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제196편
“자, 이거면 됐죠? 동생.”
“네, 형.”
김재민에게 서명한 계약서를 밀어 준다. 그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용에는 별것이 없다.
윙스네이크를 넘기는 대신 몬스터 알을 맡기는 데 우선권을 주겠다는 정도.
‘사실 한세희의 몬스터는 벌써 둘이나 맡아 준 상태니까. 이 정도는 그도 이해하겠지.’
김재민은 계약서를 비서에게 건넨 후 입을 열었다.
“그럼 윙스네이크는 제 스킬로 단번에 신선길드 건물로 옮겨드리죠.”
“한시라도 빨리 녀석을 데려가야 할 것 같긴 한데. 그 방법 외에는 지금 녀석을 안전하게 옮길 방법이 없나요? 윙스네이크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까.”
“형님 덕분에 윙스네이크 녀석, 완전히 활력을 찾았던데요. 뭘.”
“제발 자극하지 말고요.”
김재민이 윙스네이크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수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 때가 문제였다.
윙스네이크는 김재민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다시 통하지도 않는 공격을 시도했고 그건 김재민이 확인을 마치고 방을 다시 나설 때까지 계속됐다.
어떻게든 김재민과 윙스네이크는 떼어 놓아야 했다.
“그럼 몬스터 전용 캐리어를 제작해 데려가는 방법도 있겠죠. 하지만 그 방법이라고 녀석이 가만히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방법이 나을지도 몰라요.”
윙스네이크는 김재민 자체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 게다가 처음 그가 윙스네이크를 잡아 온 스킬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윙스네이크는 또다시 큰 상처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형이 잠깐 여기 머무는 건 어때요. 윙스네이크가 적당히 안정될 때까지 말이에요.”
“……사실 그 방법이 가장 나은 것 같기는 해요.”
“하지만…….”
결이가 치고 들어온다.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아무래도 이런 시기에 외부에서 장시간 머무는 건 위험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눈치챈 김재민이 눈썹을 찌그러트린다.
“우리 펌블 길드의 보안력을 믿지 못하는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신선 길드보다는 훨씬 안전할걸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하! 혜성처럼 나타난 신생 길드, 굳건한 기존 길드들을 위협할 만큼 쾌속 성장하는 놀라운 신예 집단. 뭐, 그런 타이틀은 원래 우리 펌블 길드의 것이었다고요.”
김재민의 말이 틀린 게 아니다.
나보다 어린 김재민은 미성년자일 때부터 펌블의 주요 임원이었고 성인이 되자마자 길드장의 자리를 꿰찼으니까.
어리고 통통 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별난 집단. 김재민은 그런 펌블을 인간화한 것 같은 존재였다.
“그것도 옛말이죠.”
결이가 어깨를 으쓱한다.
오늘따라 어그로를 왜 이렇게 잘 끌어?
속으로는 조마조마하긴 하지만, 사실 좀 통쾌하다.
“지난 영광에 취해 있기만 하다니. 그런 걸 꼰대라고 하지 않던가. 펌블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랑은 많이 다르네요.”
“이익…….”
김재민은 분하다는 얼굴로 결이를 노려보았다.
“그만, 그만. 우리끼리 싸우려고 귀한 시간을 내서 모인 게 아니잖아요.”
“흥.”
“하여튼 이곳에서 잠깐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내 말에 결이가 다시 한번 김재민 쪽을 슬쩍 돌아본다.
“대신 짐을 가져와야 하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할게요. 윙스네이크도 어느 정도 회복하긴 했으니까.”
“형이 편한 대로 해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재민이 따라 일어섰다.
“그럼 들렀다가 바로 다시 오시는 건가요? 돌아오시면 수조가 있는 방을 쓰시면 될 것 같은데…….”
콰앙!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고 훤칠한 키의 여성이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다들 무슨 작당 모의를 하고 있나?”
“손예원 씨?”
해령 길드의 길드장, 손예원이다.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인데.
“누님이 여긴 웬일로.”
김재민 역시 당황스러운 모양인지 헛기침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이렇게 모여서 다 같이 재미 보고 있었으면 나도 불러 주지, 그랬어.”
“재미는 무슨요.”
“흐응. 재민이 네가 던전에서 재밌는 걸 주워 왔다는 소문이 벌써 해령에도 자자한데 말이야. 거기다가 여기 은하준 씨까지 있네? 재밌어도 한참 재밌는 이야기가 오간 거 아냐?”
손예원의 눈이 기민하게 주위를 살핀다.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에 꽂히더니 콧방귀를 뀐다.
“이거 봐, 이거 봐.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재밌는 거래가 오갔나 보네.”
“그게 손예원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지?”
결이가 쏘아붙이자 손예원의 얼굴이 조금 굳어진다.
“우리 사이에 정말 너무 박한 거 아냐? 나도 좀 끼워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나?”
“참나, 뭐? 그러는 넌 말투가…….”
“누나, 그만요. 여기서 이러지 말아요.”
결이와 손예원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자, 드디어 김재민이 중재에 나섰다.
“싸우러 오신 거 아니잖아요.”
“흠흠, 그래. 맞아.”
손예원은 붉어진 얼굴에서 힘을 빼곤 다시 웃어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리고는 내 쪽을 본다.
“나도 펫 의뢰를 맡기고 싶어.”
“의뢰를 받아 준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손예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하는 것 보고 결정한다며.”
