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제179편
“정말로 몬스터 알을 부화시킬 줄이야.”
한세희는 호기심과 신기함이 가득 섞인 눈빛으로 내 품에 안겨 있는 만티코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으르르…….”
시선을 느낀 만티코어가 작게 으르렁거리자 한세희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힌다.
“사실 알을 부화시킨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음?”
약간 굳어졌던 한세희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선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거기에는 잔뜩 얼어붙어 진땀을 흘리고 있는 안영지가 있다.
한세희가 도착하기 전에 떨지 말라고 몇 차례나 말을 해 둔 상태지만, 사실 떨리지 않을 수가 없지.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이자 1세대 헌터니까 말이다.
그래도 같은 S급으로서 당당하게 맞이하길 바랐는데, 오늘 각성한 안영지에게는 무리였나 보다.
한결이 때를 떠올려본다. 그래. 그때는 당일이 아니기도 했고 성현준 대위의 기세 공격에 당하긴 했지만, S급과 A급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떠올려보니 나도 처음 S급들을 만났을 때는 거의 숨도 못 쉴 정도로 긴장했었다.
“이쪽, 신선 길드 소속 각성자 안영지 양이죠.”
“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영지 씨. 당신이 알을 부화시켰단 말입니까?”
한세희가 장갑을 낀 손을 슥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안영지는 파드득 놀라 나를 한 번 봤다가 한세희의 손을 잡았다.
가벼운 악수를 나눈 한세희는 흥미로운 눈으로 안영지를 바라보았다.
“네. 제게 몬스터 알을 부화시키는 스킬이 있거든요.”
“그럼 이전에 흑룡의 알을 부화시킨 것도 안영지 씨 쪽인가요?”
“아, 아뇨. 그건 아녜요. 그건…….”
“우리 흑단이는 제가 부화시킨 게 맞아요.”
“이런.”
한세희는 조금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는다.
“대한민국에 몬스터 브리더가 두 명이나 등장하다니.”
연한 색소의 눈이 나와 안영지를 번갈아 본다. 하기야 어이가 없겠지. 이해한다. 나도 어이가 없다. 한국에서 몬스터 브리더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만티코어가 왜 안영지 씨를 따르지 않는 거죠?”
한세희의 말에 안영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 그 잠깐 사이에 만티코어가 나만 따른다는 사실을 눈치채다니.
“그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제 스킬 때문인 것 같아요.”
“은하준 씨의 스킬?”
“알을 부화시키기 직전까지 제가 알에게 버프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흠.”
“전에 한세희 길드장님께도 사용했던 그 스킬이요. 이전에 흑단이는 그 스킬을 통해서…… 부화시킨 것 같거든요.”
“‘같다.’라는 거죠.”
“네.”
한세희는 내가 어떻게 흑단이를 부화시켰는지에 관해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브리딩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나타났고.”
“…….”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한세희는 척척이다.
보통 눈치가 아니네. 그래도 안영지가 오늘 각성했다는 것까지는 모르겠…….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고생했군요. 이렇게 단시간에 알을 부화시킬 수 있다니.”
켁. 오늘이라는 것만 모르지, 안영지가 어떤 상태인지 이미 꿰고 있는 것 같다. 하기야 폭주 중이 아니더라도 막 각성한 그녀의 마나나 모든 것들이 불안정한 상태니까.
너무 이르게 한세희를 불러들인 것일까. 하지만 나도 한세희가 이렇게 연락하자마자 달려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고!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당장은 만티코어를 한세희 길드장님께 돌려보내지 못할 것 같아요.”
“물론이죠. 그리고 전투에 쓰일 수 있을 만큼 성장시키고 훈련시키는 것까지 계약 내용에 담겨 있었으니까요.”
“그랬던가요?”
“그랬죠.”
한세희가 빙긋 웃는다. 그랬었나?
어쨌거나 지금 이 상태의 만티코어를 냅다 한세희에게 넘길 수 없는 건 사실이다.
우리가 데리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볼 생각이다. 일단은 만티코어가 다른 이에게도 애착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펫으로서 이용 가치가 있을 테니까.
한세희는 나를 슬쩍 보더니 안영지에게 다시 시선을 돌린다.
“우리 서광 길드에서라면 대한민국 어느 곳보다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안영지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본다.
“저, 저는 이미 신선 길드와 계약을 했어요.”
구두로 된 계약이지만, 그것까지 한세희가 확인할 수는 없을 터.
아니, 그런데 다짜고짜 사람을 영입해 가려고 하네?
코앞에서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그거 아쉬운 일입니다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서광 길드에서는 신선과의 해약 조건까지 맞춰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안영지 씨는 위약금이나 다른 보상에 관한 아무런 걱정 없이 계약 해지와 신규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겁니다.”
“신선 길드 건물에서 곧장 사람을 빼 가려는 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내 말에 한세희가 나를 돌아보며 담담히 말한다.
“미안하지만, 이 세계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한세희 정도의 길드장이 나서서 스카우트라니, 엄청난 일이긴 하다. 게다가 모든 해약 조건을 맞춰 줄 수 있으니 넘어오란다. 솔직히 말해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저 말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서광은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니까.
“그럴 수 없어요!”
