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제185편
부르르르.
휴대폰이 울리고 액정에 장우택의 이름이 떠 있다.
“안녕하세요, 장우택 씨. 안 그래도 연락할 일이 있었는데.”
[와, 은하준 씨가요? 이런, 그러면 연락이 올 때까지 좀 기다릴 걸 그랬네요. 아쉽다.]
“뭐가 아쉬운데요?”
[나도 은하준 씨가 직접 건 전화를 받고 싶다고요.]
“그런 게 왜…….”
[앗, 잠깐만요. 그런 방법이 있었네. 다시 전화 걸어 주세요. 알았죠?]
뚜욱.
갑자기 전화가 끊긴다.
“미쳤나.”
“네?”
안영지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본다.
“아니……. 화룽의 장우택인데 말이죠.”
“아아, 그 이상하다는 사람 말이죠?”
안영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럴 줄 알았다는 눈치다.
“어떻게 알았어요?”
“오빠가 말해 줬어요. 하준 님을 괴롭게 하는 인물이 있다고. 뭐, 한둘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으잉? 한둘이 아니라고요?”
장우택 말고 짚이는 사람이 있나 싶은데.
“그래서 하준 님을 보호할 사람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그랬어요.”
“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아요. 장우택 이 사람도 뭐, 독특하긴 하지만.”
덕분에 흑단이를 얻지 않았나.
그는 내가 흑단이를 부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부르르르. 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왜 다시 전화 걸어 주지 않았어요?]
“지금 장난합니까, 장우택 씨.”
[서운하네요.]
“대체 용건이 뭔가요?”
[용건이 있어야 전화를 하나요? 우리 사이에.]
황당하다.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 쏘아 주고 싶지만, 오늘은 일단 참는다.
“용건이 없으신 건가요? 그럼 끊겠습니다.”
[잠깐, 잠깐! 용건은 하준 씨도 있잖아요.]
“장우택 씨 용건을 먼저 들어보고 말하든가 해야겠어요.”
[쳇.]
휴대폰 너머로 낮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남자는 정말 이상하다. 어린애들도 하지 않을 이런 장난이 재밌나?
[만티코어가 태어났다면서요?]
“소식이 느리시네요.”
[사실 진작에 듣긴 했는데, 좀 바빠서 연락을 못 했어요. 축하해요. 이제 정말 어엿한 몬스터 브리더가 됐네요.]
아직 안영지에 관해서는 들은 바가 없나?
확실히 안영지가 몬스터 알 부화 스킬이 있는 건 소수만 아는 사실이다.
나나 한세희나 신선 길드의 일부 정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내가 안영지와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걸 알 수 있겠지만.
[그래서 말인데, 신선 길드에 은하준 씨를 만나러 방문해도 괜찮겠냐고 물으러 전화했어요.]
말도 없이 들이닥치던 인물인데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예의가 생긴 건가?
“경쟁자에게 기업 비밀을 공유할 생각은 없는데요.”
[와, 너무한걸요.]
사실 내가 공유받고자 하는 입장이지만, 조금 강하게 나가도 상관없겠지.
[확실히 우리 화룽 쪽에서는 큰 충격이긴 하죠. 하하하.]
꽤 심각한 일일 텐데도 남자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렇지만 화룽도 말이죠. 정말 영원히 몬스터 브리딩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등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니까요.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아, 통화로 계속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찾아뵙고 싶은데요.]
“이야기 나눌 곳은 많죠.”
[뭘 그리 애지중지해요. 안 잡아먹어요. 우리 화룽에도 새끼 몬스터는 잔뜩 있다고요.]
새끼 몬스터가 문제가 아니다. 장우택은 그저 제대로 부화를 시켰는지 확인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만, 신선 길드 내부로 불렀다가는 안영지에 관한 걸 알아챌지도 모른다.
어차피 언젠가는 공개될 정보지만, 지금은 최대한 조용히 안영지를 육성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영지의 각성자 등록 때도 일단 브리더 스킬은 적지 않았다. 나중에 생긴 스킬이라고 둘러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S급을 탐내는 괴물 특수부대의 손길에서 보호하느라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적어도 안영지가 레벨 10이 될 때까지는 조용히 일을 진행시키고 싶다.
‘거기다가 장우택은 남의 스텟을 알아보는 스킬도 있잖아. 갑자기 정보가 없는 S급이 나타났다면 분명 관심을 가지고 뒤를 캐 볼 거란 말이지.’
[뭐, 사실 이해합니다. 지금 은하준 씨 입장에서는 몸을 사릴 타이밍이 맞죠. 전 세계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제가 그렇게까지 유명해졌습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어쨌든 그럼 차를 보내겠습니다. 밖에서라도 만나죠.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 정도는 승낙하시겠죠? 은하준 씨도 제게 볼일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한 듯 장우택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좋아요.”
장우택, 당신이 몬스터 브리딩에 관해 얼마나 아는지는 몰라도 전부 다 내게 말해 줘야겠어.
* * *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호텔 라운지 카페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에 앉는다. 경쾌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카페는 텅 비어 있다.
“사람이 하나도 없네.”
“시끄러운 건 별로라서요.”
어느새 등장한 장우택이 뒤에 서 있다.
“시끄러운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오랜만에 은하준 씨랑 긴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까요. 하하하.”
장우택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자 곧장 커피가 나왔다.
“라떼로 마신다고 들었는데.”
“그건 또 어디서 들었습니까?”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장우택이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어쩌면 이미 안영지에 관해서도 다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장우택 씨 스킬로는 스텟만 읽는 게 아니라 취향까지 읽히나 보네요?”
