 준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토요일, 현관문이 닫힌 후, 한참 동안 은우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이나 눌렀지만, 준은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문을 열고, 나오지 못할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걸까.
"아, 살았다. 나 오늘 걸릴 차롄데. 으윽, 이거 풀이가 왜 이렇게 긴 거야."
재빠르게 노트에다가, 은우가 해 온 숙제를 베끼면서 투덜거렸다. 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오늘의 침묵에는 색다른 의미가 있다. 분명 준 역시 눈
치채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눈치 못 챈 척 하고 있다.
"......세 쪽 더 있어."
한참 후에, 은우가 대답했다.
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안도한 듯한 표정이 지나갔다.
그리고, 늘 그렇듯 구김살 없이 웃으며 은우를 쳐다본다.
"-엿 됐다."
"번호순으로 시키면, 이 부분일 테니까. 여기만 해 둬."
샤프로 체크해 주었다.
"에헷, 땡큐 땡큐."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물끄러미 숙제를 베끼고 있는 준을 쳐다보았다.
창가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결 좋은 머리카락의 색소가 옅어 보이게 한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신비스러워 보인다.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운동장으로 몰려갔겠지.
앞문으로 들어온 클래스메이트인 여자애 두 명이, 앞뒤로 나란히 앉아 있는 준과 은우를
보며 뭐라고 소근댔다. 그리고, 얼굴을 붉힌 채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갔다.
사각사각사각.
준은 얼굴근육을 이완시킨 채, 베끼는 것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 없는 얼굴로, 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녀석의 머리카락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뒷머리로 덮인 곧은 목덜미도.
사각. 사각.
필기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준의 샤프가 멈추었다.
의아하게 생각했을 때, 준은 고개를 들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보지 마."
은우는 조금 놀랐다.
준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녀석은, 쥐어짜듯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 마."
왜, 라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고개 숙인 준의 귀가 너무 빨갛게 달아올라 있어서,
물으려 했던 그 짧은 한 마디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알았어."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다시 준의 샤프가 움직였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남자가 남자를.
...... 강준이 이은우을.
준이 마지막 수식을 베끼고 있었다.
"그 남자 누구야."
툭.
샤프심이 부러졌다.
은우는 물끄러미 준을 쳐다보았다. 준은,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가, 곧 톡톡, 하고 샤프를
눌렀다. 그리고 다시 수식을 써 내려간다.
- 무시할 생각인 걸까.
수식을 마저 쓰고 나서, 준은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은우를 쳐다보았다.
"왜 물어."
무시당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의아한 얼굴로 은우가 대답했다.
"-궁금해서."
"니가 왜 그런 걸 궁금해 해."
준은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똑바로 은우를 쳐다보고 있는 두 눈이, 어렴풋하게 비
난의 기색을 띠고 있는 것 같아서 은우는 한층 더 의아해졌다.
"......미안."
뭐가 미안한 건지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병신 같은 놈."
"......그럴지도."
망설이다가, 간신히 바보 같은 대답 한 마디를 내놓았다.
어쩐지 우는 것 같다고 생각되어 준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울고 있지 않았다.
"집에....."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졌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후, 은우는 다시 말했다.
"집에 같이 가자."
한참 뜸을 들인 후, 준은 대답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