안영지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호랑이 앞에 있는 토끼처럼 떨던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였다.
“저는 은하준 님께 목숨을 빚졌으니까요. 누가 뭐래도, 그 어떤 조건이 온다고 해도 배신할 생각은 없어요.”
“……흠.”
한세희는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를 훑어본다.
“배신일 것까지야, 서광에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은하준 씨를 도울 수 있을 텐데요. 당신의 능력은 정말로 뛰어나니까 말입니다.”
“아뇨. 저는 하준 님과 신선 길드에 뼈를 묻을 생각이에요.”
안영지의 눈빛이 활활 불타오른다.
한세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사실 이 조건은 은하준 씨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네?”
“서광 길드에 들어올 생각 없습니까?”
“……없죠!”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습니다만, 생각보다 훨씬 단호하네요.”
예전의 나였다면 서광에 들어갈 기회가 있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았을 거다.
확실히 회귀 전에는 서광에 들어가고 싶어서 난리를 쳤었으니까. 물론 결이는 서광에 들어갈 조건을 맞췄지만, 나를 달고 있는 바람에 우리 둘은 서광을 포기해야 했지만 말이다.
“사실 신선 길드를 만든 건 은하준 씨나 다름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죠?”
“……어쨌거나 원년 멤버니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한세희의 표정은 알 수 없다.
아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미 이럴 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군다. 이 남자는 대체 뭘 어디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두 분 다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서광은 언제든 두 분에게 열려 있으니까요. 게다가 은하준 씨가 서광으로 오면 한결 씨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한세희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속삭인다.
“만티코어를 한번 안아 볼 수 있을까요?”
“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직 만티코어를 만져 본 건 저밖에 없거든요. 녀석이 허락을 하지 않아서요.”
“그래요?”
스윽.
한세희가 만티코어를 안은 내 곁으로 다가온다.
“으르릉……. 으르르르…….”
만티코어는 깜짝 놀라더니 몸을 움츠리고 이제는 보송하게 마른 털을 바짝 세운다. 두툼한 젤리 발 안에 숨겨 뒀던 발톱도 쑥 하고 삐져나오는 것이 완전히 경계 태세다. 이 녀석, 성격이 보통이 아니네.
“흐음.”
“아르르르…….”
한세희는 그런 만티코어의 반응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들이민다.
스슷…….
그리고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우는 한세희의 기세.
“헉.”
몸이 뻣뻣하게 굳어진다. 나뿐만이 아니다. 품에 안긴 만티코어도 옆에 선 안영지도 몸이 흔들릴 만큼 강하게 놀랐다.
“쯔쯔쯔. 착하지.”
얼음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한세희가 만티코어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말 이상할 정도로 숨쉬기가 편해진다.
‘기세를 거둬들인 건가?’
하지만 품 안에 안겨 있는 만티코어는 아직도 바짝 얼어붙어 있다.
‘기세를 만티코어에게만?’
기세를 그 정도까지 다룰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세희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앙!
문이 열리면서 밖에 있던 결이가 뛰어 들어온다.
“무슨 일이야?!”
“……그게.”
“보다시피 별일 아닙니다.”
결이가 심각한 얼굴로 한세희를 노려본다.
“남의 길드에서 함부로 기세를 남용하지 말라고.”
“함부로? 이유가 있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건데요. 모르면 잠자코 있으시죠. 무엇보다 방해되고 있는 건 당신이니까요. 한결 씨.”
어째 평소보다 결이를 향한 반응이 날카롭다.
“뭣…….”
결이가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보더니 결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이를 만족스럽게 본 한세희가 다시 만티코어에게 집중한다.
“으르……. 끄으응…….”
“그래, 그래. 착하지.”
그리고 기어코 만티코어를 쓰다듬는 데 성공했다.
“끼이잉…….”
만티코어는 내 옆구리 틈으로 도망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몸이 덜덜 떨려 그조차도 불가능한 것 같았다.
“녀석을 길들이기에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요.”
“글쎄요. 야수는 원래 이런 식으로 길들이는 게 아닌가요?”
“아직 어린 새끼예요.”
“아까 제게 이를 드러내는 걸 봤죠? 아무리 새끼라지만, 녀석은 야수입니다. 몬스터예요.”
“한세희 길드장님 말씀도 맞는 말씀이지만…….”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한세희의 새하얀 속눈썹이 깜빡거리며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한세희 길드장님이 그럴 필요 없게 잘 훈련시켜서 보내겠어요.”
“그렇게만 해 준다면 감사하죠.”
한세희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이미 내 겨드랑이 밑으로 얼굴을 반쯤 파묻은 만티코어는 한세희의 작은 움직임에도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쨌거나 만티코어가 무사히 부화한 것을 확인했으니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죠.”
“아.”
“두 사람은 제가 했던 제안에 관해서 더 고민해 보셔도 좋고요. 말했다시피 서광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답니다.”
한세희가 몸을 돌려 문을 나서자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는 채로 결이가 곁으로 다가온다.
“괜찮아?”
“괜찮고말고. 별일 없었어. 네가 본 게 다야.”
“난 저 남자가 싫어.”
“거래 상대일 뿐이야. 게다가 친해져서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과연 이게 친해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