“재밌네요.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한세희 길드장에게 들었습니다.”
한세희? 그 사람은 또 어떻게 알았대. 게다가 뭐야, 둘이 왜 내 이야기를 하는 건데. 아니, 그보다 무슨 커피 취향 같은 이야기를…….
“제가 은하준 님 팬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죠?”
“아, 그런 설정이었죠.”
“설정이라니. 섭섭하네요. 정말인데. 아니라면 이렇게 집요하게 쫓아다닐 이유가 있겠어요?”
“본인이 집요하다는 사실은 자각하고 계시니 다행이네요.”
“이런.”
장우택이 실실 웃으며 커피를 홀짝인다.
저렇게 실없는 사람인데도 이 장소에 이 음악에 이 조명에 분위기까지, 뭔가 영화의 한 장면같이 보여서 열 받는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외모 지상주의에 찌든 현대인이구나.
“그래서 날 부른 이유가 뭡니까.”
“이제 슬슬 화룽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나와 함께 화룽으로 가요.”
“네?”
“화룽은 이미 몬스터 부화와 양육에 관해서 체계가 잡혀 있습니다. 거래처도 줄을 서 있죠. 그런 곳이라면 은하준 씨의 가치를 더욱 높여 줄 수 있을 겁니다.”
“경쟁 대신 흡수를 하겠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는 귀한 몬스터 브리딩 스킬을 지닌 각성자를 지키고 싶은 것뿐입니다. 화룽이라면 책임지고 은하준 씨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요.”
역시 장우택도 내가 안영지를 꽁꽁 싸매는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확실히 어디에서나 탐내는 인물이 된 이상,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법.
“저는 오히려 화룽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요.”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저와 화룽은 처음부터 말했습니다. 우리는 은하준 씨의 팬이고 친구가 되고 싶다고요. 그러니 몬스터의 알을 선물한 것 아니겠습니까.”
몬스터 알의 가치를 생각하면 확실히. 게다가 그 몬스터 알의 경우도 내가 화룽에 직접 찾아오기를 바라며 선물한 거였지.
“화룽을 못 믿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 않습니까?”
“저는 신선 길드를 떠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제가 화룽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화룽의 경쟁자가 되는 편이 시장 경제의 어쩌구를 좋게 만드는 일 아닐까요? 복잡한 건 잘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뭐, 엄청나게 신경을 쓰는 건 아닌데요. ……흠, 하지만 확실히 구미가 당기기도 하는군요.”
“그래요?”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장우택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확실히 몬스터의 알을 부화시키는 일이 쉬운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좀 더 알을 잘 부화시킬 수 있는 요령을 배울 수 있다면 나도 좋겠죠.”
“화룽에서라면 분명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선배 브리더도 있는 셈이잖아요?”
“확실히 그 선배 브리더분을 만나 뵙고 싶긴 한데…….”
“그러려면 저와 함께 중국으로 가시겠단 말이죠?”
“……그렇다고 화룽 길드에 들어가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럼 우리 헌터와 이렇게 대화만 나누고 싶다?”
“무리일까요?”
“그럴 리가요. 하지만 아까 은하준 씨가 그랬죠. 기업 비밀을 경쟁자에게 알려 줄 리가 없다고요. 은하준 씨가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싶다면 화룽 소속이 되는 길이 가장 빠를 겁니다.”
장우택이 빙긋 웃는다.
“내가 화룽에 들어간다고 해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거잖아요.”
“머리를 맞대어 가며 고민하면 풀지 못한 수수께끼라도 함께 풀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는 능청스럽게 진지한 얼굴을 했다.
“허어.”
“그런지 아닌지는 지금도 알아볼 수 있겠죠. 좋습니다, 궁금한 것 중 하나만 물어보세요.”
장우택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지금 통화하시게요?”
“나한테는 그 정도 접근 권한이 있습니다. 못 들었나요? 나는 화룽 길드의 이사라고요.”
씩 웃는 입매가 쾌활하다.
이사가 이렇게 자리를 비워 놓고 맨날 놀아도 되나 싶긴 한데.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한국에 와서 뭘 하는 걸까.
생각하는 사이에 장우택은 벌써 화룽으로 통화를 걸고 있었다.
유창한 중국어로 몇 마디를 하더니 폰을 스피커로 바꿔 놓는다.
“몇 분만 기다려요. 연결해 줄 테니까.”
“응? 그분도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아뇨. 내가 통역해 주면 되죠.”
“허어……. 아니,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여야 하죠. 그래야 아쉬울 테니까.”
잠깐 기다리니 여성이 전화를 받는다. 장우택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빨리 물어볼 기회가 올 줄이야. 게다가 나는 장우택에게 물을 생각이었는데, 화룽의 몬스터 브리더에게 직접 질문을 할 수 있게 되다니.
확실히 놀랍고 당황스러운 일이긴 하다. 그래 봤자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밖에 없었는데. 장우택 씨 잘못 짚으셨어요. 하지만 뭔가 이게 대륙의 넓은 마음인가 싶기도 하다. 곧장 패 하나를 보여 줘 버리다니.
나야 이득이니 좋지만 말이야.
“아,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의 은하준입니다.”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소개하자 장우택이 피식 웃으며 내 말을 중국어로 통역해 주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역시나 긴장한 것 같은 여성이 뭐라고 말한다. 그걸 장우택이 다시 내게 번역해 준다.
“안녕하세요, 저는 중국 화룽의 샤오린입니다.”
장우택은 아주 그냥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