“그러니까……. 손예원 씨가 뭘 했는데요?”
“여기까지 친히 행차했잖아. 날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건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된다고?”
“하아?”
기가 찬다.
이 여자는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내가 뭘 더 얼마나 어떻게 해야 속이 시원하겠어?”
“그걸 몰라서 묻는 거예요?”
“난 정말 모르겠어서 물어보는 건데.”
“대체로 누나는 몰라서 물어보는 편이에요.”
김재민이 뒤에서 속삭인다.
‘오만이 아니라 멍청한 건가.’
어쨌든 그게 거기서 거기인 것 같긴 하지만.
“뭘 원하는데? 돈이나 아이템이라면 뭐든 챙겨 줄 수 있어.”
“그런 건 한세희 씨나 김재민 씨도 제게 해 줄 수 있죠.”
“다다익선 몰라?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좋죠. 좋지만 중요한 게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가 중요한데?”
“일단 예의를 좀 챙기는 게 어때요?”
“그건 내가 무례하다는 뜻인가?”
“그렇……죠?”
손예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진다.
설마 이 여자, 자기가 무례하다는 사실을 모르나?
하기야 내가 알기로도 손예원은 각성하기 전에도 거상기업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로 오냐오냐 금지옥엽으로 자랐다고 알고 있다.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하며 살았던 그녀는 심지어 S급으로 각성해 단번에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강한 헌터가 됐다.
각성의 힘이 성격이나 특성을 강화시키는 바람에 그녀의 괴팍한 성격이 더욱 심해졌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당신이 무례하다고 말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처음이야.”
“네?”
손예원은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정말로 몰랐다는 말인가?”
“누군가 그렇게 수군거려도 사실 누나는 안 듣는 편이긴 해요.”
김재민이 또다시 뒤에서 속삭인다.
황당함에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누나, 그러지 마시고 일단 좀 진정하세요.”
김재민이 손예원의 곁으로 다가간다.
“재민아, 내가 무례하니?”
“네? 아……. 뭐, 꼭 그렇다기보다……. 연락도 없이 찾아오셨으니까 좀 당황스럽긴 하죠. 하하하.”
“반가워서 그런 거잖아, 반가워서!”
“저 여자 나사가 하나 빠진 게 틀림없네.”
이번에는 결이가 내게 속삭였다.
“내가 무례하다고…….”
“그거에 관해서는 곰곰이 잘 생각해 보시도록 하시고요. 저희는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가…….”
“네, 형들. 가 보세요. 누나는 제가 챙길 테니까요.”
김재민이 손예원을 부축해 소파로 앉히는 걸 보면서 결이와 나는 펌블 길드 건물에서 벗어났다.
“저 여자 정말 황당하지 않냐?”
“자기가 무례한 줄 몰랐다는 건 솔직히 좀 충격이긴 하다.”
“저 여자한테는 절대로 펫을 넘겨주지 마. 알겠지, 하준아.”
“흐음……. 확실히 김재민보다 훨씬 문제가 될 거 같긴 해. 제대로 잘 돌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몬스터를 넘기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마주 보고 상대해야 하잖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이렇게 잠깐인데도 불쾌한데.”
결이가 치를 떨었다.
‘틀린 말도 아니지.’
왜 S급들은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밖에 없을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 결이나 한세희는 참 양반이다 싶다.
“택시 타자.”
얼른 차를 잡아탄 뒤, 곧장 신선길드로 향한다.
도로는 평일 낮치고는 꽤 막히고 있었다.
“사고라도 났나?”
“글쎄.”
“아이고, 요전번에 저기 건너편에서 포털이 열린 뒤로 여기가 항상 막혀요.”
운전기사가 투덜댔다.
“아, 그렇군요.”
“그 던전 브레이크인지 뭔지.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급성 던전 말이오. 그게 요즘 너무 자주 생긴단 말이야. 이래도 여러분 같은 각성자님들이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이미 이 나라는 망하고 말았을 거야.”
“별말씀을요.”
“아니, 정말 그렇다니까. 게다가 은하준 씨 맞지?”
“엇, 어떻게 아셨어요.”
“몬스터 알을 데리고 다니는 걸 보고 알았지. 은하준 씨가 정말 대단한 일을 많이 했잖아.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잖아~”
“아,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야, 아니야.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우리 딸한테 다 들었다니까.”
대답할 겨를도 없이 기사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딸이 얼마나 나를 좋아하는지, 거기에 팬클럽이 어떻니 너튜브 구독자가 얼마라느니 자기도 그런 정보들을 듣다 보니 팬이 되었다느니.
느릿한 택시 안에서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칭찬 공세가 쏟아졌다.
“아유, 아닙니다. 저도 뭐 저 좋자고 하는 일들인데요.”
“은하준 씨 같은 젊은 청년들이 있어서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
“감사합니다. 하하하.”
택시는 여전히 거북이처럼 느리게 기어가는 중이다. 이제 슬슬 속도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덜컹, 차가 흔들리면서 멈춘다.
“응?”
차 앞 유리에 사람의 모습이 비친다.
“어엉?!”
사람을 친 건가? 하지만 여기는 도로 한복판인데.
깜짝 놀란 기사 아저씨가 택시 밖으로 튀어 나간다.
“하준아.”
결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형태를 제대로 파악했다.
차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시…….”
터억!
밖으로 나간 택시 기사의 목을 복면을 쓴 괴